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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희년과 한반도의 1995년

레위기 김창락............... 조회 수 1906 추천 수 0 2007.12.18 20: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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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레4:26-21 
설교자 : 김창락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우리는 특별히 뜻깊은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50번째 돌이 되는 광복절 직전 주일입니다. 50주년은 한 세기의 절반인 반세기가 되는 시점이 되므로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감회를 느낄 것입니다. 오늘의 주일예배가 특별히 뜻이 깊다는 것은 단순히 50주년 광복절과 닿아 있는 주일이라고 하는 그 수치상의 특이성에 있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8년 2월 29일 제37차 총회에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장한 일을 하나 결의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7천만 겨레와 온 세계 교회 앞에 엄숙하게 공포한 것입니다.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한국기독교교회협위회가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NCC가 광신적으로 휴거론적 특수 계산법을 이용하여 1995년에 한반도에 일어날 일을 점치려 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희년 사상에 근거하여 한반도의 문제를 풀고자하는 신앙적 결의를 다지고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었습니다. 희년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서 '평화와 통일 기도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기로 하고 이 사업을 북쪽의 조선기독교도연맹과 협력하여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88년 4월에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인천에서 '세계 기독교 한반도 평화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가 이 일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해 11월에는 제2차 글리온 회의('글리온'은 스위스의 시골 도시인데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의 주최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라는 주제에 관한 제1차 글리온 회의가 86년 9월에 열렸음. 이 회의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대표단 5명과 NCC의 대표단 6명이 참석했는데 이것은 남북 기독자 사이의 첫 공식 접촉이었음)에서 북쪽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이 선언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 8.15 직전 주일에 공동기도문과 공동예배순서로 통일 희년 공동예배를 드리기로 합의하였으며 지금까지 양쪽이 그렇게 시행해 왔습니다. 특히 NCC가 오늘의 희년주일 예배를 위하여 작성한 예배순서 및 공동기도문을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받아들였으며 8월 15일에는 남북한 기독교회가 판문점에 모여 합동예배를 드리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북한에 계시는 기독자 형제자매들이 우리와 같은 예배순서와 기도문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연대하는 세계각처의 에큐메니칼 교회 형제자매들도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특별예배를 우리와 함께 드릴 것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사건은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끔찍한 희생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들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계엄철폐와 민주화 조처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을 군인들이 총칼로 무참히 학살하는 가공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안보논리를 빙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 안보논리는 남북 분단상황에 바탕을 두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분단은 독재, 인권유린, 부정부패 등의 모든 불행을 합법화해주는 원죄임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재야 및 학생 운동권에서는 남북의 통일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는 북진통일 또는 멸공통일이,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반공통일 또는 승공통일이라는 구호가 국민을 휘몰아쳤습니다. 이에 반하여 80년대의 통일운동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공생 공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한민족이 지금까지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1945년 8월 15일은 단순히 광복절로 경축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분단이 시작된 날로 애통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합니다. 통일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은 연도(年度)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민족 구성원들에게 분단 현실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이를테면 '1980년'이라든가 '해방 35년'이라 부르는 대신에 '분단 제35년' 또는 '통일염원 제35년'으로 부르면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절박성을 부각시킵니다. 70년대는 물론이요 80년대 초반에는 민간차원에서 평화적 통일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보안법으로 절대 금기사항으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살벌한 동토지대에서도 NCC는 1981년 6월 제4차 '한·독 교회협의회'에서 NCC 안에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82년 3월 26일 NCC 제31차 총회에서 '통일문제 연구원 운영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를 신설하기로 결의하고 그 해 9월에 그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위원회는 1983년 3월에 한반도 통일문제 협의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당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고 그 해 5월에도 역시 당국의 방해로 회의가 유산되었습니다. NCC는 1984년 3월 제3차 한.북미교회협의회에서 "미국교회는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와 공동으로 책임질 것"을 결의하였고 그 해 10월 일본 도산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WCC-CCIA)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 협의회'를 여는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세계교회가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러한 국제기구의 채널을 이용하여 NCC는 북한의 기독교도연맹과 간접적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하여 남북교회 사이에 막힌 장벽을 조금씩 허물고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서 NCC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1985년 5월에 제1회 한반도 통일문제 협의회를 개최하였고 1988년 1월까지 이 한반도 통일문제회의를 5회나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제2회: 86년 8월; 제3회: 87년 8월; 제4회: 87년 11월). NCC가 1988년 2월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선언〉을 채택.선포하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즉흥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여러해동안에 쌓아올린 노력을 밑거름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NCC 제37차 총회가 개최되기 얼마 전에 이 선언문 초안이 인쇄되어 나오는 순간까지도 당국의 협박과 압력이 그치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드디어 이 선언문이 NCC의 공식 문서로 발표되자 사방으로부터 찬사와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불문하고 하나의 선언서가 남북의 통일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선언서가 통일 논의가 완전히 금기시되던 살벌한 상황 속에서 교회 안팎에 통일에 대한 결렬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통일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년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가 희년으로 선포한 그 해에 우리가 들어선 지 벌써 8개월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희년 잔치의 하이라이트인 광복절의 직전 주일입니다. 이 날에 해방의 나팔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지고,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남북으로 헤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사건이 벌어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이처럼 무거운 까닭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성서의 희년 메시지를 우리의 현실에 그릇 적용했단 말입니까? 몇년 전만 하더라도 당국의 방해가 없이 기독자들이 통일마지 인간 띠 잇기 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평화.통일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희년을 맞이한 올해에는 그러한 유(類)의 옥외 집회를 일체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급랭해졌습니다.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입니다.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져야 할 희년에 이 곡성은 웬 일입니까? 저는 삼풍 참사를 지켜보면서 특히 기독자로서의 무력감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하여 모두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미국제 최첨단 전자탐지 장비는 물론이며 외국의 신통한 초능력자, 심지어는 우리가 평소에 배척하던 역술인 조차 동원하여 생존자가 갇혀 있음직한 곳을 짚게 했습니다. 왜 기독자들 가운데서는 왜 그 많다는 기적 수행자들 중에서 한 사람도 그러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지 안타까웠습니다. 또 최민석, 류지환, 박승현이라는 세 젊은이가 극한상황을 견디고 살아남아 구출된 기적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세 사람이 살아남게 된 비결이 신앙의 힘이나 기도나 경전의 말씀 등 종교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에 종교인으로서의 무력감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생존의 한계선상에서 그들은 손에 잡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에 저는 인생 항로에 있어서 장난감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두고두고 되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희년'이라는 낱말은 구약성서에 나옵니다. 레위기 25장 8-13절에 희년 제도에 관한 근본적인 규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다음에 시작되는 제50년째 해는 거룩하게 지켜야 할 희년이다. 2)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 3) 각자 자기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기업(=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4) 각자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 희년에 인간관계에 발생하는 일을 하나의 개념으로 요약하면 '원래의 상태에로의 완전한 회복'(restitution in integrum)입니다. 원상회복을 이루는 구체적인 계기는 해방(2절)과 귀환(4,5,12절)입니다. 10절b의 '자유'는 히브리어 '더로르'(deror)를 번역한 것인데 '더로르'는 '해방'으로 번역해도 됩니다. '자유'는 정태적 개념이며 '해방'은 동태적 개념입니다(이사야 61장 1절, 예레미야 43장 8,15,17절, 에스겔 46장 17절, 레위기 25장 10절에 사용된 '더로르'를 '해방'으로 번역해야 본래의 의미가 더 박진감 있게 드러날 것입니다). 귀환은 각자가 자기의 기업에로 돌아가는 것과 각자가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업'은 각 가정에게 분배된 토지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남에게 절대로 양도.처분할 수 없는 가족 전체의 공동소유의 기본재산입니다. 자기의 기업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계수단의 원천을 회복한다는 뜻이며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흩어진 가족의 재결합, 즉 가족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노예신세로부터의 해방, 채무로부터의 해방을 통하여 기존의 이지러진 경제적, 사회적, 가족적 모든 관계가 청산되고 원래의 상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희년법이 역사적으로 단 한번이라도 실시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희년법은 실시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법조문으로 제시되었는지 누구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 해답이 어느 쪽으로 내리든지 간에 희년제도가 오늘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해결해 주는 방책이냐 아니냐는 물음은 여전히 결정짓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레위기 25장 8-13절을 희년법의 총칙이라 한다면 14-55절은 그 시행세칙이라 하겠습니다. 총칙은 희년을 당하여 그 해에 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규정한 한 것인데 반하여 시행세칙은 희년이 오기 전에 일상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이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규정한 것입니다. 여기에 시행세칙은 총칙의 조항을 시행하는데 따르는 세부 지침으로서의 하위 규례가 아닙니다. 여기에 제시된 시행세칙은 휴경에 관련된 조항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희년이 아니라 평년(平年)에 이행해야 할 의무들에 관한 규정입니다. 희년제도의 사회적 효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희년법의 총칙이 총체적으로 시행되었느냐 또는 시행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시행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인 법이념(理念)에 불과했느냐는 논쟁에 빠지기보다는 이른바 시행 세칙들의 법적.윤리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순수한 법적 의미의 법률 조문과 윤리.도덕적 의무 조항을 엄밀하게 나누기는 어렵지만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법률 조문이란 그것에 의거해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며 지키지 않는 경우에는 형벌이 따르는 강제 규범이고 윤리.도덕적 의무 조항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요청적 규범인데 거기에는 강제적 집행권이나 처벌권이 부수되지 않은 것입니다. 희년법의 근본 정신은 경제적으로 몰락한 가정을 보호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보호장치가 없어서 가난한 사람이 그의 가난의 수렁에서 영원히 헤어날 수가 없고 부자는 부를 무한대로 축적하도록 방치하는 사회는 곧 불평등한 계급구조로 분화.고착되고 말 것입니다. 극심한 가난과 과중한 채무를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각 가정에 분배된 고유 자산인 토지를 처분하거나 자신 또는 가족 구성원을 노예로 팔아 넘겨야 할 처지에 빠지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러한 사람을 구제.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첫째 토지와 인신(人身)은 영구적으로 팔아 넘길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 둘째 50년을 한 주기로 하여 다음 희년까지 최대한 49년간의 사용권만을 매입자에게 허용하고 희년에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려 주도록 하는 것, 셋째 시한적 제한이 없이 양도자 본인이나 그의 친족에게 언제든지 무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재산권에 관한 규정 가운데서 우리에게 관심이 되는 것은 1) "땅을 영구히 팔아 넘길 수는 없다"(23절a) 2) "팔아 넘긴 땅을 언제든지 무를 권리가 있다"(24절)라는 것입니다.
기본재산(=기업)의 보호에 관한 규정은 가난한 사람의 재산권을 보호하는데 법적으로 어떠한 실질적 기능을 하였겠습니까? 경제적으로 파산을 당한 사람은 그의 경제적 곤경을 해결하는 마지막 수단의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 공동체의 기본재산인 토지를 처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은 토지의 영구적 매매 행위, 즉 토지의 소유권을 남에게 영구적으로 매도하는 것을 금합니다. 토지의 양도 문제에 관해서는 희년법은 49년의 기한을 최대한도로 한 임대 행위만을 허용합니다. 제49년이 지나면 임대 계약의 기한은 만료되고 그 토지는 자동적으로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장치는 사회적으로 토지가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폐단을 방지해 주는 한편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을 당한 사람에게 재기(再起)의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평등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치가 실제적으로 얼마만큼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냉철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적인 곤경 때문에 그의 토지를 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면 그는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서 적어도 20세는 넘었을 것입니다. 그가 희년 다음 해에 그의 토지를 임대해 넘겼다면 다음 희년에 그의 토지를 되돌려 받을 때에는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습니다. 사람이 70세까지 장수한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설령 그 나이까지 살 수 있다하더라도 70세 노인에게 무슨 새 출발의 가능성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희년이 오기 전에 죽고 없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희년에 그의 땅을 돌려 받는 것은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사회개혁의 혁명적 조치로 말미암아 특별한 은사로 수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전에 매도(賣渡) 대금을 받고 그의 땅의 소유권을 양도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의 임대료만 받고 그 땅의 사용권을 대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땅 임자가 희년에 그 땅을 돌려 받는 것은 원래부터 그에게 할당되어 있는 당연한 권리의 행사일 따름입니다. 이 권리는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 엄청난 매매 대금을 받는 대신에 약소한 임대료를 받음으로써 확보된 것입니다. 따라서 땅의 임자가 희년에 그의 땅을 되돌려 받는 것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약 내용의 실현일 따름입니다. 계약상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임대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재산 관계가 계약 이전의 원상 상태에로 복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원상회복이지 그 이상(以上)도 그 이하(以下)도 아닙니다. 희년법에 명시되어 있는 희년은 어떤 혁명적 조치를 통하여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모든 꿈이 실현되는 종말론적 오메가 포인트(omega-point, 최종 시점)가 아닙니다. 희년은 모든 꿈을 현실로 교환해 주는 희망의 종착역(終着驛)이 아닙니다. 희년은 모든 희망이 돌연히 실현되는 최종 시점(時點)이 아니라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안녕에 필요한 최소한의 충족 조건을 확보해야 할 집행 만료(滿了)의 최후 시한점(時限點)입니다. 그러므로 희년에다 모든 희망을 걸어두고서 그 때까지 희망의 실현을 연기하는 것은 희년의 근본 정신에 위배됩니다. 희년에 이루어질 일들은 희년이 이르기 전에 빨리 실현되면 될수록 더욱 더 좋습니다. 희년법에 보장되어 있는 무르는 권리에 관한 규정이 바로 이 사정을 잘 드러냅니다.
'무르다'는 낱말은 일반적인 용법에서는 무엇을 산 사람이 그것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값으로 치른 대금(代金)을 되찾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물건을 산 사람의 입장에서 매매 행위를 무효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희년법에서는 이와 반대로 물건(=땅)을 넘겨준 사람이 값으로 받은 금액을 도로 내어주고 물건을 되찾는 것을 뜻합니다. 즉 땅의 임자에게 시한(時限)에 제약 없이 언제든지 임대계약을 해약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땅 임자 자신이나 그의 가까운 친족들이 그들에게 법적으로 부여된 이 무르는 권리를 행사하여 그 땅을 무르면 희년에 이르러 땅을 그 원 소유주에게로 되돌리는 일이 일어날 필요성이 자동적으로 소멸될 것입니다.
인신(人身)의 권리를 보호하는 규정의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동족이나 이방 사람에게 종으로 팔려간 이스라엘 사람은 희년에 이르러 해방을 받아서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해방이 당사자에게 실질적으로 무슨 혜택을 가져올 것입니까? 소년기에 종이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희년을 맞이하기 전에 그들의 대다수는 자연적 수명이 끝날 것입니다. 비록 그 날까지 살아남아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대다수는 노령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을 거의 상실했을 개연성도 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자기의 자녀들과 함께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갈 '가족'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에 사용된 '미쉬파하흐'의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좁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한 아버지를 주축으로 하여 직계 혈통 중심으로 구성된 생활공동체를 뜻합니다(출6:14; 신29:18; 삼상20:29). 결혼한 형제들도 그들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한 가족의 구성원일 수 있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경우에는 그들은 독립된 가정으로 분가(分家)됩니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씨족' 또는 '문중'을 뜻합니다(민1:2,20; 26:5; 수7:14; 21:5). 레위기 25장 41절에 사용된 '미쉬파하흐'는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좁은 의미의 '가족'을 뜻한다면 그러한 가족은 그 때까지 남아 있을 리(理)가 없기 때문에 그 규정은 의미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넓은 의미로 '씨족', '문중', '가문'을 뜻한다면 직계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의 재결합이라고 하는 간절한 절박감은 사라진다고 할 것입니다. 부모나 형제자매를 떠나서 종살이하던 사람은 고향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날을 학수고대할 것인데 바로 그 가족은 친부모.형제자매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가족과 상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가 가까운 일가 친척을 아무리 많이 만난다 하더라도 자기의 친 가족을 만나지 못한 한(恨)이 그의 가슴속에 영원히 맺혀 있을 것입니다. 이 친 가족과 만나게 하기 위서는 희년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희년은 가족의 재결합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 이상 더 집행 유예할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Maginot 線)일 따름입니다. 희년이 되기 전에 가능한 한 일찍이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언제든지 시한(時限)에 제한 없이 값을 치르고서 종을 속량 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시행세칙 가운데서 1)상거래를 하는 경우에 이웃을 억울하게 하지 말 것(17절) 2)가난한 이웃을 도와 줄 것(35절) 3)이자나 장리(長利)를 받지 말 것(37절) 4)종을 종 부리듯 하지 말 것(39-40절) 등등의 윤리적 규정은 모두 예외 없이 희년이 아닌 평년에 실천해야 할 조항입니다. 특히 주인과 종 사이의 인도적 관계를 명하는 이러한 규정은 희년에 노예해방을 통해 실현될 종의 인권을 앞당겨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희년법은 단순히 법조문과 윤리적 훈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희년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제정되었습니다. 희년법 안에 "땅은 내 것이다. 너희는 나그네요 나에게 임시로 거주하는 자이다"(23절),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38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낸 나의 품꾼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55절),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 하나님을 경외하라"(17절)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근본 바탕이며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인 구속력(拘束力)을 지니는 것이다. 일상적인 윤리적 명령이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근거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에 적응하는 처세훈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는 역동력(dynamism)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회적.경제적으로 본연의 자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희년이 오면 이산된 가족과의 재결합, 삶의 기본 터전인 땅과의 재결합이 이루어진다는 소박한 미래 비전은 원초적 가족관계를 파괴하기에 이른 현재의 사회구조와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박탈하고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시키는 현재의 경제체제에 대한 강력한 반정립(反定立, Antithese)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상징이 순수한 미래적 비전이면서도 현재를 결정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에 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은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과 70인역 희랍어 성서(LXX)의 본문을 비교해 보면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게[하셨다].

[70인역 성서]

주의 영이 내게 내리시고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고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주의 은혜로운 해와 신원의 날을
선언하게 하셨다.

밑줄을 친 부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갇힌 자에게 놓임'과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은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까닭은 히브리어 본문의 표현이 불명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놓임'은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열음'(opening)인데 그 동사형 '열다'는 특히 눈을 목적어로 하여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갇힌 자들'은 히브리어 원어의 자의(字意)대로는 '묶인 자들'을 뜻하는데 '묶인 자들'을 '갇힌 자들'로 바꾸는데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묶인 자들' 또는 '갇힌 자들'에게 의미의 비중을 두고서 거기에 '열음'의 의미를 맞추면 갇힌 자들에게 [감옥을] 열어줌, 또는 묶인 자들에게 [수갑이나 차꼬의 자물쇠를] 열어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묶인 자들 또는 갇힌 자들의 '놓임'을 나타냅니다. 70인역은 '눈뜸'이라는 의미를 고정시켜 놓고서 거기에 맞추어 '묶인 자들'을 '눈먼 자들'이라는 의미로 바꾸었습니다. 갇힌 자가 놓여나는 일은 감옥이나 구속 상태로부터 놓여나는 구체적.신체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하여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일은 신체적인 치유 기적을 뜻하기보다는 진리를 인식하는 눈을 뜨는 것과 같은 정신적.상징적 사건을 뜻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갇힌 자가 놓임을 얻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기쁜 소식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해방의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다릴 시간의 여유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역사 안으로 개입해 오셔서 구원의 팔을 펴시기를 절박(切迫)하게 갈구합니다. 이사야 61장의 메시지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바야흐로 임박했음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 또는 '신원(伸寃)의 날'이라 하였습니다. 희년은 49/50년을 주기(週期)로 하여 시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해입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역서(歷書)에 표기되어 있는 어느 해를 구별해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간을 뚫고 침입해 오시는 위기의 때를 가리킵니다. 은혜의 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때이며 그들의 원수에게는 심판과 징벌의 때입니다. 그래서 이 때는 '구속할 해'(아63:4), '은혜의 때'(사49:8), '시온의 송사를 신원 하실 해'(사34:4), '벌할 해'(렘11:23), '벌받을 해'(렘48:44)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61장 2절에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이라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구원이 나타나는 때를 일컬어 더 흔히 '여호와의 날'(사13:6; 38:8; 겔30;3; 욜1:15; 2:1,31; 3:14; 암5:18,20; 습1:14,18; 2:2,3; 슥14:1; 말4:3,5 등)이라 하기도 하고 단순히 '그 날'(사27:12,13; 30:26; 52:6; 렘33:15,16; 39:16,17; 겔7:10; 30:3; 39:8; 욜1:15; 3:18; 암5:18; 8:3,9,11: 9:11,13; 습1:10; 3:16; 슥2:11; 3:10; 8:6,23; 12:3,4,6,8,11; 13:2; 14:4,6,9,13; 14:20,21 등)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나머지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예수의 첫 나사렛 회당 설교를 이사야 61장의 해방의 기쁜 소식과 관련지었습니다.
〈눅 4:18-19〉
a.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b.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c.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d.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e.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f.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g.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h.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본문은 70인역 성서(LXX)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f)"는 LXX에 있는 어구입니다. a-b-c-d-e-f-h는 이사야 61장 1-2절에서 인용이지만 자구 그대로 정확하게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하자면:
1) 누가에는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고쳐주고"가 누락되었음
2) 누가에는 "주의 은혜의 해"에 연결되어 있는 "신원의 날"이 생략되었고 또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게"가 생략되었음
3)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g)는 이사야 58장 6절의 인용임
예수의 의도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고지(告知)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언서의 글을 낭독한 뒤에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21절)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은혜의 해는 이사야가 예언한 은혜의 해와 마찬가지로 책력(冊曆)에 미리 표시해 둔 어느 연도(年度)가 아닙니다. 은혜의 해는 다른 모든 해와 같이 1월 1일에서 시작되는 그러한 해가 아닙니다. 은혜의 해는 다른 모든 해와 같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해서 그 시작이 포착되는 그러한 해가 아닙니다. '은혜의 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역사 운행의 주인이시라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개념조차 생소할 것입니다. 민중의 울부짖음이 극에 달해 있는 역사의 현상을 직시하고서 이 이상 더 유예할 시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때가 찼다"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에게만 은혜의 해의 서광이 비춰 올 것입니다. 은혜의 해는 자연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요 초자연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의 부조리현상을 타파하는 사건을 통하여 현실로 드러납니다. 포로된 사람들을 해방하고,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사건과 더불어 은혜의 해는 그 빛을 발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하신 것과 같습니다(마12:28; 눅11:20).
이사야의 예언에 임박한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예수의 출현과 사역을 통하여 '오늘'로 현재화되었습니다.
1995년은 과연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의 희년입니까? 이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올해 8.15에는 예년과는 다른 특별한 희년 축하행사가 있을 터이지만 이것을 성서의 희년과 개념적으로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세속적 의미의 50주년 희년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특별히 50년째 해를 맞이하여 회상하며 기념하는 해인데 반하여 성서의 희년은 50년째 해를 바라보면서 원상회복의 해방적 사건이 종국적으로 일어나야 할 미래의 그 시점으로 예고되는 해입니다. 전투에 임하여 배수진을 친다는 것은 한계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 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천명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희년선포도 이와 같습니다. 희년은 원상회복이 이루어져야 할 시한점(時限点)입니다. 희년이 되기까지의 남은 기간은 희년에 일어날 일을 앞당기려고 노력해야 하는 독촉 기한일 따름이지 낡은 질서에 할당된 집행유예 기간이 아닙니다. 한국기독교회 협의회가 1980년대 후반에 1995년을 바로 눈앞에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비극을 50년 이상은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역사적 사명을 신앙 고백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 해를 한반도 통일 희년의 해로 선언한 것은 성서의 희년 정신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만일 한국 기독교회가 1919년 독립운동이 펼쳐지는 마당에 성서의 희년사상을 끌어대어서 해방이 올 그 날까지는 아직 40여년의 기간이 남았다고 선언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면 그것은 성서의 희년정신에 위배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희년은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버팀목이요 그들의 용기를 돋구는 북소리이지 투쟁의 시점을 연기하라는 휴전(休戰) 나팔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숫자에 신비적 힘을 결부시키는 것은 성서적 신앙이 아닙니다.
1995년은 한반도가 분단 된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성서의 희년제도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 하여금 50년을 주기로 하여 원상회복의 극적 조치를 단행하여 원점에서부터 새 출발을 하도록 명하는 제도였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유의 종'은 미국의 독립전쟁의 시작을 선포하려고 울려 퍼진 종입니다. 그 종에 "온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레위기 25장 9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독립전쟁을 시작할 당시에 미국인들은 자유를 스스로 쟁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각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역사적 사명과 그것을 수행하겠다는 그들의 결의를 성서의 희년제도의 구절을 사용하여 천명했던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성서의 희년 정신에 근거하여 민족의 분단 현실을 분단 50년째 해를 넘기기 전에 극복하겠다는 결의를 그 선언문에 담아서 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취지가 선언문 속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해방 50년째인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는 것은 50년 역사를, 아니 전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현존을 믿으며, 평화로운 계약공동체의 회복을 선포하고, 또 오늘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이룩하려는 우리의 결의를 다지려는 데에 있다. 따라서 희년을 향한 대행진은 희년 대망 속에서, 민족사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갱신하고, 하나님의 선교에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결단을 새롭게 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에서).
기독교가 선포하는 희년사상은 레위기의 희년법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신 은혜의 해에 의거하여 종말론적 차원으로까지 심화되었습니다. 종말론이 제거된 희년사상은 소극적 숙명론으로 전락합니다. 희년은 그 때까지 미루어 두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되는 시점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한점입니다. 희년으로서 '1995년'에 이루어야 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다음 희년이 오기까지 또 다시 50년을 손놓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불기한이 만료된 청구서의 청산을 독촉하듯이 희년의 열매를 거두기를 재촉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영생이니 하나님 나라니 희년이니 최후심판이니 하는 궁극적 구원에 대한 깃발을 흔드느라고 눈앞에 있는 일상의 평범한 일거리를 무가치한 것으로 외면해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어린이 장난감이 절망을 버티어 나가는 데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음을 보았습니다. 한국기독교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의 희년을 향한 대행진의 깃발을 잠시라도 내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극한적인 투쟁 상황 속에서도 장난감과 같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소중하게 보듬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95년을 한반도 통일 희년의 해로 선포한 것은 성서의 희년 메시지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올바르게 적용한 장한 신앙의 결단임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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