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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찬가

창세기 길희성............... 조회 수 2133 추천 수 0 2007.12.05 01: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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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6-31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이 세상과 인생이 좋은 것이고 살만한 것임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세상을 미워하고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양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과 신앙을 철저히 대립적인 것으로,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여 마치 인생을 괴롭게 생각하고 세상을 도피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진 병폐중의 하나이며 중세적인 현세 부정적 신앙의 잘못된 유산이기도 합니다. 성서적 신앙에 의하면,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피조 세계로서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과 인생을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이 흔들리 때가 많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온 세상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산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세상이 못마땅하고 산다는 것이 괴로움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장의 성경 말씀은 세계와 인생의 선함을 긍정하고 선포하는 장엄한 인생 찬가로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세계는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며 우리 인생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세계와 인생은 미움이나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의 대상이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가르는 빛을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푸른 창공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으로 하여금 온갖 씨와 열매 맺는 식물을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들짐승과 집짐승을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말하고는 결론으로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로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세계와 인생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찬미하는 인생 찬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찬가가 우리에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으며 수긍하기조차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정말로 세계와 인생이 그토록 좋은 것입니까? 그토록 여섯 번이나 좋다고 하고, 그리고 인간을 마지막으로 하여 창조를 완성하시고는 통틀어서 참 좋았다고 강조해서 말할 정도로 인생이 좋단 말인가 우리는 묻게 됩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놓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라는 말입니다. 사실, 죄 많고 욕심 많은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릴만한 근거가 빈약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죄인들의 눈에는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고 항시 불평. 불만의 대상이며, 세상은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나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좋은 것들이라 생각되는 것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무상하고 허무한 세계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자가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것은 세상에 가득한 악의 존재를 모르거나 인생의 비극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 보시기에,"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살만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로 하나님을 떠나서 세계와 인생을 긍정하고 찬양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이 인생을 찬양하며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휴머니스트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야 인간이 비로소 주인이 되고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대로 인간이 혹시 자유롭게는 살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생을 즐겁게 낙관적으로, 더군다나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고 예찬하면서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시각에서 이 세상을 볼 때, 다시 말해 이 세계와 인생은 하나님이 내시고 보호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세계와 인생의 긍정은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가 지으신 세계와 인생도 사랑하며, 세계와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세계와 인생을 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2,3 세기 경에 이 물질적 자연의 세계와 인간, 특히 육체적 인간을 악하다고 하여 혐오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히 이러한 물질세계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악한 존재로 여겨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마르시온이라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러한 하나님을 전하는 구약성서를 아예 배척하고 오직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신약성서만을 성서로 인정하고 예수를 믿으면 된다는 주장을 한 일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한 때는 이원론을 신봉하는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졌던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세계는 선과 악을 관장하는 원리 내지 힘들이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이 세계가 이렇게 악으로 가득할 리가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악을 만들고 관장하는 힘은 따로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물론 세상을 주관하는 분은 오직 한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으로부터 헤어 나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이든 악이든 세상을 주관하는 분은 오직 한 하나님뿐이라는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 신앙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악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악도 하나님이 만드셨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적극적인 존재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주장하기 위해 악이란 결코 선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privatio boni) 정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마치 병이 건강의 결핍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악의 현실을 조화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편만한 악의 현실을 볼 때 이원론자가 되든지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생각해야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악의 현실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믿는 것이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예수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을 철저히 가지고 사신 분이며, 그러기에 그는 철저히 세계와 인생을 감사하게 여기고 사랑하신 분입니다. 물론 예수는 죄악의 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던 분이며, 당시 유태민족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과 하나님나라라는 당위 사이의 괴리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갈등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감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당연히 아름답고 좋은 하나님의 세계이어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는 악의 세력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데서 예수는 큰 괴로움을 느낀 것입니다. 특히 인간 역사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교만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에는 인간의 역사와는 달리 자연의 세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남아 있는 아름다운 세계였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 한 포기나 하잘 것 없는 공중의 새 한 마리도 예수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손길 아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은 실로 예수의 삶의 찬가였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계와 인간을 보았고, 세계와 인간을 볼 때는 하나님을 본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와 같이 이러한 하나님의 눈을 가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 또한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나 자신 때문에 너무나도 자주 세계와 자기 인생이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단적으로 말해 자기 존재 자체가 문제 덩어리, 욕심 덩어리, 초조, 불안, 근심 덩어리이기 때문에 세계와 인생은 선한 것도 아니고 감사할만한 것도 아니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 축복과 감사의 계절이라 합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니 하여 추수감사제 같은 축제를 벌렸다고 합니다. 감사의 감정은 인간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종교적 감정입니다. 종교와 윤리가 여기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마음이 생기겠으며, 불평. 불만과 끝없는 욕심과 야망으로 가득한 사람, 즉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긍정 못하는 사람이 세계와 인생을 어떻게 좋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윤리적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용납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효도가 우리 동양윤리의 기초라 하지만, 효라는 것은 부모에 대한 감사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부모에 대한 감사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의 마음 즉 감사함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 다른 말로 말해 예수와 같이 하나님께 바치는 효성도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만족과 기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자연의 고마움을 찬양하고 오곡백과를 수확하게 해주신 축복을 찬양해도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자기가 문제 덩어리이고 자신의 인생이 불만인데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맙기로서니 무슨 감사의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문제 덩어리인 죄인 된 우리들에게는 감사란 헛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와 인생 자체를 긍정하고 감사하게 여기고 생의 찬가를 부르려면,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먼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삶 자체가 감사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고마움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삶의 어떤 조건이 충족되기 이전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움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 모두가 은총이고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사의 마음이 오는 것일까?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내가 산다는 것, 아니 살아 있다는 것조차가 내가 나를 있게 하고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나의 삶이 주어진 것이요 따라서 은총이며 선물이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게 되었다는 것,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나 밖의 존재들이라는 자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나 밖의 존재란 물론 나의 부모, 친척, 친구, 친지, 스승, 그리고 나아가서 자연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사선을 넘은 사람들의 경험담이나 엄청난 참사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병마와 싸우면서 죽음의 위기를 넘긴 사람들의 절실한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신기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무심코 대하던 사물들이 하나같이 새롭게 보이며 풀 한 포기의 생명도 신기하게만 여겨지며, "아 너 여기 있었구나"하는 감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을 그것(It)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Thou)로서 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며, 여생을 덤으로, 공짜로 산다는 생각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내가 누리는 축복들, 즉 신체적 건강, 따뜻한 가정, 안정된 직장 등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자명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도 어디까지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이 밀리고 힘들 때 우리는 짜증이 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로, 은총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께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에게 주어진 소유나 일을 은총이요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나는 여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삶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 많은 한국 여성들의 애환이 감동적인 필치로 그려진 편지들이 읽혀질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는 고약한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축복이라는 것, 그것도 없는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감사하게 받으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사는 이렇게 나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시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셋째로, 나의 의로움, 즉 나의 존재 가치와 권리마저도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내가 항시 옳고 의롭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행복을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어져 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기 때문에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가식 없이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로움과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의요 정당성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증언이며,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알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으로서의 혈통을 뽐냈고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의로운 자라는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십자가상에서 죄인으로 죽은 예수의 역설적인 의를 깨닫고는 그의 가치관과 삶이 완전히 바뀌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1:20) 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자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는 무한한 감사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거져 주어지는 의로움, 하나님 앞에서나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자기 정당성을 애써 주장할 필요 없는 의로움을 깨닫고 난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성취로 의를 확보하려던 율법주의에 얽매였던 자신의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홀가분하게 새로운 인생, 감사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은총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기쁨과 감사로, 그리하여 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와 같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고 무한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착해야 얼마나 착하며, 우리가 의로워야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우리 인간들의 선과 의는 다 오십보 백보이며, 또 우리 교회가 선교 봉사를 많이 한다고 때로는 자랑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 얼마나 하며, 또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하겠는가 생각해 볼 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자랑이 못됩니다. 우리들 개인의 의도, 우리 교회의 의도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 때 감사의 마음이 있게 되고, 교만이나 독선 없이 할 수 있으며, 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우리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간에는 너그러움과 용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 즉 내가 나 된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일체의 것(물질, 명예, 실력, 직업, 건강 등), 그리고 우리의 의로움과 존재 가치 및 권리가 모두 거져 주어진 은총이라는 깊은 자각과 믿음이 있을 때, 그리하여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대한 긍정과 감사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창세기 기자가 왜 세계와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심히 좋았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인생이 한바탕 감사의 축제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고 인생이 신나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어진 그대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감사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세계와 인생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며, 왜 창세기 기자가 피조물들의 세계 하나 하나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포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죄에 눈이 어두워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 탐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 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이 못되며, 우리 인생도 좋은 것이 못 됩니다. 죄의 꺼풀을 벗고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감사할 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와 인생을 보고 좋은 세상, 좋은 인생이라고 노래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한없이 자유롭게 사신 분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으나, 그래도 그는 자유롭고 여유 있게 행복하게 사신 분입니다. 우리는 혹시 예수가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외양적으로 볼 때 그는 실로 무척 불행하게 사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조금도 비굴하거나 찌들인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거침없는 확신에 찬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세상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불평불만에 차서 자기를 학대하거나 남을 괴롭히면서 산 분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들 인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려 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하는 권력의 오만을 고발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알되 잘못 아는 종교가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올가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다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과 세계와 인생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자유와 여유, 낭만과 행복이 있었으며,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숨을 거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세계와 인생을 하나님의 눈으로 긍정하는 신앙이 없을 때는, 내가 기분 좋고 신이 나면 세계와 인생도 좋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면 하나님이 잘 만드셨다 생각되지만, 내가 조금 기분이 나쁘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과 인생이 왠지 잘 못된 것 같고, 내가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면, 욥 처럼 자기를 저주하고 세계와 자기를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세상이 좋다는 것, 인생이 좋은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산다는 것 그 자체, 존재 그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요 기쁨이라는 것은 세계와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 없이는 결코 정직하게 긍정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세상을 억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해도 세상은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상이며, 아무리 우리들이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서 내시고 돌보아 주고 용납해 주시는 귀한 존재라는 것은 변함 없는 신앙의 진리입니다. 이 신앙으로 우리는 우리 인생에 어떤 풍파와 시련이 닥쳐와도 언제나 감사와 기쁨으로, 자유와 축제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신앙을 이어받은 기독교 신앙인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끔찍하게도 더웠던 여름, 가뭄으로 무척이나 애태웠던 여름, 그 가운데서도 곡식 한 톨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비지땀을 흘리며 가꾸고 일군 농민들의 수고 덕분에 또 다시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을 맞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되게끔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시한 우리 조상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생활력을 생각하면서 이 감사의 계절에 그 분들의 은덕에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 동료, 또 이렇게 아름다운 새길 신앙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대한 감사의 마음 다시 한번 새겨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감사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너그러이 감싸주며 조그마한 불만이나 불평은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죄 많고 허물 많은 나를 의로운 존재로, 즉 살만한 가치와 권리가 있는 존재로 인정해주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깨닫고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결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며 바울의 말씀대로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끔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460장의 가사 대로,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붇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 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축복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 본질적으로 좋은 세상과 인생을 내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그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이 모든 축복을 깨달아 알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 찬송을 부를 수 있으며 인생의 찬가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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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 창세기 명절의 만남 중요한 것은... 창45:4-10  김필곤 목사  2007-12-25 2260
820 창세기 공(公)에 대한 경외 창2:7-18  최만자 자매  2007-12-20 1796
819 창세기 다시 만나는 사람들 창33:1-11  박동현 목사  2007-12-19 2152
818 창세기 하갈의 하나님, 그리고 사라의 하나님 창16:7-16  최만자 자매  2007-12-18 2797
817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15
816 창세기 창조의 미래 창2:1-3  길희성 형제  2007-12-12 1677
815 창세기 전화위복의 감사 창50:19-21  한태완 목사  2007-12-11 2916
814 창세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14:17-21  천세영 형제  2007-12-07 2342
» 창세기 삶의 찬가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2-05 2133
812 창세기 형제를 위한 희생 창14:1-16  한태완 목사  2007-11-25 2281
811 창세기 믿는 자에게도 기근이 창12:10-12  한태완 목사  2007-11-25 2463
810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1-22 1170
809 창세기 신실하신 하나님 창7:6-24  한태완 목사  2007-11-18 3242
808 창세기 나와의 씨름 창32:23-3  권진관 형제  2005-02-16 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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