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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에 대한 경외

창세기 최만자............... 조회 수 1796 추천 수 0 2007.12.20 00: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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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7-18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성서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처음 인간이 살던 낙원 에덴동산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동산을 일구어 사람을 두었고 동산 한 가운데 두개의 나무를 특별히 두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다음 구절에서는 동산의 위치가 공간적 지명으로 자세히 설명되고 하나님은 그 동산을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맡깁니다. 그리고 선악과 금령이 주어지고 난 후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짝을 창조하기 위해 먼저 동물들을 만들었으나 그 가운데 짝을 찾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여자를 창조하고 남자와 결합하게 하며 동산에서 살게 합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은 창세기 3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3장은 흙을 주제로 하고 또 인간 창조를 중심으로 하여 엮어진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용 곧 인간, 짐승, 여자의 창조 이야기와 동산, 선악과 금령, 불복종, 심판, 추방의 이야기가 섞여서 하나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1장 안에, 특히 1-3장에는 기원적 내용이 있어서 인간 삶의 근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얘기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짧은 본문 안에 깊은 신학적 주제, 인간학, 신론, 창조론 등의 신학적 내용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의 기원 해석에 관련되는 신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관심의 초점은 선악과에 대한 이해 문제입니다. 선악과는 도대체 무슨 나무이며 왜 따먹지 못하게 하였을까 라는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이 금령이 없었다면 인간이 범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래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도 노태우의 몇 천억 비자금을 꿀꺽하는 사건도 없었을텐데 라는 소박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악과와 소위 인간 타락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대체로 선악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도덕적인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선악은 특별히 지혜와 연관되어 있으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지혜와 일치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 바로 선과 악의 구별을 말하고 있습니다(왕상 3:9). 그리고 옳고 그름의 판단(사 7:15-16), 생의 좋고 나쁨(삼하 19:36), 성(sex)에의 자각(신 1:39)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보면 '야훼문서 기자의 생각이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선한 운명과 악한 운명에 대해 아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든가, '신의 지식과 능력의 비밀에 대해 아는 것', '자신에게 유익함과 해로움을 알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 그리고 선악을 '알다'라는 뜻으로 히브리 동사 알다'yada'가 모든 것에 관한 경험과 사물 및 비밀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뜻함으로 선과 악은 인간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는 등의 의미 해석들을 합니다. 또한 선악과 금령은 다른 나무가 충분히 있어서 과일의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금령이라기보다는 단지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하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이 선악과는 3장에서 금령을 어기고 그것을 따서 먹는 불복종의 행위와 연결됩니다. 대체로 이 사건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인간존재에 대한 해석을 지배적으로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원죄 이해로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씻을 수 없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죄인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이라 합니다. 인류 최초의 죄가 전 인류의 죄에 상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죄 교리는 후기 유대교적 사고이며 기독교에서는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발전된 신학적 사고일 뿐 성서 본문의 야훼문서 기자의 의도는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비유로서의 이야기인데 신학자들은 그것을 엄격한 원죄 교리로 발전시켜 놓았습니다. 성서 본문은 원죄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서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관심은 위와 같은 선악과에 대한 일반 전통적(인간의 자유의지나 원죄론 등)인 이해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다른 하나의 선악과 금령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선악과를 공(public한 것)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공개념, 그것은 선악과는 절대 사유화될 수 없는 공적(public)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유화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즉 그것은 모두 함께 소유하는 모두의 것인데 이를 사유화하면 인간은 파멸된다는 것입니다. 물질, 권력, 명예, 지위 등 유형 무형의 공유화해야 될 선악과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한 개인이 자리하고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공유해야 할 공적 영역입니다. 기업의 이윤도 기업주의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것입니다.
왜 공의 영역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관계적 존재요 책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것은 창세기 1-3장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8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 후에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는 것에 비해 2장에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실패라고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공존은 짐승과 자연과 인간의 공존까지 포함합니다. 짐승은 창세기 2장에서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냥 humanity가 아니고 co-humanity이며 그냥 existence가 아니고 co-existence입니다. 또 인간은 책임적 존재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 27-29절을 연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의 과제를 부여받는데 그것은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과제입니다. 하나님, 이웃,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 뜻을 이행하는 책임적 존재로 과제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 공동체적, 공존의 존재입니다. 나 너 관계 속에서만 참으로 인간다운 것입니다.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임은 선악과 금령 후에 받게 된 벌이 모두의 관계파괴로 나타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살라고 한 남녀 관계는 상호 책임전가와 지배 피지배의 관계로 나타나고, 자연과 인간관계에서는 땅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으며 인간은 땅으로부터 힘들게 생산을 얻게 됩니다. 자연과의 관계파괴는 카인의 죄로 땅이 곡식을 내지 못하고(창4:12), 인간의 포악으로 홍수가 일어나며(창6:11-13), 인간의 살인, 도적질 등으로 짐승과 땅이 신음한다는(호세아 4:1-3) 등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악과가 이 같은 책임적 존재로서 관계를 요구하는 공적 영역에 관련된다는 사실은 다른 낙원설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금령 이야기는 고대 근동에 많은 자료들이 있습니다(수메르의 딜문동산 신화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아마도 고대에 낙원신화의 한 원형이 있었고 그것이 후대로 전해지면서 변형 확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첫 인간이 본래 신들의 동산에 살다가 신에게 불복종하여 추방당하고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 고대 원 인간은 남자이나 성서에는 여자로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성서 안에 언급된 낙원신화는 에스겔 28:11-19절에 나오는 두로왕 심판예언에 있습니다. 두로왕 심판에서 보면 두로왕이 심판 받는 이유가 무역을 하면서 남을 억울하게 하는 죄악을 지은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이 낙원신화는 더 고대의 것으로 보이며 원형적 인간인 남자가 범죄 하여 낙원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남을 억울하게 하는 죄가 바로 선악과를 따서 먹은 죄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적이며 책임적인 인간존재의 본질과 선악과의 내용을 암시해 줍니다.
공존을 위해서는 공의 영역이 절대 필요합니다. 선악과는 바로 이 공존을 위한 인간 공동체를 위해 거룩한 것으로 구별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금령의 신성한 것입니다. 공의 영역은 소유가 아닌 섬김의 영역입니다. 공의 영역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여기서 한 인간 존재의 존재됨과 존재의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은 인간의 자유, 생명, 인권이 보장되는 곳이며 불평등이 극복되는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로 그것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 공의 영역은 신성시되어야 합니다. 공의 영역에 대한 경외감의 부재가 사유화와 소유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하늘)과 민(사람)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이 엄수되는 곳입니다. 공의 영역은 좁게는 가족 안에서, 넓게는 사회, 국가, 세계 안에서 모두 유지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설화는 공존의 인간상이 붕괴되는 것을 악의 원초적 현실로 묘사합니다. 공의 영역에 대한 사유화의 금지는 공에 대한 경외심에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금령, 그것은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지켜야 할 절대적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법을 맺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공에 대한 경외의 의식을 말해줍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힘은 신과의 계약이라는 관념이 이스라엘 고대사회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버팀은 하나님의 법령인 것입니다. 신의 금령에 의해서 공적 영역이 유지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을 사유화할 때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은 공간적 의미보다 관계의 파괴로부터 갖게 되는 고통과 갈등의 현실을 의미합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하나님을 실제로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은 어찌 멀리 계십니까 라는 예언자들의 외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과 생명이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가 끊어지면 죽음이다라는 이해에 기초한 절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공의 영역을 사유화해 나가는 역사와 그 공의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 역사의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세기 2-3장의 야훼문서 기자는 다윗-솔로몬 시대의 기록자입니다. 그러므로 왕조사에서 어떻게 그 공의 영역이 사유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아 왔을 것입니다(학자들에 의하면 야훼문서 기자는 다윗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본다. 따라서 야훼문서 기자가 직접적으로 다윗을 비난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공 개념으로 기록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가나안 정착 후 사회변혁의 두 요인은 도시화와 군주체제로서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군주정치 체제였습니다. 사사시대를 초기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사사시대는 공공영역이 사유화되지 않았고 야훼중심의 종교적 집단을 이루었습니다. 부족동맹체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간의 관계로 모두의 평등함을 전적으로 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정시대에는 다윗이 무력으로 왕좌와 수도를 차지하고 예루살렘을 왕의 사유지로 만들었으며 군사력 강화를 위해 경제적 부담이 커지는 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땅의 사유화에 더욱 전력하였습니다. 정복전쟁 후에는 다윗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처, 첩, 종이 필요했고 막대한 경제력 확보가 요구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더 화려했고 삼천 궁녀에 율사 등 막대한 경제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군주들은 무력이나 돈으로 가나안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이스라엘 토지는 매매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왕은 대 지주가 되어 땅을 확장하였으며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전전긍긍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왕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입니다. 아합왕이 사유지를 넓히기 위해 왕궁 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그에게 팔기를 권했으나 나봇의 거절로 아합이 고민하자 이세벨 왕비가 '당신의 왕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부추겨서 결국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세벨는 가나안 여인이었고 가나안에서는 왕이 모든 소유권을 가집니다. 가나안은 공의 영역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노태우씨 비자금 파문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우리들에게 극도의 슬픔과 아픔을 갖게 하였다면 이번 노태우씨 사건은 극도의 허탈감과 무기력증을 갖게 합니다. 너무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오히려 감각을 잃고 멍해지는 상태가 되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습니다. 분기충천해야 할 국민들이 검찰의 수사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문제의 결말이 완벽한 수사진행으로 제대로 법적 심판이 내려져야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피를 보게 되던가 아니면 폭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사건을 사회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기회로 삼아보자는 적극적 대응자세가 필요하지만 너무도 상처가 지저분하고 깊어서 대대적인 수술의 진통 과정을 갖지 않고서는 국면전환이 어렵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어떻게 이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허탈과 무기력증 그리고 불신으로 채워진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상처투성이의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생산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근본적 윤리의식의 문제를 보다 심각히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 사회가 이토록 부패할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으며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가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사회의 총체적 부패현상을 가로막고 그것을 상쇄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부패로 달리는 시류에 편승하였던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차근히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재점검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이를 확장시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먼저 우리사회의 공에 대한 의식문제를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지극히 상식적 수준의 공의식이 결여됨으로 말미암아 모순 투성이의 사회로 전락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영역을 경건하게 회복해 내야 사회적 희망이 있게 됩니다. 너무나 무감각해진 공의식과 공공성의 부재현실은 이기적 행위를 가없이 허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는 대체로 전체에 대한 의식이 미숙하고 부족합니다. 우리사회의 공동체 형태는 씨족중심의 촌락 공동체적 유산이 수천년간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산업화 과정을 통한 시민사회의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씨족 집단적 친밀성은 강한데 그것을 넘어선 '공공성'에는 감각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명절에 2천만이 대 이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 행렬은 교통 무질서와 쓰레기 오염으로 공공시설을 파괴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또 자식 합격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됩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 행위에 대해 일정 정도의 이해를 합니다. 친밀 집단인 자기 패거리끼리의 결속이 강하고 학연, 지연, 혈연 등 인맥을 따라 사회가 움직이며 거기서는 의리가 논리보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소단위 집단의식은 유교적 가부장주의의 위계질서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의 폐단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물질을 수단으로 하고 이에 기업은 권력의 권위에 굴복하고 또 적당히 아첨하여 특혜를 받아내어 자기 기업 확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러한 사회풍토에서는 공동체적 공공의식이 자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적 공공의식은 사적 영역보다는 공공의 영역이 풍요로워지게 하여 전체사회 속에서 한 작은 개인의 소외도 없도록 전체 공동체의 복지를 우선하는 의식입니다. 공공영역의 사유화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고 싶어하던 그 때처럼 된 것 같습니다.
다시 성서 본문의 의미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야훼문서 기자는 공적 영역이 이미 사유화된 현실을 보면서 쓴 글입니다. 물론 야훼문서 기자의 창세기 2-3장에 대한 전체적 메시지는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하나님이 주신 생기를 가지고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간의 실존적 이해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조리한 현실을 읽어낸 기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죄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죄와 벌, 그리고 회개와 구원의 반복을 말하면서 인간 실존의 모순된 현실을 인간의 죄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먹지 않으면' 동산에 머무르고 앎(지식)을 갖지 못하고 새로운 인간역사의 세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으면' 지식을 획득하고 역사세계에서 삶을 시작하지만 물질의 풍요도 보장되지 않고 사회적 조화가 결여된 좌절되고 유한한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 현실은 이미 선악과를 따서 먹은 실존적 현실로부터 이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실존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를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에덴에 머무를 수 있는 길을 말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야훼문서의 기자가 되어, 우리의 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읽어내면서 이 시대의 금령의 결과를 말하고, 우리 삶의 경건성과 절제와 사유화에 대한 고발과 공유화를 위한 부단한 예언자적 정신으로 말을 하고 그래야 선악과를 그대로 두고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종교는 이 공에 대한 신적 경외감을 상실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 영역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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