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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 유상현 목사............... 조회 수 1730 추천 수 0 2008.02.26 23: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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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계3:14-19 
설교자 : 유상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우리의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라는 곳은 터키의 내륙지방에 위치한 고대도시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B.C. 250년에 Antiochus 2세가 건립하였으며, 자기 부인 Laodice라는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는, 에베소라는 에게해 연안의 고대도시에서 메안더라는 강을 따라 150Km정도 정 동쪽으로 들어간 곳, Lycus라는 계곡 분지에 자리잡은, 고대 로마시대에 번성했던 곳입니다. 이 도시는 로마시대에 이태리에서 희랍을 지나 바다를 건너 터키의 에베소에서 다시 출발하여 동부의 제국 접경지역인 시리아까지 잇는 로마의 중요 교통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통해 농업이, 그리고 발달된 초지로 인해 목축이 융성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많은 면양 사육을 했으므로 모직을 통한 피복과 양탄자 제조 등의 제조산업을 불러 일으켰고, 기타 각종 공업, 수공업이 번성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제조 산업의 융성은 지역 화폐 제조, 은행업 등의 금융산업을 일으켰고, 이러한 경제적 부요가 고대 여러 유명한 정치가를 배출시키도록 해서 풍요로웠던 이 도시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근방의 경제·사법 중심지였던 라오디게아는 로마시대의 번성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피해로 오늘날엔 당시의 유적만이 남아 있는 폐허지대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로마시대의 경기장, 공중 목욕시설, 투기장, 극장 등의 유적들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데, 그것들과 함께, 오늘 우리의 본문과 직접 관련이 있는 석조 관개시설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관개시설이 우리의 본문과 관련이 있다고 한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즉, 라오디게아 남쪽에 오늘날 'Demizli'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서 나오는 물은 따뜻한 온천물이라고 합니다. 그 따뜻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오는 동안 식어져서 미지근하게 되는데, 오늘 나오는 본문의 '미지근하다'는 말의 배경은 거기에 있다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곳 이외에도 가까운 지역에 온천지가 있어서 '뜨뜻하고 미지근하다'는 이미지는 지역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양모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니만큼 '흰 옷'이라는 본문의 용어도 지역과 관계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우리의 관심과 연결된 '안약'이라는 용어가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이 도시 근방에 유명한 의사학교가 있어서 요즘 말로 하면 유능한 안과 전문의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사가들이 쓴 글에는 이 도시에서 만든 「프리지아 가루」라는 광석 가루로 만든 안약이 제국 각지에 수출되는 등 특산물로서 성가를 올렸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도 이 안약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하니까 명성을 날렸던 이 의료생산품과 관련된 본문 말씀은 한층 실감을 준다 할 것입니다.
본문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부유한 산업의 혜택을 받아서 스스로 느긋한 자족을 누리며, 흔한 말로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상황을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어느 정도의 산업화 과정을 겪고 나서 약간의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우리 나라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이의 없이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나는 부자다, 풍요하게 되어서 부족한 것, 아쉬운 것 하나도 없다'는 스스로의 자기 인식을 그리스도께서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면박합니다. 부자라고 스스로 만족해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것,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우리의 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가 '참 우리 모습'이라는 것,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라보는 것, 곧 하나님의 시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시선 앞에 벌거벗겨진 가련한 몰골을 향하여 우리 본문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권고합니다. 즉, 참으로 하나님의 눈에 입각한 부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금, 곧 하나님의 말씀의 메타포로서 유대사회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는 '금'을 사고, 윤리적 순결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윤리적 추악상을 가리고, 그리고 자신의 참 모습과 세상을, 자기의 눈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척도 할 수 있도록 은혜의 '안약'을 사서 바르므로, 믿음의 눈을 밝히 떠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산다, 구매'한다는 것은 이사야 55장 1절의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사는 것, 거저 받는 것이지만,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구입'하는 것인데, 돈을 줄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값없이 산다'는, 우리말 어법과 경제상식의 범주를 훨씬 뛰어 넘는 신앙세계의 은혜의 개념을 내포한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권고 중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신의 참모습과 세상의 진상을 하나님의 눈에 입각하여 밝히 볼 수 있도록, 고대 라오디게아인이 가루 안약을 사서 발랐듯이 은혜의 안약을 사서 우리 눈에 발라야 된다는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이 전제하는 바 대로 우리가 우리의 벗은 몸과 궁핍하여 시든 참 모습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어느 차원에서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이런 장애인의 처지에 닮아 있다는 지적은 우리를 심각하고도 맹렬한 반성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 세계의 운행과 그 질서가, 우리가 보는대로, 우리가 판단하는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는 생각은, 깜깜한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의 줄기처럼 우리 스스로도 언뜻언뜻 되새겨지는 바입니다. 어느 한쪽에선 풍요에 질려서 개, 고양이마저도 식사 투정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의 어느 한 구석에선 미이라처럼 피골이 상접한 검은 피부의 어머니와 아들이 파리 떼의 시달림을 쫓을 기력도 없이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TV로 안경을 쓸어 올려가면서 영화 구경하듯 퍼지르고 앉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와 인간들의 웅성거림은 우리가 보는 그 모습 그대로일 리가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계 어느 구석에선 전쟁이 일어나 쓸데없이 사람 죽이기를 식은 죽 퍼먹듯 하고, 어느 사회나 집단에 고루고루 스며 있는 각종의 비리와 부도덕, 또 요즘 서방 유럽 잘사는 나라에서 동남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등)의 젊은 여자들을 국제 결혼이라는 미명으로 유럽으로 데려와 결국은 유럽의 각종 유곽으로 떠넘긴다는 만연된 현대판 노예사냥, 브라질 등 남미에서는 너무도 못사는 어린이, 청소년들, 아무 교육도 못 받고 취업 기회도 없는 젊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마약에 탐닉한다는 기막힌 이야기들, 그보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이야기는 이런 팽개쳐진 어린이, 청소년들이 장성해 봐야 결국은 사회의 독소가 될 뿐이니까 아예 어렸을 때 죽여 없애버려야 된다는 히틀러보다 더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실상 경찰이나 극우 테러단체들이 이런 어린이 살해를 거침없이 해치운다는 암담한 이야기들, 이런 종류의 절망적인 이야기들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우리는 그런 사실들을 접할 때마다 남에게 뒤질세라 핏대를 올려 분개하고, 탄식하고 행악자를 비난하며 피해자에게 가득한 동정을 표합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흥분하는 것은 한 때일 뿐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어제와 똑 같은 오늘을 아무 동요와 변화 없이 계속 살아갑니다.
결국 어떻게 보면 한 때의 분노와 탄식은 스스로의 도덕심을 챙겨주는 심리적 도피거나 자기위로의 방편이 아닌가 자문될 정도로 우리 시대의 죄악이 추상화되고, 자신은 동시대의 공범 행위로부터 은연중 비켜나 앉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별종의 인간, 전혀 이질적인 악한 인종이 저지르는 범죄라고 치부해 버리고, 우리는 침 한번 탁 뱉고 손을 털고 돌아서서 세상은 여전히 살아볼만하고, 노력하면 행복해지고,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한다는 느긋한 세계인식, 달콤한 자기 이해, 한마디로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암묵적인 확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형용처럼 뜨뜻미지근하고 게슴츠레한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들도 때때로 금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는 가운데, 마치 악착같은 핍박자 사울이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난 후 세계와 자신의 진상을 밝히 바라볼 수 있었듯이, 우리 눈에서도 비늘이 떨어져서 우리의 벗은 몸과 곤궁한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꺼풀 벗겨진 세계의 참모습, 우리의 방조와 침묵 때문에 갖가지의 참담한 형체를 띠게 된, 눈에 '안 보이는'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부끄러움 모습을 번쩍 치켜 뜬눈으로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인식, 자기와 세계의 발견이 머릿속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편안한 자세의 몽상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락없는 윤리적 자기만족, 예수 그리스도의 표현대로 '위선'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회개'를 이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서 촉구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는 표현은 머리와 입술 끝의 자아비판과 자학에 가까운 자기 책망과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기도원 산기슭 위에서 소나무 뿌리를 뽑아내며 통렬히 회개하는 장쾌한 모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란 인식과 행위의 180도 회전이며 그 구체적 실천입니다. 그 과정이 부흥회적인 열풍을 동반한 드라마틱한 반전이 되었건, 침잠된 내성을 통한 침묵의 회전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말의 강도와 횟수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회개에의 인식과 다짐의 실천, 바로 그 실천입니다. 그 실천이 기도와 성서 말씀을 읽는 영성훈련의 형태로서, 깊이 명상하고, 깊이 기도하는 형태로도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서 기록에 있는 대로 예수께서 몇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오르셔서 하늘 나라의 신비한 모습과 감미로움을 겪고 나서, 베드로가 제시했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산장을 짓고 무릉도원의 열락을 즐기십시다'라는 제의를 할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시고 산 아래의 냄새나고, 추악하고, 배반하고, 거역하는 인간 현실로 내려 오셨듯이, 우리들도 스스로만의 은밀한 경건의 공간을 움켜쥐고 홀로 즐거워할 때도, 산 아래의 거친 세상에서 우리가 치러야 될 경건의 그 고단하고 외로운 실천을 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신앙 인격의 완성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영성의 훈련을 쌓아야 되고, 실천으로서의 회개를 이룩해 나가기 위해 적은 일로부터의 양보와 희생을 훈련해 나가도록 서로를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인식과 발견, 깨달음의 차원에서 머무는, '정보확인'의 절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금씩 스스로를 희생하고, 조금씩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는 사소한 일상사로부터 시작해야 될 지루하고 고달픈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작은 경건과 희생, 지극히 작은 포기와 내어놓음의 실천으로 훈련된 우리의 내면화된 신앙세계는 급기야 사회의 변혁과 세계의 개조를 촉구하는 예언의 함성이 될 수 있고, 이미 그 변혁의 가능성을 우리들 각자가 속한 이 작은 공동체 속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희망'을 우리는 깊이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같은 이런 예배를 통해 그 희망을 함께 나누고 격려하며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우리는 먼저 '보아야' 합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9-34절의 눈 먼 사람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눈 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측은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져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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