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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사람들

창세기 박동현 목사............... 조회 수 2152 추천 수 0 2007.12.19 23: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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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3:1-11 
설교자 : 박동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이 시간 설교본문은 오랜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제 본문에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여 너무나도 잘 알려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먼저 이야기 줄거리를 여러분과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해 보고, 이어서 본문에 비추어 우리 자신들을 돌이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채어 형의 미움을 사 외가로 달아나야 했던 사람입니다. 이 야곱이 스무해 이상 어버이 품을 떠나 머슴살이를 한 다음 마침내 대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워서 먼저 심부름꾼을 보내 안부인사를 드리기도 하고, 일꾼들을 시켜 상당한 수의 짐승들을 예물로 형 에서에게 미리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하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야곱은 재산과 처자들을 먼저 앞세워 보낸 뒤 얍복이라는 나루터에서 밤새 홀로 어떤 낯선 존재와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 싸움에서 끝내는 복을 얻어 낸 야곱은 새 날을 맞아 뒤늦게 얍복강을 건넙니다. 그러자 저 앞에서 형 에서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야곱의 눈에 들어오는 데, 앞서 보내었던 심부름꾼의 말처럼 형님은 홀로가 아니었습니다. 수백명이나 되는 힘센 장정들이 에서와 함께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혹시라도 형이 자기 일행을 공격해 올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처자들의 나아가는 순서를 정합니다. 맨 앞에 그에게 자식들을 낳아 주었던 두 여종과 그 아들들을 세우고, 이어서 레아와 그의 자식들, 마지막으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그들의 막내아들 요셉이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야곱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뒤에 쳐지지 않고 앞장서서 나아갑니다. 마침내 형 에서 일행과 마주 부딪치게 되었을 때, 야곱은 형 앞에 엎드려 일곱 번이나 큰절을 합니다. 이는 자신을 최대로 낮추고 상대를 최대로 높이는 몸짓입니다. 이는 결코 형의 마음에 들도록 겉으로만 하는 행동이 아니라 실제로 형을 하나님처럼 대하는 야곱의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임을 우리는 본문의 흐름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뒤에 야곱이 10절에서 에서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뵙듯이 당신의 얼굴을 뵙노라"고 말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일곱 번 정성 드려 땅에 엎드려 절한 다음 자기에게 다가오는 야곱에게 형 에서는 달려와 그를 맞아서 부둥켜안음으로써 스무해 이상 묵었던 둘 사이의 불화관계는 순식간에 깨끗이 사라집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 15장 20절에서 집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하고는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한 것처럼, 오늘 본문 4절에서도 에서가 야곱에게로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고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입니다. 극적인 형제 상봉의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에서는 야곱의 처자들을 보면서 동생에게 묻습니다. "네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누구냐?" 이는 그들이 야곱의 가족인 줄 몰라서 한 물음이라기보다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은 에서의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야곱이 대답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형님의 못난 아우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여기 표준새번역 성경이 "형님의 못난 아우"라고 옮긴 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당신의 종"이란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형님 앞에서 스스로를 가리켜 아우라고 하지 않고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야곱은 처자들로 하여금 에서에게 차례대로 인사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아우의 가족과 인사를 나눈 에서는 8절에서 또 묻습니다. "내가 오는 길에 만난 가축 떼는 모두 웬 것이냐?" 이 부분도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내가 오는 길에 만난 짐승떼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데) 너에게는 중요하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에서로서는 그같이 지나치게 많은 선물이 아니더라도 이미 자기로서는 아우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렇게 선물을 많이 보낼 필요는 없었음을 이 같은 물음으로 넌지시 말한 것입니다. 이런 형의 물음에 야곱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형님께 은혜를 입고 싶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앞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이 부분에서도 형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직역한다면, "나으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도가 됩니다. 풀어서 옮겨 본다면, "나으리 눈에 좋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으리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습니다"라 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히브리어 본문에서 보면 오늘 본문 전체에서 야곱이 에서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우의 말을 들은 에서는 그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우야, 나는 넉넉하다. 너의 것은 네가 가져라." 이 에서의 말은 동생을 맞는 그의 행동처럼, 자연스럽게 야곱을 아우라고 부르는 점에서, 형을 아직도 "나으리"라고 부르고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는 야곱의 말과 다릅니다. 이렇게 보더라도 에서에게는 처음부터 선물 같은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형이 자기의 호의를 물리치지 말 것을 10절에서 간청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에서도 그 선물을 받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여러분, 복받는 문제를 두고 서로 사이가 나빠졌던 야곱과 에서 형제가 스무해 이상이 지난 다음 다시 만나 기쁨으로 얼싸안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 마음이 흐뭇해짐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이 이야기가 그냥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교훈이 됨을 깨닫습니다. 특히 해방 제이 반세기, 분단 제이 반세기에 들어선 우리들이 어떠한 기독교인들이 되며 어떠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지에 대한 여러 가지 귀한 가르침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가운데서 세 가지 정도만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이 시간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큰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힘써야 함을 깨닫습니다. 다름 아니라,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 서로 만나도록 하는 일을 우리가 앞장서서 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만난다 할 때 이것은 그냥 얼굴만 마주 대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마음과 마음도 서로 만나야 그것이 참된 만남이 됩니다. 이러한 만남이 없을 때, 특히 마땅히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들끼리 만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메말라지고 짜증스러워지고 괴로워집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까지 합니다. 이 시간 서로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게 된, 놀라운 이야기를 읽는 우리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은, 남과 북으로 나누인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여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일 천만 우리 동포들입니다.
지난 십여년 동안 나라 안팎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통일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지난 89년 가을부터 동서독 사이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동독사람들이 물밀듯이 서독지역으로 넘어오던 것을 그 자리서 겪어본 저에게는, 가끔 우리 한반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우리는 통일 독일처럼 안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다 잘 아시다시피, 정치 경제 법적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사회가 지금 말할 수 없이 큰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가 되었지만 마음으로, 속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다시 만났지만 속으로는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동안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통일을 준비해 왔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준비도 참되이 다시 서로 만나는 데는 모자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양심적인 독일의 지도자들은 오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들을 향하여 충고합니다. 통일을 한시 바삐 이루려 할 수록 통일을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비추어 말한다면, 헤어졌던 사람들, 갈라졌던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로 다시 만나는 것이 통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남북이 다시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오늘 우리들도 남북이 다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통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다시 서로 만날 준비를 잘함을 뜻합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서로 만날 준비를 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남한사회 안에서라도 갈라지고 헤어지고 나누어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 만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저는 먼저 오늘 우리 남한 안에 교회적으로, 신앙적으로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 만나는 문제를 생각합니다. 새길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습니다만, 같이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내 교파, 내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 나와 생각이 같지 않으면,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는 기독교인들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누구 파 누구 파 하는 식으로 서로 갈라져 지내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은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지난 9월 1일 장로교회란 이름을 가진 여덟개 교단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행사를 벌인 것은 기쁜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 전부터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만나려고 힘쓰고 있어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 기독교인들끼리 다시 서로 만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지역적으로 나누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야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너무 많이 이야기해 왔기 때문에 구태여 제가 되풀이해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만 제 자신의 적은 경험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90년 2월 오랜 나라밖 생활을 끝내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전남 나주 어느 시골마을에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한 삼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저를 아끼는 분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제가 자주 듣게 된 한 마디가 저에게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박목사, 내 오십/육십/칠십 평생, 전라도 땅에는 처음 와 보는데, 와서 보니, 전라도 사람들도 괜찮구만!" 여러분 이 무슨 말씀입니까?
경상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충청도에서 목사가 되고 전라도에서 교회를 섬겨본 적이 있는 저로서는 아무쪼록 전라남도 밖에 있는 우리 국민들이 전라남도에 자주 와 보아야 한다고 기회 있는 대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아니 될 수 있으면 한 해에 한번쯤은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지역끼리 나누어진 것은 남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북한의 경우에도 평안도 사람들과 함경도 사람들이 또 서로 갈라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나이와 세대를 따라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 만나는 문제도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젊은이들과 어른들의 생각이 서로 어긋나고 있는 시대도 드물게 보입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버르장머리없다고 하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도무지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욕하면서 서로 만나려 하지 않는 수가 많습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요?
더 나아가서, 그 누구보다도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들께서 뼈저리게 느끼시겠습니다만, 우리 남한사회 어느 분야이든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이처럼 교파 때문에, 지역 때문에, 나이 때문에, 사상 때문에 서로 갈라지고 나누어지고 찢김이 심한 사회가 우리 남한사회라 한다면, 우선 갈라진 우리 남한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는 훈련을 부지런히 해야, 앞으로 남북이 다시 하나되는 일도 제대로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훈련과 준비를 힘써 하지 않으면 남북이 겉보기로 다시 하나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해방 직후 남한 곳곳에서 좌우익의 대립으로 엄청난 피를 흘렸던 바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한 무서운 혼란을 겪을 지 모릅니다.
지난날의 동서독 교회는 둘로 갈라졌던 나라가 다시 하나될 때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게 된 데에 교회가 이바지한 바가 컸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동서독이 다시 하나되는 과정을 지켜본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다음과 같이 작은 소리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같았으면 피비린내 나는 혼란이 있었을 터인데..." 여러분, 남북의 경우 우리는 서로 헤어진지 너무 오래 되어서 서로의 달라진 형편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나는 일을 이루어 나가고자 할 때, 본문에서 야곱의 처자들과 에서가 서로 인사를 나눈 것처럼, 남북의 분단 이세대, 분단 삼세대가 서로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미워하고 때리고 다치게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도록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기독교회는 만나는 훈련을 해 나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든지 이 본문의 이야기는 큰 교훈이 됩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서로 만나야 합니다. 이 일을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 교회들이 앞장서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분단 오십 년의 세월을 흘려 보낸 우리들의 다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 만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의 화해 사건에서 야곱이 형 에서에게 하는 말들 가운데 거듭 나오는 낱말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은혜 또는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세번, 개역성경이나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네번(5, 8, 10, 11절), 이런 낱말들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형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도 이루고 재산도 많이 가지게 되었다 하면서 이제 형 에서로부터 은혜 입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것이 오로지 하나님 은혜였다면,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은 에서가 용서의 은혜를 베푸느냐에 달렸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형 에서가 아우를 받아들여 고향에서 살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이룬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에서가 이 은혜를 아우에게 베풂으로, 야곱도 에서도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은혜 없이는 아예 살아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은혜, 이 둘이 한데 어우러져야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와 이 세계와 우리 사회에, 아니 우리 교회들 안에서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서로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히 은혜를 구하며 은혜를 베푸는 것을 소홀히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남에게 용서를 구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 받을 복만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개인과 개인 사이에 불화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단체와 단체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지역과 지역이 갈라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집니다.
야곱은 지난 날 스스로 겪어야 했던 괴로운 경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형을 만나 화해를 청할 때 야곱은 축복이란 말보다 은혜란 말을 되풀이하여 쓴 것입니다. 야곱이 아직도 덜된 사람이었다면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 보십시오. 제가 장자권을 얻은 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아 이렇게 많은 자손과 재물을 가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옛날 어릴적 일은 그만 잊어버리도록 하십니다. 형이 날 안 받아주셔도 문제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내게 복 내려주실 터이니 내가 어디 간들 못 살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야곱과 에서가 서로 다시 만난 사건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서 제대로 그 값을 다 드러내자면 사람끼리 서로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면 갈구할수록 우리는 내가 먼저 내 형제에게, 내 이웃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 하고 그런 형제를, 내 이웃을 서슴치 않고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조차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로에게 은혜를 구하고 베풂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그 동안 갈라져 살았던 사람을 은혜로 만나려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이전에 지녔던 좋지 못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뵙듯이 상대방을 만날 수 있음을 본문에서 깨닫습니다. 본문 10절이 이를 말해 줍니다. 표준새번역은 10절 뒷부분을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합니다"로 번역하여, 야곱이 에서를 하나님 뵙듯이 함이 에서의 태도에 달린 것처럼 이해하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히브리어 본문의 흐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번역입니다. 야곱으로서는 형님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에 상관없이 그냥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듯이 형님께 은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바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에서를 하나님처럼 대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본문 줄거리를 살펴볼 때 이미 여러분들께서 알아차리셨듯이, 본문에 묘사된 에서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그리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곱 못지 않게, 어쩌면 야곱보다 더 너그럽고 나은 사람이란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인상은 이 시간에 읽지 않은 33장 나머지 부분을 보면 더 굳어집니다.
여러분, 이 시간 본문의 가르침에 비추어 오늘 우리 남북의 다시 만남을 생각할 때 남한은 야곱, 북한은 에서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이야기가 가르치는 다시 만남의 근본 정신,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북한 동포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이르면,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본문의 야곱처럼 북한 동포들을 하나님처럼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들이 어떤 점에서는 본문의 에서처럼 우리 못지 않게,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시골뜨기 같고 꾀죄죄한 모습을 지니신 그분들을 혹시 마음속으로라도 우습게 보는 일은 없겠습니까? 어수룩하니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겠다, 심지어 후려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정치인, 경제인들이 전혀 없겠습니까? 상대방을 하나님 뵙듯이 대하고, 상대방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전혀 달리 좋아졌다는 점을 안다함은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갈라진 교단끼리, 개인끼리, 지역 사람들끼리, 세대끼리 다시 만나는 데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 동안 싫어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헐뜯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일은 오로지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가운데 품고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만날 때 그분들에 대해 이전에 우리가 품었던 좋지 못한 생각을 버리고, 그분들을 하나님 뵙듯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만나는 사람들 - 여러분, 이 시대 이 지구 위의 어떤 나라보다도 갈라짐이 많은 한반도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그 동안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갈라지고 나누어진 사람들끼리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에게 은혜를 구하고 베풂으로써 다시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좁게는 우리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이 다시 만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말로만 하지 말고 이전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내 몸을 먼저 움직여 그 동안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하나님 만나 뵙듯이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서로 만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만나게 하는 화해의 일을 힘써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들을 위한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들은 한 분도 빠짐 없이 모두 이러한 평화의 일꾼들, 평화의 사도들이 되셔서, 새길교회가 참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새 길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빌면서 이만 설교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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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사도행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행17:16-34  길희성 형제  2007-12-17 2135
364 레위기 하나님의 땅과 사람의 자유 레25:10  이풍 형제  2007-12-17 1860
363 히브리서 저는 다리와 곧은 길 히12:13  김병종 교수  2007-12-17 2091
362 요한복음 예수사건① :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요4:7-30  한완상 형제  2007-12-17 4038
361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15
360 로마서 그리스도인의 기쁨 롬8:9-11  길희성 형제  2007-12-17 2300
359 누가복음 고난의 역사와 구원의 기쁨 눅2:14-23  이재정 신부  2007-12-17 2123
358 고린도후 상대적 불행과 절대적 행복 고후2:8-11  한완상 형제  2007-12-17 2827
357 마태복음 믿고 구하라 마21:22  강종수 목사  2007-12-16 2150
356 요한복음 위기와 기회 요2:1-11  한태완 목사  2007-12-15 2557
355 누가복음 종의 의무 눅17:7-10  이현주 목사  2007-12-13 2314
354 로마서 죽음의 몸 롬7:7-25  길희성 형제  2007-12-13 2006
353 누가복음 화해적 코이노니아를 위한 하나 더 눅15:1-2  김흡영 목사  2007-12-13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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