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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6: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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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상태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07.1.14주일설교 |
마태복음 4:4, 디모데전서 6:7-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 4장 4절)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
“복 많이 받으세요”와 “부자되세요”
몇 해 전에, 새해 인사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덕담을 나누는 우리 전통 인사말의 의미는, 돈도 많이 벌면 좋겠지만, 건강하게 살고, 처녀 총각들 좋은 사람 만나 시집 장가도 가고, 군에 간 금쪽같은 자식들 별 탈 없이 군 복무 잘 마치고 무사히 제대하고, 두루 두루 행복하게 잘 살라는 뜻을 넓게 담아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나로 묶어서 “부자가 되라”니,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솔직하고 현실적인 축복 표현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능성이 멀기는 하지만 저 역시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두 군데를 읽었는데요. 그 중에서 마태복음 4장 4절,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가 무척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사람이 ‘빵으로’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과,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매우 다릅니다. “사람이 빵으로 살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었다면, 빵이 없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빵이 꼭 있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답게 살기에 충분하지 않다. 말씀도 있어야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빵의 힘을, 나아가서 돈의 위력을 폄하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음에 성경을 번역할 때는 ‘빵’이라는 단어를 ‘밥’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 사람들에는 ‘빵’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밥’이라고 해야 뜻이 더욱 분명해지니까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돈
오늘은 빵 문제, 혹은 밥 문제, 좀 더 나아가서 돈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전에 이 예화를 소개한 적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들은 말씀이라면, 복습이라 생각하시고 다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왕이 자기 땅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는 가난한 농부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네가 갖고 싶은 땅에 줄을 그어 면적으로 표시해라. 그러면 그 땅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면적을 제대로 표시하지 못하면 무효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농부는 해가 뜨자마자, 막대기를 들고 땅에 줄을 그으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나절만 고생하면, 넓은 광야가 모두 자기 땅이 됩니다.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누가 저한테도 이런 제안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농부는 식사도 거르고 한참을 달리다가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더 가는 건 무리야. 이제는 돌아가야 돼.” 그러나 마음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겠는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 보자..” 그러다가 농부는 그만 무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처음 시작하던 곳에 다다르지 못한채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걸 보면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요. (아마, 많이들 알고 계신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톨스토이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이었을까요? 톨스토이는, 이 농부처럼, 자기 생명이 시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돈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어록 중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재물은 배설물과 같아서 그것이 쌓여있을 때는 냄새를 피우고, 뿌려졌을 때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 옛날에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있었습니다. 연세 좀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 배설물을 한 군데다 쌓아두었습니다. 가끔 어린아이가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요... (저도 어렸을 때, 한번 빠진 적이 있습니다.)
배설물을 쌓아두면 냄새나고 더럽고 위험합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천연 비료가 됩니다. 땅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곡식과 채소를 잘 자라게 합니다. 돈은 결국 그와 같다는 것, 뿌려져야 한다는 것, 쌓아두기만 하면 냄새가 난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는, 돈이 사람의 행복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벌되, 매이지 말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도 버리고 고통을 겪은 사람이 2,000년 전에는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꽤나 많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은 ‘돈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악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에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게 하는 힘이 사랑 안에는 있습니다. 자식이 물에 빠지면 부모는 수영을 못해도 물에 뛰어듭니다. 돈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돈을 위해서 생명을 걸 수도 있습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황금을 찾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기꺼이 거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걸 보고 멋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건 멋있는 게 아니라, 정신 나간 거 아닐까요? 아무리 돈이 좋기로서니, 돈을 위해 목숨을 건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자고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결국 돈이라는 건 우리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다스려야지 사랑할 대상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을 해야 하고 또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아무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사랑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걸 사랑해야 하겠지요.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의로운 죽음이 나라를 구하기도 합니다. 정의를 사랑하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죽음이 사회를 밝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내나 남편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생명보험에 든 아내나 남편을 죽이는 비정한 아내, 비정한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문에 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돈에 매이지 말고, 어느 선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전서 6장 7-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리자, 소유권은 하나님께...
돈 문제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가져야 할 대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궁극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 나는 다만 관리자일 뿐이다.”라는 전제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생명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시고 궁극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잠시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되면, 돈에 대한 무모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님들 중에 돈 많이 벌고 싶은 분 계십니까? 그 돈의 궁극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많이 버시고 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분들이 관리하는 돈이라면, 자신과 가족의 행복 뿐만 아니라,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이웃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쓰여지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돈벌이라는 것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잘 안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돈은 아무나 벌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돌아가는 법칙이 있는데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건 풍족하게 널려있고 꼭 필요하지 않은 건 그리 많지 않다.”는 법칙입니다.
공기나 물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곳곳에 많이 허락해 주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꼭 갖고 싶지만, 그리 많지 않아서, 애쓰고 힘써도 잘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사실은 꼭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조금만 허락해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만만치 않은 숙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예수따르미들이 “어떻게 하면 돈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돈을 잘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늘의 자녀로서 사람다움의 가치를 잃지 않고, 우리의 이웃들과, 또한 지구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우리가 평생에 걸쳐 풀어내야 할 만만치 않은 숙제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살 것이다.” 우리 모두 빵과 말씀 사이, 밥과 말씀 사이, 돈과 말씀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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