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창21:8-21 |
|---|---|
| 설교자 : | 김기동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2006.10.1주일설교 |
역사 기록 안에서 객관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실증적인 입장에서 ‘사실’(fact)을 기록한다 주장해도 역사는 그 기록자의 이데올로기 즉 역사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통성과 연관된 기록일 때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 판단의 기준은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선과 악의 논리가 아닙니다. 역사는 이긴 자, 가진 자, 강한 자의 논리와 입장에서 판단되고 기록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기록을 읽어 나갈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사실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가 기록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우리가 주장하는 독립국가로서의 고구려 역사는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현재 우리의 입장을 볼 때, 우리는 자주국가라는 자부심에 살고 있지만, 우리 안에서조차 ‘자주’, ‘독립’ 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있을뿐더러 세계의 세력 속에서 저울질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역사 기록 안에서 약자, 패배자, 빼앗긴 자는 소외되고 심지어는 악한 자로 그려지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발전과 순행의 역사를 거슬렀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패배와 도태는 당연하고 적절한 것이 되고, 그래서 후대 그 기록을 읽는 자들에게는 하지 말아야할 것을 가르쳐주는 반면교사의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을 읽어보면 우리는 이러한 승자와 패자, 역사의 주인공과 반역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떠돌아다니던 유목민들, 탈출한 노예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 그들은 노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인으로 결속하여 이스라엘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사실 그들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기껏해야 독립국가로 산 기간은 남유다시대까지 합하여 길게 잡아야 5백 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 새 희망을 부여잡고, 자신들이 주인공 되는 역사를 갈구하고, 그러한 갈망과 기대는 지금 구약성서라는 기록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 특히 야웨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주인공 된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계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대문명의 꽃이 되고, 권력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제국들, 이스라엘 민족의 생사여탈의 힘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집트, 바빌론, 앗수르 등은 구약에서 보면, 힘이 있어도 결국은 지고 마는 악한 세력의 대명사로 등장합니다. 또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도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가 하면 같이 가나안으로 온 롯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대립하기를 일삼는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면서 역사의 주변부로 물러납니다.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은 소위 적통인 이삭에 밀려 또한 쫓겨나고,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리를 파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야곱에 밀려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찾으므로 민족의 정통성을 잇는 것으로 대변되는 이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여 남을 속이고 야합을 일삼는 소인배들과 같아도, 그들은 하나님은 축복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선택했고, 그리고 야웨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들의 계보를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소위 공평하시고 악한 무리에게 진노하시며 결국은 심판하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러한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은 한 쪽의 입장에서 너무 편협한 기록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을까? 등등의 의문과 회의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많이 논란되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아예 경전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구약을 공부하게 된 계기도 사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이야, 읽지 않아도 되라고 말하는 어느 한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구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오늘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인간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또한 주인공의 승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이스라엘 역사 초기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 하갈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75세에 새 땅을 향해 떠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위해 그의 아들을 얻는 이야기에 얽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는 아브라함보다 10살이 어리니까 65세, 하지만 나이를 넘어서 아직도 남성의 이목을 끄는 미모를 가졌었나 봅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잠시 내려간 사이에 하마터면 아브라함의 비겁함 때문에 바로의 할렘 여인이 될 뻔했습니다. 하나님 덕택에 아브라함과 모든 소유를 그대로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엘리에셀을 아들 삼아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사라는 가나안으로 온 지 10년 후,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결국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은 86세였습니다. 사라는 76세였겠지요.
하지만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결국 그로부터 14년 후 경수까지 끊어진 사라의 태를 통해 아들이 태어나고, 사라와 이삭은 하나님의 구원의 적통이 되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과는 대적하는 민족이 되어, 구원사의 줄기에서는 제외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사의 주인공 그리고 주변으로 밀려나는 자라는 이분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가운데, 그들은 또한 룻, 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악한 행위자들로 그려집니다. 하갈은 임신을 핑계로 기고만장하여 종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본처 사라를 업수이 여기고 어쩌면 그 자리를 넘보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쁜 여자가 되고, 이스마엘은 적자를 놀리고 희롱하여 욕을 보이는 분수 모르는 서자로 그려집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그 운명에 대해 순응하고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은 그렇게 쫓겨나도 당연하다고요. 그래서 가끔 어떤 분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랍인들이고, 그 때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였더라면 이스라엘이 아랍을 통해 당하는 오늘의 고통은 없었을 텐데라고 대단히 유감을 표하기도 하더군요. 분수를 모르는 자, 질서를 파괴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본성은 그들의 조상 하갈과 이스마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창 16:4) 우리말로 번역된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래가 화가 나서 아브람에 가서 퍼붓습니다.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5절 하반절).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하갈은 못된 여자지요. 하지만 원문을 읽어 보면 과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원문을 보면 하갈은 ‘임신하였다’라는 문장을 제외하곤 주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라고 번역된 문장에서도 주어는 ‘그녀의 여주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의 눈에 무시당했다.’ 사실 ‘무시당했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행위와 상태를 함께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무시당하는 행위와 더불어 ‘무시됨’을 내포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여기서 모호한 것은 ‘그녀의 눈에’ 즉 그녀가 보기에라고 번역될 수 있는 구절에서의 그녀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시선으로 이 말이 쓰여졌는가라는 것입니다. 하갈이 보기에 그렇다는 진술일까요? 하갈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진술하는 입장이 아닌데요? 진술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눈에’는 진술하는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진술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갈의 여주인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갈이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주인이 무시당한다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지 사실은 모호합니다. 여기서 ‘그녀’를 바로 앞에 나오는 단어 ‘그녀의 여주인’의 대명사로 볼 경우, 의미는 사뭇 달라집니다. 하갈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고 임신한 하갈을 시기한 나머지 자신이 혹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래가 스스로 생각하는 진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3절에 보면 사래는 분명 하갈(몸종은 노예와 다름)을 단순히 씨받이로 준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내’는 당당한 부인의 신분입니다. second가 아니라, secondary 즉 일부다처제에서 동일한 부인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는 소리에서 하갈을 다시 자신의 ‘종’의 신분으로 끌어내립니다. 진짜로 하갈이 사래의 종의 신분이라면 사래는 사실 하갈을 내쫓는 것도 아니고 학대하는 정도는 아브람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사래는 아브람을 부추겨 하갈을 다시 종의 신분으로 확인시키고 학대하고 급기야는 도망하게 만듭니다. 여기까지 하갈은 한 마디 말도 없고, 능동적 행위도 없습니다. 그저 사래에 의해 움직이다가 결국 고통에서 도망할 뿐입니다. 첫 번째 도망길입니다.
그리고 도망길에 야웨의 천사를 만나는데 여기서 하갈의 종 신분이 다시 확인됩니다. ‘돌아가서 복종하며 살아라.’(9절). 많은 자손의 복을 덧붙인 후,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계시해 줍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마리아 수태고지와 아주 유사합니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한다’고 말하던 하갈은 (구구한 변명이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엘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난 곳에도 이름을 새롭게 부여합니다. ‘브엘라헤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라고요. 마치 야곱이 도망가다 하나님을 만난 곳을 벧엘이라고 이름붙이고 그곳의 지명이 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보신다’는 단순히 시각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본다’라는 말은 시선을 통해 감지하고,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내포합니다. 우리말에서의 돌본다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하갈이 만난 ‘보시는 하나님’은 하갈의 새로운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래만을 돌아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으로 울부짖는 자를 돌아보시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은 돌아가 (그 다음에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이야기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브람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14년이 흐릅니다.
100세와 90세의 노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돌잔치를 합니다. 그 기쁨이야 어떻고 그 아들이야 말로 얼마나 금지옥엽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잔치 중에 사라는 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갈의 아들(15살)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입니다. ‘놀린다’라는 단어는 ‘웃는다’라는 뜻과 같은 뿌리입니다. 놀리면 물론 웃으면서 하게 되지요. 하지만 놀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15살의 큰 형이 1살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를 놀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라가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쫒아가서 이삭을 내치든지, 이스마엘을 내치든지 양자 간에 결단을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도록, 그렇게 심각한 행동이었을까요? 여기서 시기와 질투에 차서, 절대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용인할 수 없는 큰 아이 앞에서 아직은 여리고 어리기만 한 아들을 지키려는 삐뚤어진 모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라의 마음이 이렇게 삐뚤어져 있을 때 이스마엘은 어떤 행동을 해도 예쁘게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사라는 일을 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조카 롯을 그렇게 지켜내려 한 아브라함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친자와 아내의 일에 대해서는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겨우 한 일이라고는 (그 많은 재산은 다 어디에 두고, 사라가 무서워서였을까요?) 빵 몇 덩이, 물 한 포대 주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성서는 물론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니까요.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요.
물이 다 떨어지고 아이가 탈진해서 누워 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듣는 소리는 하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울음소리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하나님이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 (하나님은 한 번도 하갈과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꼭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네요!) 그 말이 끝난 후, 하갈은 드디어 물을 발견하게 되고, 이스마엘과 먹고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사실 하갈은 그 이후 사라집니다. 단지 21절에서 하갈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의 어머니’라는 다소 소극적 표현으로 하갈을 이집트 여인과 결혼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선조할머니 사라의 거대한 이야기 앞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삶은 이렇게 왜곡되어 그 의미가 축소됩니다. 능동적이지 못한, 그저 몸종노릇하다가 아들을 낳은 여성, 하갈은 결국 그의 이름마저 상실하게 되지만, 그녀는 아들을 지켜내는 인내를 감행합니다. 아내이면서도 종이라는 신분임을 재차 상기해야만 했던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 그대로 남아 있더라면 이스마엘의 신분마저 언제 아들에게 종으로 강등될 지 모르는 것이었을 겁니다. 옛 우리네에서 서자의 설움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하갈은 쫒겨나는 수모를 기회로 선용합니다. 만일 처음 도망가서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은 도망간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갈은 돌아가라는 명령 앞에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고통을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주변인으로 내몰리는 자들에게 오셔서 자신의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도록 돌아보십니다. 하갈은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간파했고, 고백합니다. ‘보시는 하나님!’ 아마도 이 말은 하갈이 하나님에게 재차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아보신다는 약속을 꼭 지키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 앞에 하나님은 여종의 굴레에서, 자기 자식의 결혼을 책임지는 당당한 가문의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게 만드십니다.
역사를 담고 있는 성서가 역사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고 서술 한다 해도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서술의 편협한 시선은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모두 감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 덧입혀진 부정적 이데올로기를 벗겨 버리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안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당당한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주인공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러한 역사 기록 안에서 약자, 패배자, 빼앗긴 자는 소외되고 심지어는 악한 자로 그려지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발전과 순행의 역사를 거슬렀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패배와 도태는 당연하고 적절한 것이 되고, 그래서 후대 그 기록을 읽는 자들에게는 하지 말아야할 것을 가르쳐주는 반면교사의 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을 읽어보면 우리는 이러한 승자와 패자, 역사의 주인공과 반역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보여주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떠돌아다니던 유목민들, 탈출한 노예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 그들은 노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인으로 결속하여 이스라엘민족으로 역사에 등장합니다. 사실 그들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기껏해야 독립국가로 산 기간은 남유다시대까지 합하여 길게 잡아야 5백 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 새 희망을 부여잡고, 자신들이 주인공 되는 역사를 갈구하고, 그러한 갈망과 기대는 지금 구약성서라는 기록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 특히 야웨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주인공 된 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계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대문명의 꽃이 되고, 권력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제국들, 이스라엘 민족의 생사여탈의 힘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집트, 바빌론, 앗수르 등은 구약에서 보면, 힘이 있어도 결국은 지고 마는 악한 세력의 대명사로 등장합니다. 또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도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가 하면 같이 가나안으로 온 롯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대립하기를 일삼는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면서 역사의 주변부로 물러납니다.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은 소위 적통인 이삭에 밀려 또한 쫓겨나고,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리를 파는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야곱에 밀려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찾으므로 민족의 정통성을 잇는 것으로 대변되는 이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하여 남을 속이고 야합을 일삼는 소인배들과 같아도, 그들은 하나님은 축복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선택했고, 그리고 야웨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들의 계보를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소위 공평하시고 악한 무리에게 진노하시며 결국은 심판하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러한 이스라엘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은 한 쪽의 입장에서 너무 편협한 기록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을까? 등등의 의문과 회의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많이 논란되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아예 경전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구약을 공부하게 된 계기도 사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이야, 읽지 않아도 되라고 말하는 어느 한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구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오늘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인간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또한 주인공의 승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이스라엘 역사 초기 주변부로 밀려난 여성, 하갈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75세에 새 땅을 향해 떠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위해 그의 아들을 얻는 이야기에 얽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는 아브라함보다 10살이 어리니까 65세, 하지만 나이를 넘어서 아직도 남성의 이목을 끄는 미모를 가졌었나 봅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잠시 내려간 사이에 하마터면 아브라함의 비겁함 때문에 바로의 할렘 여인이 될 뻔했습니다. 하나님 덕택에 아브라함과 모든 소유를 그대로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엘리에셀을 아들 삼아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사라는 가나안으로 온 지 10년 후,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결국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은 86세였습니다. 사라는 76세였겠지요.
하지만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결국 그로부터 14년 후 경수까지 끊어진 사라의 태를 통해 아들이 태어나고, 사라와 이삭은 하나님의 구원의 적통이 되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과는 대적하는 민족이 되어, 구원사의 줄기에서는 제외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사의 주인공 그리고 주변으로 밀려나는 자라는 이분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가운데, 그들은 또한 룻, 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악한 행위자들로 그려집니다. 하갈은 임신을 핑계로 기고만장하여 종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본처 사라를 업수이 여기고 어쩌면 그 자리를 넘보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쁜 여자가 되고, 이스마엘은 적자를 놀리고 희롱하여 욕을 보이는 분수 모르는 서자로 그려집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그 운명에 대해 순응하고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구원사를 파괴하려 하는 자들은 그렇게 쫓겨나도 당연하다고요. 그래서 가끔 어떤 분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랍인들이고, 그 때 하갈과 이스마엘을 죽였더라면 이스라엘이 아랍을 통해 당하는 오늘의 고통은 없었을 텐데라고 대단히 유감을 표하기도 하더군요. 분수를 모르는 자, 질서를 파괴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의 본성은 그들의 조상 하갈과 이스마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창 16:4) 우리말로 번역된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래가 화가 나서 아브람에 가서 퍼붓습니다.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5절 하반절).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하갈은 못된 여자지요. 하지만 원문을 읽어 보면 과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원문을 보면 하갈은 ‘임신하였다’라는 문장을 제외하곤 주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라고 번역된 문장에서도 주어는 ‘그녀의 여주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의 눈에 무시당했다.’ 사실 ‘무시당했다’라는 표현은 그러한 행위와 상태를 함께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무시당하는 행위와 더불어 ‘무시됨’을 내포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여기서 모호한 것은 ‘그녀의 눈에’ 즉 그녀가 보기에라고 번역될 수 있는 구절에서의 그녀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시선으로 이 말이 쓰여졌는가라는 것입니다. 하갈이 보기에 그렇다는 진술일까요? 하갈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진술하는 입장이 아닌데요? 진술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눈에’는 진술하는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진술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갈의 여주인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갈이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주인이 무시당한다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지 사실은 모호합니다. 여기서 ‘그녀’를 바로 앞에 나오는 단어 ‘그녀의 여주인’의 대명사로 볼 경우, 의미는 사뭇 달라집니다. 하갈이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고 임신한 하갈을 시기한 나머지 자신이 혹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래가 스스로 생각하는 진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3절에 보면 사래는 분명 하갈(몸종은 노예와 다름)을 단순히 씨받이로 준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내’는 당당한 부인의 신분입니다. second가 아니라, secondary 즉 일부다처제에서 동일한 부인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는 소리에서 하갈을 다시 자신의 ‘종’의 신분으로 끌어내립니다. 진짜로 하갈이 사래의 종의 신분이라면 사래는 사실 하갈을 내쫓는 것도 아니고 학대하는 정도는 아브람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사래는 아브람을 부추겨 하갈을 다시 종의 신분으로 확인시키고 학대하고 급기야는 도망하게 만듭니다. 여기까지 하갈은 한 마디 말도 없고, 능동적 행위도 없습니다. 그저 사래에 의해 움직이다가 결국 고통에서 도망할 뿐입니다. 첫 번째 도망길입니다.
그리고 도망길에 야웨의 천사를 만나는데 여기서 하갈의 종 신분이 다시 확인됩니다. ‘돌아가서 복종하며 살아라.’(9절). 많은 자손의 복을 덧붙인 후,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계시해 줍니다. 천사가 전해주는 마리아 수태고지와 아주 유사합니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한다’고 말하던 하갈은 (구구한 변명이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엘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난 곳에도 이름을 새롭게 부여합니다. ‘브엘라헤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라고요. 마치 야곱이 도망가다 하나님을 만난 곳을 벧엘이라고 이름붙이고 그곳의 지명이 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보신다’는 단순히 시각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본다’라는 말은 시선을 통해 감지하고,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내포합니다. 우리말에서의 돌본다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하갈이 만난 ‘보시는 하나님’은 하갈의 새로운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래만을 돌아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통으로 울부짖는 자를 돌아보시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은 돌아가 (그 다음에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이야기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브람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14년이 흐릅니다.
100세와 90세의 노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돌잔치를 합니다. 그 기쁨이야 어떻고 그 아들이야 말로 얼마나 금지옥엽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잔치 중에 사라는 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갈의 아들(15살)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입니다. ‘놀린다’라는 단어는 ‘웃는다’라는 뜻과 같은 뿌리입니다. 놀리면 물론 웃으면서 하게 되지요. 하지만 놀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15살의 큰 형이 1살의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이를 놀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라가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쫒아가서 이삭을 내치든지, 이스마엘을 내치든지 양자 간에 결단을 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도록, 그렇게 심각한 행동이었을까요? 여기서 시기와 질투에 차서, 절대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용인할 수 없는 큰 아이 앞에서 아직은 여리고 어리기만 한 아들을 지키려는 삐뚤어진 모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라의 마음이 이렇게 삐뚤어져 있을 때 이스마엘은 어떤 행동을 해도 예쁘게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사라는 일을 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조카 롯을 그렇게 지켜내려 한 아브라함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친자와 아내의 일에 대해서는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겨우 한 일이라고는 (그 많은 재산은 다 어디에 두고, 사라가 무서워서였을까요?) 빵 몇 덩이, 물 한 포대 주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성서는 물론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니까요.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요.
물이 다 떨어지고 아이가 탈진해서 누워 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듣는 소리는 하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울음소리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말라. 하나님이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아이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 (하나님은 한 번도 하갈과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꼭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네요!) 그 말이 끝난 후, 하갈은 드디어 물을 발견하게 되고, 이스마엘과 먹고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사실 하갈은 그 이후 사라집니다. 단지 21절에서 하갈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의 어머니’라는 다소 소극적 표현으로 하갈을 이집트 여인과 결혼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조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선조할머니 사라의 거대한 이야기 앞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삶은 이렇게 왜곡되어 그 의미가 축소됩니다. 능동적이지 못한, 그저 몸종노릇하다가 아들을 낳은 여성, 하갈은 결국 그의 이름마저 상실하게 되지만, 그녀는 아들을 지켜내는 인내를 감행합니다. 아내이면서도 종이라는 신분임을 재차 상기해야만 했던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 그대로 남아 있더라면 이스마엘의 신분마저 언제 아들에게 종으로 강등될 지 모르는 것이었을 겁니다. 옛 우리네에서 서자의 설움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하갈은 쫒겨나는 수모를 기회로 선용합니다. 만일 처음 도망가서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스마엘은 도망간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굴레를 벗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갈은 돌아가라는 명령 앞에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고통을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주변인으로 내몰리는 자들에게 오셔서 자신의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도록 돌아보십니다. 하갈은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간파했고, 고백합니다. ‘보시는 하나님!’ 아마도 이 말은 하갈이 하나님에게 재차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돌아보신다는 약속을 꼭 지키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 앞에 하나님은 여종의 굴레에서, 자기 자식의 결혼을 책임지는 당당한 가문의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게 만드십니다.
역사를 담고 있는 성서가 역사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고 서술 한다 해도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서술의 편협한 시선은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모두 감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 덧입혀진 부정적 이데올로기를 벗겨 버리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안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당당한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주인공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