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일4:7-12 |
|---|---|
| 설교자 : | 길희성 형제 |
| 참고 : | 새길교회 |
몇 주일 전 우리는 어디로 보나 너무나도 서로 다른,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슷한 두 여인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이 두 여인의 죽음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 여인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일컬어지는 화려한 혼례를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만인의 부러움을 샀던 여인, 문자 그대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현실화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서 하루아침에 영국 왕실의 세자빈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의 죽음은 그의 출세 못지 않게 급작스러웠으며, 비참한 최후는 그가 누렸던 영화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어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여인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과 부귀영화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가난을 자취하여 비천한 자들과 일생을 함께 하면서 겸손과 인내로서 사랑을 실천하다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난 한 수도자였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비슷한 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 여인이었지만, 세계는 그래도 그들의 삶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들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도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과 봉사를 아는 삶을 살다가 갔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다이애나빈이 불우한 자들을 찾고 에이즈 환자를 돌보며 지뢰 철폐 운동을 벌리는 운동 등을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세상은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렇게 애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사랑에는 뚜렷한 질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은 풍요와 여유 가운데 베푼 사랑이었고 다른 한 사람의 사랑은 스스로 자취한 빈곤과 궁핍 가운데서의 사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은 우리들처럼 사치도 할 줄 알고, 결혼도 했고, 그 흔한 이혼도 했으며, 이성의 사랑을 그리워하다가 적절치 못한 상대를 만나는 어리석음 내지 인간적 실수로 인해 엄청난 파멸에 이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한 여자의 사랑이었고, 다른 한 여인의 사랑은 2,000년 전 자기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지구 한 구석에서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요절한 한 청년의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일생 그만을 생각하면서 순결과 가난과 순종의 서약을 지키면서 산 한 수녀의 초인간적인 신적 사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기득권을 누리는 가운데서 사랑을 베풀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철저히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기를 비운 순수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곧 철저한 사랑은 기득권의 포기를 요한다는 진리입니다. 그의 삶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는 192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 지방의 한 부유한 실업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세에 수녀가 된 것 자체가 이미 기득권의 포기였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수녀로 지내는 것도 그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칼캇타의 한 여학교에서 비교적 부유층 여학생들을 상대로 영어교사를 하는 일마저도 그에게는 너무나 안일한 삶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마침내 1946년 9월 10일, 그는 빈민가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봉사하라는 소명을 받고 수도회를 떠나게 됩니다. 누구에게서 이러한 사랑을 배웠습니까? 두 말할 필요 없이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흠모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점에서 테레사 수녀의 사랑은 다이애나빈의 사랑과는 달랐습니다.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자기 희생을 동반하지만, 그래도 다이애나빈의 경우 자기 비하와 자기 포기, 기득권의 포기는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기득권을 누리는 가운데서 베푼 사랑이었습니다.
기득권을 누리면서 베푸는 사랑도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요즈음 세계 재산가들의 자선 사업에 기부한 헌금 액수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미국의 CNN 텔레비죤 방송사장이 유엔에 10년간 매해 일억 달러씩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계기로 하여 다른 재산가들의 기부 액수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 재산가들은 모두 다이애나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득권 속의 사랑, 그야말로 을 베푼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이애나는 몸으로 찾아갔고 또 자신의 인기와 영향력을 동원해서 좋은 일을 한 반면에 재벌들은 돈만 희사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들의 자선 사업은 물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지게 많은 돈을 쌓아 놓고도 남을 위해 한 푼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가 보여 준 사랑은 스스로 낮아지지 않는 자는 진정한 사랑을 하기 어렵다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의 연대는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자기도 없는 가운데서 남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베푸는 사랑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쓰고 남은 것을 베푸는 것, 자기 희생이나 고통 없이 베푸는 사랑에는 마음이 전달되지 않으며 자칫하면 받는 자를 비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야 많이 베풀 수 있지 않느냐고 반론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테레사 수녀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베풀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스스로 자취한 가난을 말합니다.
두 여인의 죽음, 특히 테레사 수녀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참다운 가치가 무엇이며 참다운 삶의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은 후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는 데, 이름은 남겨서 무엇합니까? 이름이 남았다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살다가 갔습니다. 히틀러처럼 악행을 하고도 얼마든지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한 인간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며,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불멸의 영생을 얻도록 하는가 생각해 보면, 사랑 외에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력도, 재산도, 지식도 다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도 사랑이 있어야만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말씀은 진정 진리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천사의 말도, 지식도, 심지어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은 바로 이 진리를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사랑을 베풀고 사는 사람은 죽음도 복 되게 맞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인들의 한결 같은 걱정 가운데 하나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못지 않게 죽기 전에 오랫동안 큰 병고를 치르면서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요 주위 사람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다가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못지 않게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그가 문자 그대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품에 고이 안겼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치 열매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지듯 천수를 다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것입니다.
장례식 장면을 텔레비죤으로 보았습니다. 내노라 하는 정치인들, 이름 있는 사람들, 그리고 거창한 복장을 한 고위 성직자들의 모습들이 보였지만,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비위에 거슬리고 역겨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위선자처럼 보였습니다. 그 동안 무엇하고 있다가 죽고 나니까 저렇게들 호들갑을 떠는지, 과연 그렇게 요란한 장례를 테레사 수녀가 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은 과연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요? 죽은 후에 애도하면 무엇합니까?
그리고 나 자신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그의 얘기를 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말로만 사랑을 논하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이 한없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새길교회도 이제 매 주일 예배만 드리지 말고 그 대신 차라리 전 교인이 주일마다 단 한 가지라도 사랑의 실천을 하는 실천공동체가 되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교회 봉사부가 있어서 수고를 많이 하지만, 봉사가 마치 봉사부원들만의 일이 된다면 큰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혀만 천당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마시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물을 주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또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만 하는 것도 사랑의 일차적 행위는 아닙니다. 오직 실천만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테레사 수녀가 보여준 사랑의 실천의 원천,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 비결을 오늘의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원, 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에 갇혀 있는 동안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먼저 접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므로, 아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그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근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을 위해 내어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한테서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온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 응답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작은 몽당연필이 되어 그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서 일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 인식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결코 사변이나 지혜나 통찰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식은 실천적 인식이지 이론적 인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사랑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철학적 지혜도 아니고 기도도 명상도 아니고 오직 사랑의 실천뿐이라고까지 우리는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실천이야말로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은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에서도 진리이고 사랑에서도 진리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종교의 장벽마저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정말 사랑의 극치요 완성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종교가 사랑을 외치지만, 보편적 사랑, 아니 심지어 원수 사랑까지 말하지만, 타종교와의 관계에 이르면 여지없이 그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사랑의 상한선입니다. 타종교인을 사랑한다 해도 개종과 선교의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는 이것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개종을 목표로 봉사하지 않았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품에서 죽은 사람들을 각자가 속한 신앙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 단체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카톨릭 신앙과 신학의 포용성과 개방성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본래 테레사 수녀가 빈민가에 투신하여 1952년 처음 힌두교 사원 옆에 있는 여관집을 죽음에 임박한 객사자들을 돌보는 집(Nirmal Hriday)으로 개방하고, 그들이 사랑을 느끼면서 인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돌보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특히 인도의 토착종교인 힌두교도들로부터 받았습니다. 심지어 힌두교 사원의 사제들은 시 당국에 그 시설을 다른 데로 옮기게 하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힌두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 결핵 말기 환자가 되어서 시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는 치료 가능성이 없다 하여 입원을 거절당하고 테레사 수녀의 양로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테레사 수녀는 그를 힌두교 식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넘겨주었으며, 이 소식이 퍼지면서 칼캇타 사람들은 테레사 수녀의 활동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말로 설명하고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하면 종교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종교간의 거리만 확인될 뿐이지만, 사랑의 실천에서는 교리적 차이나 사상적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데, 학생들에게 한 학기가 끝난 후 자신의 종교생활과 경험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와 자기의 종교 이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쓰도록 합니다. 처음부터 아예 종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렸을 때 가족의 영향으로, 혹은 친구를 따라서 교회 뜰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 교회에 비교적 충실히 다녔다고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실망하고 대학생이 된 지금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모두 교회를 멀리 떠나 산다는 말들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눈에 비춰진 한국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주의, 교인들의 위선, 목사들의 이상한 소리로 하는 설교 음성, 기업화되고 사교장화된 교회, 율법주의적 속박과 답답함, 알아듣지 못할 설교, 이해 안 가는 교리들, 특히 타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과 독선 등 가지각색의 이유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교회가 정말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는 구원의 체험의 장이 되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말해,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른 것들만 본 것입니다. 기업화되고 사교장화된 제도와 조직만 본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에서 그 핵심, 복음을 복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실체는 온데간데없고 빈 껍데기만 남은 종교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생명은 끝이 난 것입니다.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랑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불가분적이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사랑할만한, 즉 동경하고 흠모하고 섬겨야 할 최고의 가치, 지고의 선이듯이 인간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 또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보다도 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도 비참하게 보이는 존재, 천하디 천한 사람들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것을 결코 동정이나 자선, 시혜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수녀회에서 하는 일들을 자선 사업이나 사회사업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내내 예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주님을 섬긴다는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그 궂은 일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오래, 그렇게 순수하고 한결 같이 그런 일에 종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테레사 수녀는 문자 그대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테레사 수녀의 사랑과 세계 자선가들의 사랑에서 질적 차이를 봅니다. 사랑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자선이나 시혜가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가르침이었고 그 자신이 실천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묶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둘은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아들과 딸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이었으며, 이를 통해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요, 그 존재 근거요 존재 이유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도 넘치는 사랑 때문이며,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도 그의 사랑의 힘이며, 선지자들을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것도 사랑의 힘이며 인생의 완성도 사랑입니다. 삶의 보람과 가치, 의미와 목적, 기쁨과 희망, 모든 것이 사랑 하나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우주적 실재라는 말, 온 우주와 인생이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까, 어떻게 그 분의 실재를 확실하게 느끼고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정말로 가까이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최고 관심사이며 모든 종교인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입니다. 대답은 분명합니다. 성경공부, 교리 공부, 명상, 금식과 금욕적 생활, 기도나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열린 존재로 만듦으로써 우리 안에 나 아닌 타자가 자리잡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실재가 막연하고 맨송맨송하게 느껴집니까? 열심히 몸을 던져 사랑을 해봅시다. 우리가 모두 테레사 수녀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한 번은 그가 꿈에 하늘나라에서 베드로를 만났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지상으로 가시오, 여기는 빈민굴이 없습니다"고 했답니다. 테레사 수녀가 사랑을 실천한 장은 빈민가, 그러나 우리 모두가 빈민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각자가 처한 곳에서 조금이나마 자기를 희생하면서 자기보다 못한 자, 자기보다 약한 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베푸는 일이 우리들의 빈민가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봉사부는 여러 부서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봉사는 교회의 여러 사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요 목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뒤집어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라고까지 말해도 좋을지, 이것을 우리 모두의 화두로 던지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의 오늘의 말씀이 또 하나의 그 흔한 값싼 사랑 타령이 아니었기를 기원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