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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살후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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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우남식 목사 |
참고 : | . |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10).”
1. 바울의 자기 소개와 인사가 무엇입니까(1,2)?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어떤 점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 교회에서 자랑을 했습니까(3,4)?
2. 핍박과 환난이 믿는 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5-10)? 이 사실이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3.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11,12)?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의 주제는 재림의 때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런 주제로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자 이 서신을 읽은 사람들이 두 종류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재림하신다고 하였는데 아직껏 오시지 않는 것을 보면 재림은 먼 이야기로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살고자 하는 생각과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에 정신 쓸 것이 없다, 직장이고 가정이고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산으로 들어가자는 소위 영적인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기 위하여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격려와 칭찬, 2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과 아울러 불법의 자식,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예고, 그리고 제 3장에서는 재림 때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실제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모 있는 생활을 하라, 현재 주어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충실히 하고,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가정 잘 돌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주님 오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이고,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의 전체 흐름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님이 오실 날이 멀다며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거나 예수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든 것 다 치워버리자는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 이런 일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런 그릇된 사상에 빠지는 것입니까? 이는 열심은 있지만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몇 월 몇 일에 재림하신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몇 월 몇 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이 오시면 그 자리에서 기쁨으로 영접하면 됩니다.
첫째, 바울의 감사(3,4). 3,4절을 보면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울이 항상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믿음이 자라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역사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후서에서는 믿음의 자람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핍박 중에 전한 복음이 싹이 나서 더욱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들이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균형있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반면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를 낳기는 낳았는데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균형있게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밥은 잘 먹어 몸집은 큰데 adult child(성인 아이), 나이는 어른인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하거나 지체부자유아일 경우입니다. 그리고 밥만 먹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그런 자식일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물론 그런 자녀도 내 자식인 것만은 틀림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이 자라던 자라지 않던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그런 자녀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육체가 자라는 것만큼 정신적으로도 자라야 합니다. 그 나이에 걸맞게 인격이 성장해야 합니다.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이 자라고, 주어진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을 배웠으면 배운 만큼 봉사하고 헌신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밥만 먹고 일을 하지 않으면 체중만 늘어 제 몸도 추스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중풍병자가 되어 누워서 원망과 불평이나 하고 남의 흉이나 보고 문제만 일으킵니다. 먹었으면 일하고, 일하고 먹어야 건강한 삶을 살게 되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한편 먹지 않고 일만 하면 나중에는 지쳐 쓰러집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말씀도 열심히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전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2).”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믿음이 온전히 자라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의 풍성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사랑의 수고라고 했고, 3장 12절에서 사랑의 풍성함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 그들은 사랑이 풍성했습니다. 바울은 이로 인해 몹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랑은 수고로 끝나서는 되지 않고 풍성해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들 중에 “엄마, 아빠가 해 준 게 뭐가 있어, 낳아 준 것 밖에 없지 않아!” 대든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부모님은 “요것 봐,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런 소리를 해!” 하고 역정을 내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을 수고로만 그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수고로 끝나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딴에는 사랑한다고 여러 모양으로 수고를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쌍방 통행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풍성하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 기도해주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사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힘써서 사랑을 했는데 오히려 상대방에게는 사랑이 부담이 되게 되는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수고하면서 교제와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과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내가 죄인 되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롬5:8). 주님은 내가 탕자 되었을 때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연약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희생과 낮아지심으로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초청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풍성하십니다. 사랑의 풍성함은 겸손과 희생에서 옵니다.
셋째로 환난과 핍박을 인내로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을 인내하고 있습니다. 핍박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괴로움과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끼리 주일날 회식을 한다든지, 친척 결혼식이 주일 예배와 겹칠 때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참석을 못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직장 동료나 선배나 후배가 결혼하든지 아니면 상사의 자녀가 결혼할 때 가지 못합니다. 또 직장에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제 2차 회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 때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핍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은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당하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환난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제외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환난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도 천재지변과 자연적인 환난을 통하여 인간의 무능함과 교만함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토록 하십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의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난 앞에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하늘의 소망을 바라며 믿음으로 견디고 참습니다.
한 나이 많은 성도가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다가 10명의 난폭한 로마 병사들에게 이끌려 원형경기장의 사나운 맹수에게 던져졌습니다. 이보다 더 기막히고 비참한 일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얼마나 그 잔혹함에 떨었을까요? 그가 맹수에게 던져지기 전에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불로 지지고 쇠뭉치로 때려 보시오. 사납고 힘센 맹수를 보내보십시오. 내 뼈를 자르고 비틀고 으깨어 보시오. 내 사지를 꺾고 내 몸을 부수어 보십시오. 악마 같이 잔인한 고문으로 공격해 보시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이르게 할 것이오.
로마의 네로 황제 시대에 순교자들은 웃으며 원형 경기장에 나가고 찬송하며 원형경기장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의 소망이 공포를 이기게 했습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가 사자를 보내어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내려가 보니 사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은 시체의 얼굴에서 모두 웃으면서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네로는 내뱉었습니다. “미친 것들, 죽는 것이 뭐 좋아서 웃어!” 그는 욕하면서 내뱉었지만 굉장히 겁이 났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자, 사자밥이 되기까지 죽어가면서 웃다니, 이것은 사람의 의지로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소망이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환난과 핍박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찬송가 397장을 부르겠습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죠지 뮬러의 생애를 보면 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두고 기도했는데 그 문제가 기도로 이루어짐을 통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보다 더 깊은 믿음이 생겼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어려움에 삼켜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불평하라, 원망하라, 예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원망,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충동질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을 찾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더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환난은 훈련이 되게 하여 성숙하게 합니다. 바울은 환난과 핍박을 인내로 승리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여러 교회에 다니며 자랑했습니다.
둘째, 고난의 의미(5-10). 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첫째로 고난은 심판의 표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공의’하면 의롭게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고,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핍박을 하는 사람들이 심판을 당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는 사람이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마지막날 심판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 끝난다면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불의한 자가 잘 살고 믿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불의함이 심판의 자리로 나나납니다.
둘째로 고난은 그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출애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소망을 두고 부르셨지만 그들의 내면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430년간의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을 통해 노예근성이 찌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40년 광야 훈련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불의하고 더러운 일을 하는 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고전6:9). 음란한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여자처럼 행하는 자들) 남색하는 자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 술 취하는 자, 후욕하는 자, 토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의 결심으로 버릴 수 없고, 많은 환난을 통해 끊을 수 있습니다. 신호 위반을 밥먹듯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비싼 수업료인 몇 십만원 짜리 벌금을 물어야 신호등 잘 지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신자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징계가 없다면 이는 사생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내면이 겸손해집니다. 마음이 가난해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다윗은 애매히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환난 당한 자들의 목자가 될 수 있었고,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애매한 고난을 많이 받음으로 후에 정금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삼국 시대로 시작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내란도 많이 겪었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한국동란 등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아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민족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좀 잘 살게 되니 안일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이런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지 않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우리는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성도들의 고난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안식의 표시가 됩니다. 6,7a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환난으로 갚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해 주셨듯이 이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난을 받을 때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핍박받는 자를 안식으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냉대 받고 무시 받은 나사로를 내세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주셨습니다. 다윗은 피난길에 시므이로부터 엄청난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윗을 보좌하던 사람들은 당장 그를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냥 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핍박을 받을 때 복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핍박 중에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7b-9절은 믿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자들의 결국이 어떠한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의 불꽃 중에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핍박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들이 왜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까?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영과 육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신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이런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반면에 믿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10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재림의 날에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으십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최후에 승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과 환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환난 중에도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환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환난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험을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가 392장을 부르겠습니다. ■예수의 이름 힘입어서 죄악의 권세 이기네.....주 은혜로 거듭난 이 최후의 승리를 얻겠네■
셋째,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한 기도(11,12). 11,12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분명한 뜻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를 통한 이 땅에, 이 캠퍼스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모든 선한 일을 기뻐함과 모든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전도하는 것 모두 선한 일입니다. 또한 학과 공부와 직장 일도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그들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해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때 하나님도 그들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도 그들을 자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환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슬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난이 올 때 환난을 피하지 말고 환난을 적극적으로 이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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