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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죄

출애굽기 박충구 목사............... 조회 수 2023 추천 수 0 2008.06.15 08: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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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22:20-26 
설교자 : 박충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영웅이 누구인지를 써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소녀가 "나의 영웅은 나의 아빠(my daddy)" 라고 써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소녀의 아빠가 "왜 아빠를 너의 영웅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는 딸이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느낌을 좀더 확실히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아빠는 딸의 대답을 듣는 순간 후회하고 말았습니다. 딸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짜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구요 영화 타이타닉에 나온 남자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그 주인공 이름 스펠링이(De Caprio) 너무 어려워 쉬운 단어를 골라잡은 것이 daddy였어요." 라고 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기지는 있지만, 진실을 혼동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되 비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소녀의 모습과 흡사한 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렸을 때 제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인간이 지난날의 일들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주홍빛 같을 지라도 흰 눈과 같이 희게 할 것이며, 나의 죄를 도말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노라고 하시는 성서의 말씀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망각은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사죄의 확신을 가지면서 얼마나 위로와 평안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고, 신학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신학대학에서 윤리학 교수로서 강의를 하면서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그 목사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망각이 축복만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거룩하신 뜻을 늘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 또한 요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아버지와 형제들이 독 가스실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던 엘리 비젤은 2차 대전 후 그가 했던 어느 강연에서, 나치의 몸서리치는 범죄를 미워하고 보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로 하여금 그러한 역사적 비극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과거에 대한 무지는 과거의 오류들에서 자유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지난날의 오류와 비극적 현실들을 잊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삶 속에서 지난날과 같은 오류와 비극이 재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한 목사님의 가르침과 엘리 비젤의 일화는 오늘날 내 마음속에 한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의식의 두 축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잊어야 할 것도 있지만 잊어서는 안될 것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은 교리적으로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전통에 크게 기인하고 있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고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무거운 죄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 같은 신학자도 "하나님이 너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너도 네 자신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했습니다. 죄책에 대한 인식과 용서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교회에서 배운 죄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죄책을 불러오는 것들이란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 보다 철저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에 잘 빠지는 것, 헌금을 많이 내지 못한 것, 교회가 맡긴 직임을 다하지 못한 것들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보수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 오 분들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성서적인 근거를 지닌 죄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적질 한 것, 간음한 것, 탐심을 가진 것, 불효한 것, 거짓말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이러한 것들을 죄라고 여기고 이러한 죄를 짓고 죄책을 느낄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들면 죄책은 사라지고 믿음으로 인하여 나는 의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죄 이해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못 행한 죄"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해진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면 우리는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 이면에는 암암리에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금기적 명령을 받고 있으며, 이 금기를 깨뜨리면 죄가 된다고 믿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눈은 엄청나게 크고 잠자리 눈처럼 곁눈들이 엮어져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살피시는 하나님은 마치 첩보위성과 같으신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들키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무엇인가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분위기와 내용이 있는 것 같으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이 바른 삶이며,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을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도원 전통에 보면 수도사들이 검은 수도복과 두건을 쓰고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았고, 수도생활에 임하면서 세 가지 세속적인 것을 멀리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절대복종의 길을, 소유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절대 청빈한 삶을 살아가기를, 그리고 성적인 욕망을 버리고 절대순결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삶을 위해 이들은 부모와 형제를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수도원에 일단 들어가면 죽어서야 나오는 정주(定住)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수도원 안에 수도사들을 유혹할만한 것들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금기는 대단했습니다. 여성적인 것들은 수도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유혹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도 암컷들은 수도원 안에 들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설사 어머니나 누이동생이 찾아와도 이들은 두건을 내려쓰고 면대하지 않았습니다. 유혹을 당하지 않으려고 이들은 세상을 향해서 두건을 내려쓴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수도원으로 피해 들어가고, 또 수도원 안에서도 그들은 죄가 될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훌륭한 수도사일수록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요, 세상에 대하여 무감동해 하는 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하여 부모나 형제, 그리고 이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문을 굳게 잠가두고 세상을 멀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망각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인가 행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죄란 무엇을 행하는 죄(sins of commission)였습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하고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무관심한 존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여기서 적극적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하여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영적 이기주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따른다면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살수록 착한 사람이 되지만, 반대로 적극적이 되면 될수록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사람의 등을 밀어서 물에 빠뜨려 죽게 한다면 그것은 살인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강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잡아가지는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굶어 죽는 것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죄란 무엇을 행한 결과를 묻는 데서 오는 것이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죄를 묻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물에 빠져 죽어도 죄 책을 느끼지 않으며, 세계 도처에서 하루에 수만명씩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어도 우리는 죄책을 느끼지 못하는 깊은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향하여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을 선포하는 기독교는 신앙을 값싸고 천박한 것으로 만들며, 교회는 싸구려 은총을 남발하는 종교로 전락되어 기독교인들을 병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한 죄'만을 기억하는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전통적인 것에 매어두는 잘못을 범해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요한복음 15장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기독교는 '종의 종교'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자유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을 살아가기보다는 금기와 명령을 따라서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제한되며,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만 집중시키는 '영적인 이기주의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자기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에 기복신앙이 겹치면 교회생활을 통하여 축복을 받아서 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기도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자신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맡기고 그 십자가 앞에서 영혼이 잘되고 육체가 강건하며 범사가 잘되는 삼박자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거룩한 삶이기보다는 잔인하고 무감동한 성품의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가지고 성공한 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교회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삼박자 축복으로 해석하는 교회는 장로교나 감리교나 특정 교파를 막론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나는 이런 한국 교회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잊고 자신의 길만 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사상과 삶이 주는 가르침은 잊고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영위하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말을 건네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 곳에 나타나신 흔적이 있는 데, 마치 승리의 임금이 나타나듯이 팡파레를 울리며 나타나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도 구별하지 못한 동산지기로, 엠마오 길의 동행자로, 혹은 익명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분명히 무슨 신앙적 사건을 경험한 것 같은 데, 그 내용은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으로 되 돌려졌고, 빈 무덤의 시체를 보러갔던 여인들이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원래의 직업으로 되돌아갔던 어부들을 다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불러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현존하는 예수를 좇아 다니던 이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예수의 현존이 없어도 스스로 신앙의 길을, 증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종의 종교에서 벗의 종교로, 타율의 종교에서 자율의 종교로 신앙의 축이 옮겨졌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의 공동체는 잘못 행하는 죄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의 의미를 망각하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안식일 법도 어겼고, 성전의 거룩한 침묵도 깨뜨렸으며,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무엇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신 분이요, 행함의 죄를 지으신 분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가 앞을 못 보는 소경의 눈을 고쳐 주었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다." 행함의 죄인 셈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생각하던 당대의 종교인들의 눈에는 예수가 죄인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눈먼 이의 고통과 한을 풀어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눈먼 이의 고통과 한을 망각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오히려 이를 망각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셨습니다. Sins of Omission, Sins of Forgetting, 즉 생략해 버리는 죄, 망각해 버리는 죄가 진정한 죄라고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책망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그 밖의 채소는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구나."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망각한 종교인들의 위선을 들추어내는 말씀입니다. 정의롭게 살지 못한 죄, 평등한 삶을 살지 못한 죄, 이웃과 진정으로 유대를 나누지 못한 죄,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주지 못한 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단 50년 동안 불화와 반목과 적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향하여 총과 미사일을 장전하고 있는 분단국가의 현실을 방치한 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정의를 위하여 무엇인가 하려는 이들을 죄인이라고 보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독교인들이 불의한 현실을 지속시키는 앞잡이들이 되어 온 것이 해방 이후의 한국 기독교의 한 측면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무엇인가 망각하고 살아가는 죄를 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극적으로 살아서 나만 의로워지고 구원받겠다는 영적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보다 적극적으로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 정의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청교도 전통을 살펴보면 그들 목사는 자기 아내를 매질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란 순수한 신앙으로 깨끗한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경건주의 전통에 서서 철저히 경건한 삶을 강조하였고, 매사를 죄로 해석하던 목사님들이 자신의 아내를 매질 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내를 평등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정의로운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거나 생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 개념에는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았고 생략되었던 것이지요. 한국 사회는 이러한 나쁜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부장적인 남성 우월주의와 남성 편의주의가 교회 안에서나 밖에 편만해 있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생략하고 살아온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성이 아무리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해도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악어의 눈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이 하는 회개는 결코 참다운 회개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 태어나는 여자아이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유를 박탈당하고 평등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에게는 불의한 사회적 환경에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불의한 사회에 대하여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불의한 사회 속에서 성장해온 한국 기독교는 불의한 교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교회를 새롭게 만들어 가려는 이들이 없는 기독교는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에 앞서서 그 자체가 회개의 대상이며 구원을 받아야 할 집단입니다. 스스로 망각의 죄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가는 교회는 거대한 우상일 뿐입니다.
또 다른 망각의 죄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가난한 이들이 찾아오지 않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계급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가진 이들은 주일 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교회에 올 수 있지만, 주일 평일 가릴 것 없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들은 주일을 지킬 수 없어서 주일을 범하는 죄인으로 규정을 받습니다. 넉넉한 봉급을 받는 사람은 많은 헌금을 낼 수 있으므로 교회의 장로도 되고 봉사와 헌신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칭찬도 받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으므로 그러한 기준을 따라갈 길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이웃들을 경쟁에서 이겨 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성공한 이들을 축복하는 교회에서는 높은 사람,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 소유를 많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이들로 간주됩니다. 돈이 많은 이들은 온 가족의 건강을 늘 체크하고 건강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구하여 먹습니다. 그러니 더 건강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 이가 썩고 빠져나가도 엄청난 비용 때문에 해 넣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가난으로 인하여 건강을 잃은 이들은 축복을 받지 못한 이들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회에서도 업신여김을 당하고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했고, 자신의 삶의 원칙에서 이 사실을 생략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오래 오래 생략하다 보니까 아예 죄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회개와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전혀 죄책을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사치하고 풍요로운 삶을 부러워하는 풍토가 교회에 만연하게 되어, 이제는 신자들의 생활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교회들을 사치하게 꾸미고, 치장하기를 경쟁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 이하에 나오는 성서의 말씀은 {약자 보호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 고아나 과부를 천대하는 이들,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책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성서 본문은 원래 계약법전의 일부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가난한 이들, 사회 속에서 약자가 된 이들, 즉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들을 향하여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존중해 주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며, 오히려 외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본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삶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부유한 이들, 힘있는 이들, 많이 배운 이들 만을 위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불의한 사회이고, 이 불의한 사회를 방관하는 기독교인들은 불의한 존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칭찬을 받기보다는 철없는 이들로 치부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정의로운 요구들이 불안을 조성하는 소리로 들리는 세대가 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소리가 침묵하는 이 시대는 다음 세대를 향하여 커다란 죄를 짓는 세대입니다. 교회마다 회개를 촉구한다고 하지만 망각의 죄는 더욱 깊어져 가고 사회적 불의와 불신은 그와 정비례하여 팽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들에게 "예수가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어느 소녀처럼 자기 편한 대로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편한 예수만을 생각하던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간혹, 정말 이 길이 옳은 것, 참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선택하고 적당히 살아가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어둠을 물리치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라든지 혹은 "너희는 부패하는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You should be the light of the world"라고 말씀하기보다는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마태 5:13-14)." 라고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빛과 소금인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은 망각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을 걷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그 길을 돌이켰던 것과 같이,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잊고 자신의 길을 가던 이들이 자신의 길을 버리고 예수를 새롭게 증거하기 시작한 이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에서 잊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돌이켜 각기 자신의 가슴마다 정의의 촛불을 밝힐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어둠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며, 빛이 어둠을 비추면 어둠이 이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둠을 이기고, 소금은 부패를 막습니다. 어둠과 부패가 활개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위탁하신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빛과 소금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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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6 시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121:1-8  김이곤 목사  2008-06-06 2910
17445 시편 목자는 계십니까? 시23:1  김남준 목사  2008-06-06 2453
17444 시편 염려를 넘어서서 시23:2  김남준 목사  2008-06-06 2239
17443 시편 영혼의 침체와 회복 시23:3  김남준 목사  2008-06-06 2387
17442 시편 영혼의 회복을 주심은 시23:3  김남준 목사  2008-06-06 2141
17441 요한계시 마지막 추수 계14:장  강종수 목사  2008-06-08 1472
17440 고린도전 하나님의 동역자 고전3:9  이승남 목사  2008-06-11 3066
17439 누가복음 역사의 예수를 따라 눅7:33-35  권진관 형제  2008-06-15 1554
17438 신명기 삼가 잊지 말라 신8:11-20  박동현 목사  2008-06-15 1984
17437 고린도후 어느 여학생의 고난 고후1:3-7  길희성 형제  2008-06-15 1837
17436 마태복음 전통적 가치와의 갈등과 극복 마5:38-42  최만자 자매  2008-06-15 1603
» 출애굽기 망각의 죄 출22:20-26  박충구 목사  2008-06-15 2023
17434 누가복음 하나님 닮기: 거룩하신 하나님, 자궁의 하나님 눅6:38  한완상 형제  2008-06-15 2156
17433 누가복음 부모의 권위 눅12:51-53  한인철 목사  2008-06-15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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