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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을 벗고

에배소서 이주향............... 조회 수 2211 추천 수 0 2008.01.13 16: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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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4:21-24 
설교자 : 이주향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어렸을 때 저는 바리새인은 그냥 위선자,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부터 바리새인은 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바리새인은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하고, 일주일에 한번은 금식을 하고, 성실하게 십일조를 내며, 허튼 짓은 하지 않으며, 경건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인데." 이런 생각으로 제가 바리새인을 단순하게 '위선자'로 단죄할 수 없었던 것은 제 자신은 바리새인처럼도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의문이면서 동시에 처음으로 행했던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저는 위선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를 비판하기 위해선 나는 선한 자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위선자가 아닌 나는 선한 자가 아니라 "그래 나는 선하지 않다, 그러니 어쩔래"하고 덤비는 자가 되었습니다. 정직하지만 삶에 대해 무례한 자로, 겸손의 포장을 썼지만 더 오만해지기 위해서 겸손한 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어요, 나는 보잘것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당하게 겸손해지는 사람인데, 사실 당당하게 겸손하다는 것은 정당하게 오만해지기 위한 방법이지 결코 겸손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나의 모습은 바리새인의 변형이지 바리새인과 질적으로 다른 선한 사마리아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런 제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성서에서 더 관심이 가게 되는 인물은 얄밉게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이었고, 선택된 다윗이라기 보다는 폐위된 사울 이었으며, 모세라기 보다는 항상 징징대는 이스라엘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속에서 나 자신을 보면서, 어리석게 덤비는 나를 보면서 더 이상 그들을 비난하지 않게 되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도 다른 모습으로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그냥 그 곁을 지나가고, 선택받은 레위인이 그냥 지나가는데, 신분으로는 천한 사마리아인이 우연히 만난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나오는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을 놓치면 다 놓친다"고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누가복음 10절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며 끝나는 마지막에서 예수가 율법사에게 반문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미 아시겠지만 물음과 답이 다릅니다. 이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어디까지가 내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이웃의 범위가 정해져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웃의 범위를 정해주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숙제하듯이 정해진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경건한 바리새인, 존경받는 레위인, 천한 사마리아인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웃의 개념을 행동하는 자의 관점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의 관점으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베풀자, 가진 자 쪽에서 이웃의 개념을 정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리는 자, 고통받는 자 쪽에서 이웃의 개념을 정하고 있습니다. 천한 사마리아인이 이 강도 만난 자에게 필요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사마리아인이 천해서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는 구해주는 자가 의미가 있지, 구해주는 자가 바리새인이냐 레위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하는 신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정의의 사도 황금박쥐가 되어 "나의 도움을 받을 이웃 나오라"고 외치면서 베푸는 자의 사랑이 이웃사랑은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친 것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와보았자 신문에 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채를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것을 증명해내기 위한 이웃사랑을 그들은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과시이며 생색이라는 말이 더 좋은 표현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많이 해도 갈채나 구원이나 자기만족이 목적이 되는 것은 사랑의 이름을 써도 이웃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과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동생과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 동생이 "언니를 사랑해"라고 하며 "성서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써 있거든"하고 농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도 그와는 원수가 됐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자기과시가 되면 상대끼리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말했지만 이런 것이 옛사람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우리자신들의 익숙한 사랑의 행위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랑이 자기만족이나 자기과시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이 원수사랑이라는 것인데 옛 속성의 사람이 원수사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또는 최고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순간 묻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구원받을 자격도 사랑받을 이유도 없는 원수인데 내가 감히 보잘것 없는 너를 사랑해준다"입니다.

새 사람의 사랑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랑'의 구호가 없습니다. 당연히 베푸는 자라는 데서 나오는 당당함도 없습니다. 그는 그가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상처난 자, 고통받은 자를 끌어안았을 뿐이고 그리하여 상처난 자의 이웃이 된 것입니다. 새 사람의 이웃 사랑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바리새인적 권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적 권위란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 존경받아야 하는 자, 위대한 자이니 너희는 나를 우러러보고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보상을 기대하므로 오히려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그 옛 사람 식의 사랑을 벗는 사랑은 인생사의 희로애락이 배어나는 일상사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이웃에게 해야 합니다. 대체로 그 이웃의 출발점은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그 이웃은 나의 왕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짐이 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예수가 이웃을 강도 만난 자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면 우리도 이웃이 되어야 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이웃은 나의 왕관일 수 없는, 단지 나의 짐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의 짐이고, 나의 책임인 사람들, 나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예수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강도 만난 자 다 내게로 오라"고 떠벌리지 않은 것처럼, 우리 삶이 요구하는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사랑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그리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척거리는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사랑할 이유보다는 미워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여행이나 등산을 하다 만난 사람에게는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친절할 수 있습니다. 스쳐 지날 때는 모르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사랑하고 그 사람의 사랑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국가적 원수라도 멀리 있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큰그릇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있으면 작은 일도 참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원수가 되기 쉽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일만의 먼 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자기 삶이 솟아나는 자리에서 만난 지긋지긋한 사랑을 이루어 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원수까지 사랑했다"고 광고하며 TV에 나오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진짜 원수는 집안에 있고, 직장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화해하고 지내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삶은 간단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 크리스천이기에 더 고통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다는 것은 꼭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달픕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 고달팠고 바울의 전도여행이 간단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는 싸움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옛 사람을 벗는 싸움은 무엇보다도 자기와의 싸움이면서 어쩌면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평생의 싸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명기 1장 28절에 보면 우리의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이냐? 무모한 일이다.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우리의 형제들은, 그 곳 사람들이 우리보다 힘이 훨씬 더 세고 키가 크며, 성읍은 하늘을 닿을 듯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까지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상황이 어떤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요단강 저편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앞에 두고 가나안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가 죽은 것입니다. 그 곳 사람들이 힘이 너무 세서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여호와가 약속하셨어도 우리는 거기에 못 들어간다고 겁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진노하셔서는 이스라엘을 가난안에 입국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고 의문이 가는 것은 격노하신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하게 한 것은 모세를 불러내어 백성을 구하게 하신 이후 처음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중에도, 홍해를 건너기 전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징징거렸고 광야에서도 그랬습니다. 못한다, 안될 것이다 하면서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손에서는 구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여전히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역사 하시던 여호와가 이제 젖과 꿀이 흐른다는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징징거리는 이스라엘을 입국시키지 않으시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게 구원과 성화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느끼는 것이지만, 성서에선 어느 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어느 땐 "행함이 없는 믿음은 . . ." 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모순인 것 같은데 모순이 아닙니다. 단순히 신분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출생과 같은 것이죠. 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말많은 기독교의 예정론이 의미 있는 것도 이 지점에서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으면 인간은 로보트란 말인가라는 식의 논리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새 생명이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닌 신비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란 의미에서, 과거에 없었던 생명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갈 길에 동행하신다는 의미의 신앙고백의 차원에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된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계획이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출애굽을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신분의 관점에서 보면 애굽에 있는가, 출애굽 했는가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세상의 사람인가, 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없습니다. 할 것이 없다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이제는 그와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이걸 성화라고도 하고 구원이 완성된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둔 가제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갑자기 변심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들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왜죠? 물리적으로 좋은 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예표된 땅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예표인 가나안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땅의 상징이기에 젖과 꿀이 흐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거하면서 인격적 관계를 나누는 생활을 할 수 있는 터가 즐거운 나의 좋은 집이지, 집 자체가 화려해서 좋은 집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갈 수준이 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감당해야 하는 일을 할 능력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벌을 받고 있다기보다는 들어가는 게 의미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적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고생은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이 그랬듯이 원주민을 습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무서운 싸움, 중요한 싸움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외적이 아닌 내적과의 싸움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매일 옛 습관에 젖은 자기자신을 벗고 새로운 자기로 태어나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식의 광고용 문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단한 싸움이고 고통스런 훈련입니다.

국무총리가 된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편하게 국무총리를 시켜주었습니까? 아닙니다. 형제에게 미움받아 낯선 땅으로 팔려가게 만들고, 시위대장집에서는 무고를 받아 옥에 갇히게 하고, 숱한 억울한 세월을 견뎌내게 합니다. 요셉은 국무총리라도 되었죠. 그러나 어쩌면 많은 우리들은 무지렁이같은 인생으로 시작해서 그런 인생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합니다. 울고 싶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삶의 터전에서 옛 사람을 벗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멋있는 싸움이 아니라 고단한 싸움이고, 남이 우러러보는 싸움이 아니라 무지렁이처럼 밟히는 곳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곳에서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던 옛 사람을 벗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의 생활이랍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기가 전쟁의 기록이란 걸 기억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의 전쟁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준에 맞는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우리가 그의 사랑의 자리로 성숙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을 때를 기다리십니다. 사랑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능력 없음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무시하는 최고의 것은 딴 사랑을 만드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워낙 단단한 것이라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없어도 지켜지는데 사랑에 무신경한 것은 참지 못합니다. 가나안에 사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하며 사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옛 사랑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그것은 옛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세상의 논리, 죄의 세력을 좇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쫓아내는 싸움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불같이 질투하십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라는 딴 사랑을 제일 참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옛 성품을 벗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할 때 눈에 보이는 보상은 없습니다. 세상의 논리가 아니기에 당연히 눈에 보이는 세상적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칼을 세우지 않았으니까 칼이 우리에게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됐다는 것을 붙들고 있으면 안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거나 일부러 자학적으로 밟히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국무총리가 되었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지렁이로 살건 마찬가지입니다. 국무총리가 우리의 목표와 가치는 아닙니다. 국무총리를 안하는 것도 목표와 가치가 아닙니다. 세상 칼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이 땅 지금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억울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테반의 죽음이 억울하지 않은 것은 억울하게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새사람을 입는 싸움, 간단하지 않은 싸움입니다. 우리는 고단하고 고통스런 싸움을 할 때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자로 만난 사람들, 형제 자매로 만난 자들입니다. 귀한 사람들입니다.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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