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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숨 영

욥기 박경미............... 조회 수 2590 추천 수 0 2004.07.13 11: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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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7:7 
설교자 : 박경미 자매 
참고 : 새길교회 
 “잊지 마십시오. 이 목숨은 한낱 숨결일 뿐입니다.”(욥기 7,7)

  “주 하느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저는 정보가 넘치는 세상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는 차라리 모르고 싶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면 인터넷 뉴스 창을 열고, 9시 뉴스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시각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을 무겁고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내가 정말로 하고자 마음먹는 일은 너무나 대수롭지 않아 보입니다. 기껏해야 세상을 바라보는 내 관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거나 몇 푼의 돈을 기부하는 정도입니다. 저녁 시간 이라크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TV 화면으로 보면서 입으로는 밥숟가락이 들어갑니다.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누워 있는 용천 소학교 어린이들을 보면서 손으로는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입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시켜 ARS 자동전화 버튼을 누르거나 몇 푼의 돈을 어느 단체에 기부합니다. 내가 보내는 몇 푼의 돈이 분명 유용하겠지만, 그것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흔들림과 혼란스러움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차라리 모르고 살던 옛날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는 봄날 꽃구경도 떳떳하고, 푸른 하늘 푸른 나무도 거리낌 없이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다 했는데, 이제는 사랑하면서 미워해야 하고 미워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슬픔 뒤에 기쁨 온다 했는데, 이제는 슬퍼하면서 기뻐해야 하고, 기뻐하면서 슬퍼해야 합니다. 혼란스럽지만 혼란스러운 대로 무뎌지고 익숙해집니다.

    요즘 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무룩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가도 집 앞마당에 넘실대며 피어 있는 작약을 보면 “너 또 왔냐” 하는 반가움이 마음 가득 피어오릅니다.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마주 오는 초등학생들과 만나면 연둣빛 생명의 기운이 내게도 전해옵니다. 그들과 아파 누운 용천 아이들이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도통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아직 도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이라크도, 용천 아이들도 접어두고 연둣빛 생명에 대해서, 마지막 붉은 빛을 뿜어대는 영산홍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바라보는 북한산의 푸르른 모습, 차창 밖으로 천천히 춤을 추듯 바람결에 몸을 맡겨 떨어지는 나뭇잎들 꽃잎들, 그 위에 부서지듯이 눈부시게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 나뭇잎과 빛과 바람, 그들이 빚어내는 절묘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이어집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는 “부르조아의 나른한 오후”라면서 인상파 화가들을 경멸했는데, 혼자 중얼거립니다. 스무 살의 떳떳함이여, 스무 살의 빈곤함이여, 내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또 이런 생각도 스쳐지나갑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잔상이 아니던가. 허망함과 덧없음이 우리 마음에 남기는 자국이 아닌가. 영원한 것들이 주는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을 배경으로 사멸해 가는 것들이 늘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던가.  

    그저 그런 계절의 변화 같지만 달라진 햇빛과 바람에도 시가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내가 살아 있다”는 벅찬 느낌에 이르게 하고 “삶의 값”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곧 숨을 쉬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삶을 놀랄 만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키고 배설을 함으로, 숨을 쉼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의 목숨은 숨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기술문명은 가속도에 가속도를 붙여가며 발전했지만, 우리 몸은 원래의 고유한 속도대로 아주 느리게 변화해 왔습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살가운 관계,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친밀하고도 따뜻한 느낌, 이런 것들에서 비롯됩니다. 마치 이솝우화의 서울 쥐처럼 우리는 삶의 공간을 서울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시골 쥐여서 마음의 시골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는 아무런 위험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는데 바퀴벌레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실제적인 위험으로 말하자면 바퀴벌레보다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상황이 훨씬 위험한데 사람이 몸으로 위험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시시대 인류가 동굴에서 살아갈 때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 중에 하나가 벌레들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인간을 습격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새겨진 이 기억은 수십만 년에 걸쳐 인간의 유전자 정보 안에 들어와서 그러한 반응이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데 반해서, 자동차의 위험성에 대한 우리 몸의 반응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아직 자동차의 위험성을 모르고, 그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몸 안에 형성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 몸의 진화 속도는 기술문명의 발전 속도보다 훨씬 느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속에는 아직도 과거의 기억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내 몸 속에 파충류의 끈적거리는 욕망과 잔인한 분노가 있는가 하면, 맨 처음 연약한 두 발로 서서 하늘을 바라본 인간이 느꼈던 경이로움과 설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은 수십만 년, 수억 년에 걸쳐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과 더불어 진화의 길을 헤쳐온 생명의 숨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욥은 이 목숨은 한낱 숨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숨결이 무엇입니까? 약한 바람, 한순간 불다 가버리는 약한 바람이 숨결 아닙니까? 생명은 한낱 숨결에 불과하고, 가녀린 바람에 지나지 않아서 매우 연약하고 허망하지만 생명의 숨은 수 천, 수 만년, 수 억 년을 이어왔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는 우주창조의 신비와 손길이 닿아 있습니다. 가만히 숨죽이고 귀 기울여 보십시오. 온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생명의 숨 속에는 자유와 아름다움을 향한 꿈과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리 작은 물고기의 유연한 몸놀림이 있기까지 수천수만 년의 서툰 몸짓이 있었고, 아스팔트 틈새에 남몰래 피어난 이름 없는 들꽃의 아름다움이 있기까지 수 억 년의 외로운 몸짓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장구한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고, 오늘의 나를 거쳐 인류의 역사적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내가 쉬는 숨은 수천, 수만 년 이 땅의 추위와 비바람과 배고픔을 뚫고 온 선조들의 숨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수백만 년, 수천만 년 동안 스스로 서기 위해 몸부림친 생명의 역사 끝에 내가 있고, 나를 통해서 생명의 행진이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의 나는 영원한 역사적 생명의 한 매듭입니다. 이 매듭이 어떻게 맺히는가에 따라 생명의 의미와 방향이 결정됩니다. 오늘 이 순간의 내가 우주적 역사적 생명의 끝을 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숨결은 약하면서도 강합니다.

    신선을 꿈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장자는 “발꿈치로 숨을 쉬면 신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발꿈치로 숨을 쉰다는 것은 온 몸으로 숨쉰다는 뜻일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저 배속 깊은 곳에서부터 깊고도 긴 숨을 쉬지만 마음이 흐려지고 몸이 약해지면 숨이 거칠고 얕아집니다. 어린아이 때는 몸과 마음과 생각이 맑고 깨끗해서 배로 숨쉬지만 어른이 돼서 생각이 혼탁해지면 가슴으로 숨쉽니다. 그러다 늙고 병들면 목구멍까지 숨이 차오르고 숨이 턱에 받쳐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릅니다. 발꿈치로 숨쉰다는 것은 숨을 내 몸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쉬어서 저 밑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숨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신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선이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무협영화에 나오는 협객들처럼 ‘쉿쉿’ 소리를 내며 날 수 있다면 그것도 한 번 해볼만한 일일 것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하느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하느님도 숨을 쉽니다. 하느님의 숨은 그의 바람이고 그의 영입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타인과 교통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하느님도 당신 밖에 있는 존재와 통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이 흙을 만나서 인간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이 흙을 향해 숨을 내쉬었을 때 인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을 통해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숨은 우리 몸을 하느님의 영과 연결시킵니다.  

    숨을 통해 우리와 하느님이 연결될 뿐 아니라 숨을 통해 우리 몸과 영혼이 이어집니다. 몸으로 쉬는 숨이 곧 영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그리스어 프뉴마, 프쉬케, 라틴어 스피리투스, 인도어 아트만은 모두 숨, 또는 바람을 나타내는 말이면서 동시에 영을 뜻합니다. 동양의 기라는 말도 바람이자 숨이면서 영적 의미가 실려 있습니다. 숨은 생명의 바람, 영의 바람으로 몸을 채웁니다. 숨을 바로 쉬면 사나운 욕심도 줄고, 분노와 미움도 식고, 한도 풀리고 깊은 상처도 아물고, 밝고 따뜻한 생명 기운이 솟습니다. 숨은 나의 몸과 영혼이 하나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내 몸은 한낱 살덩어리에 불과하고, 하느님의 숨이 들어오지 못한 내 몸은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생명의 바람, 영의 바람으로 나의 몸과 마음이 가득 차면 나를 옭아매는 분노와 욕심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의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숨은 내 몸과 영혼을 이을 뿐 아니라 나와 나 밖의 세계를 잇고 통하게 합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세계와 통하고 사귀고 싶은 열망을 드러냅니다. 남과 하나가 되고, 남과 통하려는 열망이 모든 생명체의 꿈입니다. 인간은 늘 만남의 예감 속에서 삽니다. 물방울 하나에 바다의 기억이 어려 있듯이 원래 내가 속해 있던 더 큰 나에 이르고자 열망합니다. 그것은 너를 통해 닫힌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요, 열망입니다. 농염한 쾌락에도, 뜨거운 투쟁의 감격에도 그런 갈망이 있습니다. 성적 욕망도, 종교적인 갈망도, 철학과 예술의 근원적인 바람도,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노력도 남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남을 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과 하나 되고 서로 통하려는 열망이 삶의 근원적인 동력이자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사실 노래나 춤도 함께 숨을 쉬어서, 함께 호흡을 맞추어서 신명나는 세계로 날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 되면 제 숨을 못 쉬고 남의 숨만 들이마셔 숨이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기가 막혀 제 숨을 못 쉬고 정신을 잃는 것이 기절이요, 졸도입니다. 제 속에 부는 생명의 바람이 없으면 날 수 없습니다. 숨은 어떤 상황에서도 놓아서는 안 되고 제가 스스로 쉬어야 합니다. 제 숨을 놓아버려서는 남과 숨을 맞출 수도 없고, 타인과 통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를 잃지 않고 남과 통할 수 있을 때, 자신이 녹아 해소되지 않으면서 만물과 하나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와 사랑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닫힌 나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예감했던 넓고 높은 존재로 되는 일이 정말 가능합니까?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타인과 하나가 되려 하지만, 언제나 실망스럽게도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내 옆구리에 퇴화된 못생긴 날개가 하나 달려서 나를 자꾸 간지럽게 하고, 날고 싶게 할 뿐 정말 날지는 못합니다. 성서는 영으로, 하느님의 숨으로 다시 태어나야 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태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것과도 같이 불가능한 일이면서 동시에 새로 태어나야만 가능해지는 인간 삶의 비약적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과 숨을 통해서만, 거룩한 하늘바람이 불어야만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바람으로 거듭나서 하늘을 날게 될 때 만물도 새로워진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시편의 시인은 “보내시는 그분의 얼에 만물이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됩니다.”(시편 104, 30)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만물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기까지”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로마 8, 21-22)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신음하고 고통 당해온 만물이 우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만물과 함께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일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고, 오지 않은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디서나 폐쇄성이 내면에서 동터오는 거룩한 열림을 가로막습니다. 어디서나 차가움과 어려움이 내 혼 속에서 열리는 따뜻하고도 친밀한 마음을 억누릅니다.

    그러나 하늘바람, 생명바람이 불면 인간의 삶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언제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간에 간격이 있다는 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일깨워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할 때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와 너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벽과 깊은 심연을 넘어, 내가 너를 위해 있을 수 있고 네가 나를 위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위를 걷는 것처럼 순간순간이 삶의 기적이며 창조입니다. 그것은 인간 현존의 새로운 가능성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열리는 성령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한 새 창조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인간의 창조와 함께 완성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부활한 세상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두가 모두에게 속할 것이고, 각 사람이 다른 사람 안에 있지만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자유와 존엄성을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영 안에서 하나이듯이, 영 안에서 함께 숨쉬듯이 사람들도 같은 영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 서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요한 17,22) 영이 이 모든 일들을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드디어 영은 전 피조세계를 하느님의 신부로 만들 것입니다.(묵시 21,9)  

    요한복음 21장 22절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뿜으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 때 당신의 숨과 영을 불어넣었듯이 부활한 예수는 두려움과 무력감에 빠져 있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숨과 영을 불어넣으면서 내 숨을 받으라고, 함께 숨쉬자고 말합니다. 모든 예배와 기도는 하느님의 숨을 받는 것이며, 내 속을 비워서 시원하게 하느님의 바람이 통하고, 예수의 숨과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바람, 예수의 바람이 내 속에서 불면, 내가 그분과 함께 숨쉬면 내 속에서 성령의 사랑이 열리고, 믿음과 기다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성령이, 거룩한 숨결이 열어주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숨쉬고자 하는 마음이며, 상대방이 숨을 잘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함께 숨쉬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며, 함께 숨쉬며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당신의 영과 숨을 나누어 주셨습니다(요일 4,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숨을 쉬면서, 온전한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숨을 주신 하느님을 향해서 두려움과 떨림과 희망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숨결처럼 오소서! 창조자의 영이여!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바람을 타고 마음의 하늘을 날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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