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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고백-하나님나라 일꾼 나그네

레위기 한완상............... 조회 수 2095 추천 수 0 2007.12.13 13: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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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15:1-7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엄청난 힘을 지녔기에 그만큼 대가도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고백은 낭만적 시 암송이나 달콤한 사랑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절박하고 심각한 고백이었습니다. 육체의 생명을 끝장내게 하는 무서운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인간 실존과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돌로 죽임을 당한 평신도 스테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만큼 그의 신앙고백은 심각했습니다.
이 같은 힘있는 고백은 한 개인의 결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고백 위에 기독교 전통이 세워진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실존성, 공동체성 그리고 역사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고백으로 개인의 신앙은 독수리처럼 올라가고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차게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의 이러한 힘은 고백자 또는 고백공동체의 특수상황과 연결될 때 비로소 변혁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고백의 내용을 text라고 한다면 고백공동체의 특수상황은 바로 context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대체로 보편성을 띄는 고백내용이 고백공동체의 절박한 특수상황에 담겨질 때 그것은 감동의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Context 없는 text는 힘을 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text 없는 context는 또한 감동과 힘의 모태(母胎)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신경의 문제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의 상황과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공허할 정도로 추상적 교리나 교리적 요리문답 지침같이 들립니다. 내용적으로 보아도 희년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도바울의 그리스도의 모습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신앙고백의 역동적 보편성을 고백공동체의 특수상황이라는 그릇에 새롭게 담으려고 진지한 노력, 성실한 신앙의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고백의 실존적 능력과 변혁적 효력을 위해서도 text는 context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context에서 신앙고백의 내용인 text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새길공동체의 신앙고백은 1987년 3월, 아직도 全斗煥 군사정치의 억압이 시퍼렇게 살아 움직일 때 나왔습니다. 이제 21세기를 5년 앞두고 있으며 해방 50주년, 분단 반세기를 맞아 禧年의 메시지를 아직도 분단된 冷戰孤島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음미하면서 새길공동체 신앙고백을 새롭게 狀況化(contextualization)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를 희년의 관점에서 재성찰하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다듬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를 변혁공동체로 되살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은 우리 고백을 힘있는, 살아 있는 고백으로 만들어 주기도 할 것입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에 주목합시다. 하나님이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창조하시고 〈좋다〉라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자연은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여러해 전 중국 계림에 갔을 때 山의 아름다움을 보고 탄성을 발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자신이 〈좋구나〉라고 하실 만큼 자연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지으신 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구나〉라고 더욱 감탄하셨습니다. 피조물은 자연이든 사람이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었기에, 그것을 保全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값지다고 생각되는 미술품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의 걸작품을 우리는 그토록 푸대접했을까요?
바로 이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누가 파괴하고 훼손해 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독선과 교만 그리고 탐욕 아닙니까?
인간은 만물 위에 군림하는 영장이라는 독선과 교만이야말로 자연을 포함한 만물을 경시하고 함부로 다룰 수 있게 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인 자연을 잘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도 일정한 윤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교만과 독선, 오만과 방자함은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1세기의 위기는 인간과 인간간의 대결에서 나오기보다 인간과 자연간의 대결에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때 신앙공동체는 자연에 대한 성서적 인식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자연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자연을 마침내 신음하게 했습니다. 인간은 개발의 미명 아래 자연을 마구 정복, 착취, 학살해 왔습니다. 더 아름답게 창조된 인간피조물이 아름답게 창조된 자연피조물을 더 추악하게 파괴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신음소리는 저 일본의 지진소리에서, 저 유럽의 홍수 소리에서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창조주는 변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保全과 完成을 위한 하나님의 변혁활동입니다.
교회공동체가 날로 악화되고 있는 환경문제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변혁 노력과 그 완성을 감사드리며 그 완성작업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이렇게 인간만이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자연은 인간의 젖줄이요 母胎인데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도 〈좋은〉 자연을 살리시고자 오늘도 노력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창조활동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자연의 핵이라고 할 토지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알아봅시다.
성서적 이해를 하기 앞서, 토지가 힘의 원천이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부족간 갈등, 민족간 분쟁, 국가간 전쟁은 따지고 보면 땅 확장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땅을 넓히면 국가신장이요, 땅을 잃으면 국권상실입니다. 개인과 가족에게도 땅은 힘의 바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 대한 방침을 보면 그 가정, 집단, 그 국가의 앞날의 안정과 발전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토지를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나라는 장래가 없습니다. 그 곳에 평화도 정의도 없습니다. 오늘의 中南美 나라들, 그러기에 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접목되면서 토지에 대한 성서적 입장은 안타깝게도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덕지주 중에 기독교 신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악덕 봉건영주들이나, 미국의 plantation 주인들이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들이야말로 땅에 대한 성서적 인식을 왜곡해 온 장본인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서적 입장은 어떠합니까?
첫째, 성서는 안식일을 맞아 땅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도 쉬게 하라는 말씀 속에는 땅도 사람처럼 숨쉬는 생명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도 일한 뒤 보상을 받고 쉬어야 노동력을 재생산 할 수 있듯이, 땅도 인간처럼 아낌을 받고 쉬어야 합니다. 땅을 생명 없는 착취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풍부한 수확을 위해 화학 비료를 쓰는 것은 사람 몸을 즐겁게 해준다고 마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이 殺人하게 되듯이,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은 殺土요 殺生입니다. 마약 투입이 형법에 저촉된다면 토지에 독약을 집어넣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스테로이드 약을 복용하여 금메달을 따더라도 그것이 취소되고 그의 사회적 생명은 끝나게 되듯, 땅에 인공비료를 지나치게 쓰는 것은 살생으로서 마땅히 취소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땅에 대한 희년적 의미는 땅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보아 사람처럼 쉬게 하고 숨쉬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 뜻을 한번 더 깊게 짚어 본다면, 땅이 생명체이듯, 사람도 마침내 땅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과 인간은 따지고 보면 하나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땅이라는 자연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참으로 身土不二입니다. 자연을 경멸하고 파괴하는 것은 곧 자기를 능멸하고 파괴하는 짓입니다.
둘째로, 성서는 땅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땅의 임시 관리자요 임시 거주자요, 땅의 나그네일 뿐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땅이 쉴 때 땅에 관련된 모든 임시 관리자들도 쉬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나 혼자 쉬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되는 다른 사람들을 쉬게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愛他主義가 여기에 있습니다.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땅 값은 희년이 가까울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땅은 희년이 되면 원래주인에게 귀속됩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희년이 되면 그 땅을 다시 찾게 됩니다. 이것이 땅의 참주인의 뜻입니다. 이러한 희년정신에 따라 노예도 희년에는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땅의 나그네일 뿐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던져 줍니다.
종착지점을 향해 여행하는 나그네는 여행 중에 나만을 위한 튼튼한 큰 창고를 짖지 않습니다. 튼튼한 큰 성곽을 세우지 않습니다.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나만을 위한 소유와 축척에 발광하듯 정열을 쏟지 않습니다. 또한 현명한 여행자는 여행 중에 항상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여행은 메타노이아(회개)의 과정입니다. 여행 중에 느끼게 되는 새로움은 여행자를 깨닫게 하고, 감탄케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특히 종착지점의 시각에서 항상 자기를 되돌아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희망이요, 이것이 역사의식입니다. 이러한 메타노이아의 존재가 바로 희년적 인간이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나그네인 인간들에게 〈가볍게 여행하라〉(travel light)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여행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큰 보부상처럼 팔 물건을 짊어지고 여행하셨던 주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셨고, 당신 자신이 제자들에게 짐의 압박에 짖눌린 선교여행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인생여정에서 우리는 우리만을 위한 소유와 축적의 그 엄청난 짐을 지고 어리석게 어리석은 나그네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취임사 설교를 하신 것은 바로 이 같은 희년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자 당신의 특수상황에서 희년을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소유와 축적의 탐욕으로 생긴 〈아름답지 못한, 좋지 못한 균열〉을 바로 잡는 것이 곧 희년의 참 정신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가 4:16-19) 즉:
가난한 자와 부자 간의 균열
포로된 자와 횡포자 간의 균열
억눌린 자와 억압자 간의 균열
눈먼 자와 눈멀게 하는 자 간의 갈등을 성령의 힘으로 깨트리시기 위해 당신의 상황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추한 균열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죄악의 상황이며 이 상황을 바로 고쳐보려는 것이 역사적 예수의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도 이 같은 희년선포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이 선포는 성령의 능력으로 촉발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희년운동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새길공동체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 예수, 성령에 대한 우리공동체의 고백과 그에 따른 결단을 잘 드러내 보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생명체 됨과 인간의 나그네 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윤리(환경보호)와 토지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런 헌신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힘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充電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헌신은 혼자 해낼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승리에 참여하는 신앙공동체의 힘으로 해내야 합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의 고백이 있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새길새길신앙고백이 있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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