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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하나님에게 감사하는가?

욥기 민영진............... 조회 수 2418 추천 수 0 2008.02.15 13: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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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1:6-12 
설교자 : 민영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오늘은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제가 감사절 설교를 해 온 것을 보면, 목회 초년병 시절에는 퍽 순수하고 단순한 생각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감사의 조건들을 열거해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복을 주셨으니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하는 식의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찬송가 중에서도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라고 하는 후렴이 나오는 찬송가 489장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여유 있게 하고 우리 삶의 질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 지에 관해서도 설교했습니다.
몇 년 후에 또 감사 주일 설교를 할 때 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라는 것이 이렇게 받은 복을 세어본 다음에, 계산을 해 본 다음에 해야한다는 것이 제 스스로에게는 좀 속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께는 너무 야박하고 얄팍한 감사 행위가 된다는 죄송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만일 받은 복이 없다면 감사해야할 이유도 없다는 논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에는 복 대신에 만일 저주를 받았다면 저주를 받은만큼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무렵 제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공동번역 성서}로 읽은 하박국서 3:17-19입니다. {개역}으로 읽을 때에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1977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로 하박국서를 읽다가 이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 없고,
목장에는 소 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야훼 나의 주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시어
나로 하여금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십니다.
감사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직 구원을 누리지는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고 감사하고 있는 예언자에게서 보다 더 성숙한 감사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감사 주일엔가 여러분 앞에서도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감사절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좋아서 서예가 故 이철경 선생님께 부탁하여 그의 특유의 한글 궁체로 써주십사고 하여, 지금도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저는 이 구절을 감당할만한 믿음도 없고 인격도 못된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이 구절 앞에서 몹시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형편이 그렇게 어렵게 될 때에도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박국처럼 감사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제 자신을 주눅들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초까지만 해도 오늘 증언할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날을 보내고 있는데, 지난 주중에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의 교수 일부와 이사진 대다수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도날드 맥컬러 총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저서 중에 한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내일 밤에는 저자와 그의 친구들이 서울 모처에서 모여 그의 책 출판기념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 주일에 무슨 설교를 할까 하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지난 주중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교수 중에 한 분이 바로 저더러 도날드 맥컬러의 저서 우리말 번역의 서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지금 바로 이번 주일 설교 준비도 못해서 안달하고 있는 저에게, 주일 다음 날인 월요일 저녁에 있을 출판기념회에서의 서평을 하라는 부탁은 제가 받아드리기에는 무리한 요청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게 어디 그 책이름이나 한 번 들어보자고 했더니, The Trivialization of God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요? trivialization이라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시시해 빠졌다'라는 말인데, 거 무슨 그런 불경한 제목이 다 있습니까? 부제목 같은 것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제는 "The Dangerous Illusion of a Manageable Deity"라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보니까 "사람들이 제멋대로 주물럭거려 만든 다루기 쉬운 신의 위험한 환영(幻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서평 내가 맡겠습니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하나님을 "시시하게 만들어 버렸다"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호소할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저를 순간적으로 사로잡았습니다. 변변찮은 것, 하찮은 것, 대수롭지 않은 것, 심지어 천박한 것을 말할 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트리비얼(trivial)"이라는 말을 씁니다. "트리비얼 마인드(trivial mind)"라고 하면 "천박한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어떤 대상을 "보잘 것 없이 만들어 버리는 것"을 "트리비얼라이즈(trivialize)"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 미국의 신학자가, 미국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트리비얼한 것", 미국 기독교인들이 "트리비얼라이즈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섬광처럼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감사주일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하고 있는데, 우리의 감사에서 과연 하나님이 얼마만큼의 큰 비중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미국 교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교인들에게도 하찮게 여김을 받고 계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책을 받아 보니까, 우리말 번역자는, 그렇지 않아도, The Trivialization of God이라는 책의 이름을 {하찮아진 하나님?} 이라고 번역했고, 부제 The Dangerous Illusion of a Manageable Deity를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위험에 대하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생각은, 곧바로, 우리에게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기 때문에 별의 별 삶을 살면서, 자신의 욕망과 방종을 합법화해주는 신들을 마구 양산해 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상들로 가득한 만신전(萬神殿)에서 무릎을 꿇고 있지 않는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밀쳐 놓고 자기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주물러서 만든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무수한 우상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그런 생각이 제 스스로도 무서웠고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감사절에는 내가 드리는 감사에 있어서, 그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감사에서 그 하나님의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하찮아진" 하나님인가, 아니면 여전히 "두려운" 하나님, 경외하는 하나님인가?
하찮은 대상에게도 우리는 감사의 뜻을 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감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물어볼까요? 우리가 신세졌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생각되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지를 물어 보는 것도 우리가 감사하고 싶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알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나로 하여금 안락을 누리게 해 주셔서, 그 분께 감사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 못했을 때는 당연히 감사하지 않겠지요? 오늘날 내가 이만큼이나마 성취하고 살 수 있도록, 혹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그 분께 감사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셨다면 당연히 감사하지 않겠지요?
아니면 좀 고상하게, 내 목적한 바를 다 이루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확실히 이해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그 분께 감사하고 싶습니까? 나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한 경험적 지식을 가지게 되어서, 그 분께 감사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기 전에, 도날드 맥컬러씨의 책에 언급했듯이, 그 하나님이 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우상이 아닌지, 나의 이해에서 비롯된 우상이 아닌지, 나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우상이 아닌지, 말하자면 내 욕망에서 나온, 내가 만든 기획물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의 모든 욕망을 채워주기로 약속하는 신은 사실은 하나님을 가장하고 있는 악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소원이나 이루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내 뜻 이루어 주실 것을 빌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그처럼 평범하게 이해되는 하찮은 존재도 아니십니다. 성서의 인물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다가도 끝내는 그 강조점이 마지막 단어 "기이(奇異)하도다!"라는 말로 끝내는데, 그 기이하다는 말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기이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성령체험 같은 것으로 완전히 파악되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의 주관적인 체험으로 객관적인 그분을 쉽게 위압해 버려서도 안된다고 그 책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내가 이용하는 신이나, 나의 체험 혹은 나의 이해의 범주에 편안히 잘 맞는 신은 나보다 더 크지도 않고 나를 죄로부터 구원하거나, 나의 예배에 영감을 불어넣거나, 내가 힘있게 봉사하게 하지 못합니다. 내 형태에 맞는 어떤 신도 결코 나를 초월하지도 못하고 진정한 하나님이 되지 못합니다. 나의 인식이라는 감옥의 창살을 걷어차고 나가지 않는 신은 하찮은 신에 불과합니다."라고 도날드 맥컬러는 말합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본문을 욥기로 잡았습니다마는 평소에는 욥기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삼가는 편입니다. 욥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설령 그러한 고통을 당했다 해도 욥기를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욥기는 흔히 죄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왜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의인의 고통을 문제 삼고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욥기의 첫 두 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주제가 아니라, 적어도 처음 두 장에서는, 사람들이 까닭 없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찬양하는 경외의 삶, 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는 사탄의 말에서 보듯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악을 멀리하거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한 필요에서 설정된 것이 욥의 고난입니다.
욥기의 서론격인 산문(散文) 부분(1-2장)에서, 욥이라는 사람을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 사탄이 힘 겨루기를 하는 설전(舌戰)의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주장보다는 사탄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게 들립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고, 욥이 바로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오히려 그것이 더 참된 믿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사탄의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반드시 어떤 보상을 바라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 생활을 하고, 그 보상을 잃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 욥은 하루에 그 많던 재산을 다 잃고, 일곱 아들과 세 딸 곧 열 자녀마저 다 여의고, 슬픔을 못 이겨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기 1:21).

그러나 3장 이하 27장까지만 보더라도 실제로 욥은 고난을 받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부당함을 하나님께 줄기차게 항변하기는 해도,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줄곧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합니다. 그렇게 의로운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당한 처사로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재판을 여신다면 욥 자신의 무죄가 증명될 것인데, 하나님은 그 재판마저 기피하시니, 도무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길이 없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중재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변호해 줄 것을 바랍니다.
욥기의 독자들은 욥이 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하나님과 사탄의 밀약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하나님의 그 계획이 숨겨져 있습니다. 욥기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와 사건의 성격상 하나님과 사탄의 밀약은 욥에게 숨겨져 있어야 욥기에서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와 사건이 가능해집니다. 욥이 하나님의 비밀을 미리 다 알고 있다면, 욥이 드라마의 대본을 미리 다 읽고 그 내용을 다 알고 있다면, 그는 다만 고통을 받는 자의 불행한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 불과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토록 믿고 있는 욥 자신의 경건한 삶과 참 지혜를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욥이 비록 하나님과 사탄의 밀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여도, 독자들은 고난 당하는 욥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의 승리를 자랑할 기회나 기미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라는 사람을 참으로 잘 보셨습니다. 욥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끝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지혜로운 자의 삶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욥은 끝내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기 1:21)라고 한 자신의 믿음을 지킵니다. 욥의 믿음을 지켜준 것은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욥의 하나님 경외가 그로 하여금 악을 멀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 그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 번 감사절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 하는 것 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악을 멀리하며 살아 왔는가를 살피는 계기를 삼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악을 멀리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은 "하찮은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찮아진 하나님들에게서 떠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우상 파괴자"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의 하나님을 뵙는 일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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