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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길희성............... 조회 수 2000 추천 수 0 2007.11.29 2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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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21:7-34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성서본문: 요즈음 르완다 난민의 참혹상을 보면 차라리 못보고 못 듣고 살았으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과 일 백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주로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알까말까 이었지 지금같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안방 사정처럼 훤히 아는 일은 없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사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량에 시달리며 너무 많이 아는 것이 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만큼 현대인들은 방관자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역사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세계역사의 증인으로서, 참여자로서, 그리고 주인공으로서, 아니 스타로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폐쇄된 사회 속에서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폐쇄된 역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개방된 사회에서 개방된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역사의 현장을 목격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괴로운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역사의 수많은 비극에 아무런 방어도 없이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에 그만큼 더 괴로운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통신수단과 정보의 발달로 400년 동안 억압받던 남아프리카 흑인 민중이 맞았던 해방의 감격을 함께 느낄 수도 있고,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베를린 장벽이나 철의 장막이 무너지는 거대한 역사의 드라마를 바로 눈앞의 현실처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반면에, 폴퐅 정권 하에 수백만 캄보디아 인민들이 겪은 비극, 발칸반도의 갈등과 보스니아 회교도들의 수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그리고 르완다 아프리카인들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도 피할 수 없이 목도해야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남다른 고민에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아니 우스꽝스럽게 조차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참극이 벌어지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이 저절로 생깁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쓸데없는 정신적 부담, 신앙적 고민은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만큼 눈도 없고 귀도 없다면 모르되, 그리고 우리 인간들처럼 힘도 없는 존재라면 모르되, 전지전능하고 선한 의지를 가지신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극도의 참상,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정당화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난을 왜 지켜만 보며 침묵하는 것입니까? 눈물마저 매말라버린 커다란 두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면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그냥 지켜보아야만 하는 여인들의 모습, 불도저로 밀어버려도 감당하기 어렵게 쓰러지는 주검들 앞에서 하나님이 무슨 할말, 무슨 변명이 있겠으며, 그런 할 말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는 항의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설령 비극의 책임이 소수 지도층 인간들에 있다손 치더라도,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고통을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듯한 하나님을 우리가 정말 하나님으로 믿고 경배할 수 있겠는가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할 일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건만 그것처럼 믿기 어려운 일도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믿기 어려운 세상에서 인생이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긍정하며 사는 일도 심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예부터 신앙인들의 큰 고민거리였으며, 오늘 읽은 욥기의 저자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느닷없이 닥쳐온 고통이 아무런 까닭이 없는 부당한 고통이라 여겨지기에 친구들이 하는 어떠한 위로의 말도 거부하며, 어떠한 정당화도­그래도 네가 너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른 죄악이 있겠지, 악인들의 성공은 잠시뿐이라는 등­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부당성, 하나님의 불의에 신랄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말씀에서는, 욥은 자기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넘어서서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의 도덕적 부조리를 허락하는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면서 하나님을 고발하는가 하면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욥 21: 19-21, 23-26, 29-34.
그래도 욥은 그 고통이 제아무리 극심했다 해도 하나님께 항변할 기력이라도 있었기에 입을 열어 부당하다고 외치기라도 했지만, 르완다에서 죽어 가는 무수한 난민들은 누구를 원망할 기력조차 없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듭니다. 말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그 수많은 생명들이 모두 하나 하나의 욥이 되어 하늘을 원망하고 우리 인생을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 잘난 인생에 무슨 도덕적 의미가 있으며 인간이 무슨 가치 있는 존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라고 비웃는 듯합니다. 나는 요즈음에야 비로소 왜 인도인들은 예부터 인생을 대양 위에 이는 물거품 정도, 아니면 한낮의 꿈 정도로 이해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죽이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끊임없이 닥치는 삶의 고통과 비극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겠기에 그들은 아예 물거품 같은 인생에 비극이란 애당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욥과 같이 떼를 쓸 대상, 고발할 대상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존재해도 곤란하고 존재하지 않아도 곤란합니다. 존재하면 이 엄청난 부조리에 책임을 져야하고,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가 떼를 쓸 대상이 없고 원망할 대상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생이 처음부터 부조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닙니까? 인생의 도덕적 의미를 제공해주며 정의의 근거가 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에 그래도 그를 원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욥의 원망은 어디까지나 신앙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신앙이 이미 전제되었기에 그렇지 않은 듯한 상황 속에서 욥은 심한 정신적 갈등을 느끼면서 끈질기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이란 애당초부터 부조리한 것, 본래부터 불합리한 것이라면 무슨 불평, 무슨 항변이 있을 수 있으며, 누구를 향해 항의하겠습니까? 인생이 본래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전제될 때에만 비로소 왜 인생이 이러냐고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깊은 신앙의 명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회의하고 불평하는 것도 결국은 근본적인 믿음이 선행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성서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본래 계약, 언약이라는 것이 체결되어 있습니다­아담과의 계약, 노아와의 계약,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그들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축복하고 보호해 주시리라는 계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은총의 언약(임마누엘)이 있으며, 이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의로움입니다­신실함(faithfulness)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지금 욥이 항의하는 것도 하나님이 이 계약을 위반했다는 것, 말하자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먼저 반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포함한 수많은 무고한 자에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당한 고통이 주어지도록 허락했다는 고소장을 제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계약이라는 것이 애당초부터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먼저 주어져 있다는 원 사실입니다. 만약 이 계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면, 즉 인생이란 것이 처음부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우연이고 부조리라면, 아무도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계약이 먼저 있기에 계약 위반이 가능한 것이며, 이 원 사실로서의 계약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신앙으로만 받아들인 전제요 진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3000여년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무수한 고통을 받아온 민족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들이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남달리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인류 최대의 범죄자인 히틀러 치하에서 600만 명의 하나님의 백성의 목숨이 사라졌다는 사실 앞에서 유태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사실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 위젤이라는 유태인 작가(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말하듯, 유태인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면서도 유태인이 될 수 있지만 결코 하나님 없이는 유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궁극적으로 호소할 데도 없으며 위로 받을 곳도 없는 것이며, 약한 유태인들이 강한 독일 나치스에 의해 처형당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조차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의 극치인 십자가상의 절망을 체험한 예수도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 15: 34) 라는 원망에 찬 절규로 그의 생을 끝내지 않으시고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기도로써 그의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욥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의 고난의 대명사인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견합니다.
요즈음 가뭄도 심각하고 하도 더우니까 어느 디제이가 말하기를 "아니, 이렇게 더워도 되는 겁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치 누구의 허락 하에 이렇게 더운 것처럼, 그래서 마치 누구에게 항변이라도 하듯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농민들은 그렇게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의 물결에 뒷전으로 밀려나 희생만 강요당해온 농민들, 우루과이 라운드니 뭐니 해서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리는 우리 농민들의 고통이 마치 부족하기라도 한 듯 이제 가뭄까지 기승을 부리니, 그들이 하늘을 우러러 원망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껏 원망하고 불평하고 따지고 대들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항변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폭군, 독재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순탄하지만 않은 인생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러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시는가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내 자식에게 이런 시련이 닥쳐오는 것일까 깊은 회의에 빠져듭니다. 왜 저 못된 짓 많이 한 아무개가 아니고 별로 나쁜 짓도 못하고 비교적 착하게 살려고 애써온 나에게 이런 재난이 오는가 하고 신앙의 흔들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진실이 있어야 거짓이 가능하듯, 하나님이 먼저 계셔야 불평도 원망도 가능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튼튼한 계약이 원 사실로서 이미 주어져 있기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계약위반이라고 아우성치며 하나님을 고소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아무도 우리의 아우성을 들어주는 이 없는 적막한 세상, 목적도 의미도 계약의 원 사실도 없는 낯선 우주공간에 던져진 존재로서 세계의 이방인, 우주의 고아와도 같은 존재로 방황하다가 사라질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신앙의 근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만으로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한 위로가 못 됩니다. 아직도 무고한 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의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놓고는 의로운 자들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욥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며, 르완다 어린 아이들의 죽음 속에서 도살장에 말없이 끌려가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지 않는 한, 그리고 십여년 전 학살당한 광주의 의로운 자들에게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도덕적 부조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고난 당하는 아들 예수의 모습에서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읽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인생고의 문제는 해결 안 됩니다. 도대체 인간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들의 고난을 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아파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우리 신앙의 귀의를 받을 수 있으며, 우리들 인생의 억울한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시는 예수가 어떻게 우리들의 그리스도요 구원의 주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하루 2,000명 이상의 목숨이 쓰러지는 르완다의 참혹한 비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계시면서 인간의 하소연만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아예 안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팔짱 끼고 앉아 계시면서 인간의 고통을 구경만 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결코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면서 그 아들을 통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억울하게 죽어 가는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시는(compassionate)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그 분을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면서 부활의 희망을 안고서 용기를 잃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 25장의 유명한 최후 심판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 25: 31-46.
무슨 뜻입니까?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된 자(떠도는 자: 요즈음 말로는 난민, boat people 혹은 해외 날품팔이 노동자들), 헐벗고 감옥에 있는 자들 속에서 바로 나 예수 자신의 현존을 발견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며 나는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고통 당하다 있을 것이라는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위로의 말씀이자 동시에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바로 이러한 고통받는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마음놓고 예배드릴 공간하나 마련 못했지만 가능한 한 많은 헌금을 선교와 봉사에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교를 전통적인 전도로 생각하는 사고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생각하는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나라의 선교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이미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뒤따라가서 주님과 함께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핵심이며, 바로 예수 자신이 펼쳤던 하나님 나라의 선교였기 때문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 교회만 커지고 교회만 살찌는 선교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선교가 결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 하는 전통적인 전도의 단순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긍정하면서 용기 있게 ,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인생을 살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장 분명하게 새겨주신 분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가 해야할 것,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해야할 일은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그 분이 계시는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모든 억울한 자들의 눈물이 씻겨질 그 날을 함께 기다리는 일입니다. 만약 그 날이 안 온다면, 만약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억울하게 고통 당하다 죽어간 자들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날이 없다면,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모든 전도도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 12-19).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고린도 전서 15: 20) 그 날의 희망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아래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외롭지만 힘차게 고난의 종 예수의 발걸음을 멀리서나마 좇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자들의 고난의 현장, 그곳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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