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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의 하나님, 그리고 사라의 하나님

창세기 최만자............... 조회 수 2797 추천 수 0 2007.12.18 20: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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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6:7-16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오늘 봉독한 성서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를 둘러싼 두 여인 곧 그의 아내 사라와 사라의 여종이며 아브라함의 둘째 부인이 되는 하갈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들려주는 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는 교회강단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자주 전달되었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중심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백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어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중간에 여종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을 본 사라와 아브라함의 옅은 신앙에 대하여 비판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그가 선택민족으로 삼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인류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거부하고 늙은 사라의 태를 열어 그의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셨다는 지극히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라와 아브라함을 비판하면서 우리들 자신이 그들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반성과 교훈을 주는 이야기쯤으로 이해하고 넘겨 온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지극히 교과서적으로 읽어온 본문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읽음으로써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음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증거에서 우리의 성서 읽기를 전통적인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여 읽는 시도를 할 것이며, 그 새로운 관점을 페미니스트적이며 눌림 당하는 자의 시각으로부터 가져오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에 부제를 주어 본다면 [아브라함보다는 사라를, 사라보다는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오늘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본다. 우리가 소위 원역사(pre-history)라 부르는 창세기 1-11장은 이 이야기의 먼 배경이 된다. 거기엔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인간의 타락, 낙원에서의 추방 그리고 최초의 형제 살인 그후 악의 팽창과 홍수 심판, 노아의 방주 구원과 하나님과 새 계약을 맺음, 그러나 결국 바벨탑을 쌓아 하늘 꼭대기에 이르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자고하는 인간들의 교만을 보고 언어를 불통하게 하여 온 지구상에 인류가 흩어지게 된 인류 역사의 기원론적 사건들이 실패한 역사의 모습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12장은 하나님께서 그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는 사건을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펼쳐나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새 역사를 이루려고 계획하였다. 그 잘못된 첫 역사를 끝내고 탈출하도록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새로이 정착할 땅을 약속하고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나(히브리서 11:8) 아브라함은 절대 순종하고 떠났으며(창세 12:1), 하나님은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며 그에게 복을 주어 그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고 하고(12:2), 아브라함으로 하여 세상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12:3) 약속을 한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오직 미래를 향하여 떠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후대에 크게 칭송되고 있고(히브리서 11:8),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상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에 대한 주제로도 이 이야기를 깊이 관심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를 배경으로 하는 아브라함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성하는 후손의 약속을 얻은 아브라함과 사라였지만 그 약속은 지연되어 이제 그들이 생리적으로 자식을 낳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사라는 그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자식을 얻으려하고 아브라함도 이에 동의한다. 당시의 관습은 일부다처 제도였고 본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는 몸종을 자기 대신 남편에게 들어가게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 때 아이는 본부인의 아이가 되고 이를 확증하는 의미에서 그 종은 부인의 무릎에서 해산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마침내 아브라함과 동침한 하갈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신한 하갈이 그의 여주인 사라를 업신여기게 되자 분노한 사라가 그를 학대하였고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사막으로 도망을 친다. 그래서 아들을 얻으려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아이를 가진 하갈은 사막에서 헤매는데 한 샘터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하갈은 장차 태어날 아이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된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라의 수하로 돌아 갈 것을 권하고, 하갈에게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곧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고 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자유롭고 야성적이고 호전적인 삶을 사는 베두인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한다. 이에 하갈이 '라하이 로이' 곧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외쳐 자기를 찾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 샘은 그래서 브엘라하이-로이 곧 나를 돌보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하갈은 다시 돌아왔고 아들을 낳아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그 후 하나님께서 사라에게도 은혜를 베푸시어 아들을 낳고 그를 이삭 곧 웃음이라고 하였다. 16장은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그들의 갈등은 다시 21장에서 표면에 드러난다. 이스마엘이 유력한 유산상속자라는 점에서 사라는 이 모자의 추방을 요구하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약간의 양식을 얻어 가지고 쫓겨난다. 다시 하갈은 브엘세바 들을 방황하게 되었고 물이 거의 떨어져 아들이 죽어가게 될 때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등장하고 하갈에게 전과 같은 후손의 약속을 반복하며(21:18) 절망과 분노로 가려진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고 그 모자를 살린다. 하갈은 이제 그 사막에서 아들을 키우며 사막의 문화를 이루는 삶을 시작하고 애굽에서 며느리를 데려와서 한 민족을 이루어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이 이야기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사라의 약한 믿음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계획을 어그러뜨릴 뻔했다는 믿음 옅은 사라와 아브라함에 대한 비판과 노예 주제에 임신했다고 건방을 떨은 주제파악 못하는 하갈을 비난하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가져야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신앙적, 도덕적 교훈을 명백하게 얻어내곤 한 본문이다. 그러나 이를 페미니스트적 관점에 천착하여 다시 읽으면 이 이야기 밑바닥에 흐르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바라보게 된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 그것은 아이를 낳아야만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만 자신의 가족 안에서 위치가 굳건할 수 있는 고대 가부장사회가 여성에게 주는 억압적 환경을 보게 되고, 그 제도 안에서 희생되고 왜곡되는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남성중심의 세계가 여성들간의 갈등을 유발시켰고 불화 하게 한 원인임을 알고 사라와 하갈 모두가 가부장제의 모순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힘없는 여성들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아브라함, 그러나 그는 사실 사라와의 관계에서 그를 재조명하면 그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와 사라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과 20장을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12:1-3에서 위에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그토록 큰 민족을 이룰 약속을 얻었지만 그 이후 그가 행한 처음 행동은 자기 부인을 애굽 왕에게 누이라고 속이고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얻고 재산을 증식시키고 있다(창세 12:10-20). 그는 많은 보수와 아내의 명예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그들 믿음의 조상을 미화하려고 의도하지 않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이삭도 그와 같이 자기 부인을 누이로 속이고 안전을 보호받는 행동을 한다(창세 26). 야곱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 속임수의 천재이다. 인간적 약점을 서슴지 않고 폭로하는 성서의 개방성은 성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조상의 위대함보다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이라는 점에 절대성을 두기 때문이다. 성서는 저들의 위대한 조상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성서가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 이상일 수는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것의 철저한 상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 같은 솔직한 묘사를 성서의 하나님 절대신앙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성서가 사라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바로의 궁으로 끌려가는 사라의 공포감, 수치심, 분노의 감정들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다. 오직 침묵의 순종으로만 사라는 나타나고 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오직 희생할 것을 작정한 한 여성의 희생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더구나 사라의 이러한 희생 정신이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형으로 해석된 적은 더욱 없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사회는 오늘날에도 어머니, 아내, 딸들에게 남자를 위해 살고 희생하고 침묵하고 순종하기를 강요한다는 사실에서 여기 사라의 모습은 지구상의 모든 여성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위험에 처한 사라를 구출하고 그 문제를 수습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보다는 사라에게 있다. 사라는 남편의 보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사라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남편이 저지른 위기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성서는 여기서 여자가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님을 밝힌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안에 있듯이 사라도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며 그분의 보호와 사랑을 받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행하신 사실은 실제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약속의 후손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사라의 후손을 약속의 후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만 관심 하였으면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틀림없는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고 그로 후손을 삼은 것은 하나님이 꼭 사라의 후손을 세우려한 것이라고 보인다. 하갈의 아들을 거부하고 사라의 후손으로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는 행여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라 편을 들고 하갈을 미워하는 것으로 생각될 여지를 준다. 그러나 하갈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와 사랑은 그 문제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켜 준다.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다만 가부장사회 안에서 불임으로 인하여 비참한 생애를 살게 될 한 여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가부장 문화가 여성들에게 준 크다란 위협과 손상은 불임이 그 여성의 실존에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가를 알 때 가늠케 된다. 가계를 잇는 데 여성의 생산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불임은 여성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사라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위치이지만 생산 능력이 없다는 데서 가부장 사회적 조건에서 보면 결정적인 약점을 가진 존재였다. 하나님은 그 사라의 고통을 풀어주고 그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다. 오죽하면 그 이름을 이삭 곧 웃음이라고 지었겠는가!
이제 우리는 사라와 하갈의 관계에서 하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 전통 안에서 하갈은 부정적으로 이미지화 되어 왔다. 여선교회의 이름들이 에스더, 마리아, 드보라 등의 성서여성 인물로 되어 있지만 하갈회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을 먼저 낳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방해되는 인물로 오히려 아브라함의 거룩한 모습에 흠집을 내는 비신앙적 존재로 평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요 하갈은 육신의 욕정으로 난 자의 모형으로 이분화하고 있다. 그러나 하갈의 자리에 서서 본다면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노예이며 첩이며 이방인인 하갈의 처지에서 아들 없는 집에 생산의 도구로 이용만 당하고 쫓겨난 철저히 희생당한 여성이다. 하갈은 가부장적 사회조건에서 가장 힘없고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하갈을 하나님께서 관심하고 보호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하갈이 사라로부터 처음 도망쳤을 때도 그리고 두 번째 사라에게서 추방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그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그를 한 민족을 이루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과 같은 약속을 주고 있다. 절망과 분노의 끝에선 하갈에게 생존의 힘을 주고 희망을 주시는 하갈의 하나님을 우리는 하갈을 통하여 볼 수 있다. 하갈이 사라에게서 도망쳤을 때 사막에서 만난 하나님은 왜 하갈에게 사라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노예의 상태를 지속하라고 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해방보다는 생존을 우선하는 하나님의 배려를 읽게 한다. 인생에 있어 생존의 위기보다 더 절박한 물음은 없다. 절박한 생존의 위기는 정당성이나 논리적 정의와 같은 문제들을 뒤로 미루어 버린다.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자, 다음에는 어린아이와 먹을거리가 없어 절망을 헤매는 한 연약한 여성에게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들의 생존 자체에 우선적으로 관심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귀중함 때문에 하갈에게 사라에게로 돌아가라 하였고, 또 하갈로 하여금 그가 확실히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사라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해석한다. 두 번째 추방당했을 때도 생존의 자원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하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해방시키는 자라기보다는 생존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하갈에게서 해방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발성에서 나타난다. 하갈 자신이 도망치고 몸부림치고 있다. 하갈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해방이기보다는 생존과 새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분이며, 여기 중심주제는 생존에 있다. 하갈은 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계급적으로 인종적으로 억압받는 자들의 한 모형이 된다. 생산현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여성노동자들, 지배계급의 여성들에게 이용당하는 낮은 계층의 여성들,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망가는 여성들, 미혼모들, 이혼하고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어머니들, 소녀가장들,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큰 문제로 부각되는 이방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하갈은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흑인들은 성서에서 유대인과 자신들을 결코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미국 안에 백인들에 의해 기독교를 전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독교는 백인의 기독교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라보다는 하갈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같은 종족을 노예로 삼는 문제보다는 종족이 다른 이방종족을 노예로 삼는 문제를 심각하게 성서가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흑인공동체가 성서를 해석하여온 두 가지 방법이 있는 데 하나는 성서의 해방전통에 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남성이 아니고 유대인이 아닌 이 하갈의 전통에 선다는 것이다. 100년 이상 하갈은 미국 흑인들의 문화의 축적물을 이루었다. 시와 민담, 전설 등에 하갈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 중에 억압당하는 자 중의 억압당하는 자, 선택받지 못한 자, 비 유대인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있다. 들로리스 윌리암스라고 하는 흑인 여성신학자는 창세기 16장과 21장은 미국 안에서 일어난 흑인 여성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만약에 하갈의 전승이 성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흑인들에게 기독교가 가능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성서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구속사적 편견이 없이 읽고 가장 약한 자의 처지에서 다시 읽는 관점을 우리가 가질 때라야만 성서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 생명과 희망과 사랑을 회복시키는 해방적 동력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진실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성서를 읽은 우리는 사라의 하나님을 통하여 고대 가부장사회에서 위기에 몰리고 불임의 비참함으로 희생당하는 여성을 구출하고 생산 능력을 갖게 하는 그 여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하갈의 하나님을 통하여서는 생존의 위기 앞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생존할 물질을 주고, 미래에 번성할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시는 보살피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았다. 즉 오늘 본문은 교리주의적 관점을 벗어날 때 본질적으로 약자를 사랑하며 돌보고 배려하는 사랑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바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라는 윤리적 실천을 내포하는 신앙고백이라면, 오늘 우리가 발견한 하갈의 하나님, 그리고 사라의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가부장적 질서 때문에 여성들을 더 이상 희생당하게 하지 않게 하는 생활과 동시에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를 하는 생활 그리고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학대하지 않아야 하는 윤리적 실천을 또한 알게 되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씨받이 문제는 크지 않다 해도 성폭력에 의해 고통 당하는 여성 문제, 이혼 증가로 인한 가정 문제 등 변형된 가부장사회의 모순들이 많다. 아직도 뿌리깊은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 우리 가정이 정말 평등한 가정인가 되물어 보아야 할 계기를 가지게 한다. 즉 사라의 하나님을 진지하게 만난다면 남성 중심의 횡포는 잘못된 것으로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남편 없이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들, 소년소녀 가장들, 성폭행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성들, 이방나라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산업재해를 입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이들은 성서에서 하갈의 하나님을 통하여 생존적 힘과 희망을 얻을 것이다. 기원전 800-900년 에 씌어진 오늘의 성서본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명과 희망과 사랑의 힘을 인생에게 주는 메시지로 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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