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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시키시는 것

창세기 김기동............... 조회 수 1731 추천 수 0 2008.09.15 1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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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1:1-9 
설교자 : 김기동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6.5.28주일설교 
 창세기 11:1-9, 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2:1-4
‘말’은 인간 사회에서 서로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반입니다. 물론 눈빛만 봐도 그 마음이 통하고, 몸으로 의사표현 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말은 가장 명료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수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나 자라면서 배우는 중요한 것이 말이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하는 아이의 첫 마디에 그렇게 그 가족들이 좋아하는 것은 정말 서로 알아본다는 것, 이젠 적당히 울음으로 웃음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가장 탁월한 증거라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와 사도행전의 두 본문은 신학적으로 짝을 이루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두 본문을 합쳐 놓으면 하나의 말로 통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젠 여러 가지 다른 말로도 의사소통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우여곡절이었을까요?

첫 번째 창세기 바벨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음에’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저 언젠가 옛날 하나의 말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네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옛날에’라고 시작하듯 말입니다. 사람이 많아져서 자신들이 정착할 좀 더 좋은 땅을 찾아 유랑하였고,  한 무리가 시날 땅 곧 바벨론 땅에 거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사실 바벨론 땅은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찬란한 문화는 지금도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라는 놀라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두 강을 사이에 두고 기름진 땅과 풍부한 양식은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고, 거기서 그들은 자연에 기대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며 만들어가는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벽돌을 만들어서 역청으로 집을 짓는 기술은 광활한 평야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돌덩이를 대신해 집을 짓는 귀한 자재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 4절은 그들이 도시와 탑을 쌓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아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사실 도시를 세운다, 높은 탑을 쌓아 자신들의 명성을 날린다는 것들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누구 더 높은 빌딩을 짓느냐고 서로 아웅거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말입니다.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이미 이들은 이주해와 흩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흩어지지 않는다 라니요. 왜요? 누가 흩어뜨린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야기는 마치 예언이라고 해 놓은 것 같이 이 말에 충실하게 흘러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도시와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신다고 5절이 들려줍니다. ‘하늘에 닿는’ 탑을 지으려고 하지만, 하늘은 턱없나 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기 위해 내려오시기까지 해야 하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보시고 어떤 위험을 느끼신 것일까요? 6절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면 못하는 일이 없겠다’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같은 말을 해서 서로 통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치 천상회의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이 누구에겐가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자.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라고 결정하곤 결국 그들을 온 땅에 흩으시게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되니까, 도시세우는 일도 그만두고 그들은 각각 말 통하는 자들끼리 흩어져서 각각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거기에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11장까지 이르는 소위 원역사, 선역사라고 불리는 부분의 마지막에 주어진 이야기로 왜 수많은 언어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것에 대한 원인론적 설화라고 불립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사실 ‘섞는다, 혼합한다’는 뜻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바벨은 원래 ‘신의 문’(bab-el)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그 당시 고도의 문명을 가진 바벨론을 에둘러 부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문명을 떠나 가나안으로 찾아가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성서 기자의 눈에 바벨은 그 거대한 건축물의 오만이 드러내는 titanism의 상징이었고, 서로 통하지 못하는 다양한 언어 발생의 원인은 곧 그러한 도시 건설 즉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영웅적 거인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벨 사건 이후, 각각의 언어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 중에서 야웨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을 택하셨고,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야웨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과만 의사소통하시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을 조금 말하고자 합니다. 사도행전과 짝을 이루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다룹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도 장엄하게 공공연한 장소 베다니에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한편의 설교와도 같은 마지막 당부는 오늘 읽은 절로 끝을 맺습니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 그렇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 제자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라고 말하면서 누가복음은 끝납니다.

그 이후의 역사를 이어가는 사도행전은 그 서두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승천의 모습을 그리고 아버지가 주신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단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멀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의 마지막 당부의 또 다른 버전을 들려줍니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유럽에서 지난 목요일은 휴일인데 바로 예수승천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전통에 의하면 예수는 부활하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였고, 열흘 후 즉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그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는데 그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이라는 겁니다. 다음 주가 성령강림절이지요.

오순절 한 곳에 모인 자들(마가 다락방인지 확실치는 않지만)은 대단한 경험을 합니다.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고, 그 집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 오르는데 그 불길이 다시 혓바닥처럼 갈라지더니 각 사람에게 내려앉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자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여기까지 입니다만 그 다음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그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리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로마인, 크레타인들까지 바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촌구석에서 온 자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은 이제 예수를 따르며 예수사건을 경험한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온 땅이라 여겨졌던 모든 이들이 함께 공유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예수 사건이 세계에 드러나고 세계에 소통되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바벨 사건으로 야웨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배타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있게 되었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바로 예수의 복음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발판을 제공한다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흩으시고 이스라엘의 배타적 구원사를 시작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그 언어가 소통함으로 복음 전파의 길을 여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아이러니한 고백을 이 두 이야기를 통해 듣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사건은 바벨의 첫 출발 ‘하나의 언어, 같은 말’로의 회귀를 말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 말기 일본은 한국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조선어 금지를 시행했습니다. 식민의 제국정신은 말을 통한 정신성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식민정책에 가장 먼저 희생되거나 혹은 그 동조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아픈 역사를 우리는 아직 기억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시키는 것은 분명 소통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의 언어, 같은 말이 아니라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언어로 말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그것은 바람이며 기운입니다. 그것은 살리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불어넣은 바람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있는지 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코에 들숨 날숨이 남아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영은 사람의 생명과 활동력의 원천입니다. ‘얼’도 이러한 영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을 살리는 영, 생명력을 불어넣고 새롭게 활동할 수 있는 힘이 되는 영이 바로 다른 언어를 말하게 했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고, 혹은 내 말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이 말하는 그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그 말의 상대자에 대한 긍정과 배려 더 나아가 존중을 의미합니다.

흔히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누는 오순절 성령 사건은 적극적이고 공격적 전도의 포문을 여는 신학적 근거로 이야기되곤 합니다. 물론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격하시키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말’로 돌아가지 않고 성령을 통해 각각 다른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교리적 독선으로 관용 없이 이교도들을 포섭하고 개종시키는 폭력은 결코 성령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려주는 성령의 역사는 이것입니다. 성령이 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말 안에서의 소통입니다. 성령이 시키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벗어나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시키는 것은 나와 너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기에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성령 강림주일이지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20명의 신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였다고 하지요. 바로 이 때입니다. 소통케 하시고, 관용의 마음을 품게 하시는, 그래서 생명을 나누는 진정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체험하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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