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길희성............... 조회 수 1170 추천 수 0 2007.11.22 00:47:45
.........
성경본문 : 창1:26-31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얼굴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부스스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며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아야하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세수를 하고 단장을 한 후 문을 나서면, 번듯한 신사 숙녀가 되어 큰소리 치면서 사회가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내가 옳다, 네가 옳다, 물고 뜯으면서 삽니다. 이렇게 한 주간을 살면서 몸과 마음이 고달파지고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주일 아침 교회를 찾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아침에 막 일어난 자신의 얼굴을 보듯,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거울을 대할 때 가끔 거기에 비친 존재가 누군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 하는 존재인가, 아니, 도대체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까지도 제기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문제를 스스로에 대하여 제기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개인적인 측면에서 볼 것 같으면, 이 자기 정체성의 부단한 추구, 끊임없는 자기확립, 자기확인의 과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비교적 일찍 이 문제의 해결을 보아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이 사오십이 되도록 만족스러운 자기정체성을 확보 못하고 방황하며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남을 괴롭히기도 하고 자신을 학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세상적 관점에서 추구되는 자기정체성이지, 신앙적 관점에서 본 참된 자기정체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확립, 자아 실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규칙과 게임 안에서 행해집니다. 사회적으로 좀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좀 안정되면,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처럼 간주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 정도 이것에 만족해하며 자신을 받아드리면서 삽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며, 때때로 인생에 대한 허무감이 엄습해오거나, 보다 깊은 차원에서 자기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모른 체 하고 덮어두고 삽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러한 은폐나 도피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확립된 자기정체성, 사회적 게임 안에서 얻은 자기정체성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공허한 것으로서,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별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눈,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눈에는 이러한 사회적, 세상적 자기정체성이란 끝내는 허무한 것이요, 허구요 자기기만일 따름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노름이요 장난일 뿐입니다.

물론, 신앙의 눈으로 보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사회적 위치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에 따라 각기 해야할 일과 역할이 다르며, 능력도 다르고 사명도 다릅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지체로서의 역할은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타당합니다. 몸의 지체는 각각 다른 것이며, 그 역할이나 중요성도 다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하기 쉬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각기 다른 지체가 한 몸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라는 사실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볼 때 서로 다른 것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세상적으로, 상식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라는 것은 하나라는 것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지체가 통일성이 없이 각기 따로 논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나 사회 생활에서나 우리는 이 차이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리고 이 차이에 근거한 자기정체성을 내세우기에 앞서, 우리 인간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입장에서 본 자기정체성의 접근 방법입니다. 사실, 신앙적으로 볼 때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또 하나의 죄의 표현이요 징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는 물음은 어느 정도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해결되고 대답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끼리의 주고받음, 치고 받기, 상호 관계 속에서 자기위치를 정하게 되고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니 철학적으로도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모른 다는 말이 있으며, 이 말은 진리입니다. 진정한 자기인식은 타자와의 관계­부모, 형제, 친구, 이웃, 동료­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과대망상증에 걸리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러한 자기인식에 근거하여 사회적 자기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건전한', '정상적'인 자기인식, 자기정체성이라 부릅니다. 이른바, 자기주제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타자는 과연 누구이며, 인간은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말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말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의 빛 아래서만 진정한 인간의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에 관하여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인간과 비슷해서 믿기 어렵다고 합니다: 진노, 뉘우침, 선택, 사랑, 질투, 벌, 말함, 꿈, 등 너무나도 인간의 모습을 닮아서, 결국 신은 인간이 자기 모습을 투영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회의를 품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만약 말이나 소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면, 필경 하나님을 말이나 소 모양으로 그릴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전적으로 거꾸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본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며,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하나님을 쏙 빼어 닮은 신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인간의 어디가 하나님을 그렇게 닮았다는 얘기입니까? 이에 관해서는 종래 여러 가지 학설과 이론이 있지만, 창세기 본문 자체에서 보면, 가장 분명한 것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타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힘을 지닌 존재,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력과 자유를 하나님과 더불어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성과 의식, 영혼을 지닌 자유롭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는 특권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타 피조물을 다스리고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임은 언급 안 하고, 단지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리만 강조하면서, 마치 창세기의 이러한 인간관이 오늘날의 환경위기에 직접적으로 크게 공헌했다는 식으로 비판합니다. 인간은 분명히 타 피조물과는 달리 지성과 영혼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서, 자유뿐만 아니라 이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할 책임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유를 지닌 존재인 만큼 하나님과 타 피조물들 앞에서 인간은 책임적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성서의 인간관에 이렇다 할 독특한 것이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을 보는 견해는 기독교만의 사상이 아니며,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사상에도 매우 일반화된, 상식적인 견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것이 서양에서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는 희랍적 사상과 결합하여 매우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인간관을 형성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이러한 특권과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을 닮은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은총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운명체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와 그 부모를 닮은 자식간의 관계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닮아 그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위대한 것이 사실이나, 이 위대성은 어디까지나 인간보다 더 높은 존재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인간의 초월성과 자유라는 것도 우리보다 더 높은 분 앞에서 책임 있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계약인 것입니다(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너는 나와 닮은 존재다, 너는 나와 함께 살 존재이다, 너는 너의 형상의 원형인 나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살도록 된 존재이다, 너는 나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자유와 인격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 자유 속에서 나의 뜻을 좇으며 나의 일을 하며 나의 창조적 활동에 동참하는 존재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이것이 인간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이며, 인간의 최대 비극은 바로 이와 같은 근본 사실을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인간다움의 근본이 바로 우리 형상의 원형인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고 남용하며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자유와 인격의 근본인 하나님을 모르고 부정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의 인격이고 자유고 할 것 없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종종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나지도 못한 금수만도 못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근본 사실을 누구보다 강하고 확실하게 의식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다 이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이렇게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 증언하시고 몸으로 보여주시고 실천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신앙 고백에 있는 대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해치는 모든 악의 세력과 싸우시다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가 외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계입니다. 복음화는 곧 인간화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인간 이상이 되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인간(흔히 비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다운 인간, 가장 정상적인 인간, 즉 하나님께서 지어준 대로 영광스러운 자녀로서의 인간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본래적 인간상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예수를 하나님을 꼭 닮은 그의 모상(골로새 1:15),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두 번째 아담(로마 5:12-14),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모르고 거부하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첫 번째 아담이 아니라, 인간본연의 모습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지니고 보여주신 새로운 인간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즉,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들로서는 더 이상 추상적으로, 사변적으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우리에게 온전하게 보여주신 그 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닮은 그의 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만 이기심과 탐욕, 오만과 죄악으로 일그러진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날마다 키워가고 살려가야 합니다. 겉 사람은 날로 늙고 부패해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울과 더불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라디아 2:20)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그리스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화는 인간이 무슨 인간 이상의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의 모습, 그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화는 인간의 인간화인 것입니다. 참 인간이신 예수는 완성된 인간이요, 우리는 불완전한 그리스도, 작은 그리스도, 혹은 되어 가는 그리스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하게끔 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의 참된 자기실현이란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17, 고후 6:16)이라고도 했습니다. 성전에는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 안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 치고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인간을 자기와 함께 살도록 우리 안에 자신의 형상을 도장 찍듯이 박아 놓은 것입니다. 이 도장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뭉그러지기도 하지만, 결코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끝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이 형상이 남아 있기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령 이 형상이 완전히 지워진 인간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도 역시 자신의 잃어버린 옛 모습을 찾아 헤매고 몸부림칩니다. 때로는 잘못된 방법으로, 때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게 잃어버린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형상의 원형인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찾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본향을 그리워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신의 원형을 찾는 마음,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곧 희미해진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 잃어버린 것 같은 내 안의 또 하나의 자아를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원형인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도 찾을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찾지 않고는 하나님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문자 그대로 불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발견과 자기실현은 곧 하나님의 발견이요,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자기실현입니다. 이 만남과 이 발견이 없이는 인간의 다른 모든 욕구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허사가 됩니다. 공허합니다. 계속해서 목이 마릅니다. 답답하고 허전한 마음을 다른 것들로 채우려 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과욕을 부리다가 엉뚱한 일을 저질러 패가망신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참다운 자기 자신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가 못하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제대로 깨닫고 사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여, 인간이 인간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느냐 못 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인식 못하고도 인간답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답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답게, 그리스도답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편협하게 독선적으로, 배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짓밟힌 인간성을 일으켜 세우려고, 왜곡된 인간성을 곧게 펴주려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사들이요 암담한 세계의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인권선교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교 치고 인권선교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선교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는 선교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선교가 전통적인 전도에 머무른다면, 과거에 예수의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죽어간 무수한 하나님의 형상들의 억울함과 한을 누가 풀어준단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허무하게 죽어 가는 뭇 생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고 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 인간의 그리스도화가 진행되는 곳은, 그 어디나 복음의 힘이 실현되는 곳이고,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실현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고 선교 현장에 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선교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선교를 도울 뿐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선교초기부터 뿌리깊은 신분사회에서 인권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지위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 보는 평등주의적 인간관을 가르쳐 왔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길을 불완전하게나마 제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조선조 말에, 백정 출신 황 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 늘 말하기를 자기에게는 두 개의 천당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신분 이상으로 자기를 대접해주는 믿음의 형제자매 공동체인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사후에 갈 천당이라고.

인간의 존귀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이 정말 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 자신, 나의 자식은 귀하겠지만, 전쟁으로 기아로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죽어버리는 무수한 인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인간은 귀한 존재라고 말할 용기가 납니까? 희망사항 뿐이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기 어려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 하나 귀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세 때부터 인간과 맺어준 이 놀라운 계약을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것을 모르고 무시하고 계약을 위반하여 스스로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지만, 인간은 그래도 귀한 존재입니다.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뿌리깊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형상으로 지은 우리를 찾고 계시며, 여전히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냐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 우리의 물음은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즉 인간은 누구냐 하는 문제로 바꾸어 물어져야 합니다. 나와 너의 차이를 앞세워서 세상적, 사회적 자기정체성을 찾으려 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모두, 인간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인간은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 형상을 실현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지 말고 삽시다. 그리하여 떳떳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고,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이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보다 선명하게 부각되도록 날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합시다. 지나친 죄의식은 그야말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자는 지나친 자기비하를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나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순간 순간 확인하면서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과의 화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동시에, 동료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그러나 보이지는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이웃과의 화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서든 이 하나님의 형상들이 위협받고 파괴되고 고통 당할 때, 그곳에 달려가서 그들을 구하고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휴가철을 맞아, 바다로 산으로 휴양지로 사람들이 몰리는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은 오히려 조용한 시간을 찾아 자신을 성찰하며 자기와의 깊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7888 누가복음 회개하고 돌아오라 눅15:4-12  한태완 목사  2007-11-13 2780
17887 고린도후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 고후1:1-11  전병욱 목사  2007-11-14 3887
17886 역대하 나이 들어서도 초라하지 않게 사는 방법 대하16:1-14  김필곤 목사  2007-11-14 3119
17885 마가복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막11:14  한태완 목사  2007-11-14 3896
17884 시편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시22:19  한태완 목사  2007-11-15 2369
17883 이사야 전쟁과 평화 사2:1-2  한태완 목사  2007-11-15 2124
17882 잠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잠16:3  한태완 목사  2007-11-15 3842
17881 골로새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골2:6-7  한태완 목사  2007-11-15 2881
17880 시편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라 시107:9  한태완 목사  2007-11-15 1149
17879 시편 의로우신 재판장 시7:11  한태완 목사  2007-11-15 2157
17878 시편 흉기보다 무서운 말 시52:2-3  한태완 목사  2007-11-15 2131
17877 누가복음 친절한 사람이 되자 눅6:31-33  한태완 목사  2007-11-15 2950
17876 마태복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라 마5:13-16  한태완 목사  2007-11-15 4587
17875 전도서 침묵할 때와 말할 때 전3:1-8  한태완 목사  2007-11-15 2630
17874 이사야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라 사58:13-14  한태완 목사  2007-11-17 2745
17873 마가복음 아름다운 희생 막8:35  한태완 목사  2007-11-17 2357
17872 로마서 승리의 비결 롬8:1-39  한태완 목사  2007-11-17 2573
17871 빌립보서 환경을 극복하는 신앙인 빌4:10-13  한태완 목사  2007-11-18 3355
17870 마태복음 생명의 소중함 마16:26  한태완 목사  2007-11-18 2348
17869 사무엘하 하나님의 보호 삼하22:3  한태완 목사  2007-11-18 3063
17868 창세기 신실하신 하나님 창7:6-24  한태완 목사  2007-11-18 3242
17867 데살로전 성도의 감사 살전5:18  강종수 목사  2007-11-18 2192
17866 시편 말씀을 사모하라 시19:7-11  한태완 목사  2007-11-19 2584
17865 사무엘상 다윗의 친구 요나단 삼상20:35-42  한태완 목사  2007-11-19 3772
17864 시편 지혜의 근본 시111:1-10  길희성 교수  2007-11-19 2071
17863 빌립보서 하나님은 우리의 보초-그 은혜를 헤아리자 빌4:4-7  한완상 형제  2007-11-19 2108
17862 사도행전 성전의 안과 밖 행3:1-10  한완상 형제  2007-11-20 2367
17861 마태복음 예수님의 개혁비전 마5:1-12  한완상 형제  2007-11-20 2090
17860 마가복음 보다 큰 가족 막3:31-35  길희성 형제  2007-11-20 1849
17859 마가복음 편견을 버려라 막6:1-6  한태완 목사  2007-11-20 2168
17858 시편 노력과 연습의 열매 시126:1-6  한태완 목사  2007-11-21 2484
17857 갈라디아 공짜는 없습니다 [1] 갈6:8-9  한태완 목사  2007-11-21 2955
17856 마태복음 우리 친구 예수님 마11:18-19  한완상 형제  2007-11-22 2137
»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1-22 1170
17854 마태복음 그녀(여인)을 기억하라 마14:3-9  최만자 자매  2007-11-22 195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