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레19:2 |
|---|---|
| 설교자 : | 정용석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모습과 닮아지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이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내용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거룩하고 근엄한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거룩하고 근엄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자비롭고 인정 많은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본받아야 할까요?"
조금 전에 읽어드린 성경말씀 중에서 두 번째, 누가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것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이 말씀은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가르침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에수께서 유대교가 지켜온 계명에 도전하고 그 내용을 바꾸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지켜온 계명의 핵심은 아까 첫 번째로 읽어드린 레위기 19장 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본받아야 할 모습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들도 거룩해지려고 애썼습니다. 레위기 11장 44절에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너희는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거룩하다는 것을 모든 부정하고 불결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거룩함이란 곧 정결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19장 2절을 "하나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너희도 정결하라"는 내용으로 해석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정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정결법에 의해서 정결한 음식이나 동물, 정결한 장소와 시기가 생기게 되었고, 반대로 부정한 것들이 구분되었습니다. 정결법을 지키는 정도에 따라서 정결한 사람과 사회계층이 형성되었고, 반대로 부정한 사람과 계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정결한 사람들이 생겨나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병자나 가난한 자나 이방인은 부정한 자로서 죄인이라고 여겨지고 사회적으로 냉대와 소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정결법 제도에 도전하신 것은 이 정결법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정결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다.... 너희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 23:23-28)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눅 10:29-37)입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길 위에 쓰러져 있는데 경건하다고 생각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고,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미움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도와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대교의 정결법을 비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서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해 갔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법은 몸이 부정한 사람, 즉 병자나 시체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 강도 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만을 자신들의 이웃으로 생각했고, 이것이 더 심해져서 유대인끼리도 분파를 만들어서 이웃의 범위를 점점 좁혀나갔습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 즉 세리나 죄인이나 창녀들과 같이 불결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은연중에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라고 답변하지 않고,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누가 강도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께서는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구분하려는 율법교사에게 "네가 어떻게 해야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줌으로써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정결과 부정이 외적인 모습이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사람 밖의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15). 예수님은 정결법을 어기고 부정한 환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를 같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결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사랑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율법의 본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강조하고 드러내려 한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함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절의 거룩이란 말을 자비로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은 자비란 말보다 애정이란 말이 더 정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정이 있으신 것처럼 너희도 애정을 가져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기보다는 애정이 있으신 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본받는 사람은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애정이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 말은 '자궁'이란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서 학자인 필리스 트리블은 이 구절 후반부를 다음과 같이 직역합니다: "내 자궁이 그를 위하여 떨린다. 나는 그에게 진정으로 어머니의 애정(motherly- compassion)을 나타낼 것이다." 애정이란 말은 어머니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느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돌보고 양육하고, 감싸고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애정을 쏟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애정을 영어로 표현하자면 compassion이 됩니다. 'com' 이란 말은 with, together(같이,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pathos)이란 말은 feeling, emotion(느낌, 감정)이란 뜻입니다. 이 두 말을 합한 compassion의 의미는 '함께 느끼는 것'(to feel with)이 됩니다. 그러므로 애정이란 자식이 느끼는 것을 어머니가 똑같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식이 기뻐하면 어머니도 기뻐하고, 자식이 슬퍼하면 어머니도 슬퍼합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면 어머니도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는 이렇게 자식과 함께 느끼는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애정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왕상 3:16-28). 두 여자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고, 사흘 뒤에 또 한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자가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를 깔아 눌러서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는 또 한 여자가 깊이 잠든 사이에 자기의 죽은 아이를 이 여자의 아이와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아이가 죽은 것은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바뀐 것을 안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자기 아이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두 여자는 살아있는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솔로몬 왕에게로 왔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만 참 난감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인데 의학이 발달했을 리도 없으니 혈액형 검사나 DNA검사도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하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내립니다. "살아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판결을 들은 두 여자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 여자가 왕에게 애원합니다. "임금님,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어도 좋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여자도 말합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아이를 반씩 나누어 가지겠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를 죽이지 말고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아이의 어머니이다." 아이를 죽여서 둘로 나누라는 명령을 들은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개역), "마음이 메어지는 듯하여" (공동번역), "모성애가 불타올라" (표준새번역). 이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뜨거운 애정 때문에 자기 자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목숨을 살리려 했고, 결국에는 자식의 목숨을 구하고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큰 신문인 르몽드지에서 이런 문제를 내고 현상모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대답이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하얀 눈 위에 놓인 빨간 장미꽃, 노신사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랑하는 두 연인의 포옹하는 모습.... 수많은 대답 중에서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아기를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눈"이었습니다. 아기를 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아름답고 귀한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어머니와 같은 애정을 지니신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애정을 지니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 애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이 되신 분, 그래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근엄하고 꾸짖고 심판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자애롭고 돌보아주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애정의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내용은 바로 이 5장 1절의 앞 절인 4장 32절과 뒷절인 5장 2절에 나타납니다.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또한 5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주신 것같이,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전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고, 후자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은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육체적, 물질적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죄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고통과 소외감과 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믿음이 커진다는 말은 바로 사랑이 커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IMF 사태에서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정책이나 구조조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느끼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고 도움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조금 전에 읽어드린 성경말씀 중에서 두 번째, 누가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것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이 말씀은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가르침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에수께서 유대교가 지켜온 계명에 도전하고 그 내용을 바꾸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지켜온 계명의 핵심은 아까 첫 번째로 읽어드린 레위기 19장 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가장 본받아야 할 모습은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들도 거룩해지려고 애썼습니다. 레위기 11장 44절에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너희는 자신을 부정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거룩하다는 것을 모든 부정하고 불결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거룩함이란 곧 정결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 19장 2절을 "하나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너희도 정결하라"는 내용으로 해석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정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정결법에 의해서 정결한 음식이나 동물, 정결한 장소와 시기가 생기게 되었고, 반대로 부정한 것들이 구분되었습니다. 정결법을 지키는 정도에 따라서 정결한 사람과 사회계층이 형성되었고, 반대로 부정한 사람과 계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정결한 사람들이 생겨나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병자나 가난한 자나 이방인은 부정한 자로서 죄인이라고 여겨지고 사회적으로 냉대와 소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정결법 제도에 도전하신 것은 이 정결법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정결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다.... 너희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 23:23-28)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눅 10:29-37)입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길 위에 쓰러져 있는데 경건하다고 생각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사람을 피해서 지나가고,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미움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도와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대교의 정결법을 비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서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해 갔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법은 몸이 부정한 사람, 즉 병자나 시체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 강도 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만을 자신들의 이웃으로 생각했고, 이것이 더 심해져서 유대인끼리도 분파를 만들어서 이웃의 범위를 점점 좁혀나갔습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님이 결코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 즉 세리나 죄인이나 창녀들과 같이 불결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은연중에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라고 답변하지 않고,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율법교사에게 질문을 합니다. "누가 강도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께서는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구분하려는 율법교사에게 "네가 어떻게 해야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을 구분하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줌으로써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정결과 부정이 외적인 모습이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사람 밖의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15). 예수님은 정결법을 어기고 부정한 환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를 같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결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사랑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율법의 본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강조하고 드러내려 한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함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절의 거룩이란 말을 자비로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은 자비란 말보다 애정이란 말이 더 정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정이 있으신 것처럼 너희도 애정을 가져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기보다는 애정이 있으신 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본받는 사람은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애정이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 말은 '자궁'이란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귀한 아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더욱 생각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서 학자인 필리스 트리블은 이 구절 후반부를 다음과 같이 직역합니다: "내 자궁이 그를 위하여 떨린다. 나는 그에게 진정으로 어머니의 애정(motherly- compassion)을 나타낼 것이다." 애정이란 말은 어머니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느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돌보고 양육하고, 감싸고 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애정을 쏟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애정을 영어로 표현하자면 compassion이 됩니다. 'com' 이란 말은 with, together(같이,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pathos)이란 말은 feeling, emotion(느낌, 감정)이란 뜻입니다. 이 두 말을 합한 compassion의 의미는 '함께 느끼는 것'(to feel with)이 됩니다. 그러므로 애정이란 자식이 느끼는 것을 어머니가 똑같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식이 기뻐하면 어머니도 기뻐하고, 자식이 슬퍼하면 어머니도 슬퍼합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면 어머니도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는 이렇게 자식과 함께 느끼는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애정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왕상 3:16-28). 두 여자가 한 집에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고, 사흘 뒤에 또 한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자가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를 깔아 눌러서 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는 또 한 여자가 깊이 잠든 사이에 자기의 죽은 아이를 이 여자의 아이와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아이가 죽은 것은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바뀐 것을 안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자기 아이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두 여자는 살아있는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다가 그 아이를 데리고 솔로몬 왕에게로 왔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만 참 난감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인데 의학이 발달했을 리도 없으니 혈액형 검사나 DNA검사도 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하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내립니다. "살아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판결을 들은 두 여자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 여자가 왕에게 애원합니다. "임금님,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어도 좋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여자도 말합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아이를 반씩 나누어 가지겠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이 명령합니다. "아이를 죽이지 말고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아이의 어머니이다." 아이를 죽여서 둘로 나누라는 명령을 들은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개역), "마음이 메어지는 듯하여" (공동번역), "모성애가 불타올라" (표준새번역). 이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뜨거운 애정 때문에 자기 자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목숨을 살리려 했고, 결국에는 자식의 목숨을 구하고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큰 신문인 르몽드지에서 이런 문제를 내고 현상모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대답이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하얀 눈 위에 놓인 빨간 장미꽃, 노신사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사랑하는 두 연인의 포옹하는 모습.... 수많은 대답 중에서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아기를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눈"이었습니다. 아기를 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아름답고 귀한 애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어머니와 같은 애정을 지니신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애정을 지니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 애정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이 되신 분, 그래서 우리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근엄하고 꾸짖고 심판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자애롭고 돌보아주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애정의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어떻게 본받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의 내용은 바로 이 5장 1절의 앞 절인 4장 32절과 뒷절인 5장 2절에 나타납니다.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히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또한 5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주신 것같이,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전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고, 후자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은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육체적, 물질적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죄인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고통과 소외감과 죄의식을 없애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믿음이 커진다는 말은 바로 사랑이 커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IMF 사태에서 벗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정책이나 구조조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느끼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고 도움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