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

창세기 한완상............... 조회 수 2294 추천 수 0 2008.01.13 16:44:44
.........
성경본문 : 창1:31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지난달 미국 카터센타에서 북미 기독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 북한대표 7명이 참석했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술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오늘의 남북관계는 참으로 좋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북한의 여러 곤경소식을 들으면서, 그곳의 2,300만 굶주리는 동족의 아픔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지도자들, 특히 강경세력의 잘못으로 고생하는 우리겨레의 고통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저는 그 회의 만찬사를 대표로 하면서 하나님의 샬롬의 빛 아래서 오늘의 부끄러운 조국현실, 분단현실을 잠시 조명해 보았습니다. 창조의 그 조화로움과 샬롬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단계를 하나씩 끝마치실 때마다 언제나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는 그저 좋다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다'라는 말에는 아름답다, 선하다, 건강하다, 평화롭다(샬롬)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이 세상은 참으로 좋고 아름답고 선하며 건강하고 평화로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본질(하나님의 형상) 그대로를 바탕으로 해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에 교통과 화목이 있어 참으로 좋은 상태가 생기게 됩니다. 그랬기에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도 "심히 좋다"고 말씀하실만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평화롭고 아름답고,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상에서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참으로 좋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그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까? 모르긴 해도 이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던질만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들 인간의 모습은 본래의 건강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움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탐욕과 이기심과 불신으로 깨어지고 망가지고 비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참으로 좋았는데, 우리의 역사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무질서하고 혼돈 상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우리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질서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본질을 망각한데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고 따르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인간의 탐욕과 독선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질서의 세계, 다시 말해 '참으로 좋았던 이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되게 하시는 힘을 예수님의 활동과 성령의 활동 또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 안에서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대통령이나 장관과 같은 세상의 공(公)적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의 삶을 '공생애'라고 말합니다. 공생애란 무엇입니까? 퍼블릭 라이프(public life), 즉 공적인 활동을 하는, 공적 지위를 가진 삶을 의미합니다. 평범한 시민의 삶에는 결코 공생애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은 분명 '더불어 함께 사는' 공생애의 올바른 길을 우리에게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지위도 없었지만 그분의 삶 자체는 감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인 공생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출발점으로 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까요? 또 그러한 평범치 않은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처음을 알리는 아주 기념적인 취임식이 있었을 겁니다. 그 취임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철학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의 취임사에서 통치이념과 정치철학을 밝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193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그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뉴딜(New Deal)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뉴프론티어 정신(New Frontier Vision)을 내세워 미국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취임사에는 공적 활동을 시작하려는 사람의 기본 정신과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치적을 알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취임사부터 분석하는 일이 첫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로서는 마땅히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의 취임사를 분석해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취임사를 모르고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한낱 공허한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즉 하나되게 하시는 활동을 우리가 확인하려면 예수님의 첫 설교인 나사렛 교회에서의 설교를 의미 있게 읽어보아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4:18-19).

이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취임사의 청중이 누구였을까를 한번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아마도 이 말씀을 듣고 가장 좋아했을 만한 사람들이 일차 청중이었을 겁니다. 성서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깨어진 인간, 비뚤어진 인간, 외로운 인간, 괴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탐욕이라는 인간의 장벽 때문에 억눌린 사람들, 포로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어딘가 고장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데 공적인 삶의 표적을 두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에 마땅한 보상이 따라주지 않는 잘못된 장벽 때문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과 용기를 주고자 하신 겁니다. 이것은 크게 보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장벽을 허물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깨어지고 흩어지고 아프고 괴롭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온전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정말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선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프로그램이었으며 공적인 취임사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시기와 장소를 생각해 보면 주님이 얼마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예수님이 언제부터 공생애를 시작했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서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다"라는 구절에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적 활동을 아무렇게나, 또 아무데서나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신 것은 요한이 잡힌 후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왜 요한이 잡힌 후에 말씀을 선포하셨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잡혔다는 사건의 상징적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세상이 캄캄해지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지난 날 우리의 쓰라린 경험으로 말한다면 공안정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요한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른말하고 옳은 소리하는 사람들'이 잡혀가게 되었으므로 세상은 이제 바르지 못하고, 옳지 못한 것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선포된 장소가 왜 하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였을까요? 여기서도 갈릴리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라는 곳은 밑바닥, 흑암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장소였습니다. 밝고 희망찬 곳이 아니라 어둡고 외로운 곳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선포된 시간과 장소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서 판단할 때 가장 아름답지 못한, 어둡고 캄캄하고 비뚤어진 상황과 시대와 장소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가 완전히 캄캄할 때 조그만 불씨 하나가 아주 밝게 느껴지듯이, 당시의 추하고 악한 세속 권력에 의해 역사 현실이 캄캄해진 상황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그만큼 더 소중했던 것이죠. 어두움에서 밝음을, 깨어짐에서 온전하게 하나되게 하심을 이루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뜻은 그분의 활동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두 가지만 더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고치실 때 감기나 해소, 천식과 같은 사소한 병을 고치셨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어려운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 문둥병, 맹인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죽은자까지도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기적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중환자들을 대상으로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생각건대, 그것은 고질적인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야말로 창조질서의 아름다움이 가장 처참하게 깨어져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들에게 나타났던 놀라운 역사는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가장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성서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의 정신병 환자들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독하게 정신이 갈라지고 쪼개진 그 사람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군대는 로마군단 레기온의 이름입니다. 즉, 수천명으로 이루어진 로마군단의 이름이 바로 마귀의 이름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로마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압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로마군단의 숫자만큼 그 사람의 정신이 쪼개져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입니다. 가령 로마군단의 숫자가 3천명이라고 한다면, 그 마귀 들린 사람의 존재는 바로 3천개로 쪼개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잡귀신들이 한 사람의 정신 속에 들어가 앉았으니 어떠했겠습니까? 그 사람은 쇠고랑을 차고 있었지만 군대마귀가 힘을 발휘해서 쇠고랑을 끊어버렸으며 돌로 자기 몸을 쳐서 상하게 하기도 했고, 게다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어서 아무도 없는 무덤가에서 홀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치유의 역사를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써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던 모든 잡귀신들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시고 그를 말짱하게 해주셨습니다. 말짱하다는 것은 쪼개진 정신들이 하나가 되고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께서는 마귀에 들려 갈라져버린 정신들을 하나로 온전하게 만드시고, 찢어진 것들을 합쳐서 우리에게 봉사와 치유,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만약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갈라지는 일에 앞장선다면 솔직히 말해 그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마귀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도 하나된 예를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에 처음으로 성령이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도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사도행전 2:1-11).

위의 구절에서 보면, 오순절 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이 내렸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데 그 방언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각기 다 자기 고장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성령의 놀라운 힘이 역사 하여 언어와 지리, 문화와 정치체제,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하나로 되게 하기 위해 서로를 통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임하여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던 개체들을 하나로 상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서로 통해야만 합니다. 서로 통하지 않고 자기 것만 고집하면서 갈라선다면 그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진실로 성령에는 모든 언어와 문화적 장벽을 허물고, 성령 받은 이들이 다 하나로 알아듣게 하는 힘이 있는 까닭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 얘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전에 저는 부덕한 소치인지는 몰라도 감옥에 가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거기서 느꼈던 점은 사람이란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존재구나 라는 거였죠. 제가 감옥에 갔을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싹쓸이를 하던 때라 교도소마다 교도관은 물론이요 헌병까지 겹겹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헌병이 교도소까지 들어왔던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 그럴 정도로 당시의 교도소 분위기는 무시무시하고 살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옆방 사람들과 통방을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죠. 그야말로 생벙어리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면회 왔던 집사람한테서 무슨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옆방 친구와 바깥 사회에서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는데도 제가 들었던 소식을 그 친구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생각이 가슴을 태웠습니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크게 내면 교도관한테 금방 야단을 맞게 되니까 소리를 내어 말할 수도 없었죠. 결국 소리를 내지 않고 얘기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창살 앞에다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글씨를 쓰거나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벙긋거리며 크게 말하는 것이었죠. 그 때 제가 있던 방 앞에는 지금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H씨와 그 옆에는 K씨, 또 송건호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로부터 어떤 소식을 듣게 되면 곧 그들과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곤 했죠. 헌데 문제가 있었어요. 저는 소식을 전할 때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도록 글씨를 크게 쓰거나 천천히 입을 벌려 말을 했는데, 송선생은 어찌나 글씨를 빠르고 작게 쓰는지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럴 때면 무슨 얘기인지 알고 싶어서 미칠 것처럼 안달이 나곤 했습니다.

동물에게는 이렇듯 의사소통을 하려는 욕구가 절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은 의미 있는 상징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절실합니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죠. 저는 그것을 감옥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사각의 공간, 특히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절감할 수가 있었죠.
사람에게 있어 커뮤니케이션, 즉 상통의 욕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욕구를 본질적으로 아름답게 보는 종교가 다름 아닌 기독교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는 구절을 저는 요즘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즉 하나님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아! 아담아!"하고 말씀으로써 불러 찾으셨는데, 이는 아담과 서로 통하려 하셨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우리들 역시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통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 '저 사람은 나하고 말이 통하는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저 사람을 내가 알아. 그리고 이해해. 저 사람은 믿을만해. 그래서 저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어'라는 뜻입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일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 지붕밑에 살면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비극적인 일까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와 집사가 각자의 세력이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헐뜯고 내리누르는 등의 모습을 보는데, 이는 서로의 의사가 하나로 소통되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성령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초대교회에 임했을 때 일어났던 첫 역사가 바로 서로 말이 통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이 자기 말로 방언을 하는데 그것을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 고장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만민의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4절 이후의 내용에서도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과는 상통하는 일조차도 매우 불경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의 집 지붕 위에서 본 환상을 통해 "불경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더욱 기가 찬 노릇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를 하는 도중에 성령이 내린 사실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깜짝 놀라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죠. 이것이 곧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입니다. 그 전환으로 하여 유대교라는 조그만 씨족 종교가 세계 종교로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조그만 씨족 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드는 놀라운 힘이 성령에 내재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전에 제가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통일원의 책임을 맡았던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남북(南北)대화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 듯 싶습니다. 북쪽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헌데 그보다 더 어렵고 놀라웠던 것은 남남(南南)대화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저를 어렵게 했던 일은 기독교 신자들끼리의 대화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가장 강해야 할 크리스천 사회에서 냉전의식과 적대의식과 분단을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하는 잘못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논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갈라지고 깨어진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누구보다도 갈라지고 깨어지고 온전치 못한 것을 하나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 일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서 하나되는 의미를 되새겨보려 합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도 나오는 얘기입니다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있어서는 안되며, 또 있을 수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는 참으로 많은 장벽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계급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차이, 시각의 차이 등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높고 견고한 장벽이 쌓이는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장벽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미움과 갈등이 그칠 줄 모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등을 돌리고 갈라서는 일처럼 엄청난 비극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장벽들을 허물 수 있는 논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코 '때문에'의 논리가 아닙니다. 사람 사이의 단단한 장벽을 허물 수 있는 큰 힘을 바로 '불구하고'의 십자가의 논리이며,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 사랑의 논리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서든 쉽게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십자가는 분열에서 하나로 가는 상징입니다.
우선 십자가의 모양을 보면 동서남북이 있습니다. 동과 서의 나누어짐, 남과 북의 나누어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나누어짐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남쪽과 북쪽이 갈라져 있고, 또 동쪽과 서쪽으로도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만큼 십자가의 사랑이 절실한 나라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세계가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만 남쪽이 북쪽을 보고, 서쪽이 동쪽을 보고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절대로 너하고는 합칠 수 없어"라고 주장한다면 정말이지 절대로 합칠 수 없는 상황만 계속될 것입니다. 만약 '때문에'의 논리로만 따진다면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것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이 내 눈을 뽑으면 나도 상대의 눈을 뽑고, 내 이를 뽑으면 나도 상대방의 이를 뽑으면 된다는 대결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더욱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죄인임에도'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구원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네가 나에게 이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불구하고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통일원을 맡아서 일을 할 때 이 '불구하고'의 논리를 실천했다고 자부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인모 노인을 북한으로 보낸 것인데, 그것은 북한이 우리 정부에게 하는 바를 조목조목 따져서 대응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의 전임자가 이인모 노인을 북쪽으로 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결국 관철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판단하길, 새 정부의 도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불구하고의 논리'로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북쪽에서 귀순한 어느 군인의 귀순 동기가 바로 이인모 노인의 귀환 때문이었다고 하는 고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군인은 북한에 있을 때 이노인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북한 같았으면 저런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앴을 텐데 남한은 정말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래서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의 역사는 저런 엉뚱한 곳에서도 일어나는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우리가 만약 이 '불구하고의 논리'를 쓰지 않고 '때문에의 논리'를 쓴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실상을 살펴봅시다. 한국 교회에서 최대의 교파를 차지하는 것이 장로교입니다. 그런데 해방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로 딱 갈라져서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한 몸이었던 지저스(예수)와 크라이스트(그리스도)가 서로 분열된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예수교 장로교가 다시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져버린 일입니다. 도대체 그 두말이 서로 다른 말입니까? 합동이라는 말도 '하나되자'는 의미이고, 통합이라는 말도 '하나되자'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합동!" 하면서 분열하고 "통합!" 하면서 갈라지고 찢어지는 것이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차라리 나쁜 짓 하면서 내가 나쁜 짓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한 일입니다.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참으로 좋다!"고 찬탄하셨던 그 때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찬탄을 들을 수 있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825 창세기 두 가지 사명 창1:28-2:3  강보형 목사  2008-01-24 2012
» 창세기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 창1:31  한완상 형제  2008-01-13 2294
823 창세기 열명만 있어도 창18:32-33  손운산 목사  2008-01-10 2281
822 창세기 기도로 승리한 야곱 창32:24-32  강종수 목사  2008-01-06 2570
821 창세기 명절의 만남 중요한 것은... 창45:4-10  김필곤 목사  2007-12-25 2276
820 창세기 공(公)에 대한 경외 창2:7-18  최만자 자매  2007-12-20 1808
819 창세기 다시 만나는 사람들 창33:1-11  박동현 목사  2007-12-19 2172
818 창세기 하갈의 하나님, 그리고 사라의 하나님 창16:7-16  최만자 자매  2007-12-18 2859
817 창세기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 창1:16-18  최만자 자매  2007-12-17 2026
816 창세기 창조의 미래 창2:1-3  길희성 형제  2007-12-12 1685
815 창세기 전화위복의 감사 창50:19-21  한태완 목사  2007-12-11 2926
814 창세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14:17-21  천세영 형제  2007-12-07 2352
813 창세기 삶의 찬가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2-05 2153
812 창세기 형제를 위한 희생 창14:1-16  한태완 목사  2007-11-25 2311
811 창세기 믿는 자에게도 기근이 창12:10-12  한태완 목사  2007-11-25 2482
810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 창1:26-31  길희성 형제  2007-11-22 1203
809 창세기 신실하신 하나님 창7:6-24  한태완 목사  2007-11-18 3273
808 창세기 나와의 씨름 창32:23-3  권진관 형제  2005-02-16 3941
807 창세기 쉼의 저항 창2:1-3  최만자 자매  2005-02-01 2481
806 창세기 나를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요 하나님... 창45:1-8  김이곤 목사  2004-08-27 2755
805 창세기 선악의 지식은 어떻게 위험한가? 창3:1-7  정대현 목사  2003-10-03 2887
804 창세기 정말 긴 씨름을 하고 나서 창32:22-32  최만자 자매  2003-09-07 3338
803 창세기 하늘을 바라보라 창15:5-6  한태완 목사  2007-11-10 2727
802 창세기 버리고 포기하라 창13:5-18  한태완 목사  2007-11-02 2741
801 창세기 하나님과 동행 창5:21-24  한태완 목사  2007-11-02 3101
800 창세기 어리석은 선택 창25:21-34  한태완 목사  2007-11-07 2579
799 창세기 불심판이 농담이냐? file 창19:12-16  강종수 목사  2006-12-17 2690
798 창세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file 창3:7-10  강종수 목사  2006-10-29 2722
797 창세기 죄의 정체와 활동 file 창3:1-13  강종수 목사  2006-08-06 2121
796 요한계시 교회를 성경대로 계2:1-7  강종수 목사  2009-03-09 1674
795 요한계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계2:8-11  이한규 목사  2008-12-23 1779
794 요한계시 무엇이 보이느냐? 계3:16-22  전원준 목사  2008-10-04 1814
793 요한계시 뜨거운 사람이 되자 ! 계3:14-22  전원준 목사  2008-09-27 1922
792 요한계시 살아있는 신앙인의 참모습 계3:1-6  전원준 목사  2008-09-20 1929
791 요한계시 끝까지 잡아라 계2:18-29  전원준 목사  2008-09-13 1708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150 세종시 보람1길12 호려울마을2단지 201동 1608호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