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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출14: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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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준우 교수 |
| 참고 : | 새길교회 |
우리는 지금 10년만의 무더위를 겪고 있습니다. 절기상으로 어제가 입추였고 내일이 말복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광복 59주년 기념일입니다. 이 막바지 무더위 속에 힘차게 울어대는 매미들처럼, 또한 저 울창한 가로수와 들풀들처럼,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찰나에 불과한 목숨을 향유하고 생명을 보듬어 안느라 분주합니다. 특별히 지구 반대편의 남극대륙은 지금 한겨울이며, 해도 뜨지 않는 캄캄한 밤이 연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남극대륙의 겨울을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황제펭귄 무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하 40도, 그것도 눈보라가 몰아쳐 체감온도가 영하 60도까지 떨어진다는 남극대륙에서 수 만 마리의 황제펭귄 수컷들이 지금 이 순간 길고도 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에, 황제펭귄 암컷들이 알을 낳으면, 그 알이 땅바닥에 떨어져 얼지 않도록, 수컷들이 암컷들 바로 앞에서 발등으로 그 알을 받아, 수컷들이 앞가슴에 알을 품고 나면, 암컷들은 먹이를 찾아 바다로 뛰어들고 말지요. 그러면 가슴에 알을 품은 수컷들만 수 만 마리가 남아, 길고 긴 겨울을 알을 품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알을 품은 채 바다 속으로 먹이사냥을 나갈 수도 없는 수컷들만 눈보라치는 겨울의, 그 몇 달씩 계속되는 깊은 어둠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무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수컷들이 너무 몸이 얼게 되면, 무리 안쪽에 있는 수컷들이 자리를 바꿔주며,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그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 만 마리의 수컷들이 그 어둠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생명을 품은 존재는 아무리 춥고, 어둡고, 길고 긴 처절한 삶의 현장이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와 알이 부화해서 새끼가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아무리 길고 긴 어둠과 살을 에이는 추위가 무섭고, 그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견디어야만 하는 굶주림이 고통과 공포로 짓누른다 해도, 그 황제펭귄들이 지금의 이 마지막 고비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의 기원에 관한 단군신화에서, 곰이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빈 속에 쓰디쓴 쑥 한 타래와 맵디매운 마늘 스무 톨만 먹으며 속이 뒤집히고 눈물콧물에 범벅이되어 나둥글었듯이, 견디기 힘든 고난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우리의 민족사를 살아오신 우리의 조상님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님도 그 눈보라 몰아치는 남극의 황제펭귄들 못지 않게, 민족사의 한겨울, 그 추위와 배고픔, 어둠만 계속된 길고 긴 밤의 두려움과 공포를 견디시며, 우리들을 먹이시고 키워내셨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 굶주림과 고통과 공포를 견딜 수 있었던 것 역시 자식들의 생명을 보살피고 키워내서 온전한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뿐만 아니라, 길고 긴 어둠과 추위와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줄기차게 생명을 보듬어 안고 키우는 대자연의 모든 만물들, 그리고 우리의 조상님들 앞에서, 우리가 오늘의 인간세상을 생각하면, 그저 답답한 심정뿐입니다. 과학자들의 말대로, 이 우주가 150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또한 이 지구가 46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생명체가 지난 35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반지름 7천5백만 광년의 그 가없이 드넓은 우주의 뇌이며 의식이며 피조물의 왕관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 앞에 벌어지는 인간 세상의 현실은 충만한 생명력과 신비와 감격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폭력적이며, 가장 비겁한 동물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출애굽기 본문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고대 세계의 수퍼파워였던 이집트 제국, 그 수퍼파워의 막강한 군대가 추격해오는데, 그들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완전히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모세에게 종주먹을 휘둘러댑니다. 이래저래 떼죽음을 당할 판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이집트 제국의 군대에 맞서도 떼죽음을 당할 판이며,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피해 홍해바다 속으로 뛰어들어도 떼죽음을 당할 판입니다. 백성들이 하느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400년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수퍼파워였던 이집트 제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리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백성들의 계산착오였을지 모릅니다. 그 앞의 출애굽기 본문에는 하느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했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아직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바다를 향해 자유의 행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발길을 돌려 다시 이집트의 노예로 되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과 공포, 불신앙에 사로잡혀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첫째로, 뒤에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해오는데,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절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 역시 지금 절망과 좌절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제목처럼 화씨 911도의 생지옥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한꺼번에 무너져내리게 할 만큼의 가공할 온도, 수천 명의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도록 만드는 그 비극과 절망의 세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3월15일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반전운동을 펼쳤지만, 미국은 끝내 이라크를 공격하고 점령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고문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반전시위,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전세계적인 반전시위조차도 결국 전쟁과 살육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작년 10월,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대신에, 미국이 북한 핵문제 협상에서 한국의 이익을 고려해 좀더 유연하게 협상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구조차 미국이 한마디로 묵살했다는 사실도 우리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명분이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애당초 이라크에 없었다는 미국 의회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계속해서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납치하고, “나는 살고 싶다”고 절규하면서 한국군 추가파병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한국정부는 곧바로 파병강행을 천명했고, 김선일 씨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사실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1/10에 불과하며, 우리보다 더욱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할 필리핀 정부는 자국민이 납치되었을 때, 즉각 조기철군을 결정함으로써, 사람의 목숨부터 구했던 사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의 목숨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하는 야만적인 나라, 필리핀보다 더욱 수퍼파워의 눈치를 보는 겁많은 비겁한 나라라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우리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홍해바다 앞에서 부르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차라리 강대국의 노예가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실리적이라는 백성들과 매스컴의 아우성 소리를 듣습니다. 살고 싶다는 인간의 절규조차도, 인간을 참수하는 비열함조차도 무감각해지는 좌절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 저희들의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을 용서하시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둘째로,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도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보스톤에서 열렸던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면서, 미국인들의 뿌리깊은 불안과 공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대테러전쟁을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신앙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로서도,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신앙심에 근거한 대테러 전쟁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지 못한 채, 민주당의 전통, 즉 교육과 노동 문제에 치중했던 전통과는 달리, 더욱 강한 미국을 주창하는 국가안보논리에 호소하고 있었던 것은, 미국이 지구촌의 공적이 되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현재 얼마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락한 생활방식을 빼앗길까 미국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치적 테러리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수퍼파워 미국 앞에서 대등한 자주외교와 국익외교를 약속했던 노무현 정권도 미국과의 파병 약속을 위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지난 주 이라크 추가파병을 실행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많은 것을 고려해서 이 명분없는 침략전쟁에 추가파병할 것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국제정치에 문외한인 저의 짐작으로는, 현재 우리나라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고려할 때,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야만 하겠다는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혹은 파병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미국의 군사경제적 보복을 두려워하는 우리 국민들의 공포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한 것은 결코 대통령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명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절어있는 우리들, 세상의 정의보다는 경제논리에 포로된 우리들, 강대국의 보복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요? 연일 테러가 계속되는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인 가운데, 2백 명이 아니라, 단 한두 명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희생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홍해바다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노예가 되더라도 떡고물이라도 먹고 편안히 살아야겠다는 우리의 노예의 생존 철학과, 안락한 일상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우리의 공포심 때문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미국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미국의 전쟁론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인간의 생명보다 자본의 논리에 포로가 된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그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옵소서.
셋째로, 홍해바다의 검푸른 파도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진지한 성찰은 실종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생존만이 관건이 되는 불신앙의 세상입니다. 화씨 911도의 세상은 진지한 사고와 비판적 성찰, 민주적 절차마저 모두 불태워버리는 세상입니다. 제국주의와의 싸움도 힘겨운 것이지만, 더욱 힘겨운 싸움은 제국주의가 우리들의 의식 속에 심어놓은 폭력숭배와 체념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제국의 종교는 우리에게 구원받고 싶으면, 지배체제에 복종하고 체념하라고 다그칩니다. 나의 생존 이외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 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 6월 남북한간에 군사적 긴장완화조치가 구체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월초에 느닷없이 미국이 보유한 최신예 전폭기인 스텔쓰기, 레이다에도 걸리지 않아 현대전에서 침략의 선봉이 되는 스텔쓰기를 미국이 보유한 55대 가운데 10여 대를 한국에 보내 수 개월 동안 훈련에 돌입하였지만, 우리는 왜 하필 이렇게 군사적 긴장이 급속히 완화되는 시기에, 더군다나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 아프간과 이라크 공격의 첨병이었던 스텔쓰기를 10여대씩 한국에 배치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스텔쓰 전폭기들이 북한 핵시설에 대한 공격훈련을 하든 말든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최근 영국 BBC News Survey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Would you die for your God/beliefs? 당신은 당신의 하느님 혹은 믿음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설문이었습니다. 이 설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평균 52%였지만, 한국인들은 12%로서 10개국 가운데 꼴찌였습니다. 나이지리아가 93%, 인도네시아가 90%, 레바논과 미국이 70%, 멕시코가 60%, 인도가 45%, 이스라엘이 36%, 러시아가 20%, 영국이 19%인데 반해, 한국은 12%에 불과했습니다(U.S.Catholic, 2004년 5월호, 10쪽). 침략전쟁이든, 십자군 전쟁이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전되는 전쟁에 목숨을 거는 미국인들이 70%에 달하는데, 이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요?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 “사람들은 그 용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고 말하면서, 그 짐승에게 경배하였습니다”고 했는데,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하느님을 경배합니까, 아니면 이 세상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짐승 같은 제국을 누가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 하면서 제국의 지배체제를 예배합니까? 돈과 폭력을 경배하도록 만드는 세상 제국들의 종교적 테러리즘을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따르미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새길공동체 여러분은 정말로 세상의 현실을 지배하는 제국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화씨 911도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계신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오, 하느님, 저희들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게 하옵소서.
오늘의 출애굽기 본문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보면,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다본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그 검푸른 파도에 겁을 집어먹고, 이집트 군대를 향해 항복의 백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기보다는 차라리 이집트의 노예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창조주의 모습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귀함과 창조성과 평등성을 되찾기 위해, 그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만이 그 넘실거리는 검푸른 파도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갔으며, 그들 용기 있는 자들만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홍해바다를 건넜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강대국의 노예로 살더라도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떡고물에 만족하거나, 강대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겁에 질린 사람들은 결코 홍해를 건너 자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는데, 그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제국의 무자비한 학살과 살인적인 착취로 인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공동체는 여지없이 박살이 나는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나이 열두 살의 소녀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상황, 혹은 정신적 상황이 오늘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얼마나 공포가 지배하던 상황이었는지, 생존이 얼마나 힘겨운 처절한 상황이었는지를 되풀이 되풀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꿈 꿀 때마다, 그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역사가 몇 백 년 동안 계속된 좌절의 시대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두가 이제는 끝장이라고,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종주먹을 휘두를 때, 심지어 요세푸스조차도 하느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인들을 편들고 계신다고 외칠 때, 예수님은 그 좌절의 한복판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처세술, 무력감과 무관심의 불신앙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금욕생활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로 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셨습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초경이 시작되어 임신이 가능한 나이라는 말입니다. 제국의 지배와 착취로 인해 이제는 완전히 죽어버린 듯한 이스라엘 공동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소녀를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과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 넘실거리는 검푸른 파도는 분명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홍해 앞에서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에 사로잡혀, 자유를 향한 탈출을 오히려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쟁취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홍해바다는 절망과 공포, 불신앙의 바다입니다. 그 절망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할 만큼 현실이 두렵다는 것은 우리가 자본과 폭력의 우상을 경배함으로써 우리가 비겁해졌다는 증거이며, 우리의 영혼이 공포로 인해 마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우리에게 닥칠 길고 긴 어둠과 추위와 굶주림이 두렵습니까? 차라리 강대국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강대국의 고깃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를 믿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와 존엄성을 찾아 광야로 나가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저 검푸른 파도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가 자유의 행진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비겁해지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알을 품은 황제펭귄이 그 길고 긴 어둠과 추위, 굶주림을 견디어내듯이, 우리의 조상님들이 그 동굴 속의 곰처럼, 민족사의 쓰라린 겨울을 참고 견디어내었듯이, 우리도 생명을 보듬고 안고 키우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강대국의 공포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열두 살 소녀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제국의 학살과 착취 앞에서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으로 죽어버렸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생명과 희망과 구원을 주신 예수님을 믿고, 화씨 911도의 세상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 자유와 용기, 감격과 은총 땅으로 들어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다음 주는 광복 59주년 기념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진정으로 강대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노예의 생존철학에서 벗어나, 그 두려운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느님 나라를 믿고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만주에서 일본 군대를 탈영한 김준엽 선생과 장준하 선생 일행이 중경의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6천리 길의 험준산령을 가던 도중애,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한 겨울에 넘다가, 매일 100리씩 걸어서 두 주간이나 걸려 넘는다는 파촉령 설원에서, 서로 감싸안고 긴 밤을 지새우며,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 살인적인 추위와 공포를 견디어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를 원하시며, 강대국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고 독립된 나라를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자랑스런 부모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홍해바다의 검푸른 파도를 향해 저벅저벅 자유의 행진을 계속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었던 열두 살 소녀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화씨 9/11도의 생지옥 같은 절망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 용기와 감격, 협력과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새길공동체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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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조상들의 기원에 관한 단군신화에서, 곰이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빈 속에 쓰디쓴 쑥 한 타래와 맵디매운 마늘 스무 톨만 먹으며 속이 뒤집히고 눈물콧물에 범벅이되어 나둥글었듯이, 견디기 힘든 고난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우리의 민족사를 살아오신 우리의 조상님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님도 그 눈보라 몰아치는 남극의 황제펭귄들 못지 않게, 민족사의 한겨울, 그 추위와 배고픔, 어둠만 계속된 길고 긴 밤의 두려움과 공포를 견디시며, 우리들을 먹이시고 키워내셨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 굶주림과 고통과 공포를 견딜 수 있었던 것 역시 자식들의 생명을 보살피고 키워내서 온전한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뿐만 아니라, 길고 긴 어둠과 추위와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줄기차게 생명을 보듬어 안고 키우는 대자연의 모든 만물들, 그리고 우리의 조상님들 앞에서, 우리가 오늘의 인간세상을 생각하면, 그저 답답한 심정뿐입니다. 과학자들의 말대로, 이 우주가 150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또한 이 지구가 46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생명체가 지난 35억 년 동안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반지름 7천5백만 광년의 그 가없이 드넓은 우주의 뇌이며 의식이며 피조물의 왕관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눈 앞에 벌어지는 인간 세상의 현실은 충만한 생명력과 신비와 감격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폭력적이며, 가장 비겁한 동물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출애굽기 본문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고대 세계의 수퍼파워였던 이집트 제국, 그 수퍼파워의 막강한 군대가 추격해오는데, 그들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완전히 혼비백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모세에게 종주먹을 휘둘러댑니다. 이래저래 떼죽음을 당할 판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이집트 제국의 군대에 맞서도 떼죽음을 당할 판이며,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피해 홍해바다 속으로 뛰어들어도 떼죽음을 당할 판입니다. 백성들이 하느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400년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수퍼파워였던 이집트 제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리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백성들의 계산착오였을지 모릅니다. 그 앞의 출애굽기 본문에는 하느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했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아직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바다를 향해 자유의 행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발길을 돌려 다시 이집트의 노예로 되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과 공포, 불신앙에 사로잡혀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첫째로, 뒤에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해오는데,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절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 역시 지금 절망과 좌절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제목처럼 화씨 911도의 생지옥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한꺼번에 무너져내리게 할 만큼의 가공할 온도, 수천 명의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도록 만드는 그 비극과 절망의 세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3월15일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반전운동을 펼쳤지만, 미국은 끝내 이라크를 공격하고 점령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고문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반전시위,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전세계적인 반전시위조차도 결국 전쟁과 살육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작년 10월,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대신에, 미국이 북한 핵문제 협상에서 한국의 이익을 고려해 좀더 유연하게 협상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구조차 미국이 한마디로 묵살했다는 사실도 우리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명분이었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애당초 이라크에 없었다는 미국 의회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계속해서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납치하고, “나는 살고 싶다”고 절규하면서 한국군 추가파병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한국정부는 곧바로 파병강행을 천명했고, 김선일 씨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사실도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1/10에 불과하며, 우리보다 더욱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할 필리핀 정부는 자국민이 납치되었을 때, 즉각 조기철군을 결정함으로써, 사람의 목숨부터 구했던 사실과는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국민의 목숨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하는 야만적인 나라, 필리핀보다 더욱 수퍼파워의 눈치를 보는 겁많은 비겁한 나라라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우리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홍해바다 앞에서 부르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차라리 강대국의 노예가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실리적이라는 백성들과 매스컴의 아우성 소리를 듣습니다. 살고 싶다는 인간의 절규조차도, 인간을 참수하는 비열함조차도 무감각해지는 좌절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 저희들의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을 용서하시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둘째로,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도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보스톤에서 열렸던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면서, 미국인들의 뿌리깊은 불안과 공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대테러전쟁을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신앙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로서도,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신앙심에 근거한 대테러 전쟁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지 못한 채, 민주당의 전통, 즉 교육과 노동 문제에 치중했던 전통과는 달리, 더욱 강한 미국을 주창하는 국가안보논리에 호소하고 있었던 것은, 미국이 지구촌의 공적이 되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현재 얼마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락한 생활방식을 빼앗길까 미국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치적 테러리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수퍼파워 미국 앞에서 대등한 자주외교와 국익외교를 약속했던 노무현 정권도 미국과의 파병 약속을 위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지난 주 이라크 추가파병을 실행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많은 것을 고려해서 이 명분없는 침략전쟁에 추가파병할 것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국제정치에 문외한인 저의 짐작으로는, 현재 우리나라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고려할 때,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야만 하겠다는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혹은 파병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미국의 군사경제적 보복을 두려워하는 우리 국민들의 공포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한 것은 결코 대통령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명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절어있는 우리들, 세상의 정의보다는 경제논리에 포로된 우리들, 강대국의 보복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요? 연일 테러가 계속되는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인 가운데, 2백 명이 아니라, 단 한두 명이 희생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희생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홍해바다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노예가 되더라도 떡고물이라도 먹고 편안히 살아야겠다는 우리의 노예의 생존 철학과, 안락한 일상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우리의 공포심 때문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미국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명분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미국의 전쟁론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인간의 생명보다 자본의 논리에 포로가 된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그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옵소서.
셋째로, 홍해바다의 검푸른 파도 앞에서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진지한 성찰은 실종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생존만이 관건이 되는 불신앙의 세상입니다. 화씨 911도의 세상은 진지한 사고와 비판적 성찰, 민주적 절차마저 모두 불태워버리는 세상입니다. 제국주의와의 싸움도 힘겨운 것이지만, 더욱 힘겨운 싸움은 제국주의가 우리들의 의식 속에 심어놓은 폭력숭배와 체념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제국의 종교는 우리에게 구원받고 싶으면, 지배체제에 복종하고 체념하라고 다그칩니다. 나의 생존 이외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 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 6월 남북한간에 군사적 긴장완화조치가 구체화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월초에 느닷없이 미국이 보유한 최신예 전폭기인 스텔쓰기, 레이다에도 걸리지 않아 현대전에서 침략의 선봉이 되는 스텔쓰기를 미국이 보유한 55대 가운데 10여 대를 한국에 보내 수 개월 동안 훈련에 돌입하였지만, 우리는 왜 하필 이렇게 군사적 긴장이 급속히 완화되는 시기에, 더군다나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 아프간과 이라크 공격의 첨병이었던 스텔쓰기를 10여대씩 한국에 배치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스텔쓰 전폭기들이 북한 핵시설에 대한 공격훈련을 하든 말든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최근 영국 BBC News Survey가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Would you die for your God/beliefs? 당신은 당신의 하느님 혹은 믿음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하는 설문이었습니다. 이 설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평균 52%였지만, 한국인들은 12%로서 10개국 가운데 꼴찌였습니다. 나이지리아가 93%, 인도네시아가 90%, 레바논과 미국이 70%, 멕시코가 60%, 인도가 45%, 이스라엘이 36%, 러시아가 20%, 영국이 19%인데 반해, 한국은 12%에 불과했습니다(U.S.Catholic, 2004년 5월호, 10쪽). 침략전쟁이든, 십자군 전쟁이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전되는 전쟁에 목숨을 거는 미국인들이 70%에 달하는데, 이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요? 요한계시록 13장 4절에, “사람들은 그 용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누가 이 짐승과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고 말하면서, 그 짐승에게 경배하였습니다”고 했는데,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하느님을 경배합니까, 아니면 이 세상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짐승 같은 제국을 누가 맞서서 싸울 수 있으랴 하면서 제국의 지배체제를 예배합니까? 돈과 폭력을 경배하도록 만드는 세상 제국들의 종교적 테러리즘을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따르미로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새길공동체 여러분은 정말로 세상의 현실을 지배하는 제국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화씨 911도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묻고 계신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오, 하느님, 저희들의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게 하옵소서.
오늘의 출애굽기 본문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보면,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다본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그 검푸른 파도에 겁을 집어먹고, 이집트 군대를 향해 항복의 백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기보다는 차라리 이집트의 노예로 되돌아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창조주의 모습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귀함과 창조성과 평등성을 되찾기 위해, 그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만이 그 넘실거리는 검푸른 파도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갔으며, 그들 용기 있는 자들만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홍해바다를 건넜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강대국의 노예로 살더라도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떡고물에 만족하거나, 강대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겁에 질린 사람들은 결코 홍해를 건너 자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는데, 그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제국의 무자비한 학살과 살인적인 착취로 인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공동체는 여지없이 박살이 나는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나이 열두 살의 소녀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 상황, 혹은 정신적 상황이 오늘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얼마나 공포가 지배하던 상황이었는지, 생존이 얼마나 힘겨운 처절한 상황이었는지를 되풀이 되풀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꿈 꿀 때마다, 그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역사가 몇 백 년 동안 계속된 좌절의 시대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두가 이제는 끝장이라고,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종주먹을 휘두를 때, 심지어 요세푸스조차도 하느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인들을 편들고 계신다고 외칠 때, 예수님은 그 좌절의 한복판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처세술, 무력감과 무관심의 불신앙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금욕생활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로 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나가셨습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초경이 시작되어 임신이 가능한 나이라는 말입니다. 제국의 지배와 착취로 인해 이제는 완전히 죽어버린 듯한 이스라엘 공동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소녀를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과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 넘실거리는 검푸른 파도는 분명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홍해 앞에서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에 사로잡혀, 자유를 향한 탈출을 오히려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쟁취하고 이 땅에 하느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홍해바다는 절망과 공포, 불신앙의 바다입니다. 그 절망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할 만큼 현실이 두렵다는 것은 우리가 자본과 폭력의 우상을 경배함으로써 우리가 비겁해졌다는 증거이며, 우리의 영혼이 공포로 인해 마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우리에게 닥칠 길고 긴 어둠과 추위와 굶주림이 두렵습니까? 차라리 강대국의 노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강대국의 고깃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를 믿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와 존엄성을 찾아 광야로 나가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저 검푸른 파도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가 자유의 행진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비겁해지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알을 품은 황제펭귄이 그 길고 긴 어둠과 추위, 굶주림을 견디어내듯이, 우리의 조상님들이 그 동굴 속의 곰처럼, 민족사의 쓰라린 겨울을 참고 견디어내었듯이, 우리도 생명을 보듬고 안고 키우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강대국의 공포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한 열두 살 소녀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제국의 학살과 착취 앞에서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으로 죽어버렸던 이스라엘에게 다시 생명과 희망과 구원을 주신 예수님을 믿고, 화씨 911도의 세상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좌절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 자유와 용기, 감격과 은총 땅으로 들어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다음 주는 광복 59주년 기념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모두가 진정으로 강대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노예의 생존철학에서 벗어나, 그 두려운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느님 나라를 믿고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만주에서 일본 군대를 탈영한 김준엽 선생과 장준하 선생 일행이 중경의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6천리 길의 험준산령을 가던 도중애,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한 겨울에 넘다가, 매일 100리씩 걸어서 두 주간이나 걸려 넘는다는 파촉령 설원에서, 서로 감싸안고 긴 밤을 지새우며,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 살인적인 추위와 공포를 견디어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를 원하시며, 강대국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고 독립된 나라를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자랑스런 부모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홍해바다의 검푸른 파도를 향해 저벅저벅 자유의 행진을 계속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었던 열두 살 소녀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화씨 9/11도의 생지옥 같은 절망과 공포와 불신앙의 바다를 건너, 용기와 감격, 협력과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새길공동체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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