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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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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강태용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욥은 갑자기 자기 앞에 닥쳐온 재난을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잃었고 끝내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저주의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욥은 정말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시련을 잘 참아내면서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욥을 축복하시어 전보다 갑절이나 넘는 많은 재산을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주셔서 행복한 삶을 오래오래 살게 해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 평생을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인적, 가정적, 지역적 또는 국가적 민족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기는 많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60년 전 러시아 땅 연해주에서 자리잡고 살던 우리 한민족 동포들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가진 것 모두를 빼앗기고 황량한 벌판에 버려졌습니다. 그 사건은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저질렀던 만행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민족사에도 러시아 민족이 참혹하게 당했던 고난의 시기는 있었습니다.
10세기 이래로 키예프 러시아는 모든 우상숭배 행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 민족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러시아는 복음정신에 바탕을 두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습니다. 한 예로서 비잔틴에서 받아들인 형법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했고 어떠한 형태로든 체형을 금지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정부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 곳에 수도원과 성당이 건설되었으며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양식이 생산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여러 방면에서 전체적으로 발전했고, 안정된 시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몽골의 침략이 키예프 러시아를 폐허로 만들었고(13세기)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식민통치하에서 죽음이 그늘진 음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답게 건축되었던 성당과 건물들이 다 불타 버리고, 거리 곳곳에는 사람들의 머리들이 산처럼 쌓였고, 어떤 사람의 머리는 길가에 나뒹굴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민족은 240년이라는 긴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15세기 이후에서야 러시아는 공국이 아니라 제국으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단합하여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서 해방되었고 서방의 적들도 물리쳤습니다. 러시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부강한 나라로 발전합니다. 러시아의 재건은 그리스도교 정교회 정신이 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정교회는 하나의 종교로서 여겨지기보다는 러시아 정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여 자기들의 민족종교화, 민족문화화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과 예식서는 초기부터 러시아어(교회 슬라브어)로 번역되었고, 교리서와 신학서적들도 러시아어로 저술되었으며,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도 창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열도 대단히 높았습니다. 몽고 치하에서도 몽고인들에게 선교했고 광활한 전 국토를 복음화 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알래스카로의 선교사업은 오늘날 를 탄생시켰고 중국, 한국, 일본에도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신론자들이 정권을 쟁탈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교도권을 마비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918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성직자들을 체포, 감금, 추방, 살해하였습니다. 교회는 폐쇄되고 신학교, 수도원들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큰 성당들을 폭파하거나 그 용도를 변경하여 수영장, 공장, 체육관, 영화관, 극장으로 이용했습니다. 종교교육은 전면 금지되었고, 2∼3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하는 종교 신앙교육도 형법에 저촉되었으며,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준다는 조항은 있지만 종교 반대활동의 자유라 하는 조항을 넣어서 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초기에는 28명의 주교가 처형되었고 150명의 주교들을 한꺼번에 체포, 감금, 살해했습니다. 수녀들을 한꺼번에 2천여 명이나 학살했고 일반 성직자들 6만여 명을 체포, 추방 살해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시련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할 각오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직자를 양성해내었습니다. 또 해외에 퍼져 있던 러시아 정교회와 추방되거나 망명한 성직자들이 해외 러시아 정교회 주교회의를 조직하여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회개하도록 기도하며 활동했습니다. 해외 러시아 정교회 본부는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에 두었다가 그곳이 공산화됨으로써 독일 뮌헨으로 옮겼고 세계 2차 대전시 독·소 전쟁 이후 1949년에 미국의 뉴욕으로 옮겨서 러시아 땅 밖의 전 세계를 향하여 사목과 선교활동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은 살아남았던 고위 성직자들을 협박하여 무신론 정권을 인정하게 하고 티콘 총 대주교가 공산주의자들을 파문했던 사항을 무시하게 하여 모스크바에서 주교회의를 열고(참석주교 19명) 새 총 대주교를 뽑아서 무신론 정권의 하수인처럼 억압하였습니다. 1941년 독·소 전쟁에서 밀리던 스탈린은 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2개의 신학교 및 신학 아카데미야의 문을 열게 하고 소수의 성당과 수도원의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독·소 전쟁에서 승리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후르시쵸프)은 계속해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는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었지만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와 문명과 충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이제 또 다시 깨어지고 분할되고 헤어지는 진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러시아 CIS는 이념적 진공상태라고 표현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근 1세기동안 빼앗기고 매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신음해오다가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인 러시아 정교회의 어려운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들의 종파나 교세확장을 러시아 땅에 감행함으로써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작년 1997년에 러시아 땅 안에서 외국인들의 선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확정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러시아는 근 1세기만에 화해하여 국교를 정상화하고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파악 못한 채 파송되었던 한국인 선교사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대형 선교집회 운영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이나 발언에서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러시아 정교회는 우상숭배자들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짜르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어먹고 살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말 성경책도 없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 받은 자들은 신앙의 결단 없이 세례를 받았으므로 재 세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에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생기고 국민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한 책임은 러시아 정교회에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러시아 정교회에 맡길 수 없다. 개신교가 그들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썩었다."
이러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발언은 문화적, 문명적 충돌로 발전한 원인 중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정부로부터 이어진 한국정부에 대한 거액의 채무가 있으며, 국민경제는 어렵게 되어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고,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외국인들이 만든 기업에 들어가 고용살이를 하면서 동정을 구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초강대국이었던 자존심으로는 참아내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제정 러시아 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을 때 러시아에 차관을 요청한 바도 있었고 일본의 침략자들을 피하여 이란 수모를 겪었을 때 러시아는 우리의 보호자 행세를 하였으며 러시아 선교사들이 나진, 선봉, 청진, 원산, 서울, 문산, 일산, 부산, 마산 등 우리 나라 땅 여러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비록 과거의 이야기라 하지만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우리 나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 문화와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한·러 양국간의 상호발전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러시아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과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양국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적 국가들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와 우리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노선과 시장경제체제로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우리 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교류 협력을 증대하여 상호이익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일치 운동의 차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치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리뚜르기야'라고 하는 거룩한 성찬예배를 통해서이고, 두 번째는 수도생활을 이해함으로써 정교회 영성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일반 성당에선 매주일과 주간에 집전되고 수도원에서는 매일 집전됩니다. 리뚜르기야라는 말은 민중이 '협동으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모든 피조물-자연)과 협력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의 성제입니다. 그래서 희랍 말로 '에프하리스띠아'(유카리스트)라고도 말합니다.
리뚜르기야의 내용은 신구약 성서의 내용과 정교회 교부들의 신학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1부에서는 말씀의 전례로서 찬양과 연도 그리고 성경봉독과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은 보통 10분 내외로 합니다. 그날 봉독된 구약이나 신약성경을 복음에 비추어 해설하는 형태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설교가 끝나면 원칙적으로는 퇴장합니다. 그 후에는 세례 받은 자들만이 참석하게 되는 성찬의 전례가 집전됩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에피끌리시그'라고 하는 성령강림의 기도입니다. 집전자와 신도들, 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정교회에서는 봉헌용 빵은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사용합니다. 포도주는 붉은 색을 사용합니다. 축성된 성체·성혈(빵과 포도주)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금식을 전제로 합니다. 리뚜르기야 집전자는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제도는 부제, 사제, 주교입니다. 독신자나 기혼자의 구별 없이 성직자가 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이나 재혼을 할 수 없고 주교는 독신자 중에서 선임됩니다.
정교회 수도생활은 초대교회 때부터 발전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고 후에 비잔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비잔틴 사람들은 현세의 제국을 천국의 표상으로 착각했습니다. 공의회가 열리고 고칠 수 없는 교의가 확정되면서 공의회 결정에 불복한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제국에서 많은 성직자들은 관료화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향한 이들의 설 자리가 제국 안에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복음적 생활의 실천을 위해서 광야나 산림, 숲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덕을 많이 쌓은 은수자들의 주변에는 새로운 수도생활 지망자가 모였습니다. 보통 2∼3명 또는 3∼5명이 모여 수도생활을 하는 스케테가 여러 곳에 많이 생겼고 10명 이상 또는 수십명 이상이 모여 규칙을 정하고 기도와 노동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대형 수도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도원이 많이 생겼는데 그리스의 성 아토스 산은 수도원 국가처럼 여러 나라에서 모여와 자율적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수도자들은 고요함 중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도자들을 헤시카스트(Hesychast)들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말로 '이시하스모스'는 고요함, 침묵을 뜻합니다. 헤시카스트들은 예수의 기도를 많이 실행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짧은 기도문으로 훈련하는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 안에 머무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수도자들은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합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빛이 되라."는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기도생활을 합니다. 먼저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타볼 산에서 빛을 발하셨던 예수님을 그 제자들이 본 것처럼 말입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발하신 것처럼 수도자들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받은 자가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을 하는 중에서 빛을 보게되고 또 발하게 됩니다. 그 빛은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18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사라보의 성 세리핌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빛을 발하는 분으로 유명한 은수자였습니다. 그는 천일 동안 돌 바위 위에 선 채로 밤을 새우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도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아야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맹수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급자족하면서 은수생활을 했지만 제도교회와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 영성에 대해서 라돈쯔의 성 세르게이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3세기 몽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러시아 땅을 가꾸어 가난한 민중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면서 대수도원 운동을 전개하고 몽고침략에서 러시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창설자'라는 호칭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에서 약 100km 떨어진 성삼위 일체 대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생활을 영성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으로 잘 조화시켰습니다. 황무지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주변을 개간하고 옥토로 만들어 새로운 그리스도인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러한 수도원을 50여 개 만들었고, 그분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또 50개나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이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은 제도화된 수도원의 몸집이 커지게 되자 이런 제도를 통해 수도원들이 욕심을 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적 수도원은 농노를 부렸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또 엄청난 토지소유를 함으로써 백성들은 가난한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국가권력과 야합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규칙화하여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유파 수도자들로 불려졌습니다.
반면에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소유파 수도자들을 정면에서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구실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전례음악이나 이콘도 수도자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권력과 야합한 소유파들은 무소유파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변두리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은 바로 이렇게 상반되는 소유파와 무소유파의 공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음악이나 이콘은 하나의 신학으로 정리가 된 한편, 무소유적 수도생활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최고로 가치가 있는 신비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신·구파 이교사건은 러시아 정교회의 또 다른 영성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비잔틴으로부터 전이된 종교, 문화적 전통을 토착화하고 러시아화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비잔틴 전통을 추종하던 니콘이라는 자가 총대주교에 취임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예식을 그리스-비잔틴식으로 복고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 전례의 개혁과정에서 서구화 조짐도 있었기 때문에 니콘의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개혁파를 신파라 하고 개혁에 따르지 않은 파를 구파라 했는데, 구파는 이로 인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러시아화한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구파는 후일 성직자파와 무성직자파로 나뉘게 됩니다. 성직자파는 구파 안에서 성직자를 세우는 전통을 지켰고, 무성직자파는 성직자를 세우지 않고 평신도들로 교회를 유지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근본적 영성은 순교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이란, 비잔틴시대나 10세기 이후의 러시아의 국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피 흘려 순교할 일이 없게 되었을지라도 자신의 온 몸과 마음 모두를 주님께 내어 맡기는 삶, 희생적인 삶을 사는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는 수도생활이 있고, 비록 수도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사회생활 속에서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삶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게 됩니다. 즉 붉은 순교자, 하얀 순교자, 푸른 순교자입니다.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찢어왔던 상처를 다시 자체적으로 치유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아직 미진한 부분은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의 혹독한 박해를 피해 어머니 같은 조국의 땅을 비통하고 힘겹게 벗어나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며 정교회의 신앙을 고스란히 보전해온 와 공산주의자들과 야합했다는 욕을 먹으면서도 러시아 땅을 지켜온 그리고 간의 화합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정신문화의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외래의 다양한 종교 문화, 문명의 쇄도와 혼미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병약한 노구(老軀)로 보여지는 러시아 정교회에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다시 내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 번은 한 외국인이 어느 러시아 정교회 사제에게 "지금 러시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루시아!" 이 말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뜻입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많은 이들이 한 평생을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인적, 가정적, 지역적 또는 국가적 민족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기는 많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60년 전 러시아 땅 연해주에서 자리잡고 살던 우리 한민족 동포들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가진 것 모두를 빼앗기고 황량한 벌판에 버려졌습니다. 그 사건은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저질렀던 만행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민족사에도 러시아 민족이 참혹하게 당했던 고난의 시기는 있었습니다.
10세기 이래로 키예프 러시아는 모든 우상숭배 행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 민족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러시아는 복음정신에 바탕을 두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습니다. 한 예로서 비잔틴에서 받아들인 형법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했고 어떠한 형태로든 체형을 금지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정부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 곳에 수도원과 성당이 건설되었으며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양식이 생산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여러 방면에서 전체적으로 발전했고, 안정된 시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몽골의 침략이 키예프 러시아를 폐허로 만들었고(13세기)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식민통치하에서 죽음이 그늘진 음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답게 건축되었던 성당과 건물들이 다 불타 버리고, 거리 곳곳에는 사람들의 머리들이 산처럼 쌓였고, 어떤 사람의 머리는 길가에 나뒹굴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민족은 240년이라는 긴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15세기 이후에서야 러시아는 공국이 아니라 제국으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단합하여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서 해방되었고 서방의 적들도 물리쳤습니다. 러시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부강한 나라로 발전합니다. 러시아의 재건은 그리스도교 정교회 정신이 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정교회는 하나의 종교로서 여겨지기보다는 러시아 정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여 자기들의 민족종교화, 민족문화화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과 예식서는 초기부터 러시아어(교회 슬라브어)로 번역되었고, 교리서와 신학서적들도 러시아어로 저술되었으며,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도 창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열도 대단히 높았습니다. 몽고 치하에서도 몽고인들에게 선교했고 광활한 전 국토를 복음화 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알래스카로의 선교사업은 오늘날 를 탄생시켰고 중국, 한국, 일본에도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신론자들이 정권을 쟁탈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교도권을 마비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918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성직자들을 체포, 감금, 추방, 살해하였습니다. 교회는 폐쇄되고 신학교, 수도원들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큰 성당들을 폭파하거나 그 용도를 변경하여 수영장, 공장, 체육관, 영화관, 극장으로 이용했습니다. 종교교육은 전면 금지되었고, 2∼3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하는 종교 신앙교육도 형법에 저촉되었으며,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준다는 조항은 있지만 종교 반대활동의 자유라 하는 조항을 넣어서 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초기에는 28명의 주교가 처형되었고 150명의 주교들을 한꺼번에 체포, 감금, 살해했습니다. 수녀들을 한꺼번에 2천여 명이나 학살했고 일반 성직자들 6만여 명을 체포, 추방 살해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시련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할 각오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직자를 양성해내었습니다. 또 해외에 퍼져 있던 러시아 정교회와 추방되거나 망명한 성직자들이 해외 러시아 정교회 주교회의를 조직하여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회개하도록 기도하며 활동했습니다. 해외 러시아 정교회 본부는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에 두었다가 그곳이 공산화됨으로써 독일 뮌헨으로 옮겼고 세계 2차 대전시 독·소 전쟁 이후 1949년에 미국의 뉴욕으로 옮겨서 러시아 땅 밖의 전 세계를 향하여 사목과 선교활동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은 살아남았던 고위 성직자들을 협박하여 무신론 정권을 인정하게 하고 티콘 총 대주교가 공산주의자들을 파문했던 사항을 무시하게 하여 모스크바에서 주교회의를 열고(참석주교 19명) 새 총 대주교를 뽑아서 무신론 정권의 하수인처럼 억압하였습니다. 1941년 독·소 전쟁에서 밀리던 스탈린은 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2개의 신학교 및 신학 아카데미야의 문을 열게 하고 소수의 성당과 수도원의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독·소 전쟁에서 승리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후르시쵸프)은 계속해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는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었지만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와 문명과 충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이제 또 다시 깨어지고 분할되고 헤어지는 진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러시아 CIS는 이념적 진공상태라고 표현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근 1세기동안 빼앗기고 매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신음해오다가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인 러시아 정교회의 어려운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들의 종파나 교세확장을 러시아 땅에 감행함으로써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작년 1997년에 러시아 땅 안에서 외국인들의 선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확정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러시아는 근 1세기만에 화해하여 국교를 정상화하고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파악 못한 채 파송되었던 한국인 선교사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대형 선교집회 운영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이나 발언에서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러시아 정교회는 우상숭배자들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짜르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어먹고 살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말 성경책도 없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 받은 자들은 신앙의 결단 없이 세례를 받았으므로 재 세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에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생기고 국민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한 책임은 러시아 정교회에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러시아 정교회에 맡길 수 없다. 개신교가 그들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썩었다."
이러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발언은 문화적, 문명적 충돌로 발전한 원인 중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정부로부터 이어진 한국정부에 대한 거액의 채무가 있으며, 국민경제는 어렵게 되어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고,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외국인들이 만든 기업에 들어가 고용살이를 하면서 동정을 구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초강대국이었던 자존심으로는 참아내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제정 러시아 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을 때 러시아에 차관을 요청한 바도 있었고 일본의 침략자들을 피하여 이란 수모를 겪었을 때 러시아는 우리의 보호자 행세를 하였으며 러시아 선교사들이 나진, 선봉, 청진, 원산, 서울, 문산, 일산, 부산, 마산 등 우리 나라 땅 여러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비록 과거의 이야기라 하지만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우리 나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 문화와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한·러 양국간의 상호발전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러시아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과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양국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적 국가들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와 우리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노선과 시장경제체제로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우리 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교류 협력을 증대하여 상호이익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일치 운동의 차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치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리뚜르기야'라고 하는 거룩한 성찬예배를 통해서이고, 두 번째는 수도생활을 이해함으로써 정교회 영성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일반 성당에선 매주일과 주간에 집전되고 수도원에서는 매일 집전됩니다. 리뚜르기야라는 말은 민중이 '협동으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모든 피조물-자연)과 협력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의 성제입니다. 그래서 희랍 말로 '에프하리스띠아'(유카리스트)라고도 말합니다.
리뚜르기야의 내용은 신구약 성서의 내용과 정교회 교부들의 신학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1부에서는 말씀의 전례로서 찬양과 연도 그리고 성경봉독과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은 보통 10분 내외로 합니다. 그날 봉독된 구약이나 신약성경을 복음에 비추어 해설하는 형태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설교가 끝나면 원칙적으로는 퇴장합니다. 그 후에는 세례 받은 자들만이 참석하게 되는 성찬의 전례가 집전됩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에피끌리시그'라고 하는 성령강림의 기도입니다. 집전자와 신도들, 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정교회에서는 봉헌용 빵은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사용합니다. 포도주는 붉은 색을 사용합니다. 축성된 성체·성혈(빵과 포도주)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금식을 전제로 합니다. 리뚜르기야 집전자는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제도는 부제, 사제, 주교입니다. 독신자나 기혼자의 구별 없이 성직자가 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이나 재혼을 할 수 없고 주교는 독신자 중에서 선임됩니다.
정교회 수도생활은 초대교회 때부터 발전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고 후에 비잔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비잔틴 사람들은 현세의 제국을 천국의 표상으로 착각했습니다. 공의회가 열리고 고칠 수 없는 교의가 확정되면서 공의회 결정에 불복한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제국에서 많은 성직자들은 관료화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향한 이들의 설 자리가 제국 안에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복음적 생활의 실천을 위해서 광야나 산림, 숲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덕을 많이 쌓은 은수자들의 주변에는 새로운 수도생활 지망자가 모였습니다. 보통 2∼3명 또는 3∼5명이 모여 수도생활을 하는 스케테가 여러 곳에 많이 생겼고 10명 이상 또는 수십명 이상이 모여 규칙을 정하고 기도와 노동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대형 수도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도원이 많이 생겼는데 그리스의 성 아토스 산은 수도원 국가처럼 여러 나라에서 모여와 자율적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수도자들은 고요함 중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도자들을 헤시카스트(Hesychast)들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말로 '이시하스모스'는 고요함, 침묵을 뜻합니다. 헤시카스트들은 예수의 기도를 많이 실행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짧은 기도문으로 훈련하는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 안에 머무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수도자들은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합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빛이 되라."는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기도생활을 합니다. 먼저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타볼 산에서 빛을 발하셨던 예수님을 그 제자들이 본 것처럼 말입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발하신 것처럼 수도자들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받은 자가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을 하는 중에서 빛을 보게되고 또 발하게 됩니다. 그 빛은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18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사라보의 성 세리핌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빛을 발하는 분으로 유명한 은수자였습니다. 그는 천일 동안 돌 바위 위에 선 채로 밤을 새우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도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아야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맹수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급자족하면서 은수생활을 했지만 제도교회와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 영성에 대해서 라돈쯔의 성 세르게이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3세기 몽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러시아 땅을 가꾸어 가난한 민중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면서 대수도원 운동을 전개하고 몽고침략에서 러시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창설자'라는 호칭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에서 약 100km 떨어진 성삼위 일체 대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생활을 영성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으로 잘 조화시켰습니다. 황무지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주변을 개간하고 옥토로 만들어 새로운 그리스도인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러한 수도원을 50여 개 만들었고, 그분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또 50개나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이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은 제도화된 수도원의 몸집이 커지게 되자 이런 제도를 통해 수도원들이 욕심을 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적 수도원은 농노를 부렸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또 엄청난 토지소유를 함으로써 백성들은 가난한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국가권력과 야합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규칙화하여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유파 수도자들로 불려졌습니다.
반면에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소유파 수도자들을 정면에서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구실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전례음악이나 이콘도 수도자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권력과 야합한 소유파들은 무소유파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변두리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은 바로 이렇게 상반되는 소유파와 무소유파의 공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음악이나 이콘은 하나의 신학으로 정리가 된 한편, 무소유적 수도생활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최고로 가치가 있는 신비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신·구파 이교사건은 러시아 정교회의 또 다른 영성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비잔틴으로부터 전이된 종교, 문화적 전통을 토착화하고 러시아화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비잔틴 전통을 추종하던 니콘이라는 자가 총대주교에 취임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예식을 그리스-비잔틴식으로 복고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 전례의 개혁과정에서 서구화 조짐도 있었기 때문에 니콘의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개혁파를 신파라 하고 개혁에 따르지 않은 파를 구파라 했는데, 구파는 이로 인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러시아화한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구파는 후일 성직자파와 무성직자파로 나뉘게 됩니다. 성직자파는 구파 안에서 성직자를 세우는 전통을 지켰고, 무성직자파는 성직자를 세우지 않고 평신도들로 교회를 유지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근본적 영성은 순교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이란, 비잔틴시대나 10세기 이후의 러시아의 국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피 흘려 순교할 일이 없게 되었을지라도 자신의 온 몸과 마음 모두를 주님께 내어 맡기는 삶, 희생적인 삶을 사는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는 수도생활이 있고, 비록 수도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사회생활 속에서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삶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게 됩니다. 즉 붉은 순교자, 하얀 순교자, 푸른 순교자입니다.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찢어왔던 상처를 다시 자체적으로 치유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아직 미진한 부분은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의 혹독한 박해를 피해 어머니 같은 조국의 땅을 비통하고 힘겹게 벗어나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며 정교회의 신앙을 고스란히 보전해온 와 공산주의자들과 야합했다는 욕을 먹으면서도 러시아 땅을 지켜온 그리고 간의 화합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정신문화의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외래의 다양한 종교 문화, 문명의 쇄도와 혼미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병약한 노구(老軀)로 보여지는 러시아 정교회에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다시 내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 번은 한 외국인이 어느 러시아 정교회 사제에게 "지금 러시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루시아!" 이 말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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