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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씨름을 하고 나서

창세기 최만자 자매............... 조회 수 3323 추천 수 0 2003.09.07 23: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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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2:22-32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요즈음 저는 세상사를 대하기가 싫어지면서 약간의 무력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공직을 갖고 있지 않고 한 평범한 주부의 역할에 주력하고 있기에 그 무력증이 더 쉽게 찾아 온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매일의 신문지면이나 TV 보도들을 보고 들으면서 온통 속임과 술수, 계략, 부도덕한 사건들로 가득 찬 세상을 보는 것이 지겨워 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터지는 사건 하나하나를 신경 쓰기보다는 보다 더 근원적인 요인들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근원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곰곰 생각도 해 봅니다. 만사가 한 가지 원인에 기인되고 있을 리 없고 그럴 수도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세상을 이렇게 혼돈스럽게 만든 것은 아무래도 인간의 탐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래 전 김창락 교수께서 오셔서 환경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의식에 대해 말씀증거 하시면서 지금 우리에게 제11계명이 필요한데 바로 녹색계명으로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게 사는 것이라 하고 지금 생태계를 파괴하는 근본 요인도 바로 인간의 탐욕이라고 지적한 것을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

   인간의 탐욕의 역사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인간의 교만 때문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 대항이 바로 죄악이라고 해석합니다만 유물론적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은 선악과는 우리 삶의 공공(公共)의 영역이며 그 공공의 영역을 사유화하는 탐욕이 바로 죄악이 된다고 합니다. 탐욕은 함께 하여 공평하게 나누어야 할 것을 개인의 것으로 욕심을 내어 사유화하는 행위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금지하는 법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탐욕은 개인의 삶도 공동체의 삶도 파괴하고 맙니다.  

   저는 오늘 이 탐욕의 문제를 중심주제로 생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탐욕을 성취시키려고 인간들이 앞 뒤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거짓과 술수, 계략 등이 난무하는 삶의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현실을 넘어 설 수 있을 까 생각하려는 것입니다. 거짓과 술수는 당장은 탐욕을 만족시키지만 결국은 한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의 생명을 파멸로 이끌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엊그제 광복 58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정치엘리트들과 기득권층의 자기 세력유지를 위한 탐욕의 운영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이 피를 흘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물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덧나서 민족 역사의 긍정적 진행을 막는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뒤죽박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력유지를 위한 탐욕이 만들어낸 온갖 거짓과 술수들이 난무해 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사이거나 민족사이거나 그 현실관계에 탐욕을 이루기 위한 거짓과 술수의 세력이 들어오게 되면 곧 불행한 인생사와 민족사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보다 근원적 요인들을 먼저 찾아내 보고 어떻게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를 지혜롭게 생각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의 한 인물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성서 인물 가운데 속임수와 계략을 잘 쓰는 야곱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서는 야곱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모두 거짓말을 잘한 사람들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부인을 누이로 속여 생명의 안전을 구하고 부를 얻는 인물들로 창세기 12장과 26장에서 각각 폭로하고 있습니다. 성서편집기자가 이를 딱하게 여겨 아브라함은 그랬지만 하나님이 사라를 그리고 리브가를 돌아보아 구원하셨고 아브라함도 이삭도 안전하게 하셨다고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내를 속이지 않아서 이런 비판에서 예외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야곱 역시 비판을 받습니다. 그는 에서와의 대면을 위한 그의 전략에서 아내들과 가족들을 자신에 앞서 에서에게로 보내고 있는데 이것이 곧 그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더구나 그는 에서가 혹 자기를 쳐들어오는 경우를 대비하여 가족들과 가축 떼를 둘로 나누어 한 떼를 이쪽으로 보내고 다른 떼는 저쪽으로 보내어 한 떼가 패망하더라도 한 떼는 남게 한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는 절반의 가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과 자신에게 종속된 재산과 가산을 남기겠다는 철저한 이기적이고 비열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좋은 가부장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선두에 서지 않고 뒤에 섬으로써 가부장의 지위를 스스로 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가부장적 질서는 야곱에게서 이미 무너졌고 더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까지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오늘 제가 야곱을 조명하는 것은 이 같은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철저히 고민하고 자기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고통하고 몸부림치는 한 남성을 높이 평가하고자 함입니다. 저는 모든 남성들이 야곱처럼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말 긴 씨름을 하나님과 하기를 바랍니다. 남자들은 속임수를 쓸 일이 여성들 보다 훨씬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아무튼 성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조상들의 수치스러운 면모들을 숨김없이 까발려 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인들은 ‘속임’을 가장 굴절된 인간 속성이며 또한 가장 일반적인 인간적 면모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조상들을 하나같이 속임꾼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중심인물인 야곱의 이야기로 초점을 옮겨봅니다. 야곱의 인생은 파란만장합니다. 그가 130세에 애굽으로 이주하여 애굽왕 파라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나그네 길이 험악한 세월이었다고(창 47:9) 말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네 장소에서 보낸 네 시기의 인생 역정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출생에서 20세까지 브엘세바 부모님 슬하에서 보낸 유?소년기인데 이 시기는 장자권과 장자의 복을 획득하기 위하여 오직 경쟁의지로 살고 속임수까지 구사하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 20세에서 40세까지 청년기 동안 밧단 아람시절인데, 이 동안은 돌배개로 대표되는 도망자의 처량한 고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쉼 없는 도움을 경험하면서도 외삼촌을 속여 재산을 증식하는 사기꾼 삶을 지속합니다. 셋째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 애굽으로 이주하기까지 40-130세까지 벧엘-헤브론에서 보낸 시기로 이 동안 야곱은 옛 사람을 벗고 해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성화되어 간 시기로 봅니다. 그는  강철같이 경쟁의지로 달려온 인생의 허무한 붕괴를 맛봅니다. 환도뼈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부러지고 나머지 긴 생애를 다리를 절며 살아갑니다. 그의 이름이 바뀌고 그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형 에서와의 묵은 적대관계를 청산합니다. 120세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가 계신 헤브론에 가서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르며 자녀들로 인한 많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사랑하는 라헬의 죽음을 보는 등 상실, 죽음, 비통 등의 인생사를 경험합니다. 네 번째 시기는 130-147까지 애굽에서 보낸 시기입니다. 요셉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시기에 그의 험악한 나그네 세월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12지파 장래를 축복하고 예언자적 성자로 성숙해 갔습니다. 그의 백골이 가나안 땅 가족 선산 막벨라 동굴에 묻힘으로 파란만장한 생은 종료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의 세 번째 시기의 시작부분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속임과 계략 술책을 펼치면서 인생을 사는 인물인 야곱, 그가 가장 큰 속임수를 저지른 것은 형 에서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을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시력이 극약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 자기를 죽이려는 형의 노여움이 두려워 방랑의 길을 헤매다 어머니의 고향 밧단아람에서 머슴살이 20년을 보낸 것입니다. 그가 형을 얼마나 두려워하였으며 도망자의 고통을 경험하였는가하는 것은 그의 벧엘에서의 꿈(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꾼 꿈)과 하나님의 도움을 갈망하면서 단을 쌓은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가 다시 귀향길에 오르면서 그 형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를 무섭게 고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형과의 순조로운 대면을 위해 그는 그의 장기인 계략을 씁니다. 수많은 선물과 가족들을 두 떼로 나누고 줄줄이 늘어 세워 에서 앞으로 보내어 형의 환심을 사서 노를 누그러뜨리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만약 에서가 자기를 칠 경우를 생각하여 모든 것을 두 떼로 나누고 한 떼를 먼저 보내어 만약 침을 당하여도 절반은 남게 하려는 계략입니다. 그러고도 불안하여 가족과 재산을 먼저 도강하게하고 그는 홀로 남아 밤을 새우게 되는데 이때 한 낯선 이와의  정말 긴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낯선 이의 정체에 대하여는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하나님이 그와 씨름하였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고대근동의 강가의 초인자와의 씨름신화를 여기에 적용시킨 것으로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씨름에서 결국 하나님이 야곱에게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짓고 거기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얍복 강가의 씨름은 야곱에게 두 가지 결과를 남깁니다. 그 하나는 그의 환도뼈를 하나님이 쳐서 이후로 그는 다리를 절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에게 새 이름을 주어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에 의한 민족의 구체적 형성이 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강을 건너 가족과 함께 에서를 만나고 에서의 용서를 받고 깊은 형제애를 나누게 되고 세겜에 성소를 세우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얍복 강가의 긴 씨름의 경험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그 경험 이후 야곱의 생은 변화되고 그의 인격도 삶도 모두 변화되었음을 성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강가에서 야곱의 긴 씨름에 대하여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아마도 처음 시작은 야곱이 하나님에게 형 에서의 보복을 면할 길을 달라는 현실적이고 단순한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복적 태도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구만을 하면서 밤을 새우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낯선 이는 그런 요구만을 하는 야곱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낯선 이는 야곱이 진정으로 자지자신의 과거를 깨닫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기를 요구하기까지 기다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씨름은 아마 점차로 심화되어 갔을 것이고 야곱의 기원은 서서히 다른 내용으로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한참 요구하다가 문득 자기에게 내린 신탁과 자기 현실이 너무 다름을 깨달았을 듯합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출생 시의 신탁을 들었을 것입니다. 형보다 큰 자가 되고 강한 백성의 민족을 이끌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의 내용을 꿈꾸면서 그런 존재로서의 자신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오히려 초라한 모습의 자신만이 보였습니다. 형의 보복에 두려워 떨며 많은 재물이 있지만 속임과 술수로 이룬 부에 자부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은 정말 생래적으로 사기근성에 먹혀서 갱신의 여지가 없는 존재인지? 그래서 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어머니의 신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고 있음에 대한 한탄과 비애, 아 내가 왜 이런 정도의 인간이 되고 말았는가? 그래서 비통하게 자아의 본질에 대한 생사를 건 추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신탁을 받은 내가 겨우 이 모양 이 꼴일 뿐인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그 부모는 자녀에 대해  원대한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그 희망과 기대를 자신의 미래모습으로 그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현실적으로 커다란 괴리를 깨닫게 될 경우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씨름은 단순하게 문제해결을 위해 부르짖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얍복 강가의 씨름은 점차로 심화되고 승화되어 갔고 점차로 야곱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동시에 자신 속에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려는 의지와 소망으로 가득 차 게 되고  그는 이를 위해 정말 긴 씨름을 한 것입니다. 이 긴 씨름 끝에 얻어진 두 가지 결과는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그의 환도뼈가 부러진 것과 그의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환도뼈의 부서짐은 남자의 힘의 근원이 부서졌다는 것에서 야곱의 철저한 자기부정의 의미를 갖습니다. 과거의 야곱, 아버지와 형을 속인 그 교활한 간교성, 대 재벌이 된 그의 지략과 모략에 대한 교만, 이 모든 것이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철저한 자기붕괴를 통하여 그는 다시 자기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된 것이지요. 야곱의 이름이 ‘발꿈치, 하나님의 보호’ 라는 말의 어원학적 의미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라는 말의 어원학적 의미에 얽혀있는 어떤 뜻이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름의 바뀜으로 오는 생의 변화와 생의 갱신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 생의 변화와 갱신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철저한 폐기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야곱의 치욕적 과거는 전면적으로 희망의 새 세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그 지역을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지명을 줍니다. 이를 환도뼈로 인하여 다리를 절면서 걷는 길에 해가 돋았다고 상징적으로 성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 후 가나안으로 들어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는 축복을 합니다.

  이후 야곱의 모습은 인생의 성숙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가 형 에서를 만날 때 일곱 번이나 땅에 허리를 굽히고 형의 면전에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습니다.(창세기33:10)’라고 말합니다. 형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경건 가운데 최상의 경건이다’라고 김이곤 교수는 말합니다. 유한한 형님-당신을 통하여 영원자이신 하나님-당신을 볼수 있는 브니엘의 경험이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 두렵고 원망스럽고 싫었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인간에로의 변화, 이것은 마태 25장 33절에서 ‘너희가 목마른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 예수의 궁극적 요구에 상응한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술수와 계략과 거짓으로 인생을 풀어가던 야곱이 이 얍복강의 경험 이후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실 야곱의 그 이후 생은 어쩌면 이전보다 더 파란만장하고 고통이 심한 삶의 여정을 겪고 있습니다. 이 시기동안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과 죽음, 자녀들로 인한 비통한 환난들-디나의 성폭행 당함, 르우벤과 서모 빌하와의 간통, 레위와 시므온의 대학살 연루, 형제들의 시기에 의한 요셉을 잃음 등 비통한 환난들을 집중적으로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이전의 속임수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를 지금까지 살아오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신앙적 고백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야곱은 참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매우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참 인간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어쩌면 휴머니스틱한 인간상을 이 야곱에게 투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에게서는 교조주의적 경건한 종교적 차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고, 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친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도 참으로 인간적입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신성을 대면하는 모습은 그 사람이 죽거나 아니면 거룩한 신 현현의 현상을 동반하는 특별한 상황을 갖습니다(모세의 경우 비교). 그러나 야곱은 해괴하고 특이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씨름 상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교조주의적 경건이나 거룩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을 붙잡고 사생결단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삶의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깊은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의 차원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성, 율법주의적 규례들과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신 앞에 자신을 모두 있는 그대로 내어 놓고 깊고 길게 자기 성찰을 하면서 점차로 자신을 성화시켜 나가는 야곱의 모습은 참 감동적입니다. 자기 단련, 자기 수련을 극단을 통하여 하나님과 대면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경건성을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알아내기 위한 밤을 새우는 고뇌와 고통의 시간을 통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고 그 만남 이후 형의 모습이 하나님의 얼굴로 보이게 되는 브니엘의 경험이 삶의 현실에 그대로 경건이 녹아들어 살게 되는 모습, 정말 긴 씨름 후에 야곱이 획득하게 된 경건을 우리는 매우 소중하게 보게 됩니다. 교회 인터넷에서 예수 따르미와 믿음이에 대한 구별을 좀 야속하게 생각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저는 야곱의 이 경건성에서 믿음과 따름이 결코 이분화 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어진 지점을 보았습니다. 깊은 자기 성찰,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긴 시간 속에 진정한 자신을 찾고 성숙시켜 나가는 믿음의 깊이, 곧 하나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를 하나님의 얼굴로 보게 되는 따르미의 삶의 차원과 일치되는 곳일 것입니다.

  저는 야곱에게서 매력을 느낍니다. 비록 제가 야곱처럼 그렇게 속임 수단에 능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십보백보일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서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는 속임과 거짓의 속성을 가진 실존의 인간들입니다. 내 삶 속에서 야곱의 긴 씨름 같은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삶의 깊은 골에서 얼마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새로운 존재로-형제자매를 하나님의 얼굴로 대면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깊은 자기 성찰의 삶의 차원을 갖는 것에 모두 기초하고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생각을 광복 58년을 맞은 우리 민족의 모습에 조명해 봅니다. 마침 엠비시에서 ‘참된 보수를 찾아서’라는 특집을 방송하였는데 그것을 보면서 우리 역사가 기득권층의 자기세력 유지의 탐욕으로 얼마나 일그러졌고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도 그 상처는 더 덧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다시 언급해 본다면 해방 후 분단을 막기 위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결사반대하면서 남북을 오갔던 백범 김구 선생님을 남한은 공산주의자로 북한은 극우인사로 매도하여 배척하고 결국 남한의 기득권을 가진 정적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을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저해하는 가장 핵심적 문제는 무어니 해도 분단의 현실입니다. 백범 선생님은 분단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며 이 민족의 역사가 굴절되고 말 것을 너무나 자명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막으려는 일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좌와 우가 민족과 세계에 어떻게 이바지 하나를 고심했고 전쟁의 상처와 반목과 대립의 역사를 막으려 한 것입니다. 또 하나 극단적 예는 육이오 전쟁 발발시의 이승만 정부의 행태입니다. 북한이 서울 가까이 까지 왔는 상황인데도 서울 시민들에게 해주를 점령했다는 호외까지 뿌리고 동요하지 말라면서 대통령과 관료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 놓고 그때 1500명의 시민이 희생당했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민의 피난길은 끊어놓고, 그 후 서울 수복 후에는 그 시민들을 부역문제로 심판대에 올려놓고 생존을 위해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민들을 1950년에 800명을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순행의 모든 과정에 발목을 잡는 것이 안보논리였고 기득권을 철저히 유지해온 해방 이후의 역사는 박정희 정권 때 그 절정을 치달았던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결국 오늘의 이 시점에도 이 분단 논리로 인하여 국민간의 분열, 순탄한 정치의 진행을 이루지 못하는 심히 불행한 역사를 거듭하고 있고 그 순환 고리를 끊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효순, 미선이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 대한 주권외교를 부르짖는 촛불시위도 빨갱이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대규모 친미집회가 개최되고 그 시위를 미국국가를 웅대하게 불러 대미하는 극단의 행동들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소위 보수 세력의 대 결집은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연이은 집권으로 대동단결을 하면서 이 집권자들의 색깔론을 아직도 심각한 문제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현실을 이념문제로 이분화 시켜 혼란을 가중시키는데 가장 앞장선 이로는 두 원로가 꼽혔습니다. 조갑제씨, 김동길 씨입니다. 조갑제씨는 “아들이 촛불시위가면 용돈을 절대 주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뼈 빠지게 벌어 주는 용돈으로 이념서적 사보고, 시위에 참가하니 돈 주면 안 된다”는 것이고, 김동길 씨는 “부시를 깡패라 하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한다. 촛불시위 배후가 있는데 전교조 교사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짓으로 전교조가 지령 내려 그런 일이 생긴다. 지금 장관 들 중에 3명이 부친이 남로당 출신이다. 대한민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여기가 공산국가냐” 이런 식의 강연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복 58주년에 우리는 이 분단으로 인한 비극을 심각하게 참으로 긴 씨름을 하면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계략과 술수로 그리고 어느 쪽이든 간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탐욕에 희생될 수는 없는데 이 악순환의 고리를 누가 어떻게 끊을 것인가? 저는 이것은 깊은 자기성찰처럼 민족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는 그리스도인과 지성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처럼 깊은 자기성찰을 통하여 인생을 전환하듯 깊은 역사의 성찰을 통하여 민족전환의 기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씨름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평생 갖가지 문제들과 씨름을 벌이다가 마감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인생의 모습을 사람들이 경험하는 온 가지 ‘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 때, 죽을 때, 심을 때 그것을 뽑을 때, 죽일 때, 치료시킬 때, 웃을 때 슬퍼할 때 등등의 인생 희로애락이 담긴 무려 열일곱 가지의 때를 말하고 있어 인생사가 얼마나 다양한 삶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들과 인생이 얼마나 씨름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시적으로 표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수많은 때를 어떻게 대면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물론 야곱같이 속임수를 쓰면서 사는 사람은 아마 새길교회 교인 가운데는 없겠지만 그러나 때로는 적당히, 약간의 거짓으로 포장하면서 살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결정적 문제와 씨름하게 될 때 우리는 정말 나의 진정한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깊고 긴 씨름이 때때로 필요할 것입니다. 씨름을 해 가면서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절망하고 또 때로는 희망을 갖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전환시켜 희망과 새로움을 가지기 위하여서는 지극한 정말 긴 씨름을 하고나서 삶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밤을 새워 씨름한 후 과거의 수치스러운 면모들과 자신의 힘으로 내세웠던 모든 것들을 폐기시키고 새로운 희망의 존재로 살아가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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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3 출애굽기 오늘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출20:1-17  권진관 형제  2003-11-28 2995
18092 요한일서 있는 그대로 요일4:7-13  차옥숭 원장  2003-11-28 2838
18091 사도행전 힘있는 교회 행12:1-19  김삼환 목사  2003-12-23 3812
18090 마태복음 암탉 같은 하나님: 전폭적 포용과 忍苦의 神 마5:43-48  한완상 형제  2004-01-06 3520
18089 로마서 침묵의 방에서 롬11:1-5  이경숙 교수  2004-01-06 2450
18088 로마서 선물 롬12:4-8  이혜경 자매  2004-01-06 2751
18087 누가복음 평화 눅2:14  강기철 목사  2004-01-06 2885
18086 누가복음 떡떼기의 깨달음:역사적예수와 그리스도의... file 눅24:13-35  한완상 형제  2004-01-06 3024
18085 고린도전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고전4:6  강종수 목사  2004-01-21 2827
18084 하박국 희망-하나님의 인간사 개입의 가능성 합3:17-19  최만자 원장  2004-02-12 2959
18083 로마서 섬기는 한 해 롬12:9-12  길희성 형제  2004-02-12 2385
18082 누가복음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운다 눅16:9  민영진 목사  2004-03-11 2251
18081 사도행전 관용의 기억 file 행15:1-12  정경일 형제  2004-03-11 2357
18080 욥기 지혜의 새로운 차원 욥38:1-7  서창원 목사  2004-03-11 2416
18079 로마서 주를 위해 산다는 것 롬14:7-8  박충구 목사  2004-03-11 4943
18078 누가복음 자비로운 삶의 길 눅6:17-26  김장호 목사  2004-03-11 2393
18077 마가복음 동양적 지혜의 예수 막10:17-22  김명수 목사  2004-03-11 2362
18076 데살로전 모든 일에 감사: 하나의 해석 살전5:18  정대현 목사  2004-03-11 3383
18075 마태복음 예수 없는 기독교-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마6:25-32  한완상 형제  2004-03-11 2588
18074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 고전15:17-20  강종수 목사  2004-04-11 8783
18073 베드로후 몸을 긍정하는 신앙 벧후3:11-13  홍명관 형제  2004-05-05 2456
18072 마가복음 최고의 낭비 막14:3-9  권진관 형제  2004-05-05 2647
18071 누가복음 힘이 있는 예언자 눅24:13-35  길희성 형제  2004-05-05 1937
18070 누가복음 길 위의 신앙 눅24:13-35  차정식 목사  2004-05-05 2904
18069 사사기 세속 속의 크리스챤 삿16:15-19  왕대일 목사  2004-05-05 4024
18068 고린도전 신령한 일을 아는 자 file 고전2:14-16  강종수 목사  2004-06-13 2081
18067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6) 승리에 겸손하게하라 엡6:4  김동호 목사  2004-06-30 2067
18066 욥기 바람 숨 영 욥7:7  박경미 자매  2004-07-13 2590
18065 이사야 아픔을 기억하는 평화의 감수성 사11:6  최순님 자매  2004-07-13 2096
18064 이사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사11:6-8  조성심 자매  2004-07-13 2523
18063 에배소서 무엇보다 귀한 자녀(8) 믿음으로 강한 자녀 엡6:4  김동호 목사  2004-07-2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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