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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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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양현혜 목사 |
참고 : | 이화여자대학교 교목, 기독교학과 교수/새길교회 2006.1.22주일설교 |
창세기 1:26~27, 31
우리는 예배 시간에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실 너무나 큰 사건인지라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 우리 자신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을 만들어 가신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어떤 내용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1장에서는 마치 신혼부부가 새로 태어날 어린아이를 위해서 집을 새로 짓고 정원도 만들고 방을 꾸미고 배냇저고리와 입힐 옷 그리고 먹을 것을 준비 하듯이 인간 창조라는 창조의 크라이막스를 향해 차근차근 여러 가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신데렐라와 같은 만화 영화를 보면 무슨 주문을 외울 때마다 여기저기에 새로운 것들이 펼쳐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기하게 첫째 날에는 밤과 낮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땅에는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빛과 어둠을 내리셨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각종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곳에 이렇게 생명있는 것들과 생명체를 키워낼 땅과 물을 준비하시면서 흐뭇해하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지으실 때 마다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닷새간 일하시고 창조하시면서 6번이나 그 지으신 창조물을 보시고 ‘보시니 좋았다’를 연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면서 얼마나한 설레임과 기쁨이 있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사랑스러운 것이었는지, 얼마만큼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여시고 빛을 만드시고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와 그 속에 각종 식물을 만드시고 ‘이제 우리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주석서 한권 써도 될 만큼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광범위하게 일치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어떤 본질적인 속성에 관계된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그 첫째는 우리가 사물과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사물 그리고 특히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에 나의 욕심이나 이해가 투영되면 그 모습이 비틀어지기 일쑤입니다. 또한 남이 이해하는 우리의 상황과 우리가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진짜 우리가 처한 상황이란 정말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종종 오해와 분쟁이 일어납니다.
저는 저희 학교 대강당 채플에서 이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채플은 10시에 시작합니다. 그리고 10시 3분에는 출입문을 닫습니다. 더 이상 늦은 사람을 받아 주었다가는 채플이 제 시간에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이 닫히기 전에 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본, 그러나 본인은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항의합니다. 저희 이대생의 특기 하나로 뾰쪽 구두를 신고도 계단을 잘 뛰어 올라간다인데, 그것은 이 대강당 49계단 오르기의 특훈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강당 49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왔는데 누구는 지각해도 들여 보내주고 누구는 안 보내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면서요. 채플 빵구나서 졸업 못 하면 책임질 것이냐고 소리소리 지르며 심지어는 문을 걷어찹니다. 늦은 자기를 돌아보기보다는 채플 빵구 안 나게 하려고 될 수 있으면 3분까지만은 지각한 학생을 들여 보내주자는 우리의 관대함을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욕하는 것이지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 이해가 걸려 있다고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는 이러한 장면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그리고 사태를 정말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거울과 같이 맑은 심정이 되었을 때이겠지요. 이러한 거울과 같이 맑은 인식 능력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은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 냉혈한을 보면 그는 인간도 아니라고 욕을 하지요. 그런데 사랑이란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가장 소중한 한 분뿐인 아들을 내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우리를 사람되게 하는 본질이요, 또한 하나님을 닮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세 번째로는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하여도 그것이 자동 프로그래밍되어 어떤 경우에도 저절로 사랑한다는 반응 밖에 나올 수 없게 만들어 졌다면 그 사랑이 무에 그리 소중하겠습니까.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나, 충분히 사랑 안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나를 사랑한다는 선택을 해 주었을 때,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머님의 사랑을 다 큰 어른이 되는 지금에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것은 도저히 사랑받지 못 할 일을 했는데도 나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것, 그래서 우리에 대한 소망을 끝끝내 버리지 않으신 것, 어머니의 가슴이 까맣게 타도록 오래 참고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 조건없이 품어 주시는 그 사랑이 감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로 사랑하기로 선택해 주는 사랑은 고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물로서의 사랑의 고귀함을 몸소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신 할 자유까지도 함께 열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배반과 불순종의 아픔은 본인이 감수할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철없는 자식이 깨닫고 사람되어 돌아오기를 가슴이 까맣게 타도록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되기로 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데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고귀한 능력인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 창조를 마치시고서도 하나님은 흐믓해 하셨습니다. 그냥 ‘보시니 좋았다’가 아니라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셨습니다.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을 때 하나님은 인간이 배신할 가능성, 악에 굴복할 가능성도 함께 따라 묻어옴을 아셨습니다. 하여 이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도 않고 때로 진흙탕이 되어 인간들이 그 속에서 아귀다툼을 벌리리라는 것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것을 다 아시고도 이 세상과 인간을 근저에서부터 긍정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여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벌리는 모든 악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 안고 끝끝내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때로 더럽고 추하고 악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창궐하는 것도 같지만 “애야, 아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란다”라고 하시는 근원적인 축복의 말씀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속의 그리고 사람들 속의 악의 그림자를 너무나 많이 보면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결코 절망할 수 없음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긍정과 축복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창조 신앙이 없는 것이나 마찮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게 된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주일날이었습니다. 버스를 탔다가는 예배 시간에 늦을 것같아 택시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날따라 택시가 건너편 쪽에만 많고 제 쪽에는 한 참 기다려도 차 한대가 안 왔습니다. 마침 건너편을 달리던 택시 하나가 고맙게도 유턴을 해와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저를 태우고도 계속 합승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급한 저로서는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아저씨 얼굴을 보자 그만 단념이 되었습니다. 아저씨의 얼굴은 참 날카로웠습니다. 유난히도 하얗고 날이 서 있었습니다. 마음만 졸이며 겨우 연대 앞까지 왔습니다. 차선이 엉키면서 옆에 있던 하얀 색 소나타가 끼어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주먹을 흔들면서 “너 죽어 볼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정말로 그 밀집된 혼잡한 차선에서 택시를 마치 이무기가 용틀음치는 것처럼 비틀어 대면서 소나타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부딪힐 것같았습니다. 깜깍놀란 소나타도 혼비백산을 해서 신촌 굴다리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급히 달아났습니다.
겁이 더럭 난 저도 “아저씨, 저 금호 타이어 앞에서 세워 주세요”하며 후문이 못 미친 육교 앞에서 내렸습니다. 300원 남은 거스럼돈도 괜찮다고 하며 그냥 마구 내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행해 걸어오면서, ‘아, 하마터면 제 명에 못 죽을 뻔 했네’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예배당에 앉으니까 겨우 마음이 진정되면서 이번에는 그 택시 기사 아저씨의 폭발 일보직전의 분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저는 차선을 함부로 바꾸는 사람들에게 “죽어 볼래” 하고 욕을 하는 사람은 보았습니다만, 정말 차를 꿈틀대며 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내가 상처입는 것쯤은 불사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예배 동안 내내 그 아저씨가 왜 그렇게 자기 파괴적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저씨의 얼굴이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마땅히 누려야 하는 보호와 배려가 전혀 주어지고 있지 않아 두려움에 가득 차 울고 있는 어린 아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아마 그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존재에 대해 적의만을 보여주는 이 세상이 무척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무섭고 외로워 울고 있어도 누구 하나 신청도 하지 않는, 그리고 눈물 하나도 닦아 주지 않는 것이 너무 슬펐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에게 너무나 비정한 이 세상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느꼈을 것 같았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세상에 복수할 수 있다면 함께 자폭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는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차게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너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에 나의 존재를 걸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분노만이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은 사실은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 슬픔의 또다른 얼굴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냉혹함이 이렇게 불행의 씨를 뿌리고 그 씨는 점점 더 자라고 강성해 진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죄가 악의 씨를 뿌리며 그것이 날로 자라 큰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사방에 또 다른 씨를 퍼트리고 있다는 생각에 무서움증도 들었습니다. 또 세상은 왜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지 못 하는 것이 많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하며, 세상에 대해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동시에 목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같이 죽을 뻔한 그 사람의 운명에 얽혀 들지 않고 차에서 무사히 내렸다고 안도나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참 초라하고 한심스러워서 저에게도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마음이 이렇게 우울하고 산란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사무실에 놓여 있던 한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살아 있어서 정말 고맙구나! 아이야: 굶고, 매맞고 버림받고 왕따당해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책은 부스러기 선교회의 강명순 목사님이 쓴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라는 책의 겉표지 글이었습니다. 굶고 매맞고 버림받아 우리 눈에는 뭐 하나 이쁠 것이 없는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애야, 살아 있느라고 얼마나 애썼니. 살아 있어줘서 참 고맙다”라고 하실 것이라는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습0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아유, 이쁜 내 새끼, 아주 다 죽은 것처럼 보이더니 뿌리까지 다 죽은 것은 아니었구나. 너도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더니 잎 몇 개는 살아 있었구나, 아, 완전히 다 파괴된 아이는 하나도 없구나”하시며, 앞치마를 두르시고 열심히 상처를 싸메주고 미음을 끓여 먹이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기운을 차리고 무엇인가를 붙잡고 열심히 일어서 소생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신바람이 나 “야, 보기에 참 좋다”를 연발하시며 박수를 치시고 “올치, 조금만 더, 올치 잘 한다, 내 새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의 안개가 걷히면서 산란했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기쁨이 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슬픔과 두려움이 굳어 분노가 되어 버린 얼굴을 씻겨 주주시고 머리 빗질해 주시며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보아야 해, 봐라, 얼마나 번듯하고 이쁜지, 이 모습 잊어 버리지마” 하시며 우리 모두의 인생을 축복하시며 돌보고 계시는구나 하고 처음으로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로 파괴되지 않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애쓰시는데 세수 한 번 시켜 준 적이 없고 빗질 한번 해 준적이 없는 내가 무엇이라고 감히 누구의 얼굴은 밉고 더럽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 사랑하려고 해 보지도 않고 마치 남의 탓만인 것처럼 ‘세상은 썪어서 희망이 없다’고 멋대로 내던지고 손가락질하며 투덜댈 수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사랑해 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실망한 척하는 나의 영성없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다가온 성탄절을 성대히 기념하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춰 몸소 육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시며 창조 세계와 인생을 축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다시 낳으시려고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을 두고 로마서 8장 15, 16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성탄의 복된 기쁨을 맛본 우리 기독교인들은 올 한 해의 삶에 특별한 계획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해는 하나님이 가장 흡족해 하실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가장 흡족할 때는 뭐니뭐니해도 자녀가 자라 어느덧 부모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줄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충만한 자유 속에서 비록 시행착오는 있을지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이해하고 이윽고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도록 자라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장을 보는 즐거움을 고대하면서 우리를 당신과 같은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날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2002년 통계에 전국의 해체 가정 수는 96만 7,500가구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의 해체 당시 수입은 월평균 85만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심성이 좋다고 하더라도 가정을 꾸려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이러한 해체 가정에서 매년 5만~7만명의 아이들이 집을 뛰쳐나가 가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보다 싫어서 집을 뛰쳐나온 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제적, 정서적, 정신적 빈곤의 대물림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존재가 악순환의 질곡 속에서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보시니 참 좋았다”고 축복하시며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서 이 일을 거들어 달라고 우리에게 말걸고 계십니다. “알았습니다, 아버지”하고 선뜻 일어서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워 주저주저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는 “한 사람”이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 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사만 이천명을 붙잡지 못 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게도.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우리 가운데 가장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붙잡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얼굴을 씻겨 주며 ‘참 예쁘다’고 보듬어 줌으로써 여러분의 올 한 해의 삶이 더욱 따숩고 충만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우리는 예배 시간에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실 너무나 큰 사건인지라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 우리 자신도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을 만들어 가신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어떤 내용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1장에서는 마치 신혼부부가 새로 태어날 어린아이를 위해서 집을 새로 짓고 정원도 만들고 방을 꾸미고 배냇저고리와 입힐 옷 그리고 먹을 것을 준비 하듯이 인간 창조라는 창조의 크라이막스를 향해 차근차근 여러 가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신데렐라와 같은 만화 영화를 보면 무슨 주문을 외울 때마다 여기저기에 새로운 것들이 펼쳐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기하게 첫째 날에는 밤과 낮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땅에는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빛과 어둠을 내리셨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각종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곳에 이렇게 생명있는 것들과 생명체를 키워낼 땅과 물을 준비하시면서 흐뭇해하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지으실 때 마다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닷새간 일하시고 창조하시면서 6번이나 그 지으신 창조물을 보시고 ‘보시니 좋았다’를 연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면서 얼마나한 설레임과 기쁨이 있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으신 창조 세계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사랑스러운 것이었는지, 얼마만큼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여시고 빛을 만드시고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와 그 속에 각종 식물을 만드시고 ‘이제 우리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주석서 한권 써도 될 만큼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광범위하게 일치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어떤 본질적인 속성에 관계된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그 첫째는 우리가 사물과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사물 그리고 특히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에 나의 욕심이나 이해가 투영되면 그 모습이 비틀어지기 일쑤입니다. 또한 남이 이해하는 우리의 상황과 우리가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진짜 우리가 처한 상황이란 정말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종종 오해와 분쟁이 일어납니다.
저는 저희 학교 대강당 채플에서 이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채플은 10시에 시작합니다. 그리고 10시 3분에는 출입문을 닫습니다. 더 이상 늦은 사람을 받아 주었다가는 채플이 제 시간에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이 닫히기 전에 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본, 그러나 본인은 들어가지 못한 학생들은 항의합니다. 저희 이대생의 특기 하나로 뾰쪽 구두를 신고도 계단을 잘 뛰어 올라간다인데, 그것은 이 대강당 49계단 오르기의 특훈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강당 49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왔는데 누구는 지각해도 들여 보내주고 누구는 안 보내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면서요. 채플 빵구나서 졸업 못 하면 책임질 것이냐고 소리소리 지르며 심지어는 문을 걷어찹니다. 늦은 자기를 돌아보기보다는 채플 빵구 안 나게 하려고 될 수 있으면 3분까지만은 지각한 학생을 들여 보내주자는 우리의 관대함을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욕하는 것이지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 이해가 걸려 있다고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삶에는 이러한 장면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그리고 사태를 정말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거울과 같이 맑은 심정이 되었을 때이겠지요. 이러한 거울과 같이 맑은 인식 능력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은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 냉혈한을 보면 그는 인간도 아니라고 욕을 하지요. 그런데 사랑이란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가장 소중한 한 분뿐인 아들을 내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우리를 사람되게 하는 본질이요, 또한 하나님을 닮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세 번째로는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하여도 그것이 자동 프로그래밍되어 어떤 경우에도 저절로 사랑한다는 반응 밖에 나올 수 없게 만들어 졌다면 그 사랑이 무에 그리 소중하겠습니까.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나, 충분히 사랑 안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나를 사랑한다는 선택을 해 주었을 때,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머님의 사랑을 다 큰 어른이 되는 지금에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것은 도저히 사랑받지 못 할 일을 했는데도 나를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것, 그래서 우리에 대한 소망을 끝끝내 버리지 않으신 것, 어머니의 가슴이 까맣게 타도록 오래 참고 오래 기다려 주시는 것, 조건없이 품어 주시는 그 사랑이 감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로 사랑하기로 선택해 주는 사랑은 고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물로서의 사랑의 고귀함을 몸소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신 할 자유까지도 함께 열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배반과 불순종의 아픔은 본인이 감수할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철없는 자식이 깨닫고 사람되어 돌아오기를 가슴이 까맣게 타도록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되기로 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데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고귀한 능력인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 창조를 마치시고서도 하나님은 흐믓해 하셨습니다. 그냥 ‘보시니 좋았다’가 아니라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셨습니다.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을 때 하나님은 인간이 배신할 가능성, 악에 굴복할 가능성도 함께 따라 묻어옴을 아셨습니다. 하여 이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도 않고 때로 진흙탕이 되어 인간들이 그 속에서 아귀다툼을 벌리리라는 것도 왜 모르셨겠습니까. 그것을 다 아시고도 이 세상과 인간을 근저에서부터 긍정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여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벌리는 모든 악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 안고 끝끝내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때로 더럽고 추하고 악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창궐하는 것도 같지만 “애야, 아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모든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란다”라고 하시는 근원적인 축복의 말씀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속의 그리고 사람들 속의 악의 그림자를 너무나 많이 보면서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결코 절망할 수 없음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긍정과 축복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창조 신앙이 없는 것이나 마찮가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게 된 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주일날이었습니다. 버스를 탔다가는 예배 시간에 늦을 것같아 택시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날따라 택시가 건너편 쪽에만 많고 제 쪽에는 한 참 기다려도 차 한대가 안 왔습니다. 마침 건너편을 달리던 택시 하나가 고맙게도 유턴을 해와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저를 태우고도 계속 합승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급한 저로서는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아저씨 얼굴을 보자 그만 단념이 되었습니다. 아저씨의 얼굴은 참 날카로웠습니다. 유난히도 하얗고 날이 서 있었습니다. 마음만 졸이며 겨우 연대 앞까지 왔습니다. 차선이 엉키면서 옆에 있던 하얀 색 소나타가 끼어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주먹을 흔들면서 “너 죽어 볼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정말로 그 밀집된 혼잡한 차선에서 택시를 마치 이무기가 용틀음치는 것처럼 비틀어 대면서 소나타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부딪힐 것같았습니다. 깜깍놀란 소나타도 혼비백산을 해서 신촌 굴다리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급히 달아났습니다.
겁이 더럭 난 저도 “아저씨, 저 금호 타이어 앞에서 세워 주세요”하며 후문이 못 미친 육교 앞에서 내렸습니다. 300원 남은 거스럼돈도 괜찮다고 하며 그냥 마구 내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행해 걸어오면서, ‘아, 하마터면 제 명에 못 죽을 뻔 했네’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예배당에 앉으니까 겨우 마음이 진정되면서 이번에는 그 택시 기사 아저씨의 폭발 일보직전의 분노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저는 차선을 함부로 바꾸는 사람들에게 “죽어 볼래” 하고 욕을 하는 사람은 보았습니다만, 정말 차를 꿈틀대며 너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내가 상처입는 것쯤은 불사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예배 동안 내내 그 아저씨가 왜 그렇게 자기 파괴적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저씨의 얼굴이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마땅히 누려야 하는 보호와 배려가 전혀 주어지고 있지 않아 두려움에 가득 차 울고 있는 어린 아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아마 그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존재에 대해 적의만을 보여주는 이 세상이 무척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무섭고 외로워 울고 있어도 누구 하나 신청도 하지 않는, 그리고 눈물 하나도 닦아 주지 않는 것이 너무 슬펐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에게 너무나 비정한 이 세상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느꼈을 것 같았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세상에 복수할 수 있다면 함께 자폭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는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차게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너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에 나의 존재를 걸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분노만이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은 사실은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 슬픔의 또다른 얼굴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냉혹함이 이렇게 불행의 씨를 뿌리고 그 씨는 점점 더 자라고 강성해 진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죄가 악의 씨를 뿌리며 그것이 날로 자라 큰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사방에 또 다른 씨를 퍼트리고 있다는 생각에 무서움증도 들었습니다. 또 세상은 왜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지 못 하는 것이 많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하며, 세상에 대해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동시에 목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같이 죽을 뻔한 그 사람의 운명에 얽혀 들지 않고 차에서 무사히 내렸다고 안도나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참 초라하고 한심스러워서 저에게도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마음이 이렇게 우울하고 산란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사무실에 놓여 있던 한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살아 있어서 정말 고맙구나! 아이야: 굶고, 매맞고 버림받고 왕따당해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책은 부스러기 선교회의 강명순 목사님이 쓴 <부스러기가 꽃이 되다>라는 책의 겉표지 글이었습니다. 굶고 매맞고 버림받아 우리 눈에는 뭐 하나 이쁠 것이 없는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애야, 살아 있느라고 얼마나 애썼니. 살아 있어줘서 참 고맙다”라고 하실 것이라는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습0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아유, 이쁜 내 새끼, 아주 다 죽은 것처럼 보이더니 뿌리까지 다 죽은 것은 아니었구나. 너도 다 말라버린 줄 알았더니 잎 몇 개는 살아 있었구나, 아, 완전히 다 파괴된 아이는 하나도 없구나”하시며, 앞치마를 두르시고 열심히 상처를 싸메주고 미음을 끓여 먹이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기운을 차리고 무엇인가를 붙잡고 열심히 일어서 소생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신바람이 나 “야, 보기에 참 좋다”를 연발하시며 박수를 치시고 “올치, 조금만 더, 올치 잘 한다, 내 새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의 안개가 걷히면서 산란했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기쁨이 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슬픔과 두려움이 굳어 분노가 되어 버린 얼굴을 씻겨 주주시고 머리 빗질해 주시며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보아야 해, 봐라, 얼마나 번듯하고 이쁜지, 이 모습 잊어 버리지마” 하시며 우리 모두의 인생을 축복하시며 돌보고 계시는구나 하고 처음으로 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로 파괴되지 않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애쓰시는데 세수 한 번 시켜 준 적이 없고 빗질 한번 해 준적이 없는 내가 무엇이라고 감히 누구의 얼굴은 밉고 더럽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 사랑하려고 해 보지도 않고 마치 남의 탓만인 것처럼 ‘세상은 썪어서 희망이 없다’고 멋대로 내던지고 손가락질하며 투덜댈 수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사랑해 보지도 않고 단죄하고 실망한 척하는 나의 영성없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다가온 성탄절을 성대히 기념하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춰 몸소 육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보시니 참 좋았다’를 연발하시며 창조 세계와 인생을 축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다시 낳으시려고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을 두고 로마서 8장 15, 16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성탄의 복된 기쁨을 맛본 우리 기독교인들은 올 한 해의 삶에 특별한 계획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해는 하나님이 가장 흡족해 하실 모습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가장 흡족할 때는 뭐니뭐니해도 자녀가 자라 어느덧 부모를 이해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줄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충만한 자유 속에서 비록 시행착오는 있을지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이해하고 이윽고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도록 자라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장을 보는 즐거움을 고대하면서 우리를 당신과 같은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날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2002년 통계에 전국의 해체 가정 수는 96만 7,500가구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정의 해체 당시 수입은 월평균 85만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심성이 좋다고 하더라도 가정을 꾸려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 이러한 해체 가정에서 매년 5만~7만명의 아이들이 집을 뛰쳐나가 가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보다 싫어서 집을 뛰쳐나온 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제적, 정서적, 정신적 빈곤의 대물림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존재가 악순환의 질곡 속에서 완전히 파괴되지 않게 “보시니 참 좋았다”고 축복하시며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서 이 일을 거들어 달라고 우리에게 말걸고 계십니다. “알았습니다, 아버지”하고 선뜻 일어서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워 주저주저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는 “한 사람”이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 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사만 이천명을 붙잡지 못 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의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게도.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우리 가운데 가장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붙잡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얼굴을 씻겨 주며 ‘참 예쁘다’고 보듬어 줌으로써 여러분의 올 한 해의 삶이 더욱 따숩고 충만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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