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일3:9 |
|---|---|
| 설교자 : | 김경재 목사 |
| 참고 : | 삭개오작은교회,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새길교회 2007.10.21주일설교 |
제목: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본문: 요한1서 3:9
설교: 김경재목사 (삭개오작은교회,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새길교회 2007.10.21주일설교)
I. 감 씨와 ‘하나님의 씨’사이의 은유를 생각하며
제가 자랄 때, 집안 뒤뜰 담장가에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단감나무였습니다. 늦봄 오월 무렵엔 미색의 감꽃들이 지천으로 마당에 떨어지면, 주어다가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습니다. 추석 후 가을에 감이 노랗게 익어 가면, 감 껍질을 벗겨 먹다가, 감 씨를 깨물어, 그 가운데 숟가락 모양의 새하얀 배아(胚芽)를 꺼내 입술 위에 올려놓곤 했습니다. 맛이 있어서도 아니고, 씹는 재미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그 ‘작은 배아’가 나중에 흙덩이를 뚫고 나와 큰 감나무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신비해서 그리했던 것 같습니다.
성장한 후에, 성경을 읽다가 요한서신 가운데 ‘하나님의 씨’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심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1서, 3:9) 장차 감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새하얀 ‘배아’가 단단한 감 씨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내 속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는 성경말씀이 내게 공명의 맑은 종소리처럼 들려오게 됩니다.
철학사와 종교사를 보면, 이 ‘하나님의 씨’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고, 또 조금씩은 그 뉘앙스도 달라서 그 맛도 다양합니다. 여하튼 우리 속에 무언가가 가능성으로 잠재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불성(佛性), 로고스의 씨, 신적 불꽃, 명덕(明德) 등등 이름도 다양함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은 ‘씨 속의 배아(胚芽)’이지 나무는 아직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다 하나님의 떳떳한 자녀로서 영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해서, 다 깨달음에 이르러 해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II. 정신은 물질의 부수현상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거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주의적 환원주의자들이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든 정신적 활동, 예술적 창작 활동, 도덕적 결단이나 종교적 거룩 체험도 결국 뇌세포와 뇌기관의 물리생화학적 변화 결과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팽배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물질이 정신의 냉각된 결과물이 아니듯, 정신도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신활동과 그 기능은 뇌세포나 인간의 육체 신경조직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 속에서 알고 있습니다. 뇌의 부분이 마비되면 의식활동이 정지되고, 어제까지도 총명하던 천재적 재사가 어느 날 갑자기 치매환자가 되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 체험에서, 인간은 덧없는 풀이요, 하나의 연약한 생물임을 절감함니다.
사람의 정신-심리적 의식활동이 뇌신경계의 메커니즘과 긴밀한 관련 속에 있다는 것은 의학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로부터 비약해서, 모든 정신은 물질의 부수적 산물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철학적 신념 문제요, 실재관의 문제요, 형이상학적 문제가 됩니다. 많은 과학자들 중에는 우리가 ‘정신현상’을 경험하지만, 정작 ‘정신실재 그 자체’에 대하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말합니다.
오늘 설교강단에서 무슨 철학적 형이상학 이론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현상’이나 ‘정신현상’이 단순한 기계적 산물일 뿐이라는 단순 결론은 너무 경박하고 일차원적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시공간적으로 무한시공 속에서 인간은 과연 여름밤 반딧불의 작은 빛처럼 찰나같고 연약한 빛을 발하고 살아지는 갈대요 먼지입니다. 그 사실을 정직하게 명료하게 자각하면 할수록 ‘정신-영혼’의 현상은 신비롭습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거나 지진 해일이 일어나면, 아무리 훌륭한 인물도 감나무 잎에 붙어살던 벌레처럼 흙탕물 홍수 속에 휩쓸려가지만, 우리는 영원을 질문하고, 하나님에게 항변합니다. 그리고 영원자를 부릅니다. 가톨릭 시인 구상 선생의 표현대로 우리는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느낌을 지니기 때문이지요. 금화 몇 잎에 스승을 팔수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문이 멸족지문 당한다 해도, 불의 앞에 지조를 버릴 수 없다고 의연하게 죽음을 택하는 생명체도 사람뿐입니다.
III. 시편 139편의 종교시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경건한 이스라엘 종교시인은 오늘 139편의 노래를 통해서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훤히 아시는 분이시니, 어리석게 그분 앞에서 숨으려고 하거나 숨기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아시며, 우리의 행위를 익히 아시며, 내가 말하려는 바 곧 나의 심중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가, 설혹 절대자일지라도 나를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얼른 생각하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축복도 아닙니다. 몹시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맘은 나의 주체자로서 프라이버시요, 나의 존재주장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어보려 하고, 숨기려고 함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바다 깊은 곳에 숨어도 요나를 고래 배 속에서 찾아내신 분은 나를 금방 아십니다. 어른이 다 된 현대인은 그런 하나님을 살해하려고 함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나뭇잎으로 앞을 가리우고, 나무 둥지 뒤에 숨으려한 아담 이브처럼, 사람은 평생 그 무엇을 기어이 숨기고 숨으려고 발버둥칩니다.
둘째, 놀랍게도 경건한 시인은 한 단계 더 깊은 일을 말합니다. 나의 오장육부의 기본 형체가 나의 어머니 모태 속에서 아직 다 조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체성 운운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인지 모릅니다. 시골 농사짓는 부모가 낳고 기르고 대학까지 가르쳐주니까, 대학 졸업식에 찾아온 부모에게, 언제 내가 가난한 농사꾼 집에서 낳아달라고 했느냐고 부모에게 투정대는 대학생이 언젠가 있었습니다. 나의 존재를 터놓으신 분, 나에게 생명과 그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창조주 주인에게 우리는 ‘종교적 거래’를 하려는 무의식적 의도를 가집니다.
옛날 야곱이 청년 시절 브엘세바 광야에서 말하듯 “주께서 나를 지키시고 축복하시면, 내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에 돌아오게 해주면, 야훼께서 내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하나님의 집 제단을 쌓을 것이고, 십일조를 드리겠소.”(창 28:20-22) 아무리 고대사회 이스라엘의 초기 신앙이라 해도, 이런 태도는 ‘하나님과 조건부 거래’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과연 신앙일까요? 나의 형질을 지으신 분에게 ‘종교거래’를 하자는 심보가 정결한 신앙일 수 있을까요? 장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하는 것이지, 창조주 하나님과 하는 것은 아닙니다.
IV.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오늘의 한국 교회 반성
시편 139편의 신앙은 히브리적 경건 신앙의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기 시대 이 신앙이 ‘인간종교 치장물’ 속에서 희미하게 되었을 때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을 통해서 다시 되살아난 것입니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꿰뚫어 다 아시는 분이니, 그분 앞에서는 위의 은밀한 죄를 가릴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것이고, 오직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손길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많이 쌓아서 ‘행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경건한 장사거래’라는 것입니다.
칼뱅 선생도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아시고, 부르시고, 보시고 계셨던 신비하고도 은혜로운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곧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롬 8:29-30)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정론은 운명론도 아니고, 하나님의 독단론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카를 바르트는 언젠가 말하기를 “예정론은 복음이라고 부르는 반지의 한복판에 박힌 다이아몬드이다.”라고 갈파한 적 있습니다. 바르게 깊은 믿음에서 이해하면, 예정론은 복음 중의 복음이지만, 잘못 이해하거나 남용하면 독약이 됩니다.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오장육부가 조성되기도 전에, 나의 형질이 아직 지어지기도 전에 나를 아시고 보고 계신 영원자 하나님을 경외롭고 신비하지만 은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용기’를 말합니다. 그 사람만이 우리가 언젠가는 모두 잊혀지는 존재가 된다는 ‘잊혀짐의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무력증과 거룩성의 상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교회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숨을 수 있고, 숨길 수 있다는 어리석은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여러 가지 종교적인 업적과 성취를 많이 달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동하게 해서 구원을 보장받고, 큰 상도 받겠다는 행동주의, 업적주의, 영적탐욕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동산에 초청받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향유하면서 살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해가 지도록 ‘보물찾기 놀음’에 정신이 팔린 아이는 어리석은 아이입니다. 베드로전서 편지에 쓰여진 대로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벧전 2:9)인 것입니다. 오직 감사와 찬양, 그리고 자유 안에서 봉사하는 사랑의 기쁨을 향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