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일1:1-2 |
---|---|
설교자 : | 김 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설교제목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체험'이라는 다소 어려운 표현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내용은 아주 쉽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입니다. 제목을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다고 믿는데, 실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느냐, 체험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 프란체스코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성 프란체스코가 움브리안 숲을 거닐며 '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입니까' 질문하며 기도하다 그만 숲에서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숲 속에서 이틀을 헤매었지만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배고 고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발 먹을 것 좀 주십시오. 저는 지금 배가 고픕니다.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집 한 채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집 바로 옆에는 등불이 걸려 있었고 큰 표지판이 붙어있었습니다. 그 표지판에는 '여기에서는 날마다 신선한 빵을 구워내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허기져 있던 성 프란체스코는 그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통사정을 했습니다. "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집에서 날마다 굽고 있는 신선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 그러자 여인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고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신부님! 우리 집에는 갓 구워낸 빵 따위는 없답니다. 우린 그저 이런 표지판을 만들뿐이죠"
교회에서 혹은 설교자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자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양손을 벌린 채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간판만 만들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에 대한 많은 정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교회를 다니는 사람, 기독교를 믿는 사람 등등...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때 그 믿음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무엇으로 펼쳐집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을 정의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현존, 즉 그리스도가 나의 삶과 이 역사, 이 우주에 함께 계시면서 구원을 베풀고 계심을 실제로 체험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가 살아 계시다' 라고 입술로 고백하거나 머리로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사건을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어느 과거 한 순간에 일회적으로 그치는 체험이 아니라 오늘 현재,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 없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양보해도 실제로 그리스도 체험 없이 우리가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계속해서 채워지고 또 그 믿음으로 이 세계에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힘이 생겨납니까? 저는 그것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체험 없이는 힘들다고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곧 그것이 자신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착각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음식점의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음식점에 가서 메뉴을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은 그곳에 적혀 있는 음식의 맛을 대부분 알 것입니다. 메뉴에 '김치찌개' '된장찌개'라는 음식을 보는 순간 생각하면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먹어보지 않는 이상 그 음식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수많은 구원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보면 그 사건의 전개와 그 뜻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체험일까요?
1. 원체험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의 내용과 양태를 원(原)체험, 추(追)체험, 재(再)체험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원체험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역사 속에서 체험하신 바로 그 본래의 체험, 예수의 하나님 체험, 진리체험, 생명체험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 체험, 사탄의 시험체험, 사람들과의 부대낌으로 말미암은 다양한 체험, 고난의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 체험 등 성서에 나타난, 이 땅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갔던 예수 스스로 체험했던 바로 그 체험을 말합니다. 원체험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앙체험의 토대이며 동시에 기준입니다. 성서는 이런 예수의 원체험의 기록이며 우리의 모든 체험은 바로 예수의 원체험을 통해 성숙해지고 검증됩니다. 하지만 그 원체험은 오직 예수에게만 일회적으로 체험된 과거지사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예수가 체험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당신이 체험하신 것을 다시 체험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예수를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한 바로 그 원체험을 내 삶에서 체험하고픈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원체험의 깊이와 강도를 상상해 보면 말로 표현되어 기록된 성서의 내용은 그 체험의 억 만 분지의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혹은 설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예수의 체험에 대한 묘사나 표현을 보고 듣는 것으로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한 바로 그 체험을 우리 또한 해야 비로소 예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체험을 나의 체험으로!' 이것이 우리의 '예수 체험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예수 또한 같은 영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 세계를 체험했기에 우리 또한 이 영을 통해 예수의 원체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직지인심(直旨人心)의 세계입니다. 예수는 실제로 제자들에게 이 자신이 체험한 바로 그 체험을 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의 원체험을 위해 자신이 하나의 통로가 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등등 수많은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자신을 모방하거나 본 받으라고 말하기보다는 자신처럼 하나님을 체험하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하나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원체험을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그리스도의 원체험의 반복으로 성숙되어 갑니다.
2. 추체험
추체험은 오늘날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쫓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일으켰던 사건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으로 계속 현현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원체험이 '그리스도의 체험'이라면 추체험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추체험은 이처럼 계속 그리스도의 현현에 따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 우리 삶에서 추체험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삶은 예수를 추체험하는 삶이었고, 신약성서는 그러한 추체험의 회상과 현실의 표식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이 역사현장에서, 우주생명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영혼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때로는 공동체 속에서 때로는 개인의 삶 속에서, 때론 인간의 문명 속에서 혹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일으키시는 구원사건의 현장을 쫓아 그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추체험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인으로 살아간다면 생명력은 없습니다.
3. 재체험
재체험은 앞에서 말한 원체험과 추체험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체험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며 계속 체험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체험은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는 체험입니다. 반복되는 체험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 얻는 꺠달음은 깊이를 더 해 갑니다. 원체험도 추체험도 재체험으로 유지되지 못하면 한 때 강렬했던 그 체험조차 마치 메마른 뿌리 마냥 영성의 삶에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비록 소소한 체험이라고 여길지라도 그 체험이 반복될 때 의미가 확충되고 체험 또한 더 우리 영혼의 폐부에 새겨질 것입니다. 예수의 원체험이 나의 삶에서 재체험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를 따르며 그의 구원사건이 추체험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이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삶이 될 것인가? 일상의 영성은 바로 원체험과 추체험 그리고 재체험의 순환으로 말미암습니다
원체험에 대한 재체험은 추체험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원체험은 추체험을 올바르게 가름하게 합니다. 그리고 재체험은 원체험과 추체험을 현재화시킵니다.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이 세 체험의 지평이 서로 만나 하나의 삼발 형태를 유지될 때 온전한 체험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체험이 곧 나의 체험이 되고(원체험), 그의 체험을 따라, 그의 현현에 동참하며(추체험) 이것이 현재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체험(재체험)으로 이어지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현존 체험해 가는 모습은 마치 아이들에게 글자나 글을 가르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때 먼저 글씨를 크게 쓰게 하다가 나중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을 때 작은 글씨를 연습시킨다. 아직 글씨를 쓰지 못하는 아이에게 처음부터 작게 글씨를 쓰게 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곤혹스럽게 할 것입니다. 큰 글씨를 보고 따라서 글씨를 쓰다보면 작은 글씨도 익숙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체험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도 우선 큰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점차 작은 세계에서도 그의 현존하심을 체험해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서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또한 창조한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오늘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또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점차 작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모래 한 알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큰 일을 한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음을 알게되고 또 그것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의 주변 작은 자들, 즉 가난하고 병들고, 의를 위해 싸우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도 주께서 함께 계심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 '작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글자를 크게 쓰던 작게 쓰던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체험도 크고 작은 영역의 차이 없이 우리에게 같은 구원의 체험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글자'가 아닌 '글'을 가르칠 때에도 처음에는 이해하기 쉬운 글부터 읽히고 차츰 어려운 글을 읽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이해하고 수용하기 쉬운 내용을 고백하고 또 실제로 그 고백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이성과 판단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 죽음의 순간에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믿고 체험함을 통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가 구원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드릴 수 있고 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디서 체험하고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곳을 그리스도의 현존처(現存處)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성서에 따르면 첫째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남과 모임 가운데 현존합니다.: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한다."(마18:20)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 스스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믿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걸고 모인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실재를 드러내는 상징이고 은유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걸고 모인다는 것은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과 고백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모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 이름만 있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나 헌신 없이 모임 꾸려진다면 거기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서 그의 뜻을 품고, 그의 마음과 사랑으로 모인 코이노니아(친교)를 의미합니다. 모이는 사람의 수(數)나 규모에 따라 그리스도의 현존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두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모이는 곳에는 그리스도는 현존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이는 예배를 비롯한 그 어떤 모임도 의미 없는 형식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임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믿음은 늘 되새기고 고백하고 또 실제로 그의 세밀한 현존을 체험해야 합니다. 교회 내 다양한 모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임이 생명력이 없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고, 또 그러기에 모임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길교회 여러 모임을 한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아이나 굶주리고 목마른 자, 혹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이들 모두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표합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가감 없이 예수의 입을 빌어 직접화법으로 말합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다."(마18: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습니다."(마25:35-36)
예수 당시의 유대종교문화나 식민지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말씀들은 그 동안의 굳어진 가치체계나 사회통념을 일순간에 허물어트리는 급진적인(radical) 선포입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도 못한, 그래서 인간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소외된 자, 병든 자, 민중들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신앙에 대한 철저한 신앙고백이자 동시에 사랑의 화육 사건의 실천입니다. 저와 여러분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싶으세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 계신 그리스도를 찾아가십시오. 그들을 만나십시오. 이것은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이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고, 그들 섬김이 곧 하나님 섬김입니다.
성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변하는 회심 사건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바로 현재에 고난받는 자와 함께 하는 분입니다. "저희는 모두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가신 돋친 채찍에다 발길질을 하다가는 너만 다칠 뿐입니다.'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행26:14-15) 사울이 핍박한 자는 단순히 예수를 신앙하는 무리일 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바울에게 자신을 지금 핍박받는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실재의 동일시가 아니라 실존의 동일시입니다. 나라는 실재는 역사적 예수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나와 실존적인 삶 속에서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어린아이 가난한 사람, 핍박받는 사람들과 그리스도가 동일시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의(義)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기꺼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성서의 고백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눔을 표현한 성만찬 속에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마26:26-27)
이 성만찬 속에 울려 퍼지는 예수 자신의 음성만큼이나 당신의 현존을 강렬하게 묘사하는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찢겨진 예수의 몸과 쏟아진 예수의 피에 대한 연상이 빵과 포도주와 결합되면서 그의 현존사실은 극대화됩니다. 성만찬을 통해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이 내 입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듯이 그리스도와 내가 실제로 하나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만찬의 신비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 그 자체로 변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빵과 포도주를 통해 나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신비는 이미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화로 말씀드린 성프란체스코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이곳 저곳에 현존한다는 사실을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야기하는 곳,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현존처(現存處)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가 현존할 수 있는 철저하게 순수한 어린아이가 되고,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의를 목말라하고, 선을 위해 일하다 남에게 외면당하는, 낯선 자가 되거나, 옷이 없어 헐벗은 자, 또는 의를 위해 싸우다 억압당해 감옥에 갇혀 있는 자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성만찬의 신비처럼 내가 남을 위한 하나의 빵이 되고 한 잔의 포도주가 되어, 즉 그들의 밥이 되어 받쳐지는 것입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인 이유는 바로 오늘 내 삶의 육화 속에 그리스도가 계속 성육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보다 궁극적인 길은 우리 자신이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예수와 동일한 존재로서 예수가 될 수 없지만 그 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요한일서 1장 1절-2절의 고백을 보면 예수 체험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이 요한일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또한 오늘 나와 우리와 이 역사와 이 자연 우주 어디에도 계시는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생생한 체험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새길교회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그리스도 체험 공동체요, 또 공동체로서 새길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