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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기도

시편 길희성............... 조회 수 2217 추천 수 0 2007.12.22 0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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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02장 
설교자 : 길희성 교수 
참고 : 새길교회 
인간이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지만 동시에 저주요 괴로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단순히 존재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낳습니다. 이 괴리로 인해 인간은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의식하는 대자적 존재로 되어 자기를 대상화하며 자기 소외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잘 하던 일도 의식을 하는 순간 망쳐버리는 수가 있음을 종종 체험합니다. 어떤 활동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활동을 의식적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볼링, 연극, 음악 연주 등). 사람이 의식이 없이 즉자적으로만 산다면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며, 이 현재도 의식된 현재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없으면 과거의 기억도 없고 미래의 계획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쌓인 원한도 있을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인간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물들은 현재적 고통, 즉자적 고통만이 있을 뿐,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서 오는 고통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현재의 고통도 바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고통을 그냥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하기도 하며 행복했던 과거와 견주어 보면서 고통을 씹어보기도 하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가 원망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의식이란 것이 저주만은 아닙니다. 의식이 있기 때문에 행복감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한 순간을 음미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더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은 아마도 동물들이 느끼는 즉자적인 만족감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입니다. 인간은 즉자적 행복감 이외에 대자적 행복감까지 느낌으로써 행복감이 배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에 자기가 하는 여러 활동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 활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반성적 숙고를 함으로써 자기 행동의 의미를 물으며 철학적 사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로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고민을 더해주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의식적으로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며, 이것은 인간만의 초월적 특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자기 존재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물으며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의식하면서 영원을 그리워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여타의 존재들처럼 시간의 지배를 받는 무상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시간을 의식하기에 동시에 영원을 사모합니다. 인간도 여타의 존재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 자기가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기에 바로 그 순간 영원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이 영원을 의식하고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인간이 생각한다고 그것이 다 가능하거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이 자기 존재의 존재성을 의식하며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을 말해 주며 이것은 이미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02편은 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 앞에 임박한 죽음을 뚜렷이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아뢰는 한 영혼의 간절한 기도문입니다. 그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11절까지는 시인이 자기의 고통을 탄식하면서 이 고통에서부터 건져주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이며, 12-22절은 하나님께서 시온, 곧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뭇 나라들과 임금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빛나며 고통받는 사람들, 갇힌 자들, 죽게 된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를 희망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가이며, 마지막 23-28절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너무 일찍 찾아 온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세계와 인생의 변함 없는 기초가 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어떤 병으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몸과 마음 모두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임은 분명합니다:
아, 내 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뼈는 화석처럼 새까맣게 타 버렸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서, 말라 버렸습니다. 신음에 지쳐서, 나는 뼈와 살이 달라붙었습니다....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 가는 풀과 같습니다(3-11절).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낙심 중에서도 이 시인은 자신의 아픔만을 생각하지 않고 시온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모든 희망을 포기해버리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이 비참하다 해서 인생 자체를 혹은 역사 자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나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죽음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두 종류의 허무주의적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 죽으면 그만인데 죽기 전에 실컷 즐기자는 태도입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다 동원해서 최대한으로 즐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계속해서 더 벌고 남은 것은 또 자식들한테도 물려주고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번 것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얼마 안 있어서 죽을 것들이 왜 저렇게 권력과 금력에 집착하는가 하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하면서 비웃습니다. 이미 자기가 쓸 수 있는 것 이상의 재산을 모아 놓고도 더 벌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인생을 향해 이들은 말하기를 적당히 벌어서 만족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상책이라고 합니다. 내일 죽을 것들이 무얼 하겠다고 저렇게 야단법석을 떠는가 하고 자기 딴에는 인생을 관조적으로 지혜롭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 하나의 허무주의적 태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최대한으로 즐기자는 태도나 적당히 벌어 자족하며 살자는 태도나 다 똑 같이 허무주의입니다. 우선 이들은 인생이란 나 개인이 죽으면 그만이고 죽음 이후에, 혹은 죽음을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란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극도의 개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 즐겁게 사는 것이 상책인데 다만 이 즐겁게 사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맹목적이다시피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면서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누리겠다는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은 어리석은 짓으로서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도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들은 모두 인생에는 즐기는 일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이 즐김은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기에 죽음 이후에 아무런 인생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주의적 태도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회와 역사, 혹은 세계와 인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두고서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죽음이 오던 말던 삶 그 자체가 의미 있으며 삶을 위한 행동 그 자체가 진정으로 값지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시편 102편의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는 무너진 시온이 다시 세워지고 짓밟힌 땅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찬양이 드높이 울려 퍼지는 날이 오기를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셔서 시온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때가 왔습니다. 시온에 은혜를 베푸실 때가 왔습니다. 주의 종들은 시온의 돌들만 보아도 즐겁습니다. 그 티끌에도 정을 느낍니다. 뭇 나라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이 땅의 왕들이 주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주께서 시온을 다시 세우시고, 그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입니다. 버림받았던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시온에서 주의 이름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울려 퍼질 때에, 뭇 백성이 다 모이고, 뭇 나라가 함께 주님을 섬길 것이다(13-22절).

그에게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한 꺼지지 않는 정열이 있었고, 시온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루살렘의 돌만 보아도 즐겁고 티끌에도 정을 느낀다고 했겠습니까. '티끌에도 정을 느낀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는 그 흙먼지에도 연민(pity)을 느낀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자신의 슬픔을 잠시 잊고 이 시인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 속에서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 오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민족에 대한 사랑,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에 이 시인은 자기 목전에 닥쳐온 죽음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자신의 가련한 운명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중년기에, 한창 나이에 자기를 괴롭히고 데려가시고자 하는 이해 못할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주의 햇수는 대대로 무궁합니다"라고 간절히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년에서 맞는 죽음의 비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년과 청년기는 준비기로서 아직 인생을 살았다고 하기 어렵고, 노년기는 황혼기로서 인생을 이미 살은 것이기에 죽음이 그리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년기는 인생의 황금기로서 이제야말로 인생을 본격적으로 살려는 찰나이기에 이 때에 맞는 죽음은 실로 비극적입니다. 우리나라의 40대 사망률이 세계 최고라고들 합니다만 이 시인은 한창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감동적인 시와 기도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절한 기도가 어찌 중년만의 기도이겠습니까? 모든 죽음은 비극적이며 죽음은 우리가 사는 순간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움 속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시인은 이번에는 아무런 원망이나 소망도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자기 존재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의식하면 할 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와는 정반대 되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위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 펼치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그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주의 종들의 자녀는 평안하게 살 것이며, 그 자손도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25-28절).

이 시편 기자의 시온을 위한 기도는 오늘 12월을 맞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2월은 무엇보다도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하나님의 구원을 억압받고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져다주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올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기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습니다. 독재와 억압의 사슬에서 고통 당했던 이 땅의 백성들이 올린 간절한 기도가 이제 막 이루어지려는 찰나를 우리는 맞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마침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이 입증되려는 역사의 순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성탄절이 와도 우리에게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우리에게는 참다운 기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포기하지는 안았지만 우리의 웃음은 불가피하게 억지 웃음, 쓴웃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가 어딘가 공허하게만 들렸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죽게 된 사람들을 풀어놓으시는"(20절)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정의가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올 성탄절은 참으로 의미 있는 성탄절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또 다시 좌절될 수도 있고 우리는 또 다시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거기에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특별법을 만들고 과거를 청산한다고 죄인인 인간들이 창출하는 역사가 정말로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번만이라도 일그러지고 얼룩진 우리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하나의 확실한 징표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역사가 완성되거나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의 과거청산이란 결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역사를 청산하고도 또 다시 죄악의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며 탐욕의 역사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며 공의로우신 하나님 스스로 통치하시는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종말적 구원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월은 메시아의 강림과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희망과 기쁨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한 해를 마감하면서 지나간 한 해를 성찰해 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의 무상함, 시간의 덧없음을 의식하는 때입니다. 한 해가 시작될 때는 무언가 해야할 일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보람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나 자신의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을 느끼면서 나약하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습을 자각하는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 민족과 세계도 중요하고 정의와 평화도 소중하지만, 한 개인의 종말은 여전히 비극적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아무런 의식도 없는 우주보다 위대한 존재라 하지만(파스칼) 한 순간 숨이 그치면 우리 인생은 대양에 이는 물거품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인간이란 참으로 비극적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와 삶의 모든 의미를 앗아가는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의 힘 앞에서 전적인 무력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도 우리가 누리는 영화도 잠깐 있다 사라질 아침 안개와 같다고 성서기자는 말합니다(시편 103:15-18).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이건 떠나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이 되면 우리에게는 착잡한 마음이 드는 법입니다. 한 해가 다 가고 쓸쓸하게 붙어 있는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노라면 우리 인생의 달력도 얼마 남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러면서도 12월은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와 축제의 시기이며, 기다림과 기쁨의 계절입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경험했던 성탄의 설렘이 우리 어른들에게도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아니 연말 연시가 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약간 어린아이들처럼 마음이 들뜨며 가벼운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문득 어디선가 들려 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이 설레기도 합니다. 하지만 속절없이 지나가는 한 해를 지켜보면서 나 자신에게 남은 세월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내게 과연 또 한 해가 주어지려나, 새로운 해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12월을 맞는 우리들도 시편 102편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주의 햇수는 대대로 무궁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연약함을 기억하면서 "그 옛날 주님께서는..."(25-28절)라고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월의 우리의 기도는 한 편으로는 12 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강간당한 우리의 역사, 쓰라린 상처를 입은 우리의 과거가 진정으로 치유 받아 이 땅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며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만천하에 공포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의 주,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가져 올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강림절에 우리들의 시온을 향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드릴 또 하나의 기도는 주님의 구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란한 시온의 아침을 맞기 전에, 그리고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너무 일찍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하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내면서, 그리고 또 다른 한해가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의 주시요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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