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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시8:3 |
|---|---|
| 설교자 : | 김병종 교수 |
| 참고 : | 새길교회 |
제가 새길교회를 간다니까 제 아내가 말했습니다. 새길교회 같은 빵빵한 교회에 가서 대체 무슨 말을 전할거냐구요. 새길교회 교인들이 보통 빵빵한 분들이냐구요. 더구나 오늘 새벽 축구까지 져 놨으니 자칫하다간 욕만 먹고 내려오기 십상아니냐구요. 제발 어디서 오라고하면 예하고 덥석 간다고 대답 좀 하지말라구요. 하지만 제가 존경하는 한완상 선생님이나 형님, 누님 같으신 김용덕, 박창원, 서문자 형제 자매가 계시는 교회에서 오라고 하는데 안 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그 빵빵함이라는 문제, 좀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빵빵함이란 시쳇말로 힘이 좀 있다는 것인데 새길교회의 경우 이 힘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지식을 기반으로 한 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관심은 돈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힘세고 빵빵한 곳에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정반대로 힘이 약한 곳에 있다는 것, 한 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삶을 그 종국인 죽음과 함께 바라보고, 인생의 복락을 그 마지막인 고통과 함께 바라보며, 몸은 물론 그 영혼마저 능히 죽일 수 있는 권능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 별로 호감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빵빵하고 힘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대해 성경은 도처에서 경고하십니다. "눈이 가리웠으니 안약이나 사서 발라라"고 야유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길교회 같은 힘있는 교회가 그 힘을 빼고 못 배운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자 그들 편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간파한 놀라운 지혜입니다.
사실 사람은 힘이 좀 있으면 그 힘이 어깨부터 들어갑니다. 아파트 평수만 좀 늘려가도 교만해져서, 주부들 중엔 복장을 함부로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수위들을 종처럼 부리려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안에서나 입기에 좋을 운동복 따위를 입고 아파트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것, 눈썰미를 찌푸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창조하셨는데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은 그 위대한 창조에 대한 모독입니다.
사람은 학교만 좀 좋은 곳을 나와도 들어내고 싶어합니다. 옛날엔 여름에 바다에서 러닝 셔츠에까지 서울대학 뺏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교수아파트에는 유리창, 자동차, 심지어 우산대에까지 하바드 마크를 부치고 다녔던 하바드 출신 교수도 있었지요.
이런 선민 이데올로기나 자기 과시욕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작은 힘만 가져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사실 어깨에 힘 들어가는 것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다 못해 편애하시는 부류는 , 혹은 그러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들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보다 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한 자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장애자를 돌보지 않고 괴롭히는 자는 내가 내 칼로 네 자녀를 쳐서 죽이리라."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치고는 소름끼치는 대목입니다.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 나라는 아침에 소경을 보면 재수 없다고 택시까지 서지 않는 나라입니다. 10년 전 붐비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머뭇거리는 시각장애자를 누군가가 밀어서 기차에 깔려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희는 거의 돌도끼를 든 야만인의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길교회 같은, 겉으로는 좀 엉성한 집단 같은 이 교회에서 재빨리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약한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약한 곳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또 다른 소양중의 하나는 그분은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에 대한 관심입니다. 인생과 자연계를 창조하신 예술가이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 소양을 지닌 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빵빵해져서 폼잡는 예술가는 이 경우도 예외입니다. 성경은 이라 할만큼 농부나 장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나 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나 그 아내 에디스 쉐퍼는 평생 만 연구하고 사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수이셨고 전설에 의하면 말안장을 가장 잘 만드셨다고 합니다. 바울 또한 천막 만드는 이었으며 열두 제자들 또한 대부분 천한 일을 하는 이었습니다.
농부는 땅의 예술가입니다. 땅에 씨뿌려 생명을 잉태시킨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농부의 땀과 손을 하나님은 칭송하십니다. 땀흘려 소출을 얻는 그 과정의 정직성을 사랑하십니다. 어느 분야의 노동이든 그 속에 정성과 열심이 들어가면 그 은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그 속에 창의성이 곁들여지면 이 되고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라는 명제는 관념의 기쁨이나 강요된 기쁨이 아닌 창조의 기쁨이요 장인 정신, 예술정신의 기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가 하나님의 품성을 받아 너나 없이 예술적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직업 예술가도 있지요. 우리는 너나 없이 자기 앞의 인생을 완성해간다는 점에서 생을 오브제로 한 예술가들입니다. 7∼80년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 생의 예술가로서의 자기 생을 조각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각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요. 쟁이나 예술가는 최선의 것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대충 아무렇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은 끊임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간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우리도 자기인생을 되는대로 무신경하게 살 것이 아니라 스케치하고 골똘히 생각하고 그리고 땀흘려 조각하면서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아끼듯 아끼고 사랑하며 그렇게 완성해가야 할 것입니다. 가치 중 좋은 가치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장인적 몰아지경의 몰두는 평안과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휴식 같은 노동이 있는가하면 노동 같은 휴식도 있습니다. 좀 과한 노동도 은밀한 기쁨 속에 하면 휴식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일을 한다면 좀 과로해도 생산성이 높아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일본이나 이스라엘은 좀 과하게 일하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기뻐하라 하셨는데 저 좋아하는 무엇인가에 몰두하다보면 특히 창의성을 가지고 몰두하다보면 기쁨과 보람도 저절로 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아집니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자기의 을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남의 분야를 기웃댈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요. 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 으로 놓고 보면 좋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쟁이이다'라고요. '쟁이'라는 말이 주는 소박함, 전문성, 선함 이런 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예술가라는 거품이 빠져 버린 쟁이라는 말이 좋아 저는 스스로 환쟁이로 생각하며, 칠하는 사람이어서 '칠집 김씨'라고 명명하기도합니다.
장인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부유함의 거품이 거친 고도의 전문화사회로 갑니다. 독일,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그렇습니다. 오늘은 주로 일본의 경우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일본을 다녀왔는데 동행하신 분이 기차를 탈 때마다 도시락을 사와요. 엔화가 비싸니까 도시락으로 먹자는 겁니다. 저는 뻣뻣하고 말라빠진 도시락을 연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마치 예술품 같아서 먹기조차 아까운 것입니다. 보도 블록 하나도 예술적으로 그 마감이 완벽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장인정신이 직업화해서 직업적 예술가, 직업적 장인도 나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어느 분야에 대해 직업으로서가 아니고 그냥 창조적 관심으로 빠져드는 것도 좋습니다. 여기 일본 전문가 김용덕 교수님이 계십니다만 비전문가로서 전문가를 앞질러 버린 경우가 일본사회는 비일비재합니다. 일본사회는 고도의 전문성으로 넘쳐 나서 자국 문화뿐 아니라 남의 나라 문화에까지 관심을 기울여 일가를 이룬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한국 판소리연구의 일인자 니시오카겐지 교수와 한국미술사학자 요시다 교수를 만났는데 어떤 한국학자도 한국학에 관해 외국인이라고 이들을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오사카의 같은 한국 고미술상이 또한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5대에 걸쳐 한국 도자기를 모았고 지금은 세계 최대의 한국 미술수집가가 되었습니다. 80년 전 천엔에 주고 산 한국백자가 지금은 보통 3∼5억엔 입니다. 작년 한국의 모 재벌은 그 리세이로가 소더비에 낸 한국 자기를 300억원의 돈을 주고 사왔습니다. 왜 대를 이어 한국 미술을 모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냥 좋아서였다는 것입니다. 좋아서 앞 뒤 살필 겨를 없이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뛰어드니 끝이 안보였고 한국도자기의 매력에 홀려 100년 세월이 갔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다 보니 5대가 훌쩍 갔답니다. 몰아지경의 그 세월이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 한국도자기가 운다는 것입니다. 저녁 무렵 홀로 전시실로 들어가면 400년 전 끌려온 이름 없는 한국도공들이 빚은 자기에서부터 근세의 한국자기들까지 한국에서 온 도자기들이 돌려보내 달라, 고향에 가고싶다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시실에 들어가기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인제는 다 돌려줘야 할 것 같다고 주인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쟁이들이 만든 것을 홀대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나라에 가서 운다는 것 딱한 일입니다. 야나기 무네여시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한국으로 치면 육당 최남선 같은 사람인데 1930년대에 이라는 글을 쓰면서 우리 민화의 우수성을 도하 신문잡지에 써댔습니다. 일인들이 우리민화의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100만점 가까운 우리 민화를 가져갔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볼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요즘 저는 시내 도처에서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는 플랭카드를 봅니다. 문화를 알고 예술을 알아야 행세하는 세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몰아 찰 때는 언제이고 말입니다. 그 플랭카드를 볼 때마다 속으로 말합니다. "잘 났어 정말." 제가 이번에 간 바리다에는 임진란 때 모셔온 조선 도공 이삼평이 으로 모셔져서 온 도시 전체가 수백 년간이나 그를 숭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자취 가는 곳마다 모두 성역화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족한 오리지낼리티의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인접 국가의 예술을 그렇게도 아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나라의 틀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단단합니다. 장인 정신은 세상과 삶의 규모를 쓸데없이 부풀려 잡지 않고 자신의 달란트 범주 안으로 축소해서 봅니다. 터무니없는 부유함에 눈길을 주거나 자기 삶을 남의 잣대 치수로 재지 않습니다. 대단히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일단 완성되면 그 세계는 작아도 단단합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또한 주신 달란트의 범주 안에서 성실성을 다하기 때문에 성경적입니다. 자족적입니다.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삶입니다. 이 장인 정신은 생활 공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장인 정신으로 접근하면 부엌일이 지겹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남자 셋이 있는데 그 남자 셋이 깜빡 죽는 우리 처형이 한 분 있습니다. 이 분은 가정 주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일본의 여인 뺨치게 예술적으로 살림살이를 합니다. 늘 무슨 일엔가 에너지 있게 분주하고 우리 아이들이 놀러 가면 계속해서 손수 간식을 만들어 먹이며 아이들에게 잘해줍니다. 절대 인스턴트로 대충 먹이지 않습니다. 그 분은 그런 면에서 입니다. 그 분은 활동하는 여인들을 별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소박함과 정직성에 기초합니다. 치수는 잘못 재거나 부풀려 잡으면 물건이 엉망으로 나오기 때문에 정직성이 생명입니다. 장인의 나라인 일본이나 독일 네덜란드는 우리보다 정직합니다. 책상을 치며 흥분해야 될 일은 축구가 일본보다 뒤졌다는 것이 아닌 정직성에 있어 그들보다 한참 뒤졌다는 일일 것입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친절하고 너그럽습니다. 삶의 표현이 생기 있고 풍성합니다. 남에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기쁩니다. 20대에는 기쁘고 60대에는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20대에는 20대의 젊음이 있어 기쁘고, 60대에는 20대에 몰랐던 생의 예술이 완성을 향해 치닫는 데서 오는 은밀한 기쁨이 있습니다. 20대건 60대건 날마다 시마다 그 때가 입니다.
일본사람들의 친절을 계산된 친절, 상업화된 친절, 안과 밖이 다른 친절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기쁨의 기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온갖 우상 잡신 속에 살면서도 그 속에 그들이 기쁨의 바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창조하는 정신, 장인 정신에 있다고 봅니다. 더구나 그렇게도 기뻐하라고 권유하고 또 권유하신 기쁨의 원조 우리 하나님 예수님 모시고 사는 우리가 우거지상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지요. 우리는 무뚝뚝함이 속이 깊다거나 하는 식으로 예찬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너무 친절한 것에 대해 채신없다고 하기도합니다. 더구나 설거지를 하는 남자는 아주 쪼다로 봅니다. 처가가 영남인 저는 오랜만에 장인 어른 뵈러 가면 대개 서너 마디십니다. 왔나? 언제 갈끼가? 차표는? 시국이 뒤숭숭할 때는 여기에 한마디가 더 붙으십니다. 학교는? 학교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속정은 아주 깊으십니다. 그러나 표현이 안되시는 겁니다. 칠순 잔치 때 제가 "아버님 인제 어머님께 사랑한다고 좀 하시고 그러십시오" 했더니 "아이고 그거 머 평생 해보지 않은 말이 간질러워서 나오나?"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이런 고백 듣고 싶어하십니다. 언젠가 장인 어른께서 장모님 편찮으시기에 약 지어다 주시면서 "묵고 빨리 낫그라" 한마디 했더니 눈물이 핑 돌더라는 것입니다. 말이 좀 빗나갑니다만 아내의 설거지를 돕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쪼다가 아닙니다. 어제 저는 자동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 했더니 뭐냐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했더니 그 말 듣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생활 20년이 가까워 오는데 아직도 이런 고백에 현기증 나는 것이 여성입니다. 장인적 삶은 쓸데없이 폼 잡고 근엄한 것이 아닌 친절이요 기쁨을 주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풍성하게 표현하여 혹은 꾸미고 포장하여 보여주는 삶입니다. 장인적 삶은 너그러움의 삶입니다. 오늘 일본 이야기 많이 해 죄송합니다만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축구를 보았습니다. 조마조마 했습니다. 이미 일본이 한 꼴 먹었는데 3 : 0 쯤으로 박살내야 할텐데 하며 TV를 보았습니다. 내가 이런 심뽀니 우리가 5 : 0으로 안 지겠습니까? 다음날 체크아웃 할 때 호텔 종업원이 절보고 "그저께 축구가 져서 상심 되셨겠습니다. 저희는 모두 한국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 ." 이 녀석이 누구 약올리나 하고 눈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거짓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뒤틀려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새 저는 아주 짜증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 하나가 권력의 핵심에 앉고나서부터는 제 집에 지연이나 학연을 내세우며 그 친구와 연결시켜 달라는 전화가 빗발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옮겨 출세해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야심한 밤에도 전화가 와서 연결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직접 해 보시라 하면 이렇게 늦은 밤에 전화하면 실례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엔 밤늦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하면서 말입니다. 장인적 삶은 권력에 무심합니다. 자기 세계를 조각해 가기에도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에 장인적으로 충실할 때 이 모든 한국적 불 합리의 부분들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을 가진 민족입니다. 장인적 재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세계를 쪼아 가는 감격과 기쁨을 가질 때 사회적 충실 지수는 상승할 것입니다. 그때 참다운 선진국도 가능하겠지요?
좀 두서가 없었는데 이 또한 장인 기질의 하나라고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빵빵함이란 시쳇말로 힘이 좀 있다는 것인데 새길교회의 경우 이 힘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지식을 기반으로 한 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관심은 돈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힘세고 빵빵한 곳에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정반대로 힘이 약한 곳에 있다는 것, 한 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삶을 그 종국인 죽음과 함께 바라보고, 인생의 복락을 그 마지막인 고통과 함께 바라보며, 몸은 물론 그 영혼마저 능히 죽일 수 있는 권능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이 별로 호감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빵빵하고 힘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에 대해 성경은 도처에서 경고하십니다. "눈이 가리웠으니 안약이나 사서 발라라"고 야유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길교회 같은 힘있는 교회가 그 힘을 빼고 못 배운 자 억눌린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자 그들 편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간파한 놀라운 지혜입니다.
사실 사람은 힘이 좀 있으면 그 힘이 어깨부터 들어갑니다. 아파트 평수만 좀 늘려가도 교만해져서, 주부들 중엔 복장을 함부로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수위들을 종처럼 부리려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안에서나 입기에 좋을 운동복 따위를 입고 아파트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것, 눈썰미를 찌푸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창조하셨는데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은 그 위대한 창조에 대한 모독입니다.
사람은 학교만 좀 좋은 곳을 나와도 들어내고 싶어합니다. 옛날엔 여름에 바다에서 러닝 셔츠에까지 서울대학 뺏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제가 살았던 교수아파트에는 유리창, 자동차, 심지어 우산대에까지 하바드 마크를 부치고 다녔던 하바드 출신 교수도 있었지요.
이런 선민 이데올로기나 자기 과시욕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작은 힘만 가져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사실 어깨에 힘 들어가는 것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다 못해 편애하시는 부류는 , 혹은 그러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들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보다 을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한 자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장애자를 돌보지 않고 괴롭히는 자는 내가 내 칼로 네 자녀를 쳐서 죽이리라."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치고는 소름끼치는 대목입니다. 연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 나라는 아침에 소경을 보면 재수 없다고 택시까지 서지 않는 나라입니다. 10년 전 붐비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머뭇거리는 시각장애자를 누군가가 밀어서 기차에 깔려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희는 거의 돌도끼를 든 야만인의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길교회 같은, 겉으로는 좀 엉성한 집단 같은 이 교회에서 재빨리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약한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약한 곳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또 다른 소양중의 하나는 그분은 창조하시는 분으로서 에 대한 관심입니다. 인생과 자연계를 창조하신 예술가이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적 소양을 지닌 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빵빵해져서 폼잡는 예술가는 이 경우도 예외입니다. 성경은 이라 할만큼 농부나 장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나 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나 그 아내 에디스 쉐퍼는 평생 만 연구하고 사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수이셨고 전설에 의하면 말안장을 가장 잘 만드셨다고 합니다. 바울 또한 천막 만드는 이었으며 열두 제자들 또한 대부분 천한 일을 하는 이었습니다.
농부는 땅의 예술가입니다. 땅에 씨뿌려 생명을 잉태시킨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농부의 땀과 손을 하나님은 칭송하십니다. 땀흘려 소출을 얻는 그 과정의 정직성을 사랑하십니다. 어느 분야의 노동이든 그 속에 정성과 열심이 들어가면 그 은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그 속에 창의성이 곁들여지면 이 되고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라는 명제는 관념의 기쁨이나 강요된 기쁨이 아닌 창조의 기쁨이요 장인 정신, 예술정신의 기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가 하나님의 품성을 받아 너나 없이 예술적 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직업 예술가도 있지요. 우리는 너나 없이 자기 앞의 인생을 완성해간다는 점에서 생을 오브제로 한 예술가들입니다. 7∼80년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 생의 예술가로서의 자기 생을 조각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각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요. 쟁이나 예술가는 최선의 것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대충 아무렇게 만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은 끊임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간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우리도 자기인생을 되는대로 무신경하게 살 것이 아니라 스케치하고 골똘히 생각하고 그리고 땀흘려 조각하면서 어린아이가 초콜릿을 아끼듯 아끼고 사랑하며 그렇게 완성해가야 할 것입니다. 가치 중 좋은 가치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장인적 몰아지경의 몰두는 평안과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 휴식 같은 노동이 있는가하면 노동 같은 휴식도 있습니다. 좀 과한 노동도 은밀한 기쁨 속에 하면 휴식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그렇게 일을 한다면 좀 과로해도 생산성이 높아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일본이나 이스라엘은 좀 과하게 일하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항상 기뻐하라 하셨는데 저 좋아하는 무엇인가에 몰두하다보면 특히 창의성을 가지고 몰두하다보면 기쁨과 보람도 저절로 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아집니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자기의 을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남의 분야를 기웃댈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요. 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 으로 놓고 보면 좋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쟁이이다'라고요. '쟁이'라는 말이 주는 소박함, 전문성, 선함 이런 말이 저는 참 좋습니다. 예술가라는 거품이 빠져 버린 쟁이라는 말이 좋아 저는 스스로 환쟁이로 생각하며, 칠하는 사람이어서 '칠집 김씨'라고 명명하기도합니다.
장인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부유함의 거품이 거친 고도의 전문화사회로 갑니다. 독일,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그렇습니다. 오늘은 주로 일본의 경우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일본을 다녀왔는데 동행하신 분이 기차를 탈 때마다 도시락을 사와요. 엔화가 비싸니까 도시락으로 먹자는 겁니다. 저는 뻣뻣하고 말라빠진 도시락을 연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마치 예술품 같아서 먹기조차 아까운 것입니다. 보도 블록 하나도 예술적으로 그 마감이 완벽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장인정신이 직업화해서 직업적 예술가, 직업적 장인도 나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어느 분야에 대해 직업으로서가 아니고 그냥 창조적 관심으로 빠져드는 것도 좋습니다. 여기 일본 전문가 김용덕 교수님이 계십니다만 비전문가로서 전문가를 앞질러 버린 경우가 일본사회는 비일비재합니다. 일본사회는 고도의 전문성으로 넘쳐 나서 자국 문화뿐 아니라 남의 나라 문화에까지 관심을 기울여 일가를 이룬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한국 판소리연구의 일인자 니시오카겐지 교수와 한국미술사학자 요시다 교수를 만났는데 어떤 한국학자도 한국학에 관해 외국인이라고 이들을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오사카의 같은 한국 고미술상이 또한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5대에 걸쳐 한국 도자기를 모았고 지금은 세계 최대의 한국 미술수집가가 되었습니다. 80년 전 천엔에 주고 산 한국백자가 지금은 보통 3∼5억엔 입니다. 작년 한국의 모 재벌은 그 리세이로가 소더비에 낸 한국 자기를 300억원의 돈을 주고 사왔습니다. 왜 대를 이어 한국 미술을 모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그냥 좋아서였다는 것입니다. 좋아서 앞 뒤 살필 겨를 없이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뛰어드니 끝이 안보였고 한국도자기의 매력에 홀려 100년 세월이 갔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다 보니 5대가 훌쩍 갔답니다. 몰아지경의 그 세월이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새 한국도자기가 운다는 것입니다. 저녁 무렵 홀로 전시실로 들어가면 400년 전 끌려온 이름 없는 한국도공들이 빚은 자기에서부터 근세의 한국자기들까지 한국에서 온 도자기들이 돌려보내 달라, 고향에 가고싶다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시실에 들어가기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인제는 다 돌려줘야 할 것 같다고 주인이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쟁이들이 만든 것을 홀대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나라에 가서 운다는 것 딱한 일입니다. 야나기 무네여시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한국으로 치면 육당 최남선 같은 사람인데 1930년대에 이라는 글을 쓰면서 우리 민화의 우수성을 도하 신문잡지에 써댔습니다. 일인들이 우리민화의 아름다움을 간파하고 100만점 가까운 우리 민화를 가져갔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볼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요즘 저는 시내 도처에서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는 플랭카드를 봅니다. 문화를 알고 예술을 알아야 행세하는 세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몰아 찰 때는 언제이고 말입니다. 그 플랭카드를 볼 때마다 속으로 말합니다. "잘 났어 정말." 제가 이번에 간 바리다에는 임진란 때 모셔온 조선 도공 이삼평이 으로 모셔져서 온 도시 전체가 수백 년간이나 그를 숭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자취 가는 곳마다 모두 성역화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족한 오리지낼리티의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인접 국가의 예술을 그렇게도 아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나라의 틀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단단합니다. 장인 정신은 세상과 삶의 규모를 쓸데없이 부풀려 잡지 않고 자신의 달란트 범주 안으로 축소해서 봅니다. 터무니없는 부유함에 눈길을 주거나 자기 삶을 남의 잣대 치수로 재지 않습니다. 대단히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일단 완성되면 그 세계는 작아도 단단합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또한 주신 달란트의 범주 안에서 성실성을 다하기 때문에 성경적입니다. 자족적입니다.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삶입니다. 이 장인 정신은 생활 공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장인 정신으로 접근하면 부엌일이 지겹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남자 셋이 있는데 그 남자 셋이 깜빡 죽는 우리 처형이 한 분 있습니다. 이 분은 가정 주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일본의 여인 뺨치게 예술적으로 살림살이를 합니다. 늘 무슨 일엔가 에너지 있게 분주하고 우리 아이들이 놀러 가면 계속해서 손수 간식을 만들어 먹이며 아이들에게 잘해줍니다. 절대 인스턴트로 대충 먹이지 않습니다. 그 분은 그런 면에서 입니다. 그 분은 활동하는 여인들을 별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소박함과 정직성에 기초합니다. 치수는 잘못 재거나 부풀려 잡으면 물건이 엉망으로 나오기 때문에 정직성이 생명입니다. 장인의 나라인 일본이나 독일 네덜란드는 우리보다 정직합니다. 책상을 치며 흥분해야 될 일은 축구가 일본보다 뒤졌다는 것이 아닌 정직성에 있어 그들보다 한참 뒤졌다는 일일 것입니다.
장인 정신의 삶은 친절하고 너그럽습니다. 삶의 표현이 생기 있고 풍성합니다. 남에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기쁩니다. 20대에는 기쁘고 60대에는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20대에는 20대의 젊음이 있어 기쁘고, 60대에는 20대에 몰랐던 생의 예술이 완성을 향해 치닫는 데서 오는 은밀한 기쁨이 있습니다. 20대건 60대건 날마다 시마다 그 때가 입니다.
일본사람들의 친절을 계산된 친절, 상업화된 친절, 안과 밖이 다른 친절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이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기쁨의 기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온갖 우상 잡신 속에 살면서도 그 속에 그들이 기쁨의 바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창조하는 정신, 장인 정신에 있다고 봅니다. 더구나 그렇게도 기뻐하라고 권유하고 또 권유하신 기쁨의 원조 우리 하나님 예수님 모시고 사는 우리가 우거지상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지요. 우리는 무뚝뚝함이 속이 깊다거나 하는 식으로 예찬되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너무 친절한 것에 대해 채신없다고 하기도합니다. 더구나 설거지를 하는 남자는 아주 쪼다로 봅니다. 처가가 영남인 저는 오랜만에 장인 어른 뵈러 가면 대개 서너 마디십니다. 왔나? 언제 갈끼가? 차표는? 시국이 뒤숭숭할 때는 여기에 한마디가 더 붙으십니다. 학교는? 학교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속정은 아주 깊으십니다. 그러나 표현이 안되시는 겁니다. 칠순 잔치 때 제가 "아버님 인제 어머님께 사랑한다고 좀 하시고 그러십시오" 했더니 "아이고 그거 머 평생 해보지 않은 말이 간질러워서 나오나?"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이런 고백 듣고 싶어하십니다. 언젠가 장인 어른께서 장모님 편찮으시기에 약 지어다 주시면서 "묵고 빨리 낫그라" 한마디 했더니 눈물이 핑 돌더라는 것입니다. 말이 좀 빗나갑니다만 아내의 설거지를 돕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쪼다가 아닙니다. 어제 저는 자동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 했더니 뭐냐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했더니 그 말 듣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생활 20년이 가까워 오는데 아직도 이런 고백에 현기증 나는 것이 여성입니다. 장인적 삶은 쓸데없이 폼 잡고 근엄한 것이 아닌 친절이요 기쁨을 주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풍성하게 표현하여 혹은 꾸미고 포장하여 보여주는 삶입니다. 장인적 삶은 너그러움의 삶입니다. 오늘 일본 이야기 많이 해 죄송합니다만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축구를 보았습니다. 조마조마 했습니다. 이미 일본이 한 꼴 먹었는데 3 : 0 쯤으로 박살내야 할텐데 하며 TV를 보았습니다. 내가 이런 심뽀니 우리가 5 : 0으로 안 지겠습니까? 다음날 체크아웃 할 때 호텔 종업원이 절보고 "그저께 축구가 져서 상심 되셨겠습니다. 저희는 모두 한국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 ." 이 녀석이 누구 약올리나 하고 눈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거기에는 거짓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뒤틀려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새 저는 아주 짜증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 하나가 권력의 핵심에 앉고나서부터는 제 집에 지연이나 학연을 내세우며 그 친구와 연결시켜 달라는 전화가 빗발치는 것입니다. 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옮겨 출세해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야심한 밤에도 전화가 와서 연결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직접 해 보시라 하면 이렇게 늦은 밤에 전화하면 실례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엔 밤늦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하면서 말입니다. 장인적 삶은 권력에 무심합니다. 자기 세계를 조각해 가기에도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에 장인적으로 충실할 때 이 모든 한국적 불 합리의 부분들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을 가진 민족입니다. 장인적 재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세계를 쪼아 가는 감격과 기쁨을 가질 때 사회적 충실 지수는 상승할 것입니다. 그때 참다운 선진국도 가능하겠지요?
좀 두서가 없었는데 이 또한 장인 기질의 하나라고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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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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