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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과 주장하는 삶

창세기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995 추천 수 0 2008.05.28 08: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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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2:15-19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순복음중앙교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많括?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어진 삶과 주장하는 삶”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부모님 슬하에서 부모님이 정해주신 삶 즉, 주어진 삶을 살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자기주장을 하게 되고 종국에는 부모님을 떠나 독립하게 됩니다. 군대생활도 그러합니다. 군에 입대하면 군에서 정한 규율대로 살아가야 하며 자기주장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군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살다가 제대하면 자기주장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슬하에 살면서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부모님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되며 군 생활 중에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 순복해서 살면 평안을 가지고 조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운명이란 말을 종종 쓰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생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우리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주어진 삶을 산다는 생각입니다. 이 막강한 운명이란 섭리에 대항해서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 주어진 삶을 예정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즉, 하나님이 주신 삶에 자기의 주장을 혼합하면 그때부터 많은 마찰과 슬픔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주어진 삶과 자기주장, 그 첫번째

첫째로, 아브라함이 주어진 삶에 자기의 주장을 한 첫 번째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남은 여생에 해야 될 일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갈대아우르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어진 삶을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너는 네게 주어진 이 삶을 살아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남은 여생은 하나님이 주신 그 삶을 살도록 예정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주어진 삶에 자기주장을 섞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로 5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주실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날 것은 떠나고 오직 데리고 갈 것은 자기 아내 사래만 데리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브라함은 자기주장을 섞었습니다. 사래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아비 집에 속한 조카 롯을 데리고 갔고 너희 전토를 떠나라고 했는데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안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의 주어진 삶에 자기의 주장을 섞었습니다. 그래서 혼합된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거기에서는 마찰과 슬픔이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어진 삶만 살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 같이 하시지만 하나님의 주어진 삶에 자기주장을 섞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마찰이 다가오게 되고 슬픔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땅에 갔는데 그 축복으로 주신 땅에 기근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큰 꿈과 희망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기근이 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산천초목이 다 불타고 물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마실 물이 없으므로 가지고 온 짐승 떼가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종들과 데리고 온 일가친척들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서 고향땅으로 돌아가 버리고 결국에는 아브라함은 결국 그 아내 사래와 아비집의 소유인 조카 롯과 세 사람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큰 실망을 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다가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생애 속에 큰 삶의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어진 삶을 살 때 자기주장을 섞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기주장을 분리할 때까지 기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회개하고 자복하고 자기의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삶으로 나아갔으면 참 좋겠는데 여러분 우리 믿음의 조상도 우리와 별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의 삶의 방향을 회개와 순종으로 정하지 못했습니다.

2. 주어진 삶과 자기 주장, 그 두번째

아브라함의 주어진 삶과 자기 주장의 두 번째 경험을 우리 보십시다. 주어진 삶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라고 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주어진 삶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 이외 다른데 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2장 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그곳에 단을 쌓고 장막을 쳤으면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풍년이 오나 기근이 오나 회개하고 순종하고 그곳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주어진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어진 삶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삶의 두 번째 자기주장을 하나님의 주어진 삶에 섞었습니다. 자기주장은 뭡니까? 창세기 12장 11절로 13절에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주어진 삶은 가나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주장을 했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하니까 애굽으로 내려가자.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어지신 삶에 아브라함은 자기주장을 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그는 이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보고 내 보기에도 당신은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래가 굉장히 미인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75세가 된 아브라함이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가 아리땁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한 6개월 살고나면 아리따운지 아리땁지 않은지 모르는데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때까지 그 아내가 아리따웠으니 사래가 보통 미인은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까 겁이 덜컥 났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당신이 내 아내인줄 알면 나를 잡아 죽이고 당신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를 여보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말해라.” 요사이 같으면 괜찮지요. 요사이는 다 오빠라고 그러잖아요. 결혼하고 난 다음 자기 남편보고도 늘 오빠, 오빠 그래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진짜 오빠고 남편은 진짜 남편이었어요. 그래서 그 아내에게 자기 생명을 구걸하는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어진 삶을 살고 가나안에 있었으면 이런 곤란이 없지 않겠어요. 거기에 자기주장을 섞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또다시 하나님의 마찰과 많은 슬픔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애굽에 내려갔을 때 우려하던 그 사실이 일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4절로 15절에 보면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여기 애굽 여인들이 보니까 그 여인이 보통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심히 아리 아리따웠습니다. 그 부인은 적당해야지 너무 아리따우면 벌레가 붙어서 안돼요. 그 아리따운 부인을 두고서 안심할 수가 있나요? 아브라함도 이 나그네 생활하면서 부인이 너무 아리따워서 너무 고생 많이 했어요. 그 애굽 사람이 보니까 너무 아리따운지라 소문이 쫙 퍼지니까 그 당시에 군주적인 권력을 가진 임금이 가만히 있을리가 있어요? 임금이 아브라함과 사래를 궁으로 청했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사래가 아브라함보고 “오빠~” 참 좋지요. 왕이 달려가 “아니 아직 결혼 안했어요?” 아르바라함이 “예~ 내 여동생이올시다.” “아 그래요? 그것 참 잘됐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나에게 주세요. 내가 아내로 삼겠습니다.” 백주에 눈뜨고 아내를 뺏겨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나님의 주어진 삶을 가나안에서 살고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기주장을 섞어서 애굽으로 내려 왔으니 반드시 마찰이 생겨나고 슬픔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날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의 바로왕의 처남이 되어 가지고서 바로가 주는 양식을 받아먹고 바로 궁에서 사는데 여러분 그게 사는 생활이겠습니까? 자기 아내는 바로에게 시집을 보내놓고 자기는 바로의 처남이 되어가지고서 그곳에서 얻어먹고 사는 아주 비극적인 사람입니다. 아마 가슴을 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중한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으면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지 내가 잘살겠다고 애굽으로 내 주장대로 내려온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는 어마어마하게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화를 내렸습니다. 바로의 가정에 왜 이런 무시무시한 화가 있는지 알아보니까 결국에는 사래로 말미암아 그 화가 왔으며 사래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을 불러다가 크게 꾸짖고 그리고 그 아내를 자기가 취한 것을 배상했습니다. 금과 은을 많이 주고 짐승 떼와 노비를 주어서 애굽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회개하고 다시 돌이켜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니 하나님께서 그 고난에서 그를 풀어 줬습니다.

3. 주어진 삶과 자기 주장, 그 세번째

그런데 이제 세 번째 아브라함의 주어진 삶과 자기주장을 보십시다.아브라함은 이제 완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어진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생의 본분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13장 1절로 2절에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런데 이제 순종해서 아브라함이 살아야 될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옆구리에 혹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하란에서부터 따라온 그 조카가 가나안에도 왔다가 애굽까지 데려왔다가 또다시 붙어서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의 정이란 것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으므로 조카를 자식같이 길렀기 때문에 그 조카를 떼어 내지 못합니다. 도저히 못 떼어내요. 하나님은 조카를 떠나라고 했는데 조카 때문에 아브라함은 일생에 늘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올라와서 아브라함이 조카에게도 살림을 좀 나눠 주어서 조카의 짐승떼들과 아브라함의 짐승떼들이 풀을 서로 점령하기 위해서 우물물을 서로 점령하기 위해서 그 목자들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그 싸움이 심해져서 온 이방인들에게도 소문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그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고 난투극을 벌인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주어진 하나님의 삶을 살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 조카를 데리고 온 것이 끝까지 화근이 되고 끝까지 고통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 결심을 하고 조카와 헤어지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삶 그대로를 살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8절로 9절에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갈라지자고 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우리 순종하자.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인 것은 아브라함이 어른 아닙니까? 내가 우하면 너는 좌하고 내가 좌하면 너는 우하라. 이렇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겸비해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로가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로 가고 네가 주도권을 가지고 헤어지자.” 그래서 롯은 그곳에서 요단 뜰을 바라보니 좋다고 생각하고 물이 넉넉하고 풀이 많은 요단 뜰로 내려갔다가 소돔고모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고 아브라함은 산지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주어진 삶을 아브라함이 받아 들였을 때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자기의 주장을 다 꺽어 버리고 온전히 이제는 가나안 땅에 자기와 아내 사래와 함께 남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8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있었으면 축복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주장을 섞고 있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다 버렸을 때 롯이 아브라함이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원래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떨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되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삶을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신 삶에 우리의 주장을 섞어 놓으면 그 섞어 놓은 주장이 옮겨갈 때까지 그 삶 속에 마찰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는 절대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섞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중국의 순임금이 하루는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망태기 하나씩을 줄테니 우물에 가서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오너라.” 여러분 망태기는 구멍이 숭굴숭굴 났는데 거기 망태기에 어떻게 물을 담아 임금에게 가져옵니까? 그러나 한 15명되는 신하들에게 망태기를 하나씩 내어 주면서 물을 담아서 왕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도대체 임금님이 치매에 걸리셨나?” 이런 명령이 어딨느냐? 그래서 14명의 신하들은 망태기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여기에다가 물을 담아서 어떻게 가느냐? 그런데 한 신하는 우물물에 가서 하루 종일 물을 퍼서 망태기에 붓고 다 빠져 버렸지요. 또 퍼서 또 망태기에 붓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그 망태기에 물을 부으면 빠질 것 아는데 하루 종일 땀을 흘리고 손이 부르트도록 물을 푸고 있습니까?” “나도 망태기에 물이 새는 것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임금님 명령에 순종해서 망태기에서 물을 셀 줄 아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물을 붓는 것은 임금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명령이 끝날 때까지는 망태기에 물을 담아야 됩니다.”
절대 순종을 했습니다. 저녁 해가 뉘엇뉘엇 질 때 우물물이 말랐습니다. 물을 다 퍼냈으니까 이제는 아무리 물을 길어도 물이 안 차오릅니다. 그래서 허리를 굽혀서 우물 안에 들어가 보니까 밑바닥에 이만한 금덩어리가 하나 있어요. 너무 기쁘고 놀래서 그 금덩어리를 퍼 올려서 그것을 안고 임금에게 뛰어 갔습니다. “임금님! 물을 하루 종일 퍼서 망태기에 담아도 물은 담기지 않았는데 우물물은 다 없어지고 밑바닥에 이 금덩어리가 있어서 임금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임금님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 금덩어리를 내가 숨겨 놓았다. 순종하는 사람이 그 금덩어리를 차지하게 하려고 내가 물을 끝까지 푸는 사람이 그 금덩어리를 가질 수 있도록 금을 숨겼는데 열네 사람은 다 불순종하고 너만 순종해서 물새는 망태기에 물을 퍼 담았으니 너는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 금덩어리를 내가 네게 상급으로 주노라” 그래서 이 사람은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우리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끝까지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순종에 대해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어진 삶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종이요, 시종이요, 머슴이요, 일꾼입니다. 머슴과 일꾼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 자기주장을 하면 주인에게 쫓겨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사건건이 하나님의 주어진 삶에 조금씩 조금씩 자기주장을 섞었기 때문에 큰 시련과 환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올라 왔을 때는 이제는 주어진 땅으로 왔고 조카 롯도 떠나보내고 온종일 순종하매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4. 주어진 삶과 자기 주장, 그 마지막

이제는 네 번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삶과 자기주장의 마지막 장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삶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2절에 말한 것처럼“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식이 없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없지요. 하나님이 분명히 주어진 삶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올라와서 10년이 되어서 나이 85세가 되었는데도 자식이 없어요. 자기는 85세고 자기 아내 사래는 75세입니다. 이제 인간으로 생각하면 자식을 얻을 수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삶은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했는데 자기 인간으로 생각할 때는 이제 자식을 낳을 나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그만 또 자기주장을 섞었습니다. 사람이란 여러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순종합니다. 해도 곤란한 처지에 의하면 그만 자기주장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큰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 말을 듣지 말아야 됩니다. 남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마누라 말을 너무 잘 듣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담도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아브라함도 85세까지 잘 지냈으면 끝까지 지낼 일이지 자기 아내가 자식 낳기 위해서 자기의 시종 하갈과 동침하라고 하니까 “그래 좋다~” 그리고 그 제의를 받아 들여서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으니 이스마엘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삶에 큰 마찰과 슬픔이 다가왔고 지금도 그 슬픔이 중동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면 하나님과 먼지와 티끌 속에라도 큰 민족을 이룰 것인데 인간의 수단으로 하갈을 취해서 자식을 낳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만 인간이 주장해서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낳게 되는데 여종 하갈이 어린 아기가 잉태하니까 의기양양해서 그만 여주인 사래를 보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라고” 큰 소리치니까 사래가 밤에 아브라함의 멱살을 잡고 “왜 나는 잉태하지 못하고 내 여종을 잉태시켜 가지고서 나를 이렇게 모욕을 받게 하는가? 이것은 모두다 당신 때문이야”라고 하니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멱살이 잡히고 또 가서 저녁에 또 하갈에게 가서 멱살을 잡히고 영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더구나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고 난후 아들이 달덩이 같이 잘 자라니 뭐 하갈은 점점 기세등등해지고 사래는 완전히 쪼그랑바가지가 되었어요. 그래서 가정에 불행과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살이 되니까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90살 되는 사래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본처에서 낳은 이삭과 첩에서 낳은 이스마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할 수없이 아브라함은 하갈과 함께 그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어 보냈습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이룬 민족이 오늘날 아랍민족인 것입니다. 여러분 4천년이 지난 지금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피로 얼룩진 보복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최근 1년엔 더 심각하여 자살, 폭탄테러와 미사일 공격 등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처에서 난 아들과 첩에서 난 아들의 싸움이 4천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삶에 자기주장을 보태었다가 일어난 알력과 슬픔과 고통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중동분쟁의 중요원인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랍 땅을 아랍민족들이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6일 전쟁동안에 점령한 그 땅을 아랍민족은 그 땅을 내어 놓으라고 하고 기독교, 유대교, 회교의 3대성지인 예루살렘성지를 서로 점령하려고 합니다. 90년대 이후 더욱 가속화된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난민들간에 서로 뺏기고 안 뺏기려고 충돌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식수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골란고원에서 물 문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아랍민족이 또 싸우고 있습니다. 2차 대전 후에 이스라엘이 1954년 5월 14일 독립국가를 2천년 만에 세우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아랍계 주민들이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로 아랍과 이스라엘이 싸움을 네 번이나 싸웠습니다. 전세계 유대인은 1천 3백만, 본토에는 6백만이 거주하고 있지만 아랍민족은 22개국 3억이며 아랍을 포함한 이슬람권은 58개국 16억입니다. 그러므로 270대 1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이스마엘의 장자권을 들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장자다. 우리가 정통이다. 그리고 모리아산에 재물로 드린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유대민족들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적자는 바로 이삭이요,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재물로 드린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다.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리아산에 솔로몬 성전을 세웠었는데 그 성전을 헐고 아랍민족들이 그 오마의 성전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마의 모스크를 헐고 유대인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고 유대인이 와서 절대로 성전을 못 짓는다고 하고 이 싸움은 끝이 없고 결국 이것이 3차대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불씨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어진 삶을 살지 않고 자기주장을 보탠 것이 가정적인 불화만 가져올 뿐 아니라 4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피비린내 나는 혈족간에 상잔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이 청년이 되자 하나님은 최후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리아산에 네 아들을 가지고 와서 각을 떠서 불로 태워 재물로 드려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여기에 또 아브라함이 자기주장을 주장할까요? 이제는 일생을 살면서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에 자기주장을 보태면 반드시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무조건 순종합니다. 순임금이 신하에게 망태기에다 물을 담아오라고 할 때 무조건 순종하고 하루 종일 망태기에 물을 담은 것처럼 아브라함은 뻔히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을 잡아 죽여 재물로 드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는 두말하지 않고 순종하여 그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 올라가 장작을 펼쳐놓고 아들을 묶어서 그 장작위에 얹고 발로써 그 머리를 밟고 칼로 경동맥을 끊으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삶에 절대 복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자기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간주장을 전혀 보태지 않을 때 하나님은 탄복합니다. 너무나 힘든 것 아닙니까? 외아들을 잡아서 불로 태워 재물로 드린다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 이성으로 생각할 때 가당치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 명령이면 전적으로 복종하는 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시행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기 22장 15절로 19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그 아들을 잡아 재물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를 중지시키시고 하나님은 산양을 넝쿨 풀에 엉키게 해서 예비해 놓았다. 이삭 대신에 산양을 재물로 드리고 하나님은 큰 복을 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영적인 복과 자손의 복으로 이삭과 이스라엘을 창대케 하겠다는 것, 건강장수의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은 무려 향년이 175세까지 살았으며 범사에 복을 주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삶에 우리의 주장을 섞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어주신 삶을 받아 들여서 믿고 순종하고 살아야 됩니다. 거기에 우리 주장대로 아버지의 뜻을 버리고 자행자제하면 그때로부터 많은 마찰과 슬픔과 고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면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말씀한대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놀라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단번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여 주어진 삶을 살고 자기주장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나누어 보면 4번은 실패하고 5번째에 가서야 비로서 100살이 넘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어진 삶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신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해서 많은 슬픔과 알력과 고통이 다가왔다 할지라도 항상 회개하고 돌이켜서 변화를 받고 점점 더욱 더욱 하나님이 주어지신 삶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순종하고 믿고 따를 때 여러분에게 환난과 고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은 점점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신 삶이 있는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삶이 있사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평신도로서 제직으로서 장로로서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부르신 삶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삶이 있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삶에 자기주장을 섞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자기주장을 섞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알력과 슬픔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이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충실하게 믿고 순종하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자기주장은 다 제켜 버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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