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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신명기 길희성............... 조회 수 3856 추천 수 0 2003.07.08 11: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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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6:4-9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오늘 읽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증언해주는 말씀입니다. 유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아침저녁으로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들으라, 이스라엘아”(shema)로 시작하는 이 신앙 고백 내지 선언을 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다지며 생존을 이어 왔습니다. 이 구절은 수천 년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유태인들의 신앙을 지켜준 말씀입니다. 온 우주 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이슬람에서도 역시 이와 유사한 shahada라는 신앙 고백 내지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님(Allah)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라는 선언으로서, 무슬림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이 말을 귀에다 속삭여 준다고 합니다. 네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것만은 반드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신앙 의무 가운데 하나로서 매일 메카를 향해 5회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는데, 모스크의 첨탑으로부터 구성진 음성으로 울려 나오는 기도의 초대 말에서도 매일 선포되는 진리의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물론 이 야훼 하나님, 유일신 신앙을 고백하며 우상 숭배를 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어느 것이 가장 위대한 계명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이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혹은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은 오늘날 전 인류의 절반 이상의 신앙이고 그들의 신관, 세계관, 인간관, 인생관을 지배하는 위대한 신앙이며 사상입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신앙이나 관념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 유일신 신앙이 가지는 의의를 몇 가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서로 차이가 있고 막힌 것 같으나 실은 하나의 힘, 하나의 원리, 하나의 실재로 통하며 통합된다는 믿음입니다. 특히, 온 인류가 한분 하나님을 존재의 뿌리로서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가족이나 부족이나 민족의 차이와 대립을 넘어서 모두가 한 인류이며, 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 위에서 우리는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의 희로애락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품으시고 만인을 사랑하시듯,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그런 보편적 관심과 광대한 사랑을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유일신 신앙은 모든 존재는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각기 존재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들임을 믿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들이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 유일신 신앙의 가르침입니다.

3) 유일신 신앙은 동시에 어떤 피조물도,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엄숙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적 비판정신은 유일신 신앙이 가져다 준 인류의 최대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4) 나아가서, 유일신 신앙은 인류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정의, 평화, 사랑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이며, 인간은 이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와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덕질서는 인간이 마음대로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구도 어겨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며 절대적인 삶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유한하고 상대적인 피조물들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세상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는 초월적 시각과 자유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버러지 같이 땅 속에 코를 박고 살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날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일신 신앙이 오늘날 현대 세계에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으며 지성인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받으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대체로 세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유일신 신앙은 창조세계로부터 하나님을 멀리함으로써 자연 세계의 신성성을 박탈하여 오늘날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건성을 망각하고 자연을 마음대로 부리고 착취하도록 하여 오늘의 환경위기를 초래한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비판입니다.

둘째,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비판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엄격히 구별하는 유일신 신앙은 만물을 낳고 품어주며 보듬고 기르는 하나님보다는 만물 위에 군립하고 명령하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 아니면 전제군주와 같은 존재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결국 하나님을 닮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 왕, 만군의 주로 부름으로써 그러한 권위주의를 더욱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장 심각한 비판, 그리고 오늘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비판은, 모든 인류의 창조주 되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분열과 갈등의 비극적 역사를 낳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의 부쉬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과 이슬람권의 갈등,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그칠 줄 모르는 유혈분쟁, 또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북 아일랜드에서의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싸움은 모두 이 유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에 대해 회의하게 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나님이 증오와 분열의 하나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유일신 신앙에 무언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을 제기하게 됩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타종교에 대한 강한 배타성도 바로 이 유일신 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툭하면 우상숭배 혹은 범신론이라 하여 매도하고 배격합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하늘 신앙을 이어 받은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굳이 ‘하나’에다 부자연스럽게 ‘님’ 자를 붙여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개신교는 이 ‘하나’를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이나 타종교와의 차별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논리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배타성이 개신교 신자들의 뇌리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연 유일신 신앙은 이렇게 분열과 배타의 논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유일신 신앙을 깨끗이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차라리, 무신론자나 휴머니스트가 되어서 종교적 광신과 독선을 떠나 모든 인간을 품는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예 대놓고 다신론자가 되어서 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하여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할 것입니다.

사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일신 신앙은 자칫하면 모든 인간이 똑 같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신앙과 사상의 획일적 강요와 횡포를 낳기 쉽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그 안에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신교 신앙에서는 아예 너의 신과 나의 신의 따로 있으니 나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신 신앙에서는 따라서 선교나 전도라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신 신앙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은 자기 종교의 특정한 신앙을 모두에게 전파하고 강요하는 ‘종교 제국주의’를 정당화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천차만별의 차이를 지닌 세계 수십억 인구가 어떻게 똑같은 하나님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동일한 하나님 관념과 동일한 교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류의 30억 이상이 유일신 신앙의 테두리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신관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실제상 하나님은 30억 이상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만이 옳은 생각을 가졌다고 고집하며, 나아가서 세상 만물을 내시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유일신 신앙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보편성을 구실로 하여 우연적인 역사와 특정한 문화의 산물인 자기 종교의 보편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가장 고약한 형태의 자기숭배, 자기절대화의 도구로 사용되어 온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유한한 역사적 산물인 종교를 절대화하는 가장 교묘한 형태의 우상숭배입니다. 그래도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의 관심과 활동이 어느 정도 이스라엘에 국한된 신임을 인정하는 반면에,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혀 그런 제한과 자기 절제를 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편주의는 자칫하면 자기와 다른 타자, 타 문화,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제국주의와 배타주의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지금 서구 합리주의가 보편적 진리로 군림하고, 서구문화가 전 세계 문화의 척도가 되는 보편문화로 통하며, 세계화와 ‘global standard'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획일적 가치와 척도 밑에 한 줄로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근대 서구 문화의 보편성과 절대성 주장은 기독교 유일신관의 후예입니다. 유일신 신앙과 이 신앙을 부정하고 나선 근대의 세속적 합리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닮은꼴입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바로 이러한 보편주의와 획일주의에 대한 거부입니다.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판 다신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끊임없는 유혹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도 이슬람 신자도 아니며, 하나님은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어느 대형교회 신자나 우리 새길교회 신자겠습니까? 종교인들은 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을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끊임없는 유혹에 빠지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슬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들 편에 서는 이스라엘의 전유물처럼 여기던 무지와 죄악을 고발하고 이스라엘의 민족신으로 볼모 잡힌 하나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또 다시 율법과 성전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율법과 성전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이스라엘 역시 또 다시 하나님을 이스라엘 땅에 가두고서 미국의 힘을 업고서 불쌍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지독하게 자기 생존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이 있습니다. 반유대주의의 기치 아래 근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을 못살게 굴면서 하나님을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은 기독교 역사의 횡포가 있었음을 기독교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달리, 선교에 성공하여 힘 있는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후로는 다른 민족과 종교를 억압하는 횡포를 일삼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큼 선교적이고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슬람을 매우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종교로 생각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선교를 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같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종교라고 하여 관용을 베풀었고, 유대교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성서를 가지고 있는 백성들’이라고 생각하여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썽 많은 유일신 신앙을 이제 포기할 때가 되었단 말입니까? 한 주님, 오직 한 분이신 주님, 혹은 단순히 하나로서의 주님이라고 할 때, 이〈하나〉의 참 뜻은 과연 무엇인가요?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이 하나는 하나, 둘, 셋하고 수를 헤아릴 때 사용하는 숫자 가운데 하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치 한계를 지닌 어떤 유한한 사물처럼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인격적 신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과 같은 한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숫자로 셀 수 있는 물체나 개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숫자를 초월하시는 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이 하나가 숫자적 의미의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숫자를 초월한다는 의미의 하나이며, 숫자 아닌 숫자, 수를 가진 모든 것들의 근원으로서의 하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숫자를 가진 모든 유한한 사물들 배후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한한 존재를 나타내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와 여럿, 일과 다는 반대가 아니라 상통합니다. 하나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사물들에 통하고 모든 사물들 사이에 장벽을 허물고 막힘없이 해주는 무한한 힘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나 공간, 거리의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는 분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무한성, 완전성, 무차별성 그리고 아무도 독점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우상이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상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무한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나는 결코 여럿과 대립되는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 하나입니다. 참 절대는 상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상대적인 것과 대립되는 그런 편협한 절대가 아닙니다. 상대와 대립되는 절대는 참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 절대에 불과합니다. 참 절대는 상대를 포섭하고 포괄하는 절대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은 유한한 사물들과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유한한 사물들을 품고 양육하고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절대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만물이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리고 그를 향해 존재하는”(로마 11:36) 절대자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사도 17:28) 그런 실재가 하나로서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로서의 하나님이 여럿을 포용하고 포괄하는 광대무변의 무한자임을 알고,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품는 한껏 열린 넓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러한 무한한〈하나〉로서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피조물의 사랑,〈하나〉사랑과 잡다한 여럿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선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잡다한 세상 사물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진정으로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랑은 배타적이고 선택적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사물들을 사랑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특히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강조합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를 창조하고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적인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그 영혼이 허전함을 느끼고 방황하는 것은 아직 그 존재의 뿌리, 근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주신 피조물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고 즐기는 대상이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역시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랑의 대상이며, 인간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구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그리고 사물의 사랑에는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물건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보다 사람이나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질서를 어긴 것이며, 불행을 자초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결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할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해야 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것이 유일신 신앙의 기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일단 세상에서 정을 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를 놓고 치열한 영혼의 투쟁이 없이는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은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 초월이 무엇인지, 신앙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조건적인 것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이야 말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고, 이런 삶은 결국 불행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무한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유한한 것들은 불완전하고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들을 실망시킵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모든 세상적인 것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신앙인들의 공통적 증언입니다. 불교에서는 심지어 모든 덧없는 것들, 무상한 것들은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잡다한 세상 사물들을 사랑할 때, 우리 영혼은 잡다하게 되고 지리멸렬해집니다. 영혼이 초점을 잃고 그야말로 해체되기 쉽습니다. 하나만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영혼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갈팡질팡, 우왕좌왕 방황하게 되며, 영혼은 사물화 되고 물건의 노예가 되고 세상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인간 사랑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혹은 이루어지기 전의 사랑이 더 강열하고 순수하듯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잡히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열하고 순수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그야 말로 'endless love,' 'never ending love'입니다.

사랑은 어쩌면 이루어질 때보다 그리워할 때가 더 행복할는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사후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갈망으로 그칠 수밖에 없으며, 이 갈망으로서의 사랑, 그리움으로서의 사랑은 적어도 지상에서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한한 것들의 사랑은 끝이 나는 사랑입니다. 변하는 사랑입니다. 신혼부부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다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결혼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공인된 거짓말이지요.

이렇게 일단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 무한자에 대한 사랑과 유한한 사물들에 대한 사랑 사이의 배타적 선택을 분명히 하고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일단 부정되었던 세상은 새로운 긍정,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사물들을 대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만물을 사랑하고 품습니다. 부정을 거친 긍정은 순수한 긍정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사물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한 존재라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 자기의 흔적을 남기시는 분이며, 무한자는 유한한 사물들을 통해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피조물들로부터 눈을 돌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영적 기술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피조물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베일과도 같습니다. 피조물은 정녕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리는 베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베일을 살짝 걷어 올릴 수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아니, 신앙인은 이미 베일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일이란 그것이 베일임을 모르는 자에게는 베일 이상이 아니며 정말로 하나님을 가리고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베일임을 아는 자에게는 그 뒤에 혹은 그것을 통해 더 크고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 투명한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피조물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매개체가 된 사람은 정말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구체적이고 풍부한 사랑의 소유자가 됩니다.

모든 불완전한 사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것을 찾도록 하며, 우리가 사물 가운데서 경험하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며, 우리가 세상 속에서 깨닫는 참된 것은 참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시가 되며,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선함은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총의 수단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야 말로 으뜸가는 존재이며, 인간에 대한 바른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불가분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인간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고 흠 없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들과는 달리 투명한 하나님의 모상이며 아버지를 꼭 닮은 그의 아들이기에,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다양한 길들이 차단된 세속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울는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어쩌면 고대나 중세 사람들보다도 매우 가난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화가 사라진 세계, 성화와 성상들이 자취를 감추고 풍부한 상징들과 종교적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삭막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사실’과 실증만이 진리로 통하는 일차원적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개신교는 우상타파라는 이름 아래 중세 시대의 풍부한 종교적 상징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불모지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개신교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 통로를 다 차단하고,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 오직 예수만을 외치는 편협한 영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개신교 풍토에서 세속문화가 처음 등장했고 최고도로 발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로 가는 다양한 길들이 차단된 개신교 풍토에서 신앙은 전투적이고 배타적이며 메마른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좀 단순화시켜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개신교가 조성한 메마른 영적 풍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거룩함이나 초월적 실재도 거부하는 세속적 근본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편협한 근본주의자나 광신도가 되던지 둘 중의 하나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의도했든 안 했든 개신교를 통해 굴절된 유일신 신앙은 역사적으로 달갑지 않은 선택을 우리에게 강요하게 된 책임이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은 한편으로는 자연과 초자연, 피조물과 창조주를 엄격히 구별함으로써 자연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분리시켜 자연의 성스러움과 영성을 앗아가 자연이라는 풍부한 영성의 보고를 비워버리고 환경위기에 일조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빙자하여 편협한 종교적 독선과 배타성을 조장하는 제국주의적 신앙과 근본주의 신앙을 배태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일신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영성을 풍부하게 가꾸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획일성과 편협한 배타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기뻐하는 개방과 긍정의 영성임을 깨달아야 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는 광대무변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여유로움을 닮는 영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만물 가운데 계시며 만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와, 만물 속에서 다양한 하나님의 얼굴들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을 길러야만 합니다.〈하나〉로서의 하나님은 결코 여럿을 배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럿을 품고 기르시는 하나님이시며, 언제 어디서나 중심이 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댓글 '1'

헬갈림

2023.02.23 16:21:15

ㅋㅋㅋ 진짜 어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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