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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습을 찾아서

출애굽기 최만자............... 조회 수 2143 추천 수 0 2008.05.19 15: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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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34:6-7 
설교자 : 최만자 자매 
참고 : 새길교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확인하고 창에 찔린 옆구리를 확인한 후에야 주의 부활을 믿었다는 성서 기록을 읽을 때, 그의 믿음 약함을 비난하기보다는 나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던가 아니면 기도나 환상이나 꿈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거나 음성을 듣거나 하여 확신을 가지기를 원하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을 확인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의미를 갖게 하며 또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도 확인하게 되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불확실을 넘어서 확신에 찬 힘있는 삶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사실 성서는 이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으며 더욱이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를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임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갖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내거나 그래서 확신을 갖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해 내는 것은 무모한 신앙이며 우리 내면에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재발견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보려 합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들의 삶의 과정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과 또 그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경험은 매우 다양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차원에서 표현된 모습은 神人 동형적으로 하나님이 마치 사람처럼 나타납니다.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입김으로 코에 생기를 불어넣고, 또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 옷을 지어 입히는 등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초월적으로 말씀으로만 천지를 창조하고 있으며, 저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신으로 나타납니다. 神人 동형적 하나님 모습은 보다 고대 때의 신 이해로 보며, 초월적 신상은 인류 역사와 문명이 보다 더 진행된 후대의 신 이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록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 이해가 긴장되게 병행하여 표현되고 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곧 히브리적 하나님 이해는 철저하게 그들 역사 안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함께 살고 그 삶을 간섭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고된 노역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는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며, 만나를 먹이시고, 샘물을 솟게 하는 그런 하나님인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 편에서 고백하는 하나님 모습은 창조주, 해방자 하나님,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같은 하나님, 부모와 같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신랑 되신 하나님, 남편 되는 하나님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모습으로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등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반석, 산성, 독수리, 빛, 물 등 수없이 많은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아버지로 혹은 전지전능자로 부르거나 몇 가지만의 하나님 심상(imagery)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심상은 인류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 경험의 다양함은 '아버지 하나님'은 물론 어떠한 하나님의 모습으로도 완전하게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Paul Tillich란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표상들은 결코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인간 경험의 언어이므로 한계언어이다. 인간이 경험한 한계 안에서밖에는 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경험의 언어는 궁극적인 것을 모두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종교적 언어란 인간의 경험과 궁극적 진리 사이를 상관시키는 관계고리라고 하였습니다. 상관관계의 방법(method of co-relation)으로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와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습의 다양함과 그 표현이 갖는 한계와 함께 생각해야 할 다른 하나의 측면은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 모습은 우리 삶의 조건과 상황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성서는 하나님을 '평화의 왕', '평화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 이는 평화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는 상황에서 평화의 하나님을 만나며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인데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을 때 아이들과 민중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수난을 앞두고 예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인데 그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다만 여기서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의 모습은 겸손하게 오시는 평화의 임금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갈등과 소요와 민란이 끊이지 않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의 오심은 그곳에 평화를 이루기 원하는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샬롬이라고 하는 성서의 평화개념은 세계적으로 평화를 가장 적절히 나타내는 표현으로 인정되어서 세계적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평화롭지 못한 나라 이스라엘에서 평화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고린도 전서 13장 소위 사랑의 장은 바울 선생이 교회의 복잡한 질서와 갈등을 정비하기 위해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그 중에 제일은 희망이다"라고 고쳐 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윤리 등은 그 상황에서 요구되는 요인들과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은 상황과 하나님 모습과의 상관성을 보여주는 예가 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하나인 출애굽기 34장 6∼7절은 그 앞의 19장부터 연결하여 이해되어야 합니다. 19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20장에서 십계명을 받고 자기 백성에게로 왔으나 그들은 금송아지를 세워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34장에서 새 계명을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신을 선포하기를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실제로 이 본문이 정리된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계약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노력하는 과정에서 광야생활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그때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읽은 느혜미야 9장 17절은 포로기에 에즈라가 이스라엘을 재건하려고 노력할 때 고백한 하나님 모습입니다. 에즈라는 그들 조상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배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저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역설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에즈라는 과거 광야의 생활을 회상하면서 그의 조상들의 불복종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하여 보면 에즈라의 하나님 고백은 출애굽기와는 다르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에 기본적으로 있던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후대에 적용한 것으로 봅니다.

출애굽기 34장은 JE 복합자료로서 그 연대를 기원전 900∼721년의 기간으로 보는데, 여기서 하나님 고백은 그 시기의 하나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느혜미야는 포로기 작품이므로 기원전 586∼536년의 기간으로 봅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그리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느혜미야서에서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모습이 고백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본문은 모두 똑같이 광야에서의 하나님 경험을 회상하는 고백인데 이처럼 다르게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의 수정은 비단 느헤미야서 뿐만이 아니라 요나서에도 나타나고 시편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필리스 트리블이라고 하는 유니온 신학교 교수는, 이같이 같은 상황이 차이를 가지고 표현되어진 내용을 분석하면서, 이는 성서 자체 안에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 다른 하나님 모습이 표현되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후대 느혜미야 시대에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모습은 사라지고 자비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자리와 느혜미야서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자리 곧 그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의 하나님은 주변의 나라들을 심판하여야 하고, 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기간에 발생하는 이방종교와의 차별성 강화, 가나안 도시문화와 유목문화와의 갈등에서 쉽게 가나안에 동화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도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지만 동시에 불의를 심판하시는 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포로기 전까지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면과 심판하는 자로서의 양면이 모두 강조되어졌습니다. 그러나 느혜미야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되었으며, 고난과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민족 존폐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족사를 재건하고 민족종교의 재건을 꿈꾸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에 와서는 심판이 아닌 위로와 용기를 주는 하나님, 자비와 은혜가 가득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포로 후기 예언자들에게서는 심판 메시지는 거의 줄어들고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는 메시지들이 많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로하라"라는 메시지가 포로 후기에 이스라엘에 내려진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에즈라는 광야시절 그의 조상들의 불복종을 회상하면서 그들이 비록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배신하였음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 분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지금 포로생활에서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을 그냥 버려 두시겠는가? 용기를 가지시오 이스라엘이여"라고 그 백성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에즈라에게서 광야의 하나님은 연민과 긍휼의 하나님이며 생존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범죄 하였어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생존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포로기 상황에서는 야웨의 자비하심이란 성품이 강조되어서 포로기의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편 137편에는 포로기의 슬픔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으로 수금 타는 재주를 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생활 때 바빌론은 이스라엘의 강산을 초토화시켰으며 대부분의 엘리트들을 잡아가고 고국은 텅 비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비록 하나님의 응보원칙에서 시내산 계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그러나 그 포로사건이 결코 이스라엘의 종국은 아니라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경험은 시대 상황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의한 신 경험은 자칫 인간이 신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요청에 의해 신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면이 특별하게 경험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심판자로 또 은혜주시는 분으로 구원자로 사랑의 본질로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오늘 두 본문의 비교는 이러한 사실이 성서 안에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말한다면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만나고 경험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논쟁의 핵심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대적 하나님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려는 것과 또 그 하나님의 존재증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론이 발전되었고 하나님의 존재론적 증명이 하나님의 모습을 추상적 존재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는 상당히 희랍철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이 기독교 안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이해는 희랍 철학적 존재론적 증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인간의 삶 속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 경험에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한다는 욕구를 가진다는 처음의 생각과 연결하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경험을 보면서, 오늘 지금 우리에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남한은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되어 방황하고 있고 곳곳에서 괴로운 신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굶주림으로 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한반도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이전의 삶의 태도를 회개하고 다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할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위기와는 거리가 멀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고통이 가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수가 1백5십만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실업자의 평균 나이가 38세이며 평균 부양가족이 3.5명이란 노동부의 추산이 나와 있습니다. 또 비록 일자리를 가지고는 있어도 지금의 낯선 체제가 불안하고,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목숨을 끊기도 하는 형편입니다. 사회 심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과 무력감으로 고통 당하며 경제위기로 불면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고도 합니다. IMF란 물론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인들의 잘못이 크고, 먼저이지만 세계적으로 강대국 기업들의 횡포도 큽니다. 금융권을 장악하여 돈줄을 일시적으로 제3세계에 풀었다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회에 돈을 거둬들이면 제3세계는 꼼짝없이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게 되어 있는 세계경제구조가 큰 문제입니다. 지금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Jubilee 2,000 Coalition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가난한 10억의 사람들의 부채를 탕감하여 2000년에는 모든 인류가 새로 평등하게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자는 운동으로, 그 청원서를 G-8정상회담에 제출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21세기 앞에 있는 거대한 불의의 세력, 오늘의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같은 침략세력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위기의 때를 오히려 그 동안 교인 수가 감소된 사태를 회복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희망에의 갈망을 빌어 신비적 신앙체험으로 유혹하면서 교회성장의 호기로 삼으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질 위험도 큽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만날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물질적 증거나 물리적 작용으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늘 나의 존재 안에 내재하여 내 삶을 주관하고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서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를 통하여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하늘에서 다스리고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 있고 매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과 상관없는 전능자의 힘만을 요구합니다.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오늘 우리들은 만나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기를 원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힘 주심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며 우리의 도덕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하신 연민,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위로와 용기와 힘을 갖는 신앙인으로 성숙해 가는 길일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노랫말을 의미 깊게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숙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싹트고 꽃 필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형제자매에게 용기를 주는 대화 속에, 힘있게 격려하는 손잡음 속에, 힘들고 고된 마음을 밝은 미소로 치유하는 웃음 속에, 그리고 보이지 않게 위하여 간구 하는 기도 속에 늘 함께 하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를 나무와 새와 강물과 대화를 나누면서 치유 받았다고 합니다.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치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 순례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위로가 되시는 분입니다. 위로의 힘은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 창조력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포로기 때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새 역사와 신학을 형성시킨 용기요 기반이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을 새롭게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할 창조적 힘을 얻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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