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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감사: 하나의 해석

데살로전 정대현............... 조회 수 3383 추천 수 0 2004.03.11 14: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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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살전5:18 
설교자 : 정대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가) 여는 말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 사도 바울의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때 마다 하나의 의문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새길 공동체가 의지하는 이명섭 형제가 쓰러지고 아름다운 우명미 자매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어떻게 감사할 것입니까? 남한 사회의 부패, 북한 사회의 배고픔을 보면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까? 이라크의 고통 속에서, 성장 논리 앞에 분배 균형이 허물어지고 그 때문에 결과 되는 재난 앞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의 이 구절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이 바울 구절에 접근할 수 있는 해석학은 친절하게,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히 여러 가지 해석에 열려 있습니다.  이 구절이 강요하는 설득력의 해석이 있다면, 이 시간에 그러한 해석을 같이 찾고자 합니다.

(나) 감사의 논리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라는 성경 구절을 세 가지방식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첫째, 감사할 일들을 하나도 빼 놓지 말고 감사하라는 이해입니다. 큰 일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들도 기억하여 감사하라는 뜻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가족 식구의 합격, 승진, 결혼은 감사하면서 건강, 전보, 여행, 등의 작은 일들은 감사하지 않는 경향에 대한 일깨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일에 감사”를 모든 일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난 세상 속에서 모든 일에 둥글 둥글하게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밝은 국면에만 주목하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일”을  “좋은 모든 일” 정도로 생각하여 감사하고 좋지 않은 일들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조언으로 보는 것입니다. 재산, 결혼, 지위, 학교, 건강, 기회 등,  좋은 일들은 감사하지만 가난, 실직, 병환, 가족 소외, 늙음, 죽음 등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인간 조건을 십자가로 인내하여야 한다는 말씀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의 후반부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제동을 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제한은 “모든 일”의 “모든”을 그렇게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상 언어의 좋은 모든 일의 감사가 아니라 바울이 의도하는 말 그대로의 모든 일의 감사라는 것입니다. 일상 언어의 ‘감사’는 좋은 모든 일에 대하여 적용되고 좋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견디어 낸다라는 이분법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바울 언어에서 감사는 이분법적이 아니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멧시지가 있습니다. 일상 언어의 감사가 함축하는 이분법의 피상성을 넘어 영적인 차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장은 참이거나 참이 아니다라는 진위(眞僞) 이분법이 논리학이나 인간 합리성을 지배하였고, 모든 인간 행위는 선하거나 선하지 않다라는 선악의 이분법이 인간 윤리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감사할 것과 감사하지 않을 것으로 나누어진다는  감사와 불평의 이분법이 일상 경험의 구조에 들어 와 있습니다. 바울 언어는 감사와 불평의 그러한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사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일가요?

(다)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

바울이 뜻하는 “감사”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의 이분법으로 접근하지 않고,  바울의 총체성 접근을 따라가 보는 전략입니다. 이 전략은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 전략은 첫째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존재라는 것, 둘째 우리는 모두 치유자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존재입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역치(域値) 좌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촉감 역치 좌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촉감(觸感) 역치는 피부의 1평방 밀리미터에 가하는 압력 그람으로 측정됩니다. 인간의 혀는 압력 2그람을 가할 때 압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은 압력 3그람, 손등은 압력 12그람, 팔목은 33그람, 발바닥은 250 그람입니다.

그리고 고통 역치 좌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촉감의 역치에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촉감이 어느 수치를 넘어서게 되면 고통이 경험됩니다. 고통의 역치는 바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측정 좌표입니다. 손가락은 촉감 역치는 3그람이지만 300그람에서 고통을 경험합니다. 눈의 각막은 압력 0.2 그람에서 고통이 측정됩니다. 고통 역치는 신체보호 기준의 상관관계는 신체보호에 필수적입니다. 이 상관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동물종은 생존하지 못하고 이미 도태되었을 것입니다. 고통 역치좌표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이라면 고통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나병환자의 고통 역치는 손상되어 신체 보호 대처에 미흡합니다.

촉감 역치좌표와 고통 역치좌표가 심리학이 개발한 장치(Stanley Coren, Clare Porac, Lawrence M. Ward, Sensation and Perception, Academic Press, 1979, pp. 221-246.)라면 인격 상처 역치좌표라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 고통 역치에 상응하는 인격 상처 역치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좌표는 하한 절대치 0과 상한 절대치 1 사이에 무한히 많은 실수들로 구성됩니다.  돈과 외모, 가족과 학력, 명예와 인격, 역할과 인정(認定) 에서 사람들은 0에서 1의 좌표상의 압력을 받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심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고양되거나 상처를 입습니다. 기쁨이나 슬픔, 행복이나 불행, 만족이나 불만이 경험됩니다. 어느 누구도 인격의 모든 8가지 분야에서 압력을 0으로 갖지 않지만 어떤 누구도 압력을 1로 갖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간에 좋은 일만 경험하지도 않고 좋지 않은 일만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총체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모두 인격적 상처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두 치유자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성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 39)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러나 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이를 생각해보기 위해 “사람다움”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답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어떤 성질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씨에 대해 “김씨는 사람답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조건하에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김씨의 어떤 성질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재산, 사회적 지위, 신체적 조건 같은 외부적 조건입니까? 역사나 정치에서의 위대한 기여일 것 같지 않습니다. 지식, 믿음, 기쁨, 슬픔 같은 내부적 조건입니까? 위대한 예술 작품의 창조성 같은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을 할 때의 조건은 평소에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의 행위가 아닐까요?  특히 모르는 약자를 살려내는 행위? 힘없는 자를 세우는 행위? 이 행위는 역사적 주목이나 사회적 함축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사소한 몸짓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묻혀 있지만 그러나 강한 감동의 후보가 아닐까요?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콩씨는 사람답지 않다”라고 말할 때의 콩씨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콩씨가 일반적으로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아닐까요? 약한 자를 부당하게 억압, 가해하여 일어 설 수 없게 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특히 은혜를 입었던 강한 자가 약해졌을 때 그를 오히려 부당하게 억압하는 경우가 아닐까요?

사람다움과 사람답지 않음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수용할 수 있다면 이것은 흥미 있는 가설을 시사합니다:  인간연대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세우는 것은 사람다움이고 특이한 방식으로 해치는 것은 사람답지 않음이다. 이 가설은 인류에게 타인에 대한 사랑을 명령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설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습니까? 이 명제는 인류가 자연적으로 동일한 자연종이지만 사회적으로 하나의 실체일 것을 전제한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전제가 인간 일상 언어 안에 내재적으로 논리화되어 있다고 상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인간들은 상처 입은 존재이지만 또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이 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해야하고 감사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라) 하나님 나라 전개의 논리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감사에 도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식은 하나님 나라 전개의 논리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중의 하나는 인격의 왕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사물이 아니고 인격입니다. 모든 사람은 수단이 아니고 목적입니다. 이러한 인격의 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달하여 있지만 그러나 아직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는 바울 사도의 언명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시각,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의 왕국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격 왕국의 왕입니다. 어떤 의미로 그렇습니까?  우리는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윤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인 경우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 가을에 한국을 방문한 영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의 고백적 이야기입니다.  

지젝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 했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내성적인 지젝은 몇 년을 끌다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편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첫 데이트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젝은 소녀와 같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같은 고등학교의 상급생 학생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상급생은 등치도 크고 굉장한 깡패였습니다. 상급생은 소녀에게 추근 대다가  성희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10분정도였습니다. 지젝은 그 10분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그 소녀는, 지금 까지 그 여인은 지젝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지젝은 그 여인이 지금 까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젝 자신을  그러한 순간에  ‘아니오’라는 말 한 마디 못하는 무책임한 남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오’라고 해서 고작 코피 몇 방울 밖에 더 흘렸겠느냐는 것입니다. 지젝은 자신이 그 때 비윤리적이었던 것을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윤리적일 수 있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이웃의  배려 때문이라는 분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여야 하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라는 것입니다.

지젝의 고백은 매우 성찰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젝은 자신의 입을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침묵을 하였고 자신의 입을 윤리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비윤리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격 왕국의 구성적 성질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고, 거짓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여야 하는 구조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거짓 가설의 제거를 통해 이루어지듯 인격의 왕국도 거짓, 고통, 불의의 제거를 통해 보다 인격적으로 됩니다. 인간 역사에서 보았습니다. 한국 최근세사에서 보았습니다. 거짓의 왕국에 대해 기독인들은 물음을 묻고 ‘아니오’에 의한 부정으로써 새벽을 맞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성장을 말하고, 50배 100배의 성취를 말합니다. 우리 각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또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불입니다. 소금입니다. 이 이미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오’의 논리를 통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예수님 스스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거짓된 사회의 고정관념들을 타파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전개의 구조에 감사합니다. ‘아니오’를 말하여야 하는 하나님 나라 전개의 논리에 감사합니다. ‘아니오’의 논리를 통하여 인격의 왕국이 구성된다는 인간 참여의 방식에 감사합니다.  ‘아니오’라는 것은 부정의 제거라는 단칭적 문맥만으로가 아니라 긍정의 세움이라는 중층적 문맥에 올라 설 때  감사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관점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마) 맺는 말

이야기를 맺겠습니다. 지난 24일 화요일에는 우리와 같이 예배를 들여왔던 이상익 형제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신동남 자매님의 아픔에 우리 모두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감사해야 할 좋은 일과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좋지 않은 일의 이분법으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의 아픔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칭적인 차원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중층적인 차원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아픔이 있습니다. 남한의 진통이나 북한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구촌의 경제 질서나 문화 구조는 소외의 재생산을 더 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오’를 말하여야 합니다. 이 ‘아니오’는 넓고 편한 길을 약속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렵고 모험 스러운, 어려운 새 길을 요구할 것입니다. 아직 완성하여야 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낙관적 관점으로부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이고 인격의 왕국의 사역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중층적 구조에서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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