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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왕하5: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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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한성수 목사 |
| 참고 : | 새길교회 |
머나먼 요르단 강
박영한 님이 월남전을 배경으로 쓰신 소설 "머나먼 쏭바 강"이나, 미국의 민요 "머나먼 스와니 강"을 흉내내어 내건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대뜸 "머나먼 요르단 강"을 메시지의 제목으로 내건 것은, 요르단강을 향수 어린 그리움으로 읊고자함은 아닙니다.
이미 이 제목이 암시하듯이 도대체 그 멀리 있는 요르단 강을 우리들의 현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는 사소한 반란의 조짐으로 들려도 좋습니다.
옛날 모세의 출애굽 사건 때 갈대바다가 갈라졌듯이, 요르단 강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침공 때나, 혹은 엘리야나 엘리샤의 손에 의하여 수시로 그 흐름을 멈추는 기적의 현장이었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가 멀리 엘리샤의 기적을 반복하는 도덕적 정화를 상징하듯이, 그리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천국행을 꿈꾸어온 찬송가에 등장하듯이, 머나먼 요르단은 우리들 기독교도들의 노스탈쟈(nostalgia)를 자극하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봉직하였던 어느 미국인 교회에서는, 세례식을 할 때마다, 교인들 중 누군가가 이스라엘 여행할 때 가져온 요르단 강물을 몇 방울씩 아껴가며 사용하곤 했습니다.
왜 하필 요르단 강물인가?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던 그 요르단 강물을 사용하는 것이 그토록 의미 있는 것일까? 사람은 같은 강물을 두 번 건널 수 없다고 희랍의 어떤 철인이 한 말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2천년 전 그 요르단 강물, 예수님의 몸을 씻었던 그 물이라면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달라진 강물이라, 옛날의 그 물이라면 차라리 한국에서 구하는 것이 훨씬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이는 닫혀있는 지구 생명계, Bio-sphere 안에서 돌고 도는 유한 물질계를 생각할 때, 육체의 부활이 별로 의미가 없듯이 머나먼 요르단 강에 가서 2천년 전 예수님 몸을 씻었던 물을 얻기란 지극히 확률이 낮다는 점을 지적함입니다. 물론 그런 뜻에서 요르단 강물을 세례에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 왕하 5:1-14 은 본래 Lectionary text로 지정된 것이라, 제가 그냥 사용한 것입니다만, 여기 등장하는 나아만(Naaman) 장군의 문둥병 치료의 기적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를 갖았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전설적 요소가 짙은 내용입니다만, 후일 누가 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이 사건을 인용하셔서, 당신 자신이 이방 사람들을 치료하신 사연의 배경 사례로 사용하면서, 그만 기독교인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지요. 열왕기 하의 사연대로라면, 대략 기원전 850년 경 아람(Aram), 곧 지금의 Syria 지역을 다스렸던 Ben-hadad II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Naaman은 "아람을 구원하였다"는 성서의 말대로 아마 남정북벌로 자기 조국을 위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장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문둥병이란 천형의 질병에 걸렸음에도 임금의 지척에서 떠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예외적인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에게 몸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여종은 전에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을 때 아마도 매우 총명하였기에 특별히 사로 잡아온 여인으로서, 그녀의 고향에 있던 엘리샤(Elisha)란 선지자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인의 병을 치료할 유일한 능력의 사람으로 엘리샤를 추천할 수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총신 나아만의 문둥병 치료를 주선해 줄 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부탁했고, 이스라엘 왕은 이런 부탁이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운 지라, 이것이 오히려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를 잡으려는 계책이라고 넘겨 집고 큰 근심에 잠겼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샤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주문한 후, 정작 나아만 장군이 자기 처소에 이르렀을 때에는, 나아가 마중은커녕 집안에 들어앉아서, 심부름꾼을 보내어 다만 이르기를,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그러면 몸이 예전처럼 깨끗하게 되리라!" 하고 처방을 내렸다지요. 나아만은 대단히 격노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을 압도하였던 아람의 장군인 내가 여기까지 친히 왔는데, 적어도 저가 내 앞에 나와서, 그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문둥병이 있는 부위에 손을 흔들어 치료하는 행위를 베풀어 줄줄 알았다. 이렇게 나를 홀대할 수 있는가? 내 조국Damascus에 있는 Abana강이나 Pharpar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강물보다 오히려 더 낫지 않겠는가?" 나아만이 화낼만한 것이, 강물에 몸을 씻어서 되는 일이라면, 흙탕물인 요르단 강물보다는 차라리 자기 나라의 맑은 강물이 더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 이따위 흙탕물에 몸을 씻겠다고 그 먼 길을 온 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강물이 흐리고 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힘을 가진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나아만은 그러나 현명한 종들 덕분에 기적적으로 문둥병이 나았답니다.
제가 한 20여년 전에 공부했던 미국의 예일 신학교에는 마침 Henri Nouwen 이란 화란 출신의 교수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훤칠한 키에 눈이 유난히 서글서글하고 이마가 널찍한 풍모에 비하면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운 화란 액쎈트가 짙은 빠른 영어를 구사하던 그는 매우 친절한 교수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학점이 후하기로 소문나서, 그의 강의실은 청강생들까지 몰려와 항상 만원을 이루었고, 나무 밑 잔디밭에 학생들에 둘러싸여 열띤 대화를 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습니다. 어느 한국인 학생 하나가, 나를 보고, "나는 예일 신학교에 온 보람을 나우웬을 만난 것에서 비로소 느낍니다. 그의 spirituality를 배우지 않고 예일을 졸업한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한 선생도 그의 강의를 수강하세요." 본시 청개구리 근성이 있던 나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하였습니다. "나는 서양 신학을 배우러 왔지 서양 영성을 배우러 유학 오지 않았습니다. Spirituality라면 동양의 5천년 영성이 서양의 2천년 영성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기고만장한 그러나 말도 잘 안 되는 나의 억지는 훗날 두고두고 후회한 결과를 빚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강이 요단강 보다 못한 것이 무어란 말이요 하고 Naaman처럼 대든 것이라고 할까요. 오만한 사람의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더 큰 손실을 경험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것이 문제지요. 내 경우가 그랬습니다.
엊그제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과 인천지역에서 내 눈을 커다랗게 만든 광경은, 교회 뾰족지붕과 붉은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가 참으로 총총히 박혀 있는 도시의 sky line이었습니다.
웬 교회가 이렇게 많은고? 나 자신이 목사인데, 교회가 많다는 게 기뻐해야 할 일이지 기분 나쁠 이유가 없어야 하는데, 왼 일인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느 중형교회의 목사님을 뵈려고 찾아간 교회의 모습이, 특별히 그 목사님 방의 모습이 참으로 휘황찬란하였습니다.
인터넷으로 Newsnjoy를 통하여 한국의 교회현실에 대하여 상당한 선입관이 있기는 했지만, 막상 내 눈으로 직접 본 감상은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 연합 감리교회에 소속된 목사입니다. 흔히들 지적하는 대로 이른바 Mainline church 들이 추풍낙엽처럼 내리막길을 걷는 모습에 비하여,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고, 그러므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여전히 성장하는 길은 그런 미국식 번영의 신학을 부르짖는 복음주의적 교회로 나가야한다는 주장에 심히 고심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또한 복음주의라는 것이 과연 세계적 지평을 놓고 볼 때 계속하여 그 힘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 과연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건전한 신앙적 바탕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나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주의라는 말속에는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오만이 깃들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흔히들 이성은 인간적인 것이요, 계시는 신적인 것이라고, 그래서 이성이냐 계시냐하는 이분법적 영역을 토대로, 이른바 secular humanism 대 spiritual theocentricism을 천명하는 사람들의 높은 목소리가 너무도 공허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성을 멸시하는 것이 마치 신앙을 세워 가는 길인 듯이 지속돼야하는 것인지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나는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매우 몽매한 이기주의에 몰입하여 있다고 보며, 한국의 신학이란 민중신학의 서글픈 쇠락 이후 그 창조적 흥기를 잊었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신학의 무비판적 수입이 가져온 낭패를 이제 앞으로 한국 교회가 갚아가야 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 변선환 목사님의 종교다원주의를 파문한 한국 교회가, 저 해방 후 조선신학교 김 재준 목사님을 파문한 사건이후 가장 극적인 전환의 고비를 무산시켜버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Post-Christian era에 대비하는 거시적 혜안이 필요한 때이며, 종교 없이 하느님 앞에 서야할 Bonhoeffer의 예언이 옵션이 아닌 시대로 정말 진입함을 직시해야할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이 탈냉전의 시대를 자국의 국제적 지배체제의 전기로 삼은 지난 10 여년 간의 행적에서 읽어내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로라면 미국은 조만간 대내외적으로 그 힘을 잃어갈 것입니다. 무력과 방자한 전횡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와는 반대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치열하게 반전운동을 벌이는 뉴욕 맨하탄의 Central Park 집회에 참여해 보았던 나는 자기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성인들의 양심의 소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대로라면,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하느님도 힘을 잃어가고 말 것이 분명하지요. 나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제3 세계를 유린하는 현금의 작태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으로 넘기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mega-church, shopping mall culture가 가져오는 심대한 영향을 본받아, 큰 것은 무조건 효율적이요 좋은 것이라는 환상이 곧 깨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Mega-church mentality가 낳은 인물이 현 미국대통령 George Bush 같은 분이고, 그런 대통령들이 전쟁을 준비할 때마다 워싱톤의 백악관에 가서 Blessing을 퍼부은 궁중사제가 바로 Billy Graham이요, 그가 그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운 행태가 먹혀 들어가는 현장이 이른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세상은 곧 다들 알게될 날이 올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운영의 방식, 복음성가의 무차별한 수입, 거대교회의 메시지를 그대로 흉내내다가 미국이 힘을 잃어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잘되어갈 것이란 확실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유럽의 거대한 교회나 성당들이 중세 천년의 영광을 쇠잔한 그림자로 안고, 이제는 텅 비어있는 현상을 조롱이나 퍼부으면서, 우리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로 무장하고 있으니 당분간 염려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머나먼 요르단 강이 흘러내린 유대기독교 주의의 천박함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본주의와 결탁한 마지막 모습에서 미국, 그리고 미국보다 더하게 한국에서 그 고비를 향하여 숨가쁘게 올라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성서를 문자주의 그대로 읽어낼 경우, 그 지혜로움은 다른 고전 서적에 비하여 현저하게 모자라는 것은 조금만 다른 서적을 열력해 보면 곧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서를 신앙의 중심에 두는 이유는, 예수님 그는 역사적으로 누구인가를, 그리하여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에 재생해보려는 자유로운 상상(imagination)을 즐길 수 있을 때에만 허락될 것입니다.
신앙은 얼음판에 박 밀듯이 교리에 달달 통한 편집광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imagination)의 날개로 성서의 행간을 날아다니는 세월에서 터득하여지는 지혜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가 사실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가 사람의 생명을 압도하는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런 제도를 무너뜨리는 용기로 일어서는 사람들의 말을 복음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천국행 티켓을 판매하는 교회, 아니, 돈의 힘으로 제3 세계에 나아가 새로운 제국주의적 선교에 나서는 전진기지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삶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삶의 현장에서 초월하는 그런 힘이 종교로 들어가는 예수 운동의 활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머나먼 요르단 강에 가서야 세례를 받고 문둥병도 치유를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 흙이라도 담아와서 경배하여야하는 Naaman의 신앙을 결단코 칭찬하지 못합니다. 머나먼 요르단 강을 이제는 버려야할 때가 아닐지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는 한국교회가 강단을 통해서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야할 과제라고 봅니다. 머나먼 요르단 강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이나 미국에 가서 찾을 일은 아닙니다. 이른바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예수님의 이름이 붙어있는 모든 거룩한 유적지나 유물들은 이제 모두 God을 위한 곳이 아니라 Gold를 위한 성지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게다가 요르단 강물은 대체로 흐려서 깨끗하고 청명하게 깊은 강물이 아니라, 진흙탕 황톳물이나 다름없다는 거예요. 거기가 어디든 하느님의 명령이, 진실로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느껴지는 말씀이 우리들의 귀를 통하여 가슴속까지 스며들면, 우리는 그런 흙탕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살아서 움직이는 경우를 찾아내면 되는 것이겠지요. 맑은 물에 몸을 씻기를 포기하고, 흙탕물 넘실대는 현실의 고뇌 속에서 마음을 씻는 세례라야 그 물 속에서 나올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한국처럼 예수님의 정신을 억압적 위계질서로 전환시킨 교회를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 내 계급주의는 드디어 개인의 권력의지를 악용하는 단계에서 Mammon과 결탁한 진실로 Secular Humanism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런 제도 속에서 예수의 영성을 얘기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나는 지금 뉴욕에서 소문난 교회, 82년 전통의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가 아니라, 장로니 권사니 집사니 하는 교회 신령직 제도를 3 년 전 교인총회에서 투표로 없애버린 것으로 소문난 교회에서 봉직하고 있습니다.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있는 현경 교수가 수 차례 교회에 와서 강의를 해도 문제가 전혀 없는 교회입니다. 그래도 나를 "한 목사님" 이라고 부르지 말고, "한성수님" 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가, 철딱서니 없는 목사로 경고를 받았습니다. 미국이란 전혀 다른 문화권에 살면서도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 그 정신 속에 스며있는 수직적 위계질서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병입니다. 이 고질병은 요르단 강물에 씻어도 낫지를 않는, 그래서 확실히 문둥병보다도 더 고약한 질병입니다. 내 단순한 생각 같아서는 한국어의 모든 경어 용법을 없애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영어권에서 살면서 배운 편리함을 수입하자는 근시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예수 정신을 실천적 측면에서 생각한 다분히 나이브한 소견일 뿐입니다.
예수 정신이 한 나라의 문화를 파괴해도 좋은 것이냐? 한다면, 나는 문화라는 것도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고루한 것들이라면 머나먼 요르단 강까지 갈 것도 없이, 코앞의 한강 물에라도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해외유학파들이 대학강단과 교회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머나먼 요르단강에 가서 몸을 씻고, 그곳의 흙도 파서 짊어지고 돌아온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그렇게 해외에서 배워온 지식을 자신의 자리를 강화하는 데만 열심히 사용했지, 모든 기관들이, 대학이든 교회든, 지배체제로 강화되어 가는 그 생리적 비리, 그 완강한 질병에는 오히려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합니다. 가장 particular한 것이 가장 universal한 것이다. 그런 역설쯤 누가 모르겠습니까만, 우리는 이제 사람들이 온통 지구촌에 흩어져 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만도 2백만 배달겨레가 살고있다는 어설픈 통계숫자를 보더라도, 이제는 세계를 지평으로 이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새롭게 세워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교회가 가장 완고한 반통일 세력이라는 평판 위에, 한국교회가 가장 비한국적인 요소들을 배워다가 가장 고약한 한국적인 것으로 확대재생산하는 반국제적 세력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금 세계는 이미 기독교가 황무지로 변한 유럽과 기독교가 천박한 행복추구세력으로 달아오르는 미국의 어두운 전망을 배경으로, 이제 반세기 전에 이미 예언된 기독교이후(Post-Christian) 시대를 대비하여야할 때입니다. 머나먼 요르단 강에 가서 나아만의 문둥병을 씻어내듯이, 이제는 지배체제를 등에 업고 스스로 지배체제로 강화되어 그 껍질이 굳어져가는 피부병을 그 강물에 씻어야할 때입니다. 기독교가 세례 받지 않고는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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