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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히브리서 손규태 목사............... 조회 수 2808 추천 수 0 2007.11.29 20: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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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1:1-2 
설교자 : 손규태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그리스 사람들이 인류에게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로고스의 발견이고 실천적 차원에서 "이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세기의 기독교적 세계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은 잠시 수난을 당하는 어두운 시기가 있었지만 17세기 이후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그들이 발견했던 이성 그것도 도구적 이성은 오늘날과 같은 기술문명의 시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도구적 이성으로 만들어진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에 뒤진 나라들은 19세기에는 유럽과 미국의 선진공업국가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었고 따라서 국가의 주권마저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과학기술에서 뒤진 나라들은 후진국으로 전락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후진성은 단순한 문명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의 후진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과학기술에 대한 문명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오늘이지만 그것들의 진보와 발전을 추구하려는 노력들은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가 보편적 가치로서 추구하고 있는 기술문명에 대한 신뢰, 말하자면 인간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보편적 신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인류가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일본의 두 도시에 투하되어 끔찍한 사건으로서 경험했던 핵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핵폭탄의 발견과 그것의 사용은 이러한 과학적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승인인 동시에 과학이성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도덕적으로 재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인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핵무기의 발견은 그동안 인간들 사이의 갈등해결의 가장 유효한 수단과 제도로서의 전쟁을 전적으로 전혀 새롭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습니다. 즉 오늘날 과학기술 시대의 평화는 칼 프리드리히 본 봐이체커가 말한 대로 삶의 계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국가들 사이의 갈등해결의 남은 방식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 즉 정치적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안보를 핵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이른바 "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핵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핵이 얼마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가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들은 반핵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 때 박정희씨도 국가안보라는 관점에서 핵무기 개발을 꿈꾼적이 있지만 미국의 핵독점 정책에 의해서 좌절되었습니다. 지금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한이 핵을 만들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현재의 무장상태로 보아서 재래식 무기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1500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고려해 보면 비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추정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인간들 혹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과학적 이성에 의한 무기체제들을 통해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 우리 정부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대다수의 국민들이 여기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환경파괴의 문제를 고려할 때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대구와 부산 사람들은 낙동강 물을 마실 수 없게 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 전라남도 목포 사람들은 영산강 물을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우리도 언제 한강 물을 마실 수 없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식수문제는 우리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입니다.

대기오염은 어떻습니까? 저는 과학적 수치를 들어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1988년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12년 간의 독일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습니다. 귀국한 후 저는 거의 3개월 동안 오염된 서울의 공기로 인해서 호흡곤란증세를 경험해야 했고 구로동 등 변두리 지역을 지나갈 때는 알 수 없는 악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아가는 듯 했습니다. 약 3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저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 호흡곤란증세도 악취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러한 나쁜 환경에 적응된 것뿐이지 환경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적응은 결코 건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상태의 악화를 의미합니다.

저는 지금 목동에 살고 있습니다만 저의 이웃에 사는 분이 금년 초 일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가 몇년동안 심각한 기관지 질병에 걸려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사에 따르면 그 아이는 부득불 목동을 떠나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병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파괴의 문제성은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전문적 지식을 가져야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때 과학이 더욱더 발전하면 이러한 환경파괴 문제도 과학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윤추구에 급급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들의 도덕성을 우리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도구적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오늘날의 과학기술 세계는 인간이 안심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 가지 시험들을 극복했습니다. 즉 종교적 시험으로서의 영예와 정치적 시험으로서의 권력 그리고 과학적 시험으로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종교적 시험으로서의 유대적 시험 그리고 정치적 시험으로서 로마적 시험과 함께 과학적 시험으로서 그리스적 시험을 그는 통과하시고 나서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마태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는 그리스인들의 도구적 이성의 시험대에 오늘날 우리는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과학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궁극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더 이상 땅에 곡식을 심어 놓고 자연이 줄 수 있는 것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인공비료를 주고 인공농약을 주어서 기른 농산물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인공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해서 그의 공생애 처음부터 그리스적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돌로 만든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도구적 이성에 기초한 과학과 기술시대를 거부하고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척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저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해보고 싶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삶을 움직여 왔던 것이 이성이라면 히브리인들의 삶을 이끌어 왔던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이 이성에 기초한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란 가능하며 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성에 기초해서 사는 것을 현실적이라고 하고 믿음에 의지해서 사는 것은 이상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 신앙에 의지해서 사는 것은 비현실적인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이라는 것이 가지는 이상적인 성격 즉 비현실적인 성격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희망하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현재의 것의 실상 즉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 얻는 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에서 얻는 확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희망하는 것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폴 틸릭은 그의 책 믿음, 소망, 사랑에서 믿음은 과거의 것, 소망은 미래의 것, 사랑은 현재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야말로 희망의 차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것과 결합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 없는 희망이 불가능하듯이 희망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이란 현재의 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을 실상으로 만들어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의 차원이 없는 믿음이란 실상이 아니라 실망으로 나타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이 가지는 희망의 차원, 희망을 실상으로 만드는 차원을 오늘 읽어드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100세나 되어서 얻은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라는 미래를 약속하시고는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약속의 차원에서 봐도 그리고 그 약속을 파기하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차원에서 봐도 도저히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키일케골은 그의 책 "두려움과 떨림"에서 이 문제를 윤리적 차원과 종교적 차원으로 갈라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아들의 살해가 윤리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종교적 차원에서는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태는 이성으로 사는 사람의 행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행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행태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고사는 사람의 행태는 분명히 아닙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사람의 삶의 중심이 현재에 있다면 아브라함의 삶의 중심은 언제나 미래에 즉 희망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란을 떠날 때 '약속'이라고 하는 미래만을 믿고 떠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의 불확실성에서부터 미래의 확실성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이려고 할 때 설마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설마 자식을 죽이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에 응답했습니다. 그는 수양을 준비해서 그것을 제물로 이삭 대신 바치게 했습니다.

현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들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통에 사는 사람들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이성이 산적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만이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적인 것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기술 사회에서는 이성적인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에서도 도구적 이성을 가장 잘 사용하는 이른바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을 입학시킵니다. 도덕적 성품이나 시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대학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정치에서도 현실적인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척도가 되지 믿음이나 이상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배척을 당합니다. 그래서 독일을 통일했고 정치에서 내노라했던 비스마르크는 산상설교를 가지고는 나라를 통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며 기독교 신앙은 거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오늘날의 모든 산적한 문제들이 이성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가? 인간의 문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을 통해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닌가?
한 예로서 오늘날의 남북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남북문제는 실상 오늘날까지 정치적 차원에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을 통해서 접근해 왔습니다. 북에서 무기를 증강하면 남에서도 거기 대응해서 무기를 증강했고, 북에서 군인의 숫자를 늘리면 남에서도 군인의 숫자를 늘렸습니다. 성서의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북에서 왼뺨을 치면 남에서도 왼뺨을 치고 북에서 이빨 한 개를 부러뜨리면 남에서도 이빨 한 개를 부러뜨리는 것이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 상대방을 제압할 정도로 월등한 것이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대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단의 고착화와 상호 불신의 심화와 적대감의 고양밖에 다른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분석에 의거해서 얻은 것이란 엄청난 군비의 증강과 남한 사회의 외세예속과 북한사회의 궁핍화와 비정상적 통치체제의 강화 외에 얻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확신하기는 남북문제는 더 이상 이성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분석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고 산상설교가 말하는 이상 즉 믿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하고 있듯이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바랍니까? 그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군사력이나 어떤 정치적 이성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스커드미사일이나 거기에 대응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우리의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그러한 조치는 가장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치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더욱더 불신감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것을 현실로, 실상으로 만들려면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식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는 바를 실상으로 만드는 것은 이성, 즉 머리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부모들의 신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과외를 시키고 도구적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며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교육현장의 황폐화와 우리 사회의 모순화가 바로 이러한 교육이 빚어낸 결과가 아닙니까? 우리가 가치를 두고 있는 이성적인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많은 농민들이 이제는 유기농법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것은 이성이나 현실적인 것에 기초해서 얻은 확신이 아니라 믿음에서 얻은 확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너무나 이성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익숙해 있어서 희망적인 것 즉 바라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모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신앙을 바르트는 부르주아적 사회의 믿음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에 집착해서 뭔가를 모험하지 못하는 것,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기독교인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가지는 희망의 차원, 미래를 모험하지 못하는 믿음은 희망을 현실로 만들지 못합니다. 믿음은 따라서 사고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모험입니다. 뭔가를 새롭게 생각하고 뭔가를 새롭게 모험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고 나아가서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원사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증언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사야는 그의 책 7장 9절에서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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