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 복음............... 조회 수 3676 추천 수 0 2007.11.11 06:15:11
.........
성경본문 : 계21:4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처어칠의 '81세' 축하연 때 영국 국민들은 놀랄 만한 가치 있는 선물들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매우 슬퍼하며 사람들에게 그의 소감을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인생 최후의 노정에 진입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눈물을 머금고 말 없이 그의 부인이 있는 곳을 향해 갔습니다. 이 탁월한 정치가는 그의 생일 잔치에서, 이제까지 이룬 업적과 명예, 그리고 영국사람들에게서 받은 추종과 흠모로 인해 기뻐해야 했지만, 죽을 날이 가깝다는 것을 예감했으므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눈물은 고귀합니다. 눈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진합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은 신성합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심에 틀림없습니다. 가끔 애처롭게 비가 내릴 때면 '하나님도 외로워 우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값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건강한 영혼만이 눈물을 흘립니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희로애락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창세기42:24) 사도 바울도 눈물로 성도들을 섬겼습니다.(사도행전20:19)
눈물의 가치는 누구를 위해 울며, 무엇을 위해 울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영성 생활의 출발은 회개의 눈물과 함께 시작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한 사람의 영혼의 창은 새롭게 열립니다. 눈물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케 한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애통한 후에 열린 눈으로 그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른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눈물은 하늘의 다이아몬드입니다. 비누는 몸을 닦는데 필요하고 눈물은 마음을 닦는데 필요합니다.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정치도, 사회도, 교육도, 교회도 눈물 메마른 안질에 걸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너’를 보듬는 정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통곡하는 어린 삼 형제와 함께 아픔을 나누며 울어주는 정치와 교회가 필요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같으니이다."(시39:13)

정호승의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에 실린 시를 소개합니다.

눈물을 닦아주며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 또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사랑과 기쁨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픈 상처를 씻어주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영혼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눈물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의 배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눈물 속에는 말못할 사연, 아픔 그리고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때로는 감격적인 기쁨 속에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와 같은 상을 받는 사람의 눈물 속에는 지난날의 아픈 추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나는 어느새 이불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1981년 2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중인 김대중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옥중서신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24시간 내내 눈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안구가 건조해져서 상하게 됩니다. 눈물은 세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너무 슬프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 눈물을 흘리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 할 때 함께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아주면 위로를 받지요? 물론 악어가 흘리는 거짓 눈물도 있습니다. 탈무드에서 “비누는 몸을 닦는 데 사용하고 눈물은 마음을 닦는 데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눈물에는 사랑과 기쁨과 슬픔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한 부인이 과학자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목석같은 남편은 부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심각한 고민이 생겨 그만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이 우는 것을 본 남편이 당황하여 달려와서는 “어디 아프냐?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남편은 부인이 왜 우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실로 가서 깔대기를 가져 왔습니다. 부인의 눈물을 받아서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와서는 하는 말이 ‘당신의 눈물에는 조금의 소금과 포도당, 그리고 다량의 물이 들어 있더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물을 어찌 과학적인 분석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눈물은 사랑의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눈물 흘리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울면 “울면 안돼 우는 아이에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주신데”, 라고 하지요? 아이들이 우는 것은 자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어릴 적에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남자가 울면 ‘너희 부모님이 돌아 가셨냐?’ 그리고 사람들은 “남자들은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 “태어나면서 울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울고, 나라를 잃었을 때 운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남자들도 세상을 살면서 울 일이 참 많습니다. 감정의 표현을 잘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형편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건강합니다.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통곡하며 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중 다윗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는 어떨 때 눈물을 흘렸습니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편6:6)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다윗은 우리아를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는 범죄를 저지른 후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시편 6편에서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에 민감했던 것입니다.

또한 삼상30장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고 합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슬퍼하며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고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얼마나 민감했으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죄악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주야로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그 눈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눈물을 병에 담으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된 비결도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같으니이다."(시39:13)

예수님도 남자였는데 3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우셨습니다. 저는 요사이 눈물이 많아졌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보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절로 눈물이 나오지요? 성도님들은 어떤 일로 눈물을 흘립니까?

누가복음 7장11~17 절에 보면 예수님은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가까운 아름다운 나인성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며 결혼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결혼하여 처음에는 남편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산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부는 이제 아들을 낳고 재롱을 보며 행복에 빠질 나이가 되었는데 그만 남편이 죽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가장 큰 스트레스는 부부 중 한쪽이 먼저 죽게 되는 경우라고 합니다. 남편이 죽고 나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기쁘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독과 가난이 늘 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눈물로 보냈겠습니까? 이제 정신을 차리고 아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힘겹게 살았습니다. 이제 아이가 장성하여 군에 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고생을 한 고비 넘기고 한 숨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집안의 기둥 같던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겨우 눈물샘이 마를까 했는데,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여인은 울 기력도 없어 절망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와서 장례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시신을 관에 넣은 상여가 마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앞에는 어머니가 서고 그 뒤에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며 슬퍼했습니다. 해도 자취를 감춘 듯 절망의 긴 행렬이 마을을 빠져 나와 무덤으로 파둔 동굴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의 회한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일찍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효도하지 못한 자책의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부모의 깊은 속을 모르고 애 먹이는 자녀들 때문에 아파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시절에 할머니가 초상집에 갔다가 손자에게 주려고 떡을 가져왔습니다. 밥도 먹기 힘든 시절에 떡 하나 먹는 것은 꿀맛입니다. 할머니가 주신 떡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손자는 떡을 먹으면서 할머니에게 물어봅니다. “할머니, 할머니, 이 떡 어디서 났어! 응 그 떡 뒷집의 할머니가 죽어서 초상을 치르고 얻어 온 거야!” 철없는 손자는 “그래 우리 할머니도 빨리 죽으면 떡 많이 먹을 수 있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일행이 가버나움에서 나인성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앞장서고 제자들이 뒤따랐습니다. 생명의 주요, 슬픔과 죄로 슬퍼하는 이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주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예수님은 우울하고 불길한 행렬을 비켜갔을까요?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보고 감당하기 힘들어서 숨어 버렸을까요? 귀찮아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못 본척하면서 후닥닥 지나쳤을까요? 예수님은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사람은 잔칫집 보다 초상집을 찾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세상에 의지 할 데 없는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세상에 실패하여 눈물이 말라 버린 사람을 주목했다고 40번이나 말 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어김없이 인생의 무거운 짐 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아픔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다가가서 “여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그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까? 살아갈 앞날을 생각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절망하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위로할까?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지금 이 여인에게 내가 할일은 무엇인가?” 그 짧은 순간에 이 모든 생각을 깊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의 아픔을 다 아셨고 최선을 다해 고쳐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하는 마리아 자매의 말을 듣고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슬펐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사람들이 죽음의 심판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죽은지 사흘이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나사로야 나오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의 소굴로 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서 우셨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고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메시야를 핍박하고 죽이는 미련한 인생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에 짓눌려 아파하는 이들의 마음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십니다. 우리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넓은 가슴으로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고 조용히 다가와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당한 사람을 보면 다가가서 ‘울지 마세요?’라고 말하지요? 그 말밖에 더 할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그것밖에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손수건을 내밀며 “눈물을 닦고 뚝 그치세요? 그만한 일에 울기는 왜 웁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세요? 당신보다 더 힘들고 고통당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울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신에게 슬픔의 장막을 걷고 기쁨을 줄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 희망을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가 무궁무진하시니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의 세계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죽음의 권세가 물러가고 생명이 되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또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의 시신이 있는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상려를 매고 가던 상여꾼과 호곡꾼들이 멈춰 섰습니다. 율법에는 더러운 시신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이나 누구의 시선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금한 더러운 병자나 사람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불태우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시신에게 말을 겁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아니 죽은 시신이 다시 살아납니까? 죽으면 굳어지고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명령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은 자는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죽음도 잠시 이별에 불과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저편에 가 있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만날 수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두고 잔다고 하였습니다. 현대 의술이 발달하여 병을 고친다고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서야 어떻게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흐르는 눈물만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릴 근원을 없애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눈물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쁨과 슬픔이 있으면 절로 눈물이 나지요? 그러나 이 세상은 안그러는 척하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힘들어도 힘 안드는 척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무런 일 없는 척하지요? 체면과 위선의 문화가 팽배한 것입니다. 다들 말쑥하게 정장을 입고 계시니 모든 일이 형통한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눈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역사는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아래에서 나라 빼앗긴 설움으로 온 나라가 방성대곡하였습니다. 한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고 산천초목이 초토화 되어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 눈물 없이 볼 수 없습니다.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보릿고개를 지내며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풀뿌리 나무뿌리 캐먹으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우리 부모들은 밤만 되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때 우리의 부모님들은 새벽마다 교회에서라도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 들으면서 은혜 받아 운 것보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 괴로워 울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면서 인생이 서러워서 운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인들은 왜 맨 날 교회에서 우느냐?” 고 했지요?

시골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하여 은혜로운 설교를 하려고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기도하고 주석을 보고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였으나 번번이 교인들은 졸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설교를 하는데 은퇴하신 권사님이 눈물을 주루룩 흘리더란 것입니다. 목사님은 얼마나 반가웠는지 예배를 마치자마자 권사님에게 다가가 설교에 은혜 받았느냐고 직접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어 ‘권사님에게 무슨 일로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권사님이 “목사님, 오늘 우리 집에 송아지 태어났는데 낳자마자 죽어 버렸어요? 오늘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죽은 송아지가 생각나서,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지 뭐예요?”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로서 역할을 감당하느라고 지쳐 흘리는 눈물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바라며 흘리는 눈물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수고하며 흘리는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죄로 죽어가는 인생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신의 죄의 짐이 너무 무거워 괴로워서 회개하는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눈물로 키운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살아가는 성도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눈물이 많은 교회는 부흥합니다.

한 번은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대구 출신의 김한규 장로님이 나오셨습니다. 장로님은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은 중국과 민간외교에 앞장서시고 계십니다. 장로님은 어릴 적의 일을 한참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시골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중학교를 들어갈 때 부친이 돌아갔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홀어머니가 자녀들을 키운 것입니다. 장로님이 어릴 적에 새벽에 잠을 깨보니 어머니가 자녀들 머리맡에서 울면서 기도하시더란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가난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가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눈물로 기도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 우리가 사랑하는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과 땀 속에는 소금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과 땀은 함께 만납니다. 그리고 땀이 깊어지면 피가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흘리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습니다.(누가복음22:44) 결국 눈물과 땀과 피는 함께 만납니다. 아름다운 세 가지 액체를 흘리는 사람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행복합니다. 그는 멀지 않은 날 기쁨으로 열매를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126: 5, 6)
이제 더욱 아름다운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 함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립시다. 멀지 않은 날에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사38:5)

나라를 위한 눈물, 교회를 위한 눈물, 용서의 눈물, 중보의 눈물들이 모여 사랑의 샘을 이룹니다. 방황하는 자녀를 위해, 깊은 타락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땅의 청소년을 위해, 거짓과 불법으로 오염된 이 민족을 위해, 경제난으로 절망하는 백성들을 위해, 무력해진 한국교회를 위해, 그리고 고통의 언덕에서 눈물짓는 이웃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런 눈물이 이 땅을 살리는 생명의 강물인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저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주님의 보혈을 찬양드리오니, 날마다 거룩하신 보혈로 저의 영혼과 육체를 덮어주셔서 정결하게 하여주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소서. 슬퍼서 울게 마시고 회개와 반성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욕망의 눈물이 아닌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에 눈물 양식이 세정제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애통함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하심 같이 우리도 세상을 살리는 거룩한 울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 2부 : 분반(구역) 공부 자료

1. 말씀: 회개의 눈물

한 천사가 천국 문을 열기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피 한 방울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굳게 닫힌 천국 문은 꼼짝도 안 했습니다. 그는 급히 다시 세상으로 와서 슬픔 가운데 죽어간 한 여인의 한숨을 거두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흘린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자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눈물은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약한 소금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담긴 눈물은 굳게 닫힌 천국 문도, 돌같이 굳어진 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보다는 기쁨을, 울음보다는 웃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론 신앙생활 가운데 눈물을 흘려야 할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믿음 없는 자들의 몰지각한 비난과 비판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면서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울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손수건을 드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고 평강의 품에 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식의 눈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입니다.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0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눈물의 기도를 흘린 적이 있는가?
0 형제의 상처가 곧 나의 아픔이 되고 있는가?
0 나는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을 굳게 지키는가?
0 나는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는 자인가?
0 나는 형제의 아픔을 보고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가?
0 베드로의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최근 나를 회개케 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한경직 목사의 눈물 기도

인격 목회의 귀감이 됐던 한경직 목사님은 당회에서 전원일치가 안되면 결의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여운학 장로가 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가끔 교회에서 귀가하신 후 혼자서 우실 때가 있다고 하던데요?”
“예, 그럴 때가 있지요. 꼭 교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아직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한사코 반대하는 장로님이 가끔 계시거든요.”
“목사님께서 잘 설득하시면 되잖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목사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그야 그렇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나는 좋겠지만 그 분은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소? 그럴 때는 오직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할 뿐이지요.”

* 예화(2): 눈물의 주기도

전도사 시절, 임신 8개월 된 아내와 금식을 결정했다. 그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우리는 성미가 떨어져서 그날 저녁부터 금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곳은 깊은 시골 교회여서 주변에 쌀 가게도 없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굼식이었다. 그러나 뱃속의 아이와 아내를 굶주리게 하는 가장의 심정은 무척 쓰라렸다. 혹한의 밤 11시,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대문 앞에 쌀 한 말과 땔나무가 놓여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놓고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잔에 넘치옵니다.”
우리 부부는 밥상 앞에서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지금도 누가 쌀과 땔감을 놓고 갔는지 모른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깨달은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
“주의 종은 일용할 양식도 눈물로 받아야 하느니라.”
-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예화(3): 눈물 기도

예 권사는 부모 손잡고 북에서 피란와 모태신앙인인 김 장로와 결혼했다. 빈 손으로 시작한 신혼살림에 자녀 6남매를 합하니 식구는 8명이었다. 남편과 함께 닥치는 대로 일하여 아이들을 키웠다. 자녀들은 모두 건실한 사회인이요 교회의 기둥으로 자랐다. 막내 아들의 대학교육을 위해 예 권사는 시청 구내식당에서 일했다. 남편의 어린 자식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엄마 잃은 자식들을 내가 아니면 누가 키우겠는가.” 예 권사는 항상 밝은 표정이었다. 막내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첫 월급 받은 날 진해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무디고 거친 어머니 손에 봉투를 쥐어주며 “어머니 고마워요”하고 울었다. 예 권사도 울었다. 눈물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고훈 목사

* 예화(4): 과부의 흐느낌

스코틀랜드에 한 기독교인 과부가 살았다. 그 부인은 자녀들에게 줄 음식과 옷을 마련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을 믿었으며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사랑으로 가르쳤다. 그의 돈 주머니가 비고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는 날이 왔다. 단지 한 줌의 밀가루만 통에 남았다. 어머니는 배고픈 어린것들에게 빵을 만들어주려고 한 줌의 밀가루가 있는 통 밑바닥까지 긁어모았다. 밀가루통 속으로 허리를 구부렸을 때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리곤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작은 아들 로비가 엄마의 우는 소리를 듣고 그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그는 머리를 들어 의심에 찬 자기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우세요?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통 밑바닥을 긁어모으는 소리를 못 들으실까봐서요?” 이 순간 부인의 흐려져가는 믿음이 되살아났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다.

* 예화(5): 눈물의 세례식

어제 드디어 기다리던 세례를 받았다. 한마디로 완전히 망가진 세례식이었다. 세례식 때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고 홍 집사님이 말했을 때, 나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한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세례를 받는 그 좋은 날, 왜 우냐고…. 그런데 내가 그렇게 심하게 망가질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원래 마이크 체질로 통했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장에 모인 학우들이 내 한마디에 웃고, 내 한마디에 감동받곤 했다. 세례받기 전날 밤, 나는 5분에 맞춘 간증을 서너 번 읽고 연습했고, 한국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아내는 너무 감동적이라고, 나는 정말 남편 잘 만난 것 같다고 그랬다. 목사님이 무릎 꿇고 앉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셨다. ‘이제 시작이다’ 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데 물이 내 머리를 타고 흐르자 감정이 복받치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물로 죄를 씻는 형식을 취한다고 했는데, 그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왜 그렇게 힘들었고 또 오래 걸렸을까?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버텼을까? 사람들을 펑펑 울리겠다고 자신하던 나는 없었고 죄를 용서받고 눈물 흘리는 초라한 나만 있었다. 내가 흘린 눈물에는 과거에 대한 서러움도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죄를 용서받고 든든한 하나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격한 행복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은 멋지게 간증하겠
다는 나의 교만함도 여지없이 무너뜨리셨다. 하나님은 잔머리 굴리는 교만한 나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나의 그 진심을 하나님이 들으셨으니 만족하고 행복했다.
- 「아름다운 시작」/ 주선태

4. 찬송: (343장) 울어도 못하네

1.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2.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3.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4.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후렴]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7747 이사야 완악한 백성 사6:6-10  이경숙 교수  2007-12-20 2577
17746 창세기 공(公)에 대한 경외 창2:7-18  최만자 자매  2007-12-20 1796
17745 사무엘하 다윗의 지도력을 다시 생각하며 삼하23:3-4  한완상 형제  2007-12-20 2350
17744 요한계시 중,근동 여행길의 하나님 계3:16-17  김병종 교수  2007-12-20 2161
17743 시편 12월의 기도 시102장  길희성 교수  2007-12-22 2217
17742 사사기 회상의 힘 [1] 삿11:34-40  최만자 자매  2007-12-22 2487
17741 누가복음 빛으로 오신 임마누엘, 그리스도 눅2:11-14  김성수 목사  2007-12-22 2469
17740 레위기 희년을 보내는 마음 레25:8-13  서광선 목사  2007-12-22 2149
17739 마태복음 예언 성취자로 오신 그 그리스도 마2:1-12  소재열 목사  2007-12-22 2028
17738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선포와 권위 마5:1-11  소재열 목사  2007-12-22 1906
17737 마태복음 백부장을 구원하신 예수님 마8:5-13  소재열 목사  2007-12-22 2239
17736 마태복음 예수님의 하신 일 마9:35  소재열 목사  2007-12-22 2175
17735 마태복음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 마14:22-33  소재열 목사  2007-12-22 998
17734 마태복음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예수님 마18:15-20  소재열 목사  2007-12-22 2139
17733 마태복음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한 천국 복음 마20:1-16  소재열 목사  2007-12-22 3771
17732 마태복음 인자, 그 영광의 재림과 심판 마25:31-46  소재열 목사  2007-12-22 2196
17731 마태복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5-49  소재열 목사  2007-12-22 2137
17730 누가복음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2:10-14  강종수 목사  2007-12-23 2344
17729 창세기 명절의 만남 중요한 것은... 창45:4-10  김필곤 목사  2007-12-25 2260
17728 사사기 135,000대 300의 싸움 삿7:2-14  김필곤 목사  2007-12-25 3178
17727 마가복음 큰 믿음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담 막7:24-30  김필곤 목사  2007-12-25 2836
17726 역대하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대하33:10-19  김필곤 목사  2007-12-25 2292
17725 디모데후 큰그릇 딤후2:20-21  한태완 목사  2007-12-27 3031
17724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막1:1  소재열 목사  2007-12-27 2361
17723 마가복음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 막1:1-8  소재열 목사  2007-12-27 2551
17722 마가복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막1:29-39  소재열 목사  2007-12-27 2659
17721 마가복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막8:27-34  소재열 목사  2007-12-27 2324
17720 누가복음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눅2:15-20  소재열 목사  2007-12-27 2297
17719 누가복음 죄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눅7:36-50  소재열 목사  2007-12-27 2035
17718 누가복음 회개의 기회를 말씀하신 예수님 눅13:6-9  소재열 목사  2007-12-27 2311
17717 누가복음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한 천국 복음 눅16:19-31  소재열 목사  2007-12-27 3680
17716 누가복음 새 언약의 피 눅22:14-23  소재열 목사  2007-12-27 1975
17715 요한복음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요1:19-34  소재열 목사  2007-12-27 2203
17714 요한복음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요4:7-14  소재열 목사  2007-12-27 5088
17713 요한복음 내가 그 메시아다 요4:23-26  소재열 목사  2007-12-27 182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