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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근본

시편 길희성............... 조회 수 2071 추천 수 0 2007.11.19 15:07:26
.........
성경본문 : 시111:1-10 
설교자 : 길희성 교수 
참고 : 1993.1.17 새길교회 
나이가 들면서 산다는 것이 점점 두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철이 없으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살면서 인생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깨닫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의식을 못합니다.
인생이란 돌이켜 보면 위기의 연속입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청년기에는 힘도 있고 정열도 있고 용기도 있으니까 현재의 역경도 별로 두렵지 않고 미래도 염려보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나이를 세면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삶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정신적 고민과 방황도 많았고 끊임없는 인간관계의 갈등과 마찰로 속이 상한적도 한두 번이 아니며 경제적인 우려, 취직걱정, 실업의 두려움, 자식걱정, 사회적 격동 등 수 없는 파고를 넘어서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기적과 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살아 온 날보다 적은 시점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감정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님의 크신 은혜라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이고 앞으로 넘어야 할 파고가 얼마나 많고 클까 두려운 마음도 생기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시련과 좌절, 유혹과 위험이 그치지 않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생긴 것이 구약성서의 이른바 지혜의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전도서, 욥기, 시편 등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중심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년모임에 가게되면 누구나 덕담이라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덕담은 주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 풍부한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인생의 지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 의하면 가장 성공적인 삶은 바로 지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문학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생의 지혜를 속담이나 격언과 같은 형태로 모아 놓은 것입니다.
언제 읽어보아도 항시 인생의 도움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혜는 지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지혜롭지 못해서 자기 인생을 망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지식은 책을 통해서 누구나 습득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혜는 노력만으로는 그렇게 쉽게 얻어지지가 않습니다. 지식은 인격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다스리는 그런 힘입니다. 지식은 결코 지혜를 낳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을 인도해서 지식을 어디에다 쓰고 어떻게 쓸까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지식은 인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만 지혜는 언제나 인생을 살리기만 합니다. 지혜 없는 지식은 위험하며 맹목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지만 지혜는 인간을 겸손하게 합니다. 지혜는 또 우리가 말하는 꾀하고도 다른 것입니다. 선악이나 시비의 관계없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추구하는, 원칙 없이 타협하고, 배신을 일 삼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를 도모하는 이른바 능한 처세술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꾀를 부리는 사람은 결국 자기 꾀에 넘어가서 망하게 됩니다. 꾀는 자기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 가지만 지혜는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줍니다. 동시에 자신의 선악시비에 대한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는 겸손도 동시에 줍니다. 지혜는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꾀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적인 인생의 필수적인 지혜는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고 은총인 것입니다.
잠언(2장 6절)에 보면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나니" 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지혜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가요?
시편이나 잠언에서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다, 지혜의 근본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게 되면 지혜의 시초다, 시작(beginning)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는가요?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편과 잠언의 기자는 두려움, 경외라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인생을 내신 그리고 우주와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비로소 인생의 지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초월적인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인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지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초월적 관심이라는 것은 세계와 인생이 또 세계와 자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초월적 관점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데서 인간은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세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유와 여유가 생기고 바로 이러한 자유와 여유로부터 인간은 지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 개념 가운데 가장 위대한 개념은 바로 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일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에게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사는 사람과 이 하나님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천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관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볼 때 이 세계가 전부이고 자기 자신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내가 전부가 아니고,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관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묘한 작용이고 위대한 권능인 것입니다.
이런 초월적인 지혜, 초월적인 관심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인식을 가지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철저한 자기 인식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친구. 동료들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게 되고 조금 자라서는 이성을 사귀면서, 부부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를 인식하게 되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동료들을 통한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적으로 볼 때 또 신앙적으로 볼 때 이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은 무어라 해도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절대적 타자 앞에 서 볼 때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 인생의 한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한계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요 하나는 죄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 것인가,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그 것은 사실 그리스의 Delphi 신전에 쓰여 있는 말이라 합니다. 그 원래 뜻은 소크라테스적인 자기 자신을 알라는 뜻이 아니고 너 자신을 알라 함은 네가 인간임을 알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신은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이라 할 때 그 말은 인간은 꼭 죽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과 인간을 구별해 주는 가장 확실한 것은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어에 보게 되면 인간이란 말을 시적으로 표현할 때 mortal이라 합니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들은 immortal이라고 합니다. 불멸의 존재,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실로 자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인생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우리 성서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어느 날 자기영혼을 하나님께서 취해갈지 모르고 세상에 취해서 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데서 오는 또 하나의 지혜는 자기가 참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사회적인 기준으로만 보게 되면 내가 왜 죄인입니까? 왜 교회에 나오면 죄인이란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할까요? 사실 잘 생각해 보면 특별히 무슨 범법을 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해악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죄인인가요? 세속적인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자기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지 않은 사람은 죄라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 이것은 기독교 신앙만이 주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유한성, 자기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느끼는 데서 인간은 겸손해지고 여기서부터 지혜가 싹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앎으로 인해서 세계와 자기 자신을 초월적으로 보는 관점, 거기서부터 오는 자유. 여유, 여기서부터 오는 지혜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데서 오는 겸손 이것이 지혜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인생을 경건하게 삽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겸손하고 참되게 사는 지혜를 주십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절대화하지도 않고 사는 여유를 줍니다. 또 성공에 오만하지도 않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너무 경망하게 가볍게 우습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의 자비와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그저 인생의 순간 순간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삽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이 지녀야할 태도를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는 데 그 첫째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두려워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을 사모한다, 갈망한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편 42편에 나오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오 하나님 당신을 찾나이다"하는 고전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는다"하는 그런 믿음의 강조도 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에 나오는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을 마음과 심성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는 얘기는 아주 고전적인 성서의 구절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에 보게 되면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계명 가운데 무엇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하나님을 온 마음과 심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둘째가는 계명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이후 신약성서에 오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많이 강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모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도 뺄 것이 없이 중요한 관계들입니다.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신앙생활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모하고, 갈망하고,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 모든 표현들은 모두 신앙의 일상적인 경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도 있고, 안타깝게 목말라 찾아 헤매는 사모와 갈망이 타오를 때도 있으며, 또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믿고 안심과 평안을 맛보기도 하며, 또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불타 넘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외,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는 못한다해도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는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첫째 태도이며, 의무이며 피조물된 우리 인간의 지혜의 근본이고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간단히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는 존재다"하는 이 간단명료한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요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영화롭게 하며, 인간은 자기의 분수를 알고 자기의 한계를 깨달아 경건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생은 주어진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자들이 얘기하듯이 인간은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완성은 자기가 자기 뜻대로 자기 인생을 설계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내신 분,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이게끔 하는데 우리 인생의 완성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는 말은 우리는 땅에 있다는 말이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뜻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경외케 하소서 하는 얘기나 똑같은 얘기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것이 우리 인생이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 본연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실현, 자아완성이라는 것을 금과 옥조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역설적인 자기실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표를 자기 자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둘 때 진정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인생의 길입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 뜻을 위해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인생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뿐입니다. 아마 인생이 두렵다는 마음 속에는 암암리에 하나님이 두렵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함부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조심스럽게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체험을 두 가지로 흔히 나눌 수 있습니다. 일이 잘 될 때가 있습니다. 일이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끈임 없이 찾아오고 위기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 때는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고,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굳건한 믿음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이 잘되고 순탄할 때, 별 문제 없이 모든 것이 굴러갈 때, 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때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로는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누구든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는 교만의 죄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알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죄, 이것이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고만장해서 욕심에 욕심을 더하고 못하는 짓이 없다가 결국은 거꾸러지는 것이 이런 교만한 자의 운명입니다. 인생을 망치고 그르치는 것은 재난이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잘되고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인생의 위기는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의 관심사 밖으로 밀어버릴 때 인생의 참 위기는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생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시당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외면당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 인생을 찾아 오셔서 우리 인생의 문을 두드리고 나아가서 우리 인생의 중심부에 앉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보면 어느 면으로 보나 성공했다고 보이는 사람들이 인생의 정점에서 갑자기 인생을 그르치고 패가 망신하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최근 정치인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몇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어디서 옵니까? 결국 세계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데서 옵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과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 그리고 세상과 인생을 초월적 관점에서 보는 여유와 자유의 느긋함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을 그르칩니다. 아마도 요즈음 자기 인생의 최고 절정기에 도달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두 말할 필요 없이 미국과 우리나라의 두 대통령 당선자들일 것입니다. 평생 꿈꾸던 권력을 손에 쥐고서 요즈음 한참 사는 맛이 나리라 추측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요,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 겸손의 지혜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끝마다 위정자들을 위해서 권력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해달라는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지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혜 없는 자에게 막강한 권력은 맡기는 것은 미친 사람에게 칼을 주는 것이고 어린아이에게 불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섰다 하면 넘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이 위정자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好事多魔란 말이 있고 좀 다른 뜻이지만 다 된 밥에 재 뿌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모두 인생은 성공 후가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격언들입니다. 저는 미국 이민교회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몇 안 되는 교인들을 이끌고 어렵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는 참으로 큰 교회로 일구어 목회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뜻하지 않은 스캔들이나, 과욕을 부리거나, 봉급을 더 달라는 등 이런 이유로 다 잘된 목회를 그르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존경받는 교육자들이 제자들과의 스캔들이 있어 교직을 떠나는 일도 보았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이 과욕 때문에 무지한 사업확장으로 쇠고랑을 차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보아 왔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93년이라는 한 해가 우리에게 또 주어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앞길에 무엇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어떤 기회가 주어지고 어떤 위기가 닥쳐올지, 어떤 유혹이 엄습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
1993.1.17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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