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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빌3: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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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완상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
"同苦走 : 예수 따르미의 바람직한 삶"
성서 본문: 빌립보서 3 : 12 ~ 1
한완상 형제
또 다시 새해를 맞으며 보다 값진 삶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해봅니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봅니다만 실제로 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여태까지 개미 쳇바퀴 돌 듯 해온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2003년 새해를 맞아 과연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삶으로 올라 갈 수 있을지 자신 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인 듯 하여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간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여러 차례의 새로운 다짐에도 불구하고 별반 나아진 삶이 되지 못하였음을 먼저 고백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공동체에 나와 그간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것과 부족함을 고백하여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고 서도 또 다시 비슷한 세상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 세속의 삶은 바로 그 전주의 삶과 별로 달라진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제자리걸음의 신앙생활을 해 온 셈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평생 그렇게 살아 온 셈입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아 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우리들의 통상적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우리의 교리적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닌지를 한 번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개신교도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은총만으로>와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에 대한 우리의 안일한 인식을 구도자적 노력 또는 구도자적 실천의 문제와 연결시켜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일주 내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탐욕, 독선, 이기심, 경쟁, 출세, 안일의 삶을 추구하다가 일주일에 하루 교회에 나와 십자가 보혈의 은총으로 죄 사함 받게 된다는 믿음, 바로 그것이 신앙의 제자리걸음을 하게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아닌지를 성찰하고 싶습니다. 이때 십자가의 피공로는 어떤 뜻에서 값싼 신앙생활 곧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제자리걸음 신앙생활을 평안하게 합리화 해주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십자가의 피공로로 구원받았다는 확신만으로, 예수 따르미들에게 저절로 성숙한 신앙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인가요? 한국 크리스찬들의 신앙은 대체로 독실하고 뜨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기독교인들은 그 신앙이 영적인 뜨거움을 지니고 있는 반면, 그들의 구체적 삶은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 일수록 교회운영은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일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방언, 치유, 축사(귀신 쫓는 일)에는 열성인데 사랑실천(자기 비움)과 평화구현에는 왜 그렇게 차가운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바로 이런 현상, 곧 신앙과 삶간의 분리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위기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교회의 양적 성장이 주춤하거나 후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불교의 명상과 수행이 진리에 굶주린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적절하고 절박한 매력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깊이 성찰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계적으로 달라이라마나 틱낫한 스님의 삶과 메시지가 감동적으로 먹혀드는 것은 그것이 열려있는 감동적인 메시지이면서 삶과 신앙을 함께 향상시켜 준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지금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가 정신을 바짝 차려서 신앙과 삶을 하나로 엮어 주는 문제 곧 질적 성장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같은 우리의 고민을 풀어주는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습니다. 최초의 예수그리스도 따르미들 가운데 가장 출중한 예수 따르미는 바로 사도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제도 기독교를 창시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과 말씀은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저희들에게 적절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삶의 궤적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초기 삶은 예수 따르미 죽이기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열혈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준수만이 구원을 보장해 준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율법 지킴을 가볍게 여겼거나 그것을 아예 거부했다고 인식된 예수의 추종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그는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초대 교회 청년 집사 스테반을 처형하는 일에도 적극 가담했고, 초대 교회 신도들을 체포, 구금하는 일에도 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다메섹 지역의 예수 따르미들을 체포하러 가는 도중에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에 의해 오히려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신자를 체포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가 그를 영적으로 체포한 셈이지요. 그래서 그는 정말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대주의적 세계관은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공가치관도 완전히 전복되었습니다. 그간 그가 율법주의자로서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들은 이제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3 : 7 ~ 8)
그의 생각만 180도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도 완전히 달라 졌습니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증오했던 예수를 이제는 구세주로, 메시아로 높이 받들게 되었고 그의 부활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희랍 · 로마 세계 속에서 그 부활의 깊은 뜻을 용기 있게 해석하고 증언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이나 권세자들이 그의 그러한 행동을 미친 짓으로 여겼습니다(사도행전 26 : 24). 게다가 그의 새로운 행동과 실천은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겪도록 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보통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삶을 직접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 : 23 ~ 27)
▶ 여러 번 옥에 갇힘.
▶ 매를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음.
▶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음(세 번 태장 맞고 한번 돌로 맞았음).
▶ 파선 당해 일 주야를 사선(死線)에서 헤매었음.
▶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음.
▶ 여러 번 굶주림을 견딤.
이 같은 사도바울의 고난은 한마디로 그의 새로운 신앙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번 예수의 은총으로 사로잡힌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 졌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구체적 삶의 변화로 이어지면서 한 단계 한 단계 향상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제자리걸음의 삶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달음질하는 전진의 삶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난에 찬 구도자적 삶, 곧 수행의 삶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이 모습을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삶, 곧 모든 예수 따르미의 삶을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자의 삶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부끄러운 개미 쳇바퀴의 삶을 이제 청산하려면 그의 이 메시지에서 값진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 그는 달리는 자로서 자기의 부족함을 솔직히 먼저 시인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고 결단코 완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 했다고 시인했습니다. 구도자적 신앙생활에서 이미 골인(goal in)한 것처럼 교만 떠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때문에 이제는 구원을 얻었으니, 저절로, 평안하게, 쉽게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에 의해 영적으로 체포된 그 은총을 이제는 자기가 주체적으로 육화(肉化) 하려고 달려가는 삶을 살려고 애썼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뒤에서 강조하겠습니다. 여하튼 그는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은혜로 새사람 된 것을 항상 감사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들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후 15 : 10)
자기의 존재 근거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언했습니다. 자기가 잘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새사람이 된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전히 부족한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미완성, 불완전성을 용기 있게 자인했지요. 그런데 이 고백을 그가 빌립보 교우들에게 쓴 편지에서 특별히 강조하게 된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우 중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진 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낫다고 믿어 허영이나 다툼에 빠진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빌립보 2 : 1 ~ 4).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유명한 <예수 마음의 노래>를 특별히 적어 보낸 것 같습니다(빌립보 2 : 5 ~ 11).
예수 따르미의 삶이 마땅히 경주자의 삶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달리는 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교만에 빠지지 않는 일 입니다. 사도바울처럼 겸손해야 하고, 예수처럼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적 교만도 예수 따르미에게 심각한 문제이지만, 영적 교만은 정말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종교적 교만과 독선은 구도자가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첫 번째 함정입니다.
<한번 사로잡힌 체험> 곧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게 된 은총의 체험을 신주단지 같이 그저 모셔 두기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언제 구원받았는지 아시오? 라고 남에게 묻고 자기는 그 날을 너무나 똑똑하게 기억한다고 자만하는 일은 정말 금물입니다. 이것은 영적 교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돈독한 가톨릭 신자였던 미국인 현각(玄覺)스님이 한국의 선불교 수도자가 된 후에도,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지금도 달려가는 삶, 곧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전철을 탔는데 어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귀엽게 웃으면서 승복을 만지작거렸다고 합니다. 현각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기에게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기 엄마가 갑자기 아기 팔을 확 낙아 채면서 “떼끼! 안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라고 내뱉고 자기 자리를 털고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답니다. 이때 현각은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뇌였다고 했습니다. “정작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 정말 이 글을 읽고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한국 크리스찬들의 상당수가 이 아주머니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있지 않을까요. 아예 푯대를 향해 달리기를 게을리 하면서도 자기만이 은총으로 구원받았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 특히 다른 종교인들을 경멸하는 교만한 맹신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하고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달리는 자는 주체적 신앙을 세워야 합니다.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첫 번째 은혜는 공짜로 받은 소중한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허나, 한번 예수님에 의해 체포당했던 체험(apprehended)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자기가 잡아야 (apprehend)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도자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달리기의 올바른 주체적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른 사도를 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고생하고, 더 많이 헌신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구도자의 노력과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지요. 그에게는 <은총>과 <노력>이 모순이 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이 고백은 그가 구도자로서 신앙의 달리기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 달림은 실천적 신앙 곧 주체적 신앙과 삶을 하나로 엮어내는 일을 위한 끊임없는 주체적 몸부림이라 하겠습니다.
셋째로, 바울사도는 달림의 성공비결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뒤의 것을 잊어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메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날 찬란했던 경험에 계속 취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난날의 영광스러운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달려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지난날의 쓰라렸던 실패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구도자로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의 한(恨)에 함몰되어 오늘도 구원(舊怨)에 사로 잡혀 있게 되면, 영적 전진은 어렵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영광이나 수치가 모두 오늘의 겸손을 낳고, 나아가 내일의 희망으로 이어진다면, 푯대를 향한 달리기는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라는 사도바울의 권고는 반드시 시간차원에서 말한 것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겠습니다. 미련 두지 말 것을 당부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자격이 없다”(누가 9 : 62)고 하신 것도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돈, 명예, 권력도 얻고 천당도 가려는 신자들은 뒤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쓰라린 과거든지, 영광의 과거든지 간에, 미래희망의 불빛을 밝혀주는 것일 때, 과거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경험입니다. 뒤를 돌아보아 오늘 이 시간에 그것을 감사 할 터이면 지난날을 뒤돌아볼수록 더 좋을 것입니다. 감사는 겸손의 짝이므로, 지난날을 감사한다면, 푯대를 향해 더욱 올곧고 겸손하게 달리게 될 것입니다.
정말 보람 있게 달리는 일에 성공하려면 목표를 확실하게 처다 보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뒤의 것을 망각하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처럼 뜻 없이 달리는 것은 헛수고 일 뿐입니다. 구도자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야 합니다. 왜 달리는지를, 달리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끈기 있게 달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리기에 있어 빨리 달릴 수록 좋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예수 따르미의 독특한 달림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달리기 또는 운동경기에서 달리기는 속주(速走)가 제일 중요합니다. 속주는 올림픽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도자에게는 속주가 오히려 심각한 장애나 유혹이 된다는 진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체로 속도제일주의는 자기제일주의로 이어집니다. <나 홀로 일등>의 비결은 대체로 속도에 있습니다. 남들을 모두 제치고 자기만이 제일 먼저 골인해야 영광의 월계관을 홀로 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같은 신앙은 값싼 출세주의를 잉태하게 됩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편법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목표를 신속하게 달성하면 된다>는 편법주의는 온갖 개인적 일탈과 구조적 역사적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날 군사쿠데타나, 경제성장제일주의가 빚어내 온갖 비극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속도 숭배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빨리 빨리 주의>는 우리 한국 사람들과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저도 이 병에 걸려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달려가는 경주자에게는 이 같은 속도 숭배가 오히려 유혹이 될 뿐입니다. 구도자로서 달리는 자는 달리는 길 곳곳에서 탈락되어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돌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경우 속주(速走)는 무시해야 할 사항이지요.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 같은 구도자의 참 모습을 너무 뚜렷하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돈독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쓰러져 죽어 가는 인간을 보고 함께 아파하기는커녕 고개를 돌리고 피해 갔습니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그러했겠지요. 그런데 잡종인간, 도무지 경건한 유대인들이 상종해서는 안될 쌍 것인 사마리아인은 그의 여행계획을 연기해 가면서 까지 불쌍한 인간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그만큼 그의 달리기는 늦어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결코 빠른 속도가 자랑이 될 수 없지요. 오히려 구원에 장애가 되지요.
사실 달리면서도 남을 나보다 더 낮게 여긴다면 특히 예수를 바라보며 달릴 때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가 예수 따르미로서 남들보다 중단 없이 앞서 뛸 수 있겠습니까. 예수 따르미의 달리기가 세속경주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것이 속주나 독주(獨走)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길 벗이 되어 함께 뛰는 동주(同走)의 정신 또는 함께 아파하며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뛰는 동고주(同苦走)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동고주가 예수 따르미의 경주 모형 곧 모범적 경주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푯대를 보지 못하고 세속적 가치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달려가기만 하는 사람을 붙잡고 동고주의 깊은 뜻을 알려주는 일이 소중합니다. 한때 열 일곱 명의 생명을 탈취해 갔던 살인마 김대두가 사형 당하기 전에 한말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가 경찰에 쫓기면서 허기진 배를 안고 어느 날 밤 남산 꼭대기에서 전기 불로 반짝이는 서울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 왜 내 불빛은 없습니까? ” 라고 처절하게 절규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형광등 십자가들이 김대두의 눈에 띄었을 터인데도, 그를 올곧은 삶으로 이끌어 준 달리기 선수 예수 따르미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의 녹음된 육성을 듣고 저 스스로 깊은 자괴심에 빠졌습니다. 그 많은 교회 십자가들이 서울의 밤을 밝혀주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푯대 예수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김대두에게는 그 형광등 십자가가 생명의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한국 크리스찬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제 2003년도 벽두에서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짐은 우리의 삶이 바로 예수와 <더불어> 예수를 <향해> 달려가는 구도자의 삶임을 새삼 깨닫는 다짐이기를 바랍니다. 길 되시고 진리 되시여 생명 되시는 우리 주 예수를 쳐다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길벗 되시고 주님과 함께 진리길을 달려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는 구도자에게 목표가 됨과 동시에 그 목표에 이르는 올곧은 길 곧 진리의 길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힘겹게 우리가 달려가다가 도중에 기진 하여 쓰러질 때 바로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同走하시며 同苦走 하시는 우리의 길벗임을 새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실력으로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은총으로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멈추게 되면 마치 어미제비가 물어주는 먹이를 입만 벌리고 받아먹는 제비새끼 같은 수준에 우리신앙이 머물러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 따르미의 믿음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그 자람은 선한 사마리아사람 같은 구도자의 주체적 달림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달림에서 우리 예수 따르미들은 결코 속주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2003년 새해 우리 새길 공동체도 천천히 달려 봅시다. 지극히 적은 자들과 함께 아파하면서 천천히 달려 봅시다. 우리가 이 같은 同苦走의 모범을 보여줄 때 우리 공동체의 신앙은 천천히 그러나 아름답게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賞)은 속주자(速走者)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동고주자에게 허락하시는 또 하나의 하나님 선물임을 기억합시다. 저는 만보기(萬步器)를 차고 하루의 운동량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영적 만보기(漫步器)를 달고 <천천히 그러나 사랑으로> 달리는 내 모습을 체크 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 새길 공동체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 기도로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부터 우리들은 예수를 푯대 삼아 천천히 그러나 뜻 깊게 동고주 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 봅시다.
한길교회 주간 말씀 메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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