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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는 기쁨

시편 민영진 목사............... 조회 수 2205 추천 수 0 2008.02.26 23: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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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19:105 
설교자 : 민영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199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부설 공동체성서연구원이 "한국기독교인의 성서관과 성서적 실천에 관한 조사연구"를 한 바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교인의 성서 통독에 대한 조사보고서의 통계를 보면 대단히 희망적입니다. 신구약전서를 두번 이상 읽었다는 교인이 46.7%, 신구약전서를 한번씩 읽었다는 교인이 25.6%, 신약만 한번 읽었다는 교인이 7.5%, 구약만 한번 읽었다는 교인이 0.9%였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리 나라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성서를 잘 읽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사의 문제점은, 설문을 만든 쪽의 의도가 설문에 대답하는 이들 쪽에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문제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설문을 만든 쪽에서는 이 설문지가 여러 계층의 교인들에게 골고루 배부되고 그리하여 여러 연령층과 여러 직업 층의 의견이 골고루 반영되기를 바랐으나, 설문지를 배포한 목회자들은 마치 이것이 무슨 성서시험이나 된다고 생각했는지, 교인들 중의 정예들을 뽑아서 설문에 응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통계는 한국교회 전반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한국교회의 열성적인 교인들의 성서통독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체 교인들을 다 고려해 보면, 실제로 성서를 통독한 교인들의 수는 퍽 저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전 세계교회는 성서주일을 지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으로부터 97년 전인 1899년 12월에 첫번 성서주일을 지킨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들은 성서주일을 맞이하면, 한편으로는 성서 보급 운동을 위한 헌금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나 강연을 통하여 성서의 유래라든가 번역의 역사라든가 성서를 공부해야할 까닭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관심사들에 관하여 배우게 됩니다.
저는 우리 나라 교인들 중에 어떤 교인들이 성서를 잘 읽지 않는지, 성서를 읽지 않는 이들이 어떤 이유로 성서를 잘 읽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성서를 읽는 재미를 부칠는지 제나름대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서를 읽지 않는 이들의 유형을 살펴보니 한 대여섯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성서를 꼭 읽어야만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설교나 잘 들으면 되는 것이지, 어디 그뿐이냐, 교회에서 성경공부라고 하는 것도 하는데, 그러한 기회마다 성서의 내용을 조금씩 들으면 교인 구실 하는데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을 터이고, 더욱이 옛날 천주교에서는 일반 신도들에게 성서를 함부로 읽어서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하여 개인들이 사적으로 성서 읽는 것을 금하기도 했다는데, 솔직히 말해, 읽어도 무슨 말이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성경을, 어떻게 따분하게 읽고 앉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를 읽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성서를 안 읽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러한 독자들이 성서를 기피하는 데에는 성서 자체에도 책임은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말로 번역되어 있다든지, 구어체로 번역이 되어 있다든지, 어쨌든 그들이 쓰는 언어와는 동떨어진 언어로 번역되어 있어서 읽으려해도 읽기가 사실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보는 것입니다.
2) 교인들 중에는 성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기회가 생기면 읽고, 또 읽을 기회가 없으면 없는 대로 읽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교인들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이 성서를 읽는 기회란 고작해야 예배시간에 누가 성서를 낭독하면 자기 성서를 펴서 함께 읽을 때 뿐입니다.
3) 성서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보거나 심지어는 반대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대로 받아들일만한 종교인데 성서 안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는 맞지도 아니한 미신적인 신앙, 교육적으로 볼 때 건전한 윤리에 반하는 그릇된 교훈도 들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의식적으로 성서를 읽지 않는 이들입니다. 성서는 신앙을 체계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자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일반 신도가 그냥 성서를 읽다가는 오히려 신앙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는 안 읽어도 성서의 진수를 뽑아 체계적으로 진술한 기독교에 관한 책이나 신학 책은 읽습니다. 신학생 중에 이런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4) 성서를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읽을거리가 많아서 미처 성서까지는 읽지 못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독자들은, 기독교가 세계 굴지의 종교인데, 성서는 바로 그 종교의 경전인데, 거기에는 해로운 말보다는 이로운 말이 많을 것이고, 들어서 유익한 말이 많이 있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서를 읽을거리의 우선 순위에서 일간신문이나 주간 잡지나 월간지보다 못한 맨 꼴찌에 두기 때문에, 우선 읽을거리를 먼저 읽다가 보면 성서를 읽을 시간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의 가치를 인정은 하면서도 성서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읽을거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5) 독서 자체에 익숙해 있지 않아서 성서를 읽지 않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는 즐겨서 봅니다마는 인쇄 매체로 된 것은 신문이나 잡지나 소설도 안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독서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정보를 얻거나 즐기는 데 있어서 그 매체를 달리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를 읽지 않는다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이해 받아야 할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성서를 읽히고 싶어한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매체 곧 TV, PC 등으로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6) 기독교인으로서 성서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혹은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너무나도 바쁘게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성서를 못 읽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신문도 텔레비전도 안보는 사람들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저 교회에 나와서 성서에 근거한 설교를 듣는 것이 성서와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성서를 멀리하는 이들을 전들 어떻게 성서를 읽도록 설득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러한 사람들이 성서를 기피하는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까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을 돌려서 성서와 관련된 또 다른 국면을 보면, 성서는 다른 책과는 달리, 몇 가지 세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1) 성서만큼 많이 보급된 책도 없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 나라 안에서 성서가 보급된 통계를 보면, 일반 출판사에서 보급하는 성서 말고도, 대한성서공회가 보급한 것만 해도 해마다 1백만 권이 넘습니다. 해마다 1백만 권에서 2백만 권까지 보급되는 책은 성서 외에는 없습니다. 나라마다는 달라도 세계적으로 보면 성서는 영원한 베스트 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 성서만큼 전 인류가 쓰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책도 없습니다. 작년 말 통계로 2,123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지금 계속되고 있는 성서번역의 진도로 보아서 아마도 21세기에는 인류가 쓰고 있는 4-5천여 개 언어가 모두 자기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 세기 안에 새로운 언어가 더 생기지 않는 한 모든 언어는 제 언어로 된 성서를 갖게 될 것입니다.
3) 성서만큼 장기간 읽히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성서가 구전 형태에서 책의 형태로 완전하게 바뀐 것은, 구약의 경우 에스라 시대라고 보고, 신약의 경우는 주 후 2세기라고 봅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읽히고 있습니다. 일반 책은 얼마만큼 읽히다가는 독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데, 혹은 지속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고전으로 남는 책들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 독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서만이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성서만큼 사랑 받는 책도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성서만큼 인류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처할 깨달음을 주는 책도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4) 성서만큼 전 인류가 그들의 석학을 총동원시켜 연구하게 하는 책도 없습니다. 한 책에 대한 연구물이 성서만큼 많은 것도 없습니다.
5) 성서만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성서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성서는 계속적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6) 성서만큼 매체를 달리하여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책도 없습니다. 구전 시대에는 구전으로, 문필 시대에는 책의 형태로, 멀티미디어 시대를 맞아서는 전자매체인 CD ROM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성서가 이런 기록을 가지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서 자체가 지닌 매력이라고 할까요, 성서 자체가 지닌 능력이라고 할까요. 성서가 사람을 이렇게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붙잡고 있는 자체의 힘은 무엇입니까? 성서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고백하는 말을 들어보면, 1)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2) 성서가 거룩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도 말합니다. 3) 성서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불행하게도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나 성서의 신비한 세계 속을 여행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도 안되고, 매력도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이러한 포괄적인 진술은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본 경험이 있거나 성서의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 본 경험이 있는 이들 끼리나 통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말,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서가 이러한 세계적 기록을 지닌 책이라면, 성서는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인류가 2천여년 이상 매달려 온 책이라면, 우리도 한번 진지하게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무시해 버릴 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성서를 이해하면 할수록 성서를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고, 성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성서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와 사랑이 서로 맞물려서, 돌고 돌수록, 곧 이 둘이 맞물려서 순환하면 할수록, 성서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사랑, 사랑과 이해가 증폭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성서의 말씀은 독자를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성서를 읽는 사람이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하며, 새로운 희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새로운 믿음을 고백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계속적으로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은 책을 만든다. 그러나 성서는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서를 다른 책들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느니, 혹은 "생명의 말씀"이라느니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역할 수 없이 절대적인 명령으로 육박해 오는 말씀이라는 뜻일 것이며, 성서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 함은 그 말씀이 솟아나는 생수처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성서와의 관계가 이쯤 되면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나더러 성서를 읽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성서를 애독하는 독자들이라면 이것이 단순한 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성서를 읽는 기쁨과 감격을 말하라면, 여러분께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입니다 마는 저는, 두서가 없긴 합니다마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성서의 여러 곳에서 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바울이라는 분의 고백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이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롬7:15-8:1). 사랑과 미움, 죄와 용서, 믿음과 의심, 절망과 희망, 탐욕과 질투, 분노와 좌절, 포기와 극기, 위로와 격려 등과 같은 나의 갈등이 여기에 그대로 모자람이 없이 다 반영되어 있습니다.
나를 반기시는 분의 초청의 음성을 듣는 것도 성서에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 이웃을 발견합니다. 형제 자매를 발견합니다. 어머니를 발견합니다(눅2:34-35). 자식이 누구인지를 발견합니다(시127:1-5). 자연을 발견합니다(창1; 호2:21-23). 하나님을 발견합니다(요3:16). 성령을 발견합니다(고전12).
성서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성서도 내게 가까이 접근해 옵니다. 그래서, 안 보이던 본문이 보입니다. 늘 보던 본문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양쪽에 날이 선 검과 같이 되어 돌 같은 내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갈 길이 보입니다. 말씀이 나를 심판합니다. 말씀이 나를 용서합니다. 목회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것도 배웁니다(고전 9). 목회자의 절망과 희망이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고전 4:8-13).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할지 배웁니다(시34; 34:11). 철없던 시절에는 성서를 읽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웠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특히, 인생을 다 살았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인생 설계도 하지 않으려 하는 유혹을 받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는, 저는 가끔 제가 이 나이에 이르렀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서는 저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보여줍니다(시31:25). 우주적 시각을 갖게 하고 우주적 전망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영원 전에 대한 저 아득한 우주의 과거를 영상하고 싶어하고, 저 머나먼 아득한 미래, 곧 우리의 인식 바깥에 있을 영원까지에 대한 비전을 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단계에서입니다.
결국 성서에서는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발견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성서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여 성서가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서 자체의 권위가 기독교로 하여금 성서를 경전으로 만들게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성서가 우리를 사로잡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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