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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준비

창세기 민영진 목사............... 조회 수 2160 추천 수 0 2008.05.29 0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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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48:17-19 
설교자 : 민영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죽음학이 말하는 죽음 준비

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몇몇 사회봉사 단체와 관련을 맺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음학' 혹은 '사망학(thanatology)'이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학문의 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1) 죽음학에서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품위 있고 존엄스럽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2) 죽음학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어떤 것인지를 분석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나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공포가 어떤 것인지, 왜 그러한 공포를 갖게 되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3) 병에서 회복되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말기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라는 일이 있다는 것도, 그 일에 종사하는 기관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학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저는 제 생애에서 처음으로 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숙연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경건한 것인지, 죽는 순간에도 자기의 죽음을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연출해야 한다는 죽음에 임하는 성숙되고 품위 있는 자세가, 죽어 가는 본인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교훈을 주는지를,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웠습니다.

저는 또 제가 배운 것과 새롭게 얻은 삶에 대한 통찰을 제 아내와 아이들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저나 저의 가족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여길 일만은 아니라고 하는 것, 평소에 우리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 중에 누가 회복 불가능한 말기 환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서로 이야기하고, 장기 기증이나 장례 문제 등에 관해서도 또 남편을 잃은 친구의 아내에게 어떻게 대해야 그의 슬픔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목사로서 이제까지 기피해 왔던 죽음에 관한 설교를 할 용기도 드디어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학에서는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확고히 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1) 죽음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과제이며,
(2) 따라서 금기로 여기지 말고, 죽음의 여러 국면에 관하여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며,
(3) 특수 문제에 직면하기 위해 특수 교육을 받듯이 죽음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죽음에 성숙하게 직면할 수 있도록, 죽음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을 모르고 당할 때보다 죽음에 대한 교육을 받고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죽음에 대해 친숙해질 수 있고, 죽음이 주는 공포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4) 또한 죽음의 드라마에서 주연은 죽어 가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각자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각자가 적극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죽음학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죽음에 직면하여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이나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1) 첫 단계에서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죽음에 대해 '분노'한다고 합니다. 평생 간호사로 일하다가 은퇴한 어느 자매는 제게 목사들과 신부 중에서도 죽음에 임박하여 공포와 분노 속에서 무섭게 절규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3) 그러다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어떤 삶을 살겠다는 뉘우침과 다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 앞에서 죽음의 세력을 능가하는 더 큰 힘과의 '타협'이라는 것입니다. (4) 그러나 그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우울증'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5) 그러다가 마지막으로는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바로 이 단계에서 임종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 단계에 이른 환자들은 이미 의식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청각이 맨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고 하여 죽어 가는 환자가 말을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대화가 불가능한 일 방향 의사전달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 준비 교육을 통해 평소부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와 희망' 가운데서 임종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최종 단계를 더 첨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죽음 준비 교육은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죽음의 단계를 이해시키고, 자신이 말기 환자가 되었을 때 거기에 성숙한 태도로 부응하도록 가르칩니다. 끝까지 용기를 가지고 투병을 하는 것도 귀중한 것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도록 하는 여유와 자유를 보일 수 있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2) 평소에 각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유언을 미리 해놓는 것이라던가, 재산을 정리해 놓는 것이라던가, 가고 난 뒷자리가 깨끗하도록 치워놓는 일 등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3) 이별의 슬픔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칩니다.
(4)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이완시키는 힘을 가지도록 가르칩니다.
(5)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지 않고 자유스럽게 말함으로써 죽음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6) 자살을 방지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7) 환자의 알 권리를 인정하고 말기 환자와의 의사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줍니다.
(8) 안락사와 같은 죽음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해 사회적인 의학적인 인식을 가지도록 촉구합니다.
(9) 장기 이식, 뇌사 결정과 같은 의학적 법률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합니다.
(10) 장례식의 기능에 대해 알게 합니다.
(11) 시간의 귀중성을 인식하게 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12) 노년기를 풍성하게 보낼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13) 개인적으로 죽음의 철학을 추구하게 합니다.
(14) 여러 종교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탐구하게 합니다.
(15) 사후의 생명에 관한 인류의 오랜 인식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합니다.

고유문화 속의 죽음 준비

저는 저의 부모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46세에 첫 아들인 저를 낳았습니다. 그 때 어머니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 다섯 살이나 젊었습니다. 과수원 일로 늘 건강하게 활동하시던 아버지가 회갑을 지내고 나서, 꼬박 한 해를 중풍으로 투병을 해야 했습니다. 중풍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중풍을 취급하는 전문병원으로 가지 않고, 산부인과 친구의 병원에 입원하여, 친구의 치료 덕분에 중풍을 완치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에 대한 신뢰와 우정이 호스피스의 구실을 하여 그 병을 낫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놀랍게도 중풍으로 쓰러졌던 아버지는 한 해 후에 완전히 회복되어, 전보다 더 강인한 체력과 정열을 가지고 여든 일곱에 선종(善終)을 맞을 때까지 스물 다섯 해를 더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어머니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세상에서 누린 햇수는 일흔 하고도 일곱이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아버지보다 15세 연하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회갑이 지난 다음부터, 특히 저의 아버지가 중풍을 앓고 난 다음부터는, 맏아들인 저에게 노인들은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니 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귀뜸을 해 주곤 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서울에서 유학을 하던 맏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오는 날을 잡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가친척들과 동네 사람들 모아놓고 잔치 분위기까지 내가면서, 당신들의 수의(壽衣)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생시에 당신들의 관(棺)을 손수 짠다는 말도 듣고, 어머니가 당신들의 수의 감이라고 하면서 옷감을 준비한다는 말도 듣고 있었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맞이하려고 준비한다는 것이 이상했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내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저 자신은 그 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거기에 모인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수의를 미리 준비해 놓으면 오래 산다"고들 했습니다. 죽음을 긍정하고 그것을 숙연히 맞이하기 위하여 수의를 만들면서도,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한 것이 스물 세 살 때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연세는 예순 아홉이었고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저더러 제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지거나 일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즉각 연락할 수 있도록 어디를 가든지 꼭 연락처를 알리고 다니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아버지의 장례식 순서와 장례식에서 순서를 맡을 담당자들까지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건강한 아버지를 두고 그런 준비를 하시는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잠시였고, 저 자신도 모르게 저도 점점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예편을 하고, 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감리교신학대학 전임 강사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옛날에 사 두었던 논산군 두마면의 작은 산에 가족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70대 초반의 아버지는 대전에서 논산군 두마면까지 시외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그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려 무덤을 쓸 자리를 정리하고, 드디어 그 곳에다가 나란히 세 개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장될 무덤이고, 나머지 좌우의 두 무덤은 당신들의 두 아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묻힐 무덤이었습니다.
1972년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 여덟이 되던 해 어느 날, 대전에 잠깐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아버지와 두 어머니의 무덤 안에 관 셋을 만들어 묻었는데, 고향에 멀리 떨어져 있는 안동 김씨 큰어머니의 뼈를 추려 옮겨 묻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무덤 속에 박아 넣은 아버지의 관은 퍽 짧고 좁아 보였습니다. 작아 보인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미리 다 길이와 너비를 재어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누어서 확인해 보겠다면서 직접 거기에 누어 보더니, 꼭 맞는다고 했습니다. 관속에 누운 살아 있는 아버지를 보는 것도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죽으면 묻힐 무덤 앞으로 가서 멀리까지 확 트인 앞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좌우로는 순한 야산이 양팔을 벌린 것처럼 죽 펼쳐 있고, 정면으로는 넓은 벌판 넘어 계룡산에서 흘러내리는 산맥들이 북쪽 하늘 밑으로 아련하게 겹쳐 있었습니다. 여기가 내가 누워 쉴 자리로구나 생각하니 아늑했습니다.
가족 무덤 밑에는 작은 집 한 채를 지었습니다. 이 집은 무덤보다 먼저 지은 것입니다. 가족 무덤 앞에 있는 것이니까, 무덤을 지키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아버지는 아예 이리로 거처를 옮겼었고, 무덤 공사가 다 끝난 다음에는 부근에 밭을 일구고 유실수를 심곤 했습니다. 공사가 다 끝난 다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그 곳에 들려 땅을 갈고, 나무를 심고, 집을 수리하고, 빈 무덤을 관리하셨습니다. 가끔 대전에 들려 보면, 아버지는 그 곳에 가 계셨고, 때로는 어머니도 함께 가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80을 몇 년 내다보실 무렵부터는, 아버지는 살아 있는 당신 자신과 아들 며느리들이 묻히게 될 무덤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여든 일곱에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열 두 세 해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을 당신이 묻힐 무덤에 손수 잔디를 입히고 때를 맞추어 벌초를 하며, 그렇게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자식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저 세상을 왕래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저 세상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도 들락날락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고 살았습니다.

죽음 드라마의 주인공은 죽어 가는 사람 자신이어야 한다.

구약은 죽음을 철저히 비신화화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영역이라거나 신적인 영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약은 전반적으로 죽음을 흉한 것으로 봅니다. 죽음에는 어떠한 후광도 둘려 있지 안습니다. 무덤과 마찬가지로 죽음 그 자체도 거룩하게 구별되거나 신성한 것으로 봉헌되는 어떠한 예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예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었다 해도 죽은 다음에는 일체 화려하게 추모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이 세상 생명의 종말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죽은 자 숭배도 없습니다. 시체에 닿는 것은 부정타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은 물 세척으로 깨끗해지지 않고, 정결 예식을 베풂으로써 깨끗해집니다(민 19장). 이런 예식은 죽음의 비신화화나 탈 신성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는 죽음에 대한 어떤 신성화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임박하여 인간의 한계점에 이르러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는 유언에 대한 중요성이 더 돋보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창 48장)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맏아들 므낫세와 작은아들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을 방문합니다. 요셉은 곧 죽을 자기의 아버지가 그의 손자들을 축복해 주기를 기대하고서 자기의 두 아들을 아버지의 임종의 자리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아들의 마지막 방문을 받은 아버지 야곱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손자들을 축복할 때 오른 손은 맏손자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은 막내 손자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도록 그렇게 아이들을 야곱 앞에 세웠는데, 웬 일인지, 야곱은 그의 팔을 '엇갈리게' 내밀어 손자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요셉이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 하고 말합니다마는 그의 아버지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19절) 하고 말하면서, 모두에게 이르기를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21절) 하고 말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두 세 가지 점에 착안합니다. 하나는 요셉이 힘없이 죽어 가는 아버지를 허약한 병자로 보거나 쓸모 없는 인생으로 보지 않고 복을 빌어 줄 능력의 소유자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허약하게 죽어 가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한 민족의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고, 유한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개인의 한계를 체험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놀랍게도, 죽어 가는 야곱은 맏아들이 작은아들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사회적 통념과 같은 맏아들 기득권의 상식을 부정하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맏아들의 기득권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죽어 가는 사람 야곱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변화할 미래를 기다리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자신이 적극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 죽음의 드라마에서 주연은 죽어 가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죽음학 쪽의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에서 주연으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 낸 모범적인 예를 바로 야곱의 죽음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 자가 단순히 주인공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바꾸어 버리는 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전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망각하고 살지 맙시다.
2) 지레 죽어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처럼 무기력하게 삶을 포기하고서 살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3) 까짓 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하는 식으로 삶이나 죽음을 하찮게 여기지 맙시다.
4) 삶과 죽음을 사려 깊게 통찰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을 귀하게 간직하고 성실하게 함께 어울려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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