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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는, 그래서 보다 아름다운 삶

욥기 박창원............... 조회 수 2051 추천 수 0 2007.12.18 2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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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8:11-12 
설교자 : 박창원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0년이 되었고, 남달리 기도가 부족한 제가 이 강대상에 선다는 것은 분명 이 성스러운 예배에 대한 무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이 강대상에 한번 서보고 싶었습니다.
신학을 모르고, 더구나 간증 설교를 할 자격도 없이 이 강대상에 선다는 것은 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무거운 인내를 요구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간증 내용을 제가 저의 말로 해보고 싶은 이유는, 말하면 누군가는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이 있을 것 같고, 들으면 이해하고 납득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실낱같은 소망을 안고 이 자리에 섰음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가 금년이 10년째입니다. 그 10년 중 절반 이상을 선교부 일을 맡아보았고 그 임기 마지막 해인 금년 중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여 말씀 올리는 것이 교우로서의 할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높고 웅장한 산을 어느 각도에서 보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집니다. 어느 각도에서 기독교와 성경을 보았느냐에 따라서 평신도의 신앙관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에 나온 지 일년이 좀 지났을 때 성경공부 시간이 마련되었고, 각 대학의 교수 여러분이 번갈아 이 성경공부 시간을 인도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욥기는 4주간에 걸쳐 강의되었으며, 제가 특이하게 생각한 점은 교인들이 번갈아 봉독하고 나면 곧 이어 강사는 해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욥기 5장부터 10장까지 집에서 읽어 오라고 하시기에 혹시나 다음 주일에 저보고 읽으라고 할까봐 마지못해 읽던 중 이 대목에서 호흡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꺾일 때 되기 전에 먼저 꺾인다"는 말에는 눈이 굳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몇 번이고 이 구절을 되새겨 읽곤 하였습니다. 불현듯 제 과거를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 행복했던 삶이 꺾인 적이 있었고, 부모의 사랑은 그야말로 "꺾일 때 되기 전에" 꺾이는 바람에 전쟁고아로 이곳저곳을 전전한 적이 있었고,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꿈도 가난 때문에 꺾여 버리고, 생각해 보면 저의 인생은 온통 타의에 의해서 꺾이며 살아온 것이었기에, 성경에서까지 꺾이는 말이 나오니 호흡이 정지되는 듯한 기분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꺾인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꺾인다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27년이란 긴 세월을 꺾인 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 자기를 투옥했던 백인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은 사람, 그 백인과 화해한 사람, 그리고 그 백인과 더불어 미래의 청사진을 함께 그리는 사람,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꺾이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삶이고 넬슨 만델라처럼 자신을 스스로 꺾어야 위대한 사람입니다. 식량을 구걸하기 위해 이집트에 온 형들이 눈앞의 총리가 옛날 그들이 팔아먹은 요셉인 줄 알고 그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인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였나니..." 하며 자신을 꺾는 사람, 아무도 보는 사람 없고, 누구도 아는 사람 없고, 증거인멸도 완벽하고, 출세와 쾌락이 보장되는 상황하에서도 왕비의 유혹을 뿌리치며 하는 말 "먼 후일 제가 참회하면 하나님께선 내 죄를 용서하시겠지만 나는 내 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스스로 감옥 행을 택한 사람, 그런 사람! 요셉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요셉과 같이 스스로를 꺾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정말 꺾이는 삶은 꺾는 삶보다 무용의 가치관일까요?
군에서 제대한 후 상도동 어느 산모퉁이에 겨우 2평 남짓한 방에서 혼자 자취를 하던 때가 제겐 있었습니다. 절대고독과 절대빈곤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서 백척간두와 암중모색이라는 또 다른 두 단어 앞에 맞서서 대립적 생활을 강요당하던 때였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으레 버릴 신문지는 한 묶음 싸서 밖에 내 놓았고 저는 이때마다 잽싸게 그 신문지를 몽땅 방에 끌고 들어와 신문에 실린 시라는 시는 전부 오려내어 사방 벽에 온통 시의 향연을 벌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네모로 곱게 접은 후, 접은 선을 따라 침을 바르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도려낸 시를 방 벽에다 온통 부치는 것입니다. 갈 곳도 없는 일요일, 나다닐 돈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교회에서 전도하러 나온 사람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 그 많은 시를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하고, 홀로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 꿈속에서나마 영혼의 먼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시는 제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고, 그 습관은 방법만 달리할 뿐 오십대 중반의 저에게 아직도 남아서 그 맥을 이어오는 애잔한 습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결코 시인이 될 자질은 없지만 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때부터 연유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편안한 침대에서 자지만 꿈속에서 제 몸은 상도동 山 17번지 그 쾨쾨한 온돌방에서 온통 뒹굴며 시를 읽고 외우곤 합니다. 저는 오늘 저의 불행한 과거의 어느 단면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제가 얻은 것이 있기에 그 은혜를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 때는 캄캄한 밤중에 자갈밭을 맨발로 걸어가는 격이었습니다. 물론 신고 갈 신도 없고, 지도도 없고, 앞을 밝혀 줄 호롱불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긴 터널을 10년이 넘도록 지나오다 보니 저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내가 신고 갈 신을 내가 삼고, 나의 지도를 내가 그리고, 앞을 밝혀 줄 호롱불을 내가 만드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남이 모르는 기쁨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파랑새가 되기도 하여 창공을 훨훨 날기도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꺾이는 삶도 꺾는 삶 못지 않게 능력과 지혜를 창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싱그럽고 상쾌하다는 것입니다.
한 5년전 Robert Shuller목사가 시무하는 수정교회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L.A. Orange County의 경관이 빼어난 곳에 위치해 있는데 교회 입구에 예수님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뒤에는 양떼가 따르고 왼 팔에는 병색이 완연하고 몹시 여윈 어린양 한 마리가 안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초라한 어린양을 통해서 제 자화상을 봅니다. 아! 그랬구나. 지금까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대속자의 은총이었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가졌던 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순식간에 꺾이고 맙니다. "순간경험"을 처음 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까지 가서 또 꺾이고 그 찬란하고 아름답기만 한 [순간경험]을 지니고 예수님 동상을 뒤로하고 그 교회를 떠날 때 저의 이 귀한 [순간]을 축하라도 하듯 어디선가 쓰르라미 소리가 들려오는 한가한 6월 오후였습니다. {순간} 체험이 있을 때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호흡이 정지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역도 선수가 바벨을 들어올릴 때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춤니다. 예수님이 호흡을 멈출 때 하나님은 서둘러 [새하늘·새땅]에 대한 비전을 마련하십니다.
갯벌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갯벌, 악취가 코를 찌르는 갯벌을 일컬어 질펄이라고 알고 있는데 바로 이 곳에서 왕골이 자란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고 계시의 불빛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돗자리나 의자 등의 원료가 되는 왕골은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면 맑고 투명한 액체가 나오는데 그 순도가 알로에보다 더 정결하고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갈대는 또 어떻습니까? 평지보다는 언제 떠내려 갈 지 모르는 물 가에서 키가 훨씬 더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사회에도 질펄과 같은 아픈 시대에, 언제 떠내려 갈 지 모르는 물 가와 같은 불안한 시대에 왕골처럼, 갈대처럼 아름다운 교훈을 주는 예가 있습니다.
1920년 강원도 산골에 남궁억이라는 아동문학가 한 분이 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외우는 [소쩍 소쩍 소쩍새]와 [잘 살어보세 잘 살어봐]를 쓴 동시작가이기도 합니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날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 왕복 20리가 넘는 초등 학교까지 눈 위에 제일 먼저 발자국을 내고 갑니다. 동네아이들이 행여 길을 잘못 들까봐, 그래서 넘어지거나 다칠까봐 계속 그 일을 합니다. 드디어 졸업식 날이 가까워왔고 가난한 학교나 불쌍한 학생들은 이 남궁선생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나 가난해서 해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선생이 제안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학교에서 그 분에게 명예 졸업장을 드릴 수 있다면",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들은 기쁜 웃음을 활짝 웃었고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좋아서 강중강중 뛰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졸업식날 삼십이 넘은 이 시인은 조무래기 아이들과 함께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그날부터 명예동창생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잊혀진 어느 아동작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전해드리고자 하는 말은 남궁선생이 제일 처음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위에 발자국을 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조무래기들이 학교를 갔고, 마음이 변화되었고, 드디어 사랑이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세의 우리에게도 발자국을 흰 눈 위에 처음 내는 사람이 되라고,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애타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몇 년 전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여사가 연금 되어 있었을 때 미얀마 NCC 인권위원회를 통하여 약소하나마 1000불을 지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수많은 교회 중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이 일을 자청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흰 눈 위에 우리가 제일 처음 발자국을 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는 교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따라오는 행렬이 긴 행렬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명예동창생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것을 저는 코이노니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 돈 키호테 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 위에 안장을 얹고 돈 키호테 서둘러 길 떠날 준비에 분주합니다. 그 문하생 산쵸가 묻습니다:
선생님,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오직 진리를 찾아 떠날 뿐이다.
그럼 얼마나 여행하실 계획입니까?
그것도 나는 모른다. 진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갈 뿐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건 상관없다. 진리를 찾아서 가다가다가 피곤해 쓰러지면 머무는 그 곳이 목적지인 것이다. 나는 그곳을 향해 간다.
돈 키호테 출발했고, 굶주림과 피곤이 겹쳐 결국 이름 없는 빈들에 그의 몸을 묻었고 볼품없는 무덤 하나를 산쵸는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 나그네 한사람이 길을 가다 그 무덤을 발견하였고 그 처연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다가가니 풀 속에 덮여 있는 작은 팻말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풀을 헤쳐 그 이름이라도 확인하려고 보니 누군가 이 이름 없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작은 천사]라 쓰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천사. 작은 천사, 이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NCC 인권위원회 양심수 후원회의 선교 프로그램에 작은 정성을 표하고 있습니다. 30년이 넘은 옥고를 치르고, 정신 이상이 되고, 양로원에서는 접견 금지가 되어 있는 무의탁 노인 돕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 프로그램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끝도 없고, 기대되는 결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다하다 그치는 그 날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야말로 이 작은 교회가 작은 천사의 행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천사가 이 사회에서 사랑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제2, 제3 아니 수많은 작은 천사가 생겨나는 사회를 저는 감히 [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도 목적지의 도착보다는 푯대를 향하여 우리는 나갈 뿐... 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러한 선교 프로그램이 하루에도 한 곳씩 두 곳씩 아니 백곳씩 만곳이 전국 방방곡곡에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작은 천사의 행렬이 한없이 길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막혔던 마음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작은 천사, 그 작은 천사는 누구입니까?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그 이름을 알려고 한다면
그야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마워하고,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함을 느끼고,
그러나 붙어 가는 편에는 꼭 전하는 말이 있는...,
그래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듣는 말...,
사랑, 믿음, 소망을 향하여 가다가다 또 가다
그래서 병들고 지쳐 머무는 그 곳이, 형제여!,
그 곳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겠소?
남한과 북한 당국을 향하여, 그 숫한 교회와 목회자를 향하여,
정치인, 지식인을
향하여, 학생,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작은 천사와 명예동창생 되기를 기뻐하는
이 땅의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돈 키호테 꺾임이 되기 전에 꺾여 말라짐으로 해서 작은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간증설교의 제목을 감히 [꺾이는, 그래서 아름다운 삶]으로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변적 지혜문학은 욥기와 전도서가 대표하고 있는데 욥기를 말틴 루터는 성경 안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책이라고 하였고, 시인 Alfred Tennyson은 인간이 쓴 시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라고 하였으며, 문학비평가 Thomas Carayle은 성경책 안에서나 밖에서나 욥기에 비견할 책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감히 말씀 올리는 이 구절은 욥의 친구 빌닷, 소발, 엘리바스 셋이서 욥을 방문하여 토론식 대화를 하는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욥기의 결론은 인간이 몸을 움직이고 땅위에 사는 한 이유가 없고 원인불명의 비극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고, 아무리 새벽기도에 열중해도 르완다의 굶주림은 계속될 것이고, 아무리 통성기도를 해도 스리랑카와 동티모르의 양심수는 늘어나고, 아무리 기도원 출입이 잦아도 삼풍의 비극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동창생과 작은 천사가 존경받고 사랑 받는 그 사회가 바로 천국이고 그 천국 지향적 자세가 바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허지만 질펄 위의 왕골, 물 위의 갈대 이것도 하나님만이 아는, 계시의 불빛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창조주의 신비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겪은 MOMENT 즉 순간경험과 욥기를 통해서 누구에게도 간섭받기 싫은 그래서 평생을 고집할 기도와 천국에 관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저 혼자에게만 적용될 이 결단을 내리면서 뜬눈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번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지용씨의 시에 그리움에 관한 시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얼굴이야 두 손으로 포옥 가릴 수 있지만
그리움이야 호수와 같아 두 눈 꼭 감을 수밖에...
우리의 얼굴은 작습니다. 그래서 두 손으로 포옥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불빛이 너무 찬란해서, 그래서 눈이 부셔, 그만 두 눈 꼬옥 감는 그러한 여러분 되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상도동 山 17번지, 주인 아주머니가 사방 벽의 시의 향연을 보고 꾸지람을 하는 바람에 부치지 못한 시 한 편이 아직 제게 있습니다. 책에서 도려내고, 접고, 침 바르고, 곱게 도려낸 후, 밥풀만 부치면 되는데 못다 부친 시가 있기에 이제 부칠 장소를 찾았으니 여러분 마음에 부칩니다. 이 시는 질마재 신화에 실린 시입니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옥수수 밭을 지나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흘러 들어와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이면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찾느라고 알 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 이야기를 무진장 늘어놓으시던 외할머니는, 이 때에는 웬일인지 한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 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답니다. 그 때에는 왜 그러시는 지 나는 아직 미쳐 몰랐습니다만, 그 분이 돌아가신 이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약간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는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녘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30년 전에 되뇌던 이 시를 지금도 생각해 보면서 이렇게 반문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때로는 질펄의 모습으로 그리고 왕골의 모습으로
그리고는 또 갈대가 되기도 하고 물살이 되어 오시는 데
우리도 할머니처럼 경외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거슬러 올라와서,
옥수수 밭을 지나서, 또 삼대 울타리 틈으로 흘러 들어와
작은 천사의 모습으로, 명예동창생의 모습으로
찾아오실 때 우리도 할머니처럼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이 발갛게 붉어집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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