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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리와 곧은 길

히브리서 김병종............... 조회 수 2096 추천 수 0 2007.12.17 00: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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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12:13 
설교자 : 김병종 교수 
참고 : 새길교회 

전공관계로 어떤 예술가의 얘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난히 말을 잘 조각하는 조각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못쓰게 된 나무나 돌에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곧 달려갈 것처럼 살아 생동하는 말이 되곤 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 조각하는 조각가가 되었소"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간단합니다, 저는 돌이나 나무 중에서 말 아닌 부분만 떼어 내버리죠"라고 했답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담지 않은 부분을 하나씩 떼어버리기를 생의 내내 요구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때때로 그것이 혈기일 수도 있고 정욕일 수도 있고 세상 욕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속에 있는 아킬레스건을, 사탄이 침투하는 것을 하나씩 떼어버리면서 죽기까지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낙망하며 힘겹게 힘겹게 그 형상을 이루기 위해 걸어가는 것이 지상의 우리 크리스천의 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그 떼어내는 작업이 멈추어지고 그 길마저 굳은 것이 되고 다리가 절뚝거리게 될 때 주인이요 보호자 되시는 우리 주께서는 손을 내밀어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이끌어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자유의지가 가지 않으려는 소처럼 고삐를 재끼고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때로는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죄인인 저까지 모두 하나님의 관리체계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건 하지 못하건 간에 크고 작은 보호와 징계가 예수의 형상을 이루는 인생 길 도정 내내 계속되어 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한 징계의 채찍을 하나님께서는 들었기 때문이죠.

저는 어렸을 적 이후에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지만 아직 자각 의지가 싹트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인지 청년이 되어서까지 실존의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했던 세월이 많았습니다. 성령 없는 교인으로 말하자면 써클이나 동문회에 드나드는 것 비슷하게 교회에 들락거리며 다녔습니다. 구원에 관한 것 역시 애매하고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보혈 흘려 이루어 놓은 예수의 구원사역을 저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를 들면 서울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를 차를 몰고 편안하게 가면 될텐데 제가 직접 삽질을 해서 길을 만들어 가야 할 것 같은 착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 아이가 둘이 있는데 명절 때 친가나 처가에 내려가게 되면 둘째 아이는 편안하게 곧 잠들어 버리는 데 첫째 아이는 제 운전에 대해 불신을 하고 끝까지 간섭을 합니다. 고속도로가 막히면 국도로 돌아가라 지시하고, 조금만 과속을 하면 브레이크를 밟으라 하고, 물론 아빠에 대한 사랑이겠습니다만. 아빠를 불신하고 아빠의 운전 실력을 온전히 믿지 못하니까 짜증스럽더라고요.

저의 신앙생활 역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예컨대 사람 사이의 현실성 없는 관념적인 사랑에 불꽃이 일어나기 어렵듯이, 저의 알량한 문화적인 지식이나 이성의 범주 안에서 관념으로만 만난 예수는 제 청년기에까지 능력을 발휘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저는 어떻게 이해했는고 하니 한 유약한 고대 히브리 민족의 고대사인 것으로 알았고요 신약은 그 민족의 고난 속에서 난 한 위대한 선각자나 윤리학자 정도로 이해를 했습니다.

성경의 도처에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따른 피 냄새로 진동하는 그것이 나와 예수와의 숨막히는 개인적 관계에 대한 그분의 뜨거운 진술이라는 것을 안 것은 30을 훨씬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이 실존이라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본인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증명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원래 굉장히 낭만적인 기질인데다가 눈물이 많고 상상과 몽상을 즐기는 사람이어서 소년시절 이후부터 상상이 현실화되는 것을 몽롱하게 꿈꾸면서 하루를 보낸 적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 상상 가운데 하나가 중학교 때부터 가져온 생각인데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떻게 될까 하는 게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집요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아이를 가지고서부터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도대체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매를 들어서 그 사랑을 확증하듯이 내가 하나님의 가르침에 정 반대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되면 하나님이 그러한 매를 들어서 그 사랑을 내게 전달시키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보는가하는 방법으로 마이너스 방향으로 가는 길에 몰두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집 마련을 위해 주식투자하며, 승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때에 저는 그런 상상이나 하면서 보냈습니다. 공중예배 때나 주일날 대예배 때 말고는 그 당시 제 개인이 예수님과 밀실 골방에서 만난 체험이 별로 없습니다. 생각이 많아져서 자꾸 생각의 갈래가 파괴되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심통을 부려서 어머님의 사랑을 얻어내듯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만한 일을 골라서 해보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89년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위험한 내기가 시작될 즈음에 저는 영적으로 몹시 피폐해 있었습니다. 세상의 잣대와 교회의 잣대가 서로 너무나 달라서 혼란해 있었으며 유난히 감성이 풍성한데 교회의 건조한 사랑만 가지고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말씀에 게으르고 생각만 많은 저에게는 영적인 힘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주일의 한 두 번의 경건한 예배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간사를 오래 했지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제대로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요 제가 아는 젊은 목사의 어린 조카가 젖을 떼면서부터 걸레를 보기만 하면 빨아먹기 시작해서 골치를 썩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래는 걸레가 빨기만 하면 달짝지근하지만 그 속에 병균과 독소가 가득하여서 아이는 모유로부터 나오는 건강한 영양소를 먹어야 무럭무럭 성장할텐데 제대로 발육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절 저도 걸레를 빠는 아이처럼 늘 공허하고 허기져 있어서 갈증을 느끼는 상태였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정욕의 허상을 쫓는 걸레 빠는 어른아이 같은 것이었죠.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사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공기가 그래도 덜 탁했지만 제가 빨아대는 세상의 공기는 더 탁하고 산소부족인 상태와 비슷했습니다. 요즈음은 마치 거대한 슈퍼마켓이나 혹은 포르노극장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공기가 날로 탁해가고 있습니다.

저희 어렸을 때는 가난했지만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하나님 창조하신 풍성한 자연과 교감하면서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고갈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상대적인 물질적 빈곤감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살기 편해지고 좋아졌다고 하는 지금 시대에 있어서는 어떤 유형적인 핍박은 없습니다만 정말 신앙생활 하기가 몇 배 더 어렵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날로 빨라지고 있고, 이제 7년인가 후면 아침에 대학생 아이가 친구와 통화하면서 맨해튼의 음식점에서 점심약속을 하면 엄마가 저녁 늦지 않도록 조심해라 라고 하는 그런 환상적인 세계가 온다고 참 좋아합니다. 날로 편해진다고도 하고요. 그렇지만 영적인 면에서 제가 보니까 분명한 것 한가지는 앞으로의 사회는 날로 더 사탄적이 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어쨌든 89년도의 저는 하나님의 실존을 제 개인사에 체험해 보고싶은 욕심과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죄악 된 길을 일부러 이를 악물고 걸어갔습니다. 그것들을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마이너스로 가기 시작한 이 위험한 시도가 개통되면서 저는 서서히 하나님의 구속권 안으로 옥죄어 오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기다 위기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는 저의 영적 상황을 전혀 눈치 챌 수가 없었습니다. 신호대기에서 차를 세우고 있을 때는 어디선가 구급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 것 같기도 하면서 고통사고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징계가 가까이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하며 1989년 11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신림동에 조그만 작업실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조교한테 부탁해서 작업실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해달라고 했더니 닭장이라고 불리는 신림동 일대의 고시원 중의 하나를 얻어 주었습니다. 골방인데 거기서 잠을 자던 두 번째 날 밤에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 전날 평창동에 사시는 학부모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오랜만에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랬던지 점심을 하지 말고 오전 10시쯤에 차나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 분이 평창동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점심시간인데요 라고 하는 것을 제가 우겨서 10시에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작업실 근처의 작은 찻집에서요. 그리고 제가 그 방에 들어간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저의 집사람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약속 전날 밤 12시쯤 제가 이 다리를 가지고 시내를 막 방황하면서 다녔습니다. 다 큰 어른이 그 때 37살인데 방배동 골목을 자정까지 방황했다고 하면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방황을 하면서 밤 12시쯤 들어와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제 생각에 새벽 1시정도 됐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게 연탄가스였는지 어떤 괴질 이었는지 명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 속에서 의식 속에 제 얼굴을 만지니까 마치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만지는 느낌이 들면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사지를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소에 신문 기사 같은 데에서 일가족이 연탄가스로 몰살당했다 하는 기사를 읽으면 건강한 사람도 있을 텐데 설마 그 방 하나를 빠져 나올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직접 당해보니 정말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잠인지 혼돈상태에서였는지 깜박깜박 의식이 돌아오면서 무려 6-7시간 사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질러 대는데 과장 없이 모기소리만 하게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이 뿌옇게 동터오는데 계속 사람 살리라고만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 당시 제가 한번도 주님이라고 부르지를 못했는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그냥 사람 살리라고만 계속 부르짖었는데 그게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면서 돼지 저금통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걸 힘껏 들어서 던지면 누군가 알고서 들어올 것 같았습니다만 그렇게 못했지요. 제가 거기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군다나 조교는 먼데 살기 때문에, 이대로 죽는가보다 하는 절망감이 엄습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37살에 죽는다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이제 학교를 정년 퇴임하면 저도 조그만 마을에 가서 눈발을 휘날리며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싶었는데, 37살에 너무나 엉뚱하게 죽음이 덮치는구나 생각하니까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도 슬퍼졌습니다. 그 때 마지막 의식이 깜빡깜빡 하는데 흑백사진처럼 어떤 화면이 확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어 보니까 낙엽이 굉장히 우수수 지고 있는 아주 음습한 공원 같은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이게 명료하게 눈앞에 싹 스쳐 가는데 바람이 한번 부니까 그 썩은 잎들이 우수수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낙엽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습진 썩은 잎들이 날리는 것은 처음이었고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의식 속에서였는지 아닌지 저 떨어지는 썩은 잎 하나 하나가 내가 세상에서 받았던 영광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전혀 모르는 데, 저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제 전공분야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세상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어렸을 때부터 라면박스로 하나 가득히 상장 같은 것, 상 받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골똘해서 아주 애지중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썩은 나뭇잎 하나 하나로 일순에 우수수 져버리면서 이제 주님 앞에 서겠구나, 이제 다른 이력서를 준비해야 될텐데 아무 것도 준비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벌써 선생을 10년 가까이 했지만 그것이 이력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주일학교 반사를 한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늘 시간에 늦어 가지고 뒤에 앉아서 공과를 삽시간에 뒤적이면서 했던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생각나는 게 없었습니다. 상장이라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제가 이래봬도 어렸을 때는 부동산 재벌이었는데, 무언고하니 제가 어렸을 때는 변변한 놀이 기구가 없어서 땅따먹기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제가 인근을 주름잡을 만큼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몰 무렵에 어머님이 들어 오라 하면 그 많은 땅 부자였지만 그걸 다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슬, 딱지도 서랍 하나 가득 이었습니다. 어려서는 친구들 중 딱지 왕이었으나 그게 어느 날부터 아무 효력을 발생할 수 없었듯이 제가 믿고 의지했던 상장 같은 것, 그 알량한 영광이라 하는 것이 썩은 낙엽처럼 일순에 져버린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세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런 것이 아무런 눈곱만큼도 효력을 바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면 인생 자체에 성실성 같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회의도 순간 엄습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런 차가운 현실 앞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0시가 좀 지난 것 같았습니다. 의식이 깜박 들어오면서 제 머리 속에 나를 만나기로 했던 그분이 10시에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나는 살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제 작업실 옆에 있는 찻집에 왔다가 자동차는 있는데 사람이 안나오니까 한참을 기다리다가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용산쯤까지 돌아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 제가 그렇게 실없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까닭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신림동으로 되돌아 오셨습니다. 돌아오셔서는 다시 망연히 차 앞에 앉아 기다렸지만 역시 제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마침 지나가는 청년에게 이곳에 사는 제가 혹시 어디 갔는지 모르느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이 저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매를 때리신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섭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분이 제 조교한테 전화 걸어서 11시쯤에 문짝을 뜯고 들어왔어요. 그래서는 신림동에 있는 인근 병원으로 옮겼는데 보니까 대퇴부에서 시작해서 발목까지 엄청나게 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 부은 다리는 면도칼로 자르듯이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사람들이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겨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제가 얼른 빽이 없어서 서울대학병원에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교직원은 자동적으로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는 그게 무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파스를 한번 부쳐보라고 했습니다. 파스를 부치고 아무리 주물렀으나 낫지를 않고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제가 계속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거기서 무려 10시간 가까이 지났으나 별 차도가 없던 중 친구 덕분에 11시 30분에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져서 계기로 재어보니 다리가 폭발해 버리고 뼈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150이 정상인데 7500까지 압이 올라가 곧 터지려고 하니까 어른어른한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지금 대퇴부까지 다리를 잘라야 하는데 보호자가 싸인을 해야 한다니까 놀라서 달려온 처가 싸인을 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쉽게 싸인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목숨을 건진다고 생각하니까 다리를 저는 것은 문제가 안 되더라는군요. 그 때 저는 한 발로 서서 강의를 하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박사님이라고 하는 분에게 수술하기 전에 상의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의사분께 전화를 하였는데, 11월 말 새벽 2시에 전화가 오니까 그 분은 춥고 나가기 싫은 것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그분의 사모님께서 미대교수가 입원했다고 빨리 일어나 보라고 하셨답니다. 그 사모님이 미대를 졸업하셨거든요. 그래서 결국 나오셔서 그 수술을 집도 하셨고 양쪽으로 쨌는데 한 3일 지난 다음에 움직여 보라고 하기에 제 의지로는 움직여 보았지만 의지대로는 안되고 3일 째 되는 날 조금은 움직였노라고 하니까 참 기적이라고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수술을 마쳤는데 그 당시 서울대학병원에는 정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 서문자교수가 도와주셨고 또 간호사들에게 잘 지시를 하셔서 많은 친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병상에 있으면서 어떻게 사람의 머리통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나오나 할만큼 많이 울었고 그렇게 울고 나니 기분이 포근해지고 안심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큰 힘이 되었던 것은 한완상형제께서 여러 번 찾아와 주신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것이 시간과 정력과 물질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이 사랑임을 그 때 알았습니다.

요즈음 상황에서는 사랑 실천이 굉장히 어려운 것임을 알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많이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각오를 했는데도 조금 바빠서 하루 이틀 지나면 곧 퇴원을 하곤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생활 속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과격한 주문이었구나, 더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끌어안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임을 알았습니다. 수술은 아주 원시적으로 째서 독소가 빠져나가야 하는 원시적 수술이었는데 그렇게 세번이나 수술을 하는 중에 라디오 방송에서는 고 김 아무개가 라고 잘못 오보가 나가기도 했을 만큼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모처럼 포근하게 잠을 자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시더니 양쪽의 40개 철사를 떼어내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 전날 전신마취를 해야 하지만 전신마취를 하면 독소가 심장에 남아있게 되어 수술이 위험하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치사율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40-60%나 된다고 하기에 제가 이제 겨우 위기를 벗어났는데 또 죽는구나 싶어서 전신마취를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국소마취는 한 30분밖에 안 가는 데 그 철사를 푸는데도 30분이 다 가버린다고 하는 것을 제가 우겨서 국소마취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 보자기를 덮고 수술을 하는데 의사들은 당연히 마취과에서 전신마취를 하고 보낸 줄 알고 철사를 천천히 푸는데 한 1/4쯤 풀고 나니까 마취가 풀리더라구요. 그 때 수술한 의사가 젊은 분이었는데 수술하며 나눈 대화를 제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함지박 중국집 음식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또 제주대학에 교환교수로 갔다 오셨는데 그 제주도의 유료한 풍경들을 말씀하시면서 철사들을 풀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신의 아들이고 신 자체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이 우리보다 좀 덜하지 않을까, 무슨 묘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만큼 침착하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는 좀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제가 어떻게 어금니를 꼭 깨물었는지 현기증이 깜빡깜빡 났습니다.

 한 세시간 반쯤 걸려 다 풀고 나서 다시 꿰맸는데 나중에 온 몸이 물에 젖으니까 왜 그렇게 젖었느냐기에 국소마취를 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시며 그 해에 고통을 가장 잘 참은 환자로 표창하겠다고 이런 농담도 하셨습니다. 병실에 와서 있으니까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다가는 밖으로 나가서 구토를 하곤 했는데 내 모양이 너무 흉측하고 내장이 다 보이는 듯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변도 못보고 주사바늘은 양쪽에 5-6개를 꽂고 꼼짝을 못하고 아침을 맞곤 했습니다. 그 때 소원은 주사바늘 없이 잠을 잘 수 있다면 모든 욕심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여러 날을 지냈는데, 머리가 너무 가려워서 머리를 감고 싶었고, 또 여자들이 찾아오는데 너무 추해 보여서 제 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제 생각에는 머리를 감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새 다리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걸으려고 침대에서 움직이다 떨어졌는데, 침대 밑 스프링에 제가 누워서 보니까 제 몸의 주인이 제가 아니더라고요. 머리카락 하나도 어떻게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려 3시간을 거기서 바둥거렸는데 제 처는 거기가 동숭동이라 모처럼 외출을 해서 차도 마시고 들어 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막 우는데 언뜻 비스듬히 측면으로 보니 믿을만한 환상인지 느낌이 강화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새카맣게 탄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네가 아프냐, 나는 네 죄로 인해 더 아프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주 가까이 와 계시는 걸 알고 나서 육신은 아주 고통스러웠으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거기 좀 더 있어야 되는데 마침 전두환 대통령이 건강진단을 하러 오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지 않은 환자는 전부 퇴원하라고 해서 병실을 옮겼습니다. 퇴원 이후에 요양생활을 하며 제 인생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쉬고 있던 어느 하루 저희 다섯살 난 꼬마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집을 멋지게 짓고 차고도 만들며 아주 근사하게 만들어 놓고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화장실을 가다가 그것을 그만 툭 차버렸더니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는 데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 생각에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간과 장막의 나그네길을 요구하셨는가? 이런 모든 것들이 허상이구나. 세상을 열심히 살되 거기에 빠져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것들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저는 제 기질이 좀 골치였는데, 너무 감성이 예민하고 현실감각이 없을 때가 참 많고 또 혈기 같은 것도 잘 사라지지 않고 자주 실패를 했는데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제 기질과 타협을 하고 기질에 굴하지 않고 기질을 통해서 역사하시려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실은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교회에 오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일 전부터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며 계속해서 실족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네가 교회에 가서 설 수 있겠느냐, 네가 가서 감히 하나님 말씀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퇴원 이후에 드라마틱하게 변화된 부분도 없지 않느냐, 네가 자격이 되느냐, 자꾸 계속 이렇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젖히고 사실 이곳에 오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허지만 퇴원 이후에 어떤 지혜는 생겼어요. 계속 넘어지지만 그러나 매맞기 전에 얼른 돌아서는 순발력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를 에워 싸오는구나, 그래서 정말 행복한 듯이 젖은 세상걸레를 달짝지근하게 빨며 취해 있다가도 영적으로 각성이 오면 위기다 싶어 빨리 도망가라 하면 놓고서 이크 하고 돌아 설 수 있게 되었어요. 한번 매를 맞으니까 쉽지 않더군요. 육체적 고통은 가볍고 정신적 고통은 더 아프다고 하지만 양쪽으로 철사를 50개 가까이 박아놓고 지내니까 육체의 고통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고, 또 그런 매를 맡고 싶지 않아서 얼른 돌아 설 수 있는 거였어요. 아직도 그 상처자국이 흉측해서 사우나탕에 가면 얼른 자리를 비켜주곤 합니다. 그 매맞은 자국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닌가 이렇게 위로를 하면서 관념적인 신앙을 가지고서 의외로 구원의 숫자가 적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각성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또 철저한 신앙생활은 현재진행형일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어제의 악인도 회개했을 때 의인이 된다라고 하는 원리 같은 것이지요. 또 매일 샤워를 하고 이빨을 닦지 않으면 입이 더러워지듯이 우리 영적인 것도 기도의 골방에서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없이는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세워지지 않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이런 것들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처럼 매를 맞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신 여러분들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하지만 저는 매를 맞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게나마 돌아오고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부족하지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녹음한 것을 옮겨 적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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