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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벧후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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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홍명관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
저는 새길이 생각하는 그 <대안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인지, 비판을 넘어선 <공동체> 라면 그 공동체는 일반 교회의 방식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그리고 있는지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 새길의 핵심적 가치는 개혁이 아닐까요? 저는 먼저 새길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그러진 교회 상을 바로 잡고 건강한 교회모델을 제시해 세상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존재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나아가 영혼구원 내지는 내면성으로의 부름으로서만 해석 되는 기독교를 버리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책임지는 자세로 사회곳곳에서 살림의 일들을 넉넉히 감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행동이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모양은 다르지만 요즘 우리 새길의 신앙 모습도 많이 퇴색되고 건조해 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일 하루만으로 유지되는 형식적인 예배참여, 신앙의 과제들이 사회적 섬김과 봉사까지 확장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이고 냉소적인 태도, 삶이 수반된 깊은 기도로 이웃의 고난을 직접 감당해 내기 보다는 기도자체에 게으른 허구적 모습과 자조적, 감상적 기도로 일관된 모습이 우리 안에 팽배함을 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강단에서의 메시지가 상식적이긴 하나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희망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데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
다.
더 이상 아쉬울 게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희망마저 필요 없다는 것일까요? 이런 신앙의 형식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현실주의,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대한 냉소적 태도야 말로 그저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의 위선적인 여유로움이 아닐 런지요. 포기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현재의 모순을 바꾸는 자가 진정한 현실론자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현재 절망과 고난 속에 있는 약자들과 대안적 민중교회들이 자기만족에 취해 있는 우리들보다 더 정직하고 희망이 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문득문득 그리스도를 따르는 몸부림과 개혁을 위해 열심을 내다 자신과 주변의 한계에 부딪쳐 눈물을 흘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그것이 선이라 여기며 힘 있게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을 여러분과 함께 해 온 제가 감히 새길의 신앙 이야기, 새길 공동체의 앞날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마는 “누구나 남의 일에는 현자가 된다”라고 했나요? 어쩌면 타산지석과 같은 면도 없질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감히 여러분 앞에 서 봅니다. 그러기에 본인이 직접 구체적 내용들을 서술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듣는 여러분들이 우리의 문제와 아픔에 대한 그 구체적 내용들을 찾고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스스로의 반성이 없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 과연 희망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제는 <우리>의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를 모색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새길이 추구해야 할 영성의 모습이 어떠했으면 좋을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흔히 남용되는 말이 영성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 의미는 각 개인이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에서 갖는 어떤 신앙의 경지를 의미하기도 하고, 은사 같은 어떤 신비적이고 뜨거운 마음상태, 어떤 초월적 실재와 통하는 신비스런 능력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의미가 이렇게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밑바탕에는 영성이란 뭔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데는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영성에 대한 추구는 어떤 초월적 실재를 자기 내면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세속을 벗어난 삶 이른바 피정, 기도와 수행, 묵상, 금식, 초월적 실재와의 합일, 마음의 평화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 일상의 문제, 이를테면 총선, IMF, SOFA개정국민행동, 한-칠레 FTA, 이라크 전쟁과 파병안, 기아문제, 빈부격차, 실업문제, 파행적 국회, 독점재벌의 횡포, 농약남용, 환경오염, 유전자 조작 등- 이런 문제들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받아 들여 집니다. 이런 우리의 영성은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인식과 관행의 지체로 이어져 사람이 몸을 부딪기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는 등을 돌린 채 침묵만을 요구하는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만 머물게 되고 그것은 가족이기주의, 개교회 중심주의로 바로 직결되어 사회와는 배타적인 삶을 낳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대다수 신앙인들에게 사회현실은 영성과 관련이 없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영성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몸을 벗어나서 영으로 얻게 되는, 이 세상을 떠난 어떤 초월적 세계나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얻게 될 관념적 구원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개인적 실존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또한 전체 환경 안에 놓여있는 통전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에 개인적, 심령적 구원이 따로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선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영혼과 육체, 인격과 사회, 인간과 자연을 함께 포함하는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선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완성해 가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벧후3:11-13)
그렇다면 예수의 삶과 영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흔히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예수의 모습은 기도, 말씀묵상, 금식, 성령의 은사 같은 거룩한 행동들이지요. 그런데 복음서가 그리는 예수의 삶은 그런 것이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아주 제한적이며, 그것도 이 세상의 현장을 떠나서 도피적 영성의 삶으로 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기도이자 고난을 앞두고 그 세상과 맞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가 금식했다는 것도 마태복음에만 나올 뿐 다른 곳에는 나오질 않습니다. 예수는 금식보다 오히려 잔치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풀이 죽고 기가 죽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영접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기쁨의 잔치를 즐겨 벌였습니다. 삶에 지치고 고달픈 자들에게는 금식보다는 잔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의 행동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은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하면서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기도, 금식, 성경묵상, 율법준수가 영성의 척도라면 바리새파 사람들이야 말로 최상의 사람들 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뿐 만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바쳤고,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비롯하여 모든 율법을 생명을 걸고 철저히 지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버린 위선자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제가 신앙하는 그리스도도 모든 백성을 부조리와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려 억눌리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아픔을 같이 하다 민중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그는 유대사회의 율법적인 체제와 로마라는 거대국가의 착취와 수탈로 인해 인권과 생존권이 위협받는 자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일깨워 주고, 그 피해자 자신들이 단결하여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스스로 지켜가도록 함께 싸워 주신 분입니다. 예수께는 영성의 삶과 해방의 실천이 결코 다른 것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한 어떤 자리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들의 억눌리고 억압당하는 현장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해방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영성을 말합니다.
그 영성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삶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 되어 살며 사명감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한결같은 뜻은 바로 새로운 신경험이 모든 인간의 세계에 흘러 들어옴으로써 실현되는, 모든 난관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그의 능력과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모든 곧은 것을 펴게 하고, 골짜기는 메워지고, 험한 길은 평탄케 되는 나라입니다. 하늘이 지상으로 하강하고 나아가서 사람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모든 구조와 제도와 관습을 해체하는 역전되고 상하 도치된 나라였습니다. 이것은 현실세계와는 무관한 정신세계의 그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난한자, 정치적 권력구조에서 눌린 자, 신체적으로 또는 지적으로 눈먼 자, 실제 삶에서 포로 된 자가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그러한 속박과 결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그것은 억압과 착취를 영속시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물질적 제 관계를 뒤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서 태동된 것이지, 우리가 읊조리듯 교리나 교의학의 틀로 넘겨받은 개념적이고 명제적인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그런 정치적, 경제적 상황적인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적인 세계로 도피하는 것을 오히려 영성이라고 여깁니다. 예수의 영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제도와 작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회악과 대결하는 데서 추구되었는데 오늘날의 우리교회는 영성을 말하면서 오히려 보이지 않게 가난한 사람의 교회, 중산층 교회, 대형교회가 구분되어서 공존할 수 없는 지경이며, 신학자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억압과 착취의 지배구조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해 주는 구실을 도와 줬습니다. 설교자들도 민중에게 단지 심령의 위로와 피안의 구원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의 해방의식을 잠재우고, 도태시키고, 결국에는 지배자들의 이익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봉사하는 노예로 길들여 가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사회적 실천을 영성과 무관하게 여기는 사이 사회정의는 참여연대가, 경제정의는 경실련이, 환경운동과 미군 범죄에 대항하는 일은 환경운동 연합과 녹색연합이 전담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보는 교회가 없질 않으나 이것도 자선의 수준이지 신앙의 궁극적 내용이 아닙니다.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알프레드 테니슨도 『할머니』라는 시에서 이렇게 한탄 했습니다:
진실을 반쯤 섞은 거짓말이 가장 무서운 거짓말
온통 새빨간 거짓말은 즉각 대항하여 싸우기 쉬운 법
그러나 일부만 진실인 거짓말은 훨씬 싸우기 어렵지
교회사를 돌아보면 교회들이 시대마다 그럴듯한 형태의 다양한 반쪽 진리에 넘어가 부패한 적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완전할 수는 없겠지요. 반쪽 진리인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이 횡행하는 한국교회도 문제지만 은혜를 헐값에 덤핑하면서 교회를 넓은 길로 선도하는 편안한 예수를 포용하는, 양념 치듯 고난을 살짝 비켜가는 우리의 지성적, 사변적 신앙 또한 비판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 역시도 자본이 주는 물량적 성장가치에 길들여져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채 그 피해의식과 상처로 좁은 길의 인도자 예수를 따르는 고통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면 우리 새길의 영성은 어떠해야 할까요? 저는 참 영성이란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된 이기적 에너지를 타인에게로 돌리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억압하는 구조를 깨뜨리는 것, 누구나 하늘로 예우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게 우리의 진짜 영성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이것이 맑스가 이야기하는 인간 소외의 극복 아닌가요? 인간의 영혼을 물질주의와 기계론의 마력으로부터 구출하고 맘몬의 노예와 무감각에서 건져 내어 인간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실존의 빛으로 들어와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신앙의 진정성은 하나님과 물신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해 가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와 세계주의에 대항해서 모든 소외를 깨뜨리는데 헌신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세계주의라는 세계의 마술에 사로잡힌 인습적 기독교는 이미 삶이 아니라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속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윤리적, 예언자적 경건을 외면한 채 심미적, 제의적인 하나님 경배로 삶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체적인 몸이 부정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우리 새길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억눌리고 고난 받는 민중의 한 가운데 참여하여 그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본래적 사명을 다하는 능력(?)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의 온갖 그릇된 규정과 인습이 총체적으로 극복되고 하나님의 법, 그의 사랑과 능력만이 규범과 잣대가 되어 온갖 형태의 속박과 노예상태들이 해체되어, 함께 섞일 수 있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열린 평신도 교회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새길인의 신앙의 지평도 교회라는 울타리를 감히 넘어서는 경지에 다다랐으면 좋겠습니다. 결국에는 교회마저도 필요 없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거짓 평화 이데올로기로 위장된 세계를 직시해야만 하고 그것과 연관된 분단국가로서의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땅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가로막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그들과 맞서 억눌린 자 들을 대변하고 해방시키고 함께 고통은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장 억압적인 구조악과 그 구조악의 횡포 속에 수탈당하고 수난 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요? 여기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전 요즘 그들이야말로 앉은뱅이이고 장님이고 문둥병자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의 불구자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는 극도의 이윤추구적인 노동 분업을 통해 노동자들과 그들의 일과의 관계를 파괴한 악의 세력입니다.
원래 모든 노동은 원래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창조적인 그 무엇이었습니다. 창조적 노동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유의 인간성입니다. 이렇게 통전적이어야 할 노동이 이윤추구를 위해 파괴당했습니다. 이 자본주의가 인간을 파괴했듯이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성도 훼손시켰습니다.
또한 노동이 비본래적인 목적에 굴종되었듯이 소비도 마찬가지 입니다. 소비는 더 이상 수요충족의 정상과정이 아니라 이윤증대에 기여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윤과 관련되면 모든 것이 상품이 됩니다.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관계도 자연의 아름다움도 윤리적 종교적 진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돈이 주인이고 깊은 무신성이 이 질서를 이루고 있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바로 이 폭력적인 구조, 이 깊은 무신적 상태를 그냥 참지 않고 그 불의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더 이상 우리 새길인의 신앙은 이제 더 이상 관념에 머무는 추상적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몸을 긍정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그 누구도 누구의 노예가 되지 않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망하지 않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교리적 진술이 더 이상 뭐 필요하며, 신학적 사변이 왜 필요합니까?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마18:10)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18:14)
장황한 이야기 끝에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준비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이미 알 만큼 알고 있는 자들이며, 거룩할 만큼 경건한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새길은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적 교회가 되기 위하여 먼저 우리 교회의 내적갱신에 힘쓰고, 구조악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사회개혁에 힘쓰고 , 무엇보다 가장 폭력적인 구조가 되어 버린 경제구조의 병폐에 의한 약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존권을 확립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지닌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하고 나누는 실천적 행동들에 우리의 몸을 쓰는 그야말로 <예수 따르미>로 살아내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 처절한 인간의 육체와 몸을 더 긍정하고 발로 뛰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너의 아들들은 모두 야훼의 제자가 되고 크나큰 평화를 누리리라.
네가 정의 위에 튼튼히 서서 온갖 압박에서 풀려나리니,
두려워 할 일이 없으리라
온갖 공포가 사라져 너에게 닥쳐오지 아니하리라.
너를 고소하는 혀가 도리어 패소의 쓴 잔을 마시리라
바로 이것이 야웨의 종들이 나에게서 받을 몫이다 (사54:13/17)
주님, 지금 우리는 누구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제시한 길은 명징하지만 작고 좁고 고통스런 길임을 저희는 잘 압니다.
주님, 더 이상
신앙과 현실을 분리함으로써,
곧잘 신비를 끌어 들임으로써,
직설법을 가정법으로 바꿈으로써,
우리의 길을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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