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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각 나팔소리 크게 울릴 때

레위기 김이곤 목사............... 조회 수 2814 추천 수 0 2007.12.12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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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25:8-3 
설교자 : 김이곤 목사 
참고 : 새길교회 
흔히들 하는 말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딱딱한 법조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못지 않은 그런 깊은 인간애로 가득 차 있는 문헌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주 그러한 깊은 인간애가 과연 구약의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은 계명을 읽을 때 손쉽게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들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도 이전에는 애굽에서 몸 붙여 사는 나그네들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약의 율법이 지니고 있는 그 기본 법 정신과 그 중심신학은 첫째 애굽 땅에서 겪었던 이스라엘의 고난의 경험과 둘째 거기서부터 건짐을 받았던 구원의 경험, 이 두 가지의 큰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된 그런 경험의 신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율법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인간애"는 바로 이러한 특수한 고난역사와 구원역사를 통하여 겪은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난경험과 구원경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인들이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과거에 그들이 겪었던 고난 경험을 거울삼아서 노예살이의 서러움과 외로움과 갖가지의 고통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회, 이른 바,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흩어진 지파들은 고난받는 자의 편에 서서 고난받는 자에게 위로와 긍휼을 베푸시는 신이신 "야훼"라는 신의 이름 아래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과거에 겪은 그런 증오스러운 사회, 이른 바, 빈부의 격차와 권력의 편중 등으로 인하여 생긴 계급사회의 부조리를 깡그리 떨쳐버린 완전한 의미의 민주적 평등사회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은 분명히 이러한 사회를 추구해 간 이스라엘 역사 가장 초기의 모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 여러 사사들, 사무엘 등이 통치하던 시대도 또한 분명, 비록 불완전하나마 그러한 이상적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시대였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불행스럽게도 이러한 이상적인 평등공동체를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형성하도록 내버려두는 그런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침략과 약탈, 착취와 억압 등이 팔레스틴의 가나안 땅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사회구조는 순식간에 "힘의 논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고 또 제대로 이념 정리가 되지도 못한 채로 왕권 지배사회가 생기게 되었으며 빈부의 격차와 권력의 편중에 의한 부조리한 계층사회가 형성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적 필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런 부조리의 사회현실이 바로 우리가 애굽 땅에서 노예살이로 고생을 할 때 그토록 꿈꾸어 왔던 사회는 결코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는 심각한 민족적 각성이 생겨나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러한 사회는 개혁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개혁을 위한 혁명적이고도 이상적인 한 사회개혁법안이 야훼종교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제출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른 바, "희년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희년"이라는 말은 "수양 뿔"을 가리키는 히브리말 "요-벨"이라는 말에서부터 왔는데,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선 그 해를 출발점으로 해서 그 때부터 계산하여,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후 즉 7x7=49해서 49년을 지낸 후 맞이하는 그 첫해 즉 제 50년째 되는 해 일곱째 달 제 10일에 수양 뿔로 만든 나팔, 소위 양각나팔을 크게 불게 하고 온 땅 거민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는 이 해방의 날을 기념하는 대 축제를 가졌는데 이를 가리켜 성서는 희년축제라고 했고 이 때 선포된 해방에 관한 법을 소위 "희년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희년법"은 "희년"의 또 다른 이름인,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대 사면의 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대 특사를 내리는 한 법령"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희년 때 부는 "수양의 뿔"을 표시하는 히브리어 "요-벨"이라는 말이 "기쁨의 큰 선물을 가져온다"라는 뜻을 가졌던 것도 그렇고 그리고 이 말을 그대로 음역한 영어 jubilee의 라틴어식 표기인 jubilare가 "큰 소리를 높이 울려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때아닌 은총에 대한 큰 기쁨의 반응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 사면의 해에 선포된 이 희년법의 기본 사상은 우선 그 법의 서두 말 즉 희년법의 서문에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희년법은 그 서문에서 다음의 네 가지를 요구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첫째, 해방을 선포하여라.
둘째, 각자 자기 유산의 기업으로 돌아가라.
셋째, 너의 이웃을 억울하게 하거나 억압하지 말아라.
넷째,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즉 희년법의 기본 목적은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화 그리고 종교적 평등사회를 이루는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1) 첫째 여기서 "해방을 선포하여라"라고 한 말은 주로, 가난 때문에 즉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노예로 전락하게 된 동족에게 그 노예 신분을 완전히 사면해 주는 노예 해방적 사건을 지시하는 말입니다. 즉 희년 선포의 제일 목적은 우선 "인간해방"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원 조상으로 알려진 히브리인들은 본래 노예의 신분을 가졌던 경험이 있는, 신분이 낮고 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의 독립된 민족인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형성한 이후부터는 적어도 히브리인이 같은 히브리인을 노예화하는 일은 즉 자기 동족을 노예화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금지를 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예라면 그들이 모두 다 노예였었는데 이제 와서 동족끼리의 등차와 계급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출발할 때부터 가졌던 기본 신앙이었고 기본 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급변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단지 경제적인 이유, 그 한가지 이유 때문에, 비록 동일한 자산을 가지고 출발은 다 같이 했지만, 살아가다가 보니까 가난에 직면하는 동족이 생겨나게 되고 또 그 가난 때문에 부채를 짊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 몸까지도 노예로 팔아 넘기는 사태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비극적 첫 걸음은 이런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이유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희년법은 우선 이러한 인간 노예화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을 선결문제로 보고 노예로부터의 해방 즉 인간의 정치, 경제적 해방의 선언을 먼저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해방이란 해방의 이념을 선포만 하는 것으로는 이루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인간 해방을 위한 구체적 실천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2) 따라서 둘째로는 이 서문에서 이 희년법은 매우 특이하고도 혁명적인 한 요구를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즉 "돌아가라"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말 "타슈부"라는 말을 3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던 것입니다. "타슈부!" "타슈부!" "타슈부!"(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그러나 어디로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여기서 "돌아가라"는 말은 각자가 그 생의 출발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그 "기본 생활자금"인 소위 유산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즉 모든 것을 그 출발점으로 원상복귀 하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말하는 원상복귀라는 말은 이스라엘인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온 땅을 각 지파와 각 가문 앞으로 균등하게 배분 받을 때 받았던 그 모든 사업의 출발점인 기업의 원 상태, 즉 민족 출발 때의 모든 히브리인의 경제적 원 상태로 "돌아가라"는 그런 명령입니다. 7x7=49, 49년 세월을 지내오면서, 어떤 이는 치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난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조리도 생겨났으며 같은 동족사회 안에 원치도 않는 계층도 생기게 되고 또 동족간에 억울함을 당하여 한이 맺히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따위의 부조리가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그대로 존속하여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부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등사회, 샬롬의 현실은 결코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내 온 50년 역사의 모든 부조리를 다 백지로 돌리고 원 상태, 즉 하나님으로부터 자산을 물려받던 가나안 정착 초기의 원 상태로 돌아가서 즉 물려받은 원 자산인 유산의 땅, 그 조상의 토지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똑같이 재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 각각 자기의 기본 자산인 유산의 땅과 그리고 자기의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서 ("타슈바"해서) 거기 그 원 출발점에서 똑같이 다시 서 보자는 말입니다.
타슈부! 타슈부! 타슈부!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3) 그러나 왜 돌아가는가? 그리하여 셋째로, 구약의 희년법은 돌아가야 할 그 이유를 더 이상 이웃을 억울하게 하고 더 이상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밝혀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을 억울하게 하여 억압하는 일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인하여,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멸시하고 구박하며 마침내는 노예화시키는 그런 행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적어도 우리 히브리인 동족만은, 즉 "같이" 노예로 있다가 또 "같이" 해방을 받은 우리 히브리 민족끼리는 적어도 그런 한을 남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이 이러한 대도 여전히 이런 한을 심는 일은 그들을 종살이로부터 은혜로(!), 전혀 은혜로(!)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얕잡아 보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4) 이 희년법 선포의 그 서문 마지막에서는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말로 서문을 마무리짓습니다.
희년법의 이러한 서문은 실로 희년법이 지닌 그 신학적 성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서문을 기초로 하고 즉 이 서문의 신학적 의미와 그 정신을 기초로 하고서 희년법은 다음과 같은 5개 종목의 법조문을 제시합니다. 즉
① 토지에 관한 법, 즉 토지의 자동적 무상원상복귀에 관한 법
② 가옥에 관한 법, 즉 가옥의 자동적 무상원상복귀에 관한 법
③ 레위인의 토지와 가옥에 관한 법
④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고 돈을 빌리는 금전대부에 관한 법
⑤ 노예해방에 관한 법 등입니다.
이러한 법규란 그러므로 인간의 "생의 기본자산"인 땅, 가옥 그리고 몸,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물려준 생의 기본자산, 즉 히브리말로 "아훗짜"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즉 땅, 가옥 그리고 몸은 절대로 영구히 팔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법규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여 가난 때문에 그것들을 어쩔 수 없이 팔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능력이 허락되면 어느 때든지 즉각적으로 무를 수가 있고 또 혹 무를 능력이 없더라도 50년째 되는 희년이 되면 무를 값을 치르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상으로 사면 및 탕감이 되어 주인에게 자동적으로 무상복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하고 있는 법입니다.
모든 토지는, 즉 가나안에 있는 모든 땅은 야훼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착 초기에 이스라엘에게 직접 나누어주신 선물이요 기본 자산이므로 아무도 인간이 마음대로 매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저 봉건사회의 군주가 자기의 봉신들에게 자기 봉토의 일부를 빌려주듯이 그렇게 야훼께서도 자신의 땅을 한 때 나그네였고 노예에 불과한 히브리인이었던 우리에게 평등하게 분배해 주시었던 땅이므로 우리가 마음대로 매매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설혹 가난 때문에 자기 땅을 판 것이 있더라도, 사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판 것이라기보다는 빌려준 것과 같은 것인데, 그러므로 무를 능력이 생겨나면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었습니다. 설혹 무를 능력이 없더라도, 안식년의 안식년 7x7=49, 49년이 지난 제 50년째에는, 이른 바, 야훼의 역사가 움직여 가는 그 대 주기가(대 싸이클) 새로 시작되는 그 희년의 해에는 네 것, 내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고 단지 야훼 하나님의 것만 남으니까, 이 희년에는 모두들 그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다시 분배받아서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법규의 정신은 가옥에 관한 법이나 레위인의 재산에 관한 법이나 돈 대부에 관한 법, 그리고 노예 즉 인신매매에 관한 법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되었습니다. 한 때 너무 궁핍해서 남에게 넘겨주었던 가옥, 또 한 때 너무 궁핍한 나머지 빌려 썼던 돈, 그리고 한 때 너무 가난하여 자기 처자나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았었던 그 처자와 자신의 몸이 모두 희년이 되면, 50년째가 되면, 자동적으로 대 사면 대 탕감을 받아 무상으로 그 원래의 상태로 복귀되도록 법으로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49년 세월동안 쌓인 모든 부조리를 모두 한꺼번에 다 원상복귀 시켜서 새로운 삶으로 그리고 똑같은 조건 하에서 모두 다시 시작하라고 하는 이 희년법은 초기 이스라엘, 즉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부터 기적적으로 해방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었던 그 첫 이스라엘인들이 그렇게도 열망하여 꿈꾸었던, 그리고 그 후의 많은 예언자들의 하나님나라 이념 속에서도 그토록 끊임없이 살아 있었던 이상적 평등사회에 대한 한 희망의 표현임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분명히, 이 희년법 속에 나타난 이상적 사회에 관한 이 이념은, 분명 개인의 사유재산 극대화와 개인의 권리의 극대화를 방지하고 그리고 철저히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눌림 받는 자, 억울하게 고난받는 자가 없는 그런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구현하자는 것과 그리고 그런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서는 우선 모든 인간이 똑같이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과 또 모든 인간이 다 동등한 경제균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회 건설을 위하여서는 적어도 50년을 한 주기로 보는 그 주기의 첫 해에는 희년의 양각나팔소리를 크게 울림과 동시에 모든 것이 처음의 출발상태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슈부, 타슈부, 타슈부,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이상사회 이념은 그 많은 세월동안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토록 끊임없이 그리고 그토록 통절히 절규되어 왔지만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은 없었습니다. 예언자 제3 이사야가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알려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어라.
라고 외쳤고 그 후 3세기만큼이나 후에 와서도 누가복음 기자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처럼 희년의 복음 즉 주의 은혜의 해를 외쳤지만 인간역사는 여전히 희년의 정신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희년의 대사면, 희년의 대복귀가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단지 웃음거리로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안식년에는 경작을 하지말고 1년 내내 땅을 묵혀두라고 하니 이게 어디 될 말이며 또 희년은, 특히 안식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휴경의 해가 2년이나 반복되는 셈인데, 그러면 이것은 2년이나 땅을 묵혀두라는 말인데 이게 어디 될 말이며, 무엇보다도 그토록 수고하여 일구어 놓은 나의 모든 농경지를 돈 한푼 받지 않고, 희년이라고 해서 모두 무상으로 원점으로 돌려 원 주인에게로 돌리라고 하니 이게 어디 자본주의 경제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인가 라고 냉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년에 2모작 3모작을 해도 살기가 힘이 드는데, 한 달에 월급을 500만원, 800만원, 천만원씩 받아도 나와 나의 후손의 백년대계를 위한 나의 인생설계에는 너무 적은 액수인데, 그런데, 안식년과 희년에는 휴경을 하고 또 빌려줬던 돈과 가옥을 모두 다 원점으로 탕감해 주라고 하니 그게 어디 될 말이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쉬어라, 안식년에는 면제하라, 희년에는 모든 것을 사면하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 음성은 웃음거리로만 들릴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모두 냉소하며 오늘도 스스로 멸망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땅도 쉬어야 하고 나무도 쉬어야 하며 사람들도 모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서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도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에는 좀 접어두고 쉬어야 합니다. 먹을 만큼만 먹고 가질 만큼만 가지고 일할 만큼만 일하고 높아질 만큼만 높아져서 그 때 양각나팔소리 크게 울릴 때는 그 모든 것을 멈추고 쉬어야 하며 각각 자기가 왔던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도 사실은 누가복음 기자가 적절히 말하였듯이:
가난한 자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게 하려고, 포로된 자에게 이 자유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려고, 눈먼 자도 다시 보게 되고, 눌림 받는 자에게도 이 자유가 전해지게 하려고, 용서받기 힘든 모든 죄인 된 인류에게 "주의 은혜로, 희년의 대 사면처럼, 모두 무상으로 그 죄가 용서받고 탕감 받을 수 있는 그런 희년의 해를 선포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로 오신 것은 자신이 대속량의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인 십자가 위에 받쳐드림으로 온 인류가 이 은총을 통하여, 비록 사죄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그 모든 잘못을 원점으로 돌리는 희년의 대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희년 정신은 실로, 고대 히브리종교로부터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성서적 복음의 핵심을 이루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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