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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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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시90 |
|---|---|
| 설교자 : | 이찬수 목사 |
| 참고 : | 길벗예수교회/ 새길교회 주일설교 |
가끔 시간이란 무엇일까를 주제로, 남의 책을 보고 정보를 얻는 공부가 아닌, 일종의 명상을 해보곤 합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감각기관이 있다 보니 생기는 경험의 다른 이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경험이 연속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만일 우리에게 몸이 없다면, 감각기관도 없을 테고, 감각기관이 없다면 시간 경험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을 넘어선 세계, 이것이 영원의 세계입니다. 영원에는 크기도 없습니다. 크기조차 우리의 분별적 감각 기관의 판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원은 몸을 벗어버리고서야 가능한 데 살아있는 한 몸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다는 가정도, 몸을 벗어버리는 상상도, 몸 안에서 몸을 가지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확장처럼 유추해서 생각해볼 뿐입니다. 시간을 확장한다고 해서 영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그런 상상은 우리의 실상을 잘 돌아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상상 속에서 우리의 시야를 지구 밖으로 끝없이 옮겨가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우주 끝으로 가져가보면 내 몸은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때 시간은 우리의 몸 안에서,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먼지만도 못한 지구에서만 이루어지는 지극히 제한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혹 내 안의 세포 하나에 집중해보기도 합니다. 우주에서 보면 내가 먼지만도 못한 존재이듯이, 내 안의 세포 하나도 나 전체와 견주면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그 세포 하나가 떨어져나간다고 해도 우리 몸 전체에서는 별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주에서 나라는 존재는 내 몸의 세포 하나와 비슷한 관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참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우주적 차원에서의 ‘나’는 참 보잘 것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발견은 나에 대한 비관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그 보잘 것 없음을 느끼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정말 큰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신의 작음을 느낀다면, 정말 큰 것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납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보잘 것 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정말 큰 것을 다시 본 이의 신앙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근원이자(1) 영원자이시며(2) 시간을 초월하신 분으로서(4) 그분 앞에서 인간은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3) 나와 세상의 진정한 주재자로서(5-6), 인간에 비하면 너무 크신 분으로서(7, 9), 그분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8) 왜냐하면 기껏 숨겨놓은 그곳도 그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숨겨놓지만 그곳이 이미 그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진리하고 하거나 이치 내지 원리라고 하거나 우주적 힘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교리를 머리 속에 외워두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적 진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원이 되는 그 어떤 분, 원리, 힘을 체현함으로써 인생을 더 넓고 깊게, 이웃을 포용하며 살아갈 줄 아는 삶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하느님을 나의 욕심 안에 가두어놓고 나의 계획을 이루어주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영원의 하느님을 시간 안에 가두어두고 나의 시간적 욕망을 채워주는 그 어떤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낫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낫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 시간을 세어나갑니다. 모레보다는 한 달 후가, 한 달 후 보다는 일 년 후가 더 낫기를 바라며 삽니다. 그렇게 하다가 언젠가는 몸이 사라지고 그렇게 셈하는 능력도 없어지리라는 것을 머리 속으로는 알지만 정작 몸으로는 느끼지 못합니다. 오년 후 십년 후, 이십년 후를 마치 영원으로 착각합니다. 하루 이틀 세어나가는 우리의 습관이 영원까지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순간 오늘 성경은 우리가 정말 무엇을 세며 살아야 하는지, 과연 우리의 날 수를 끝없이 셀 수나 있기는 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역심과 집착을 기대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놓고 살지만, 그래서 그러한 기대와 희망에 따라 인생의 날 수를 하루 이틀 세며 살지만, 이러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 읽은 성경은 영원할 것 같은 인생도 영원은커녕 한낱 먼지나 한바탕 꿈과 같다는 사실,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터전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강력한 폭탄처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아 먼지로 돌아가라” 하고 하나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그저 일장춘몽처럼 먼지가 되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는 저녁에 시들고 마는 풀잎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살이 인생인줄도 모르고 천년을 계획하며 사는 인생을 영원하신 분이 보면 웃음 나올 일이겠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칠십년이고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10a), 요새 기준으로 하면 기껏해야 팔구십이고 근력이 좋으면 백년 뿐인데도, 내일을 세고, 모레를 세고, 십년을 세고 백년을 세다가 영원까지 셀 태세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돌이켜보면 그 보잘 것 없는 날 수마저 고생과 슬픔에 젖은 시간에 지나지 않은데 말이지요.(10b)
이 시편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통찰하고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날 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아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12) 정말 인생의 기간, 날 수를 제대로 세며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대로 헤아리고 센다는 것은 내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것만한 지혜가 어디 있겠느냐는 깨달음에 기반한 기도이지요.
김준태라는 시인이 쓴 “감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목적 속에서 무엇을 세며 살아야 하는지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 합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우리는 먼 훗날엔 무엇을 세며 살게 될까요? 먼 훗날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달 후엔 무엇을 세며 살게 될까요? 한 달 후에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도 나름대로 묘미가 있지만, 저는 다소 시골스러운 곳에 살면서 봄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린 나뭇잎이 파릇파릇 솟아나오는 모습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얼른 그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그런데 김준태 시인의 물음처럼, 정말 먼 훗날에는 무엇을 세게 될까요? 몸이 없으니 하나 둘 세던 행위도 사라지겠지 하며 쉽게 답변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물음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영원한 세계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그 모습도 기억하고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하고 유치한 상상만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인생의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고백됩니다. 그러니 기도도 그에 맞게 하게 되지요: “당신의 종들에게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또 그 후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16)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그것이 이어지면서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는 고백이 담긴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깊이를 제대로 통찰하며 사는 삶 만큼 훌륭한 선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소서”(17) 하는 기도도 그저 자신만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날 수를 제대로 세며 사는 사람의 모습, 즉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가는 감사함 속에서 사는 사람의 삶의 모습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시편 90편의 기도를 우리의 입으로 절절하게 고백할 줄 아는 신앙 체험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당연히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영원은 몸을 벗어버리고서야 가능한 데 살아있는 한 몸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다는 가정도, 몸을 벗어버리는 상상도, 몸 안에서 몸을 가지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확장처럼 유추해서 생각해볼 뿐입니다. 시간을 확장한다고 해서 영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그런 상상은 우리의 실상을 잘 돌아보는데 도움이 됩니다.
상상 속에서 우리의 시야를 지구 밖으로 끝없이 옮겨가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우주 끝으로 가져가보면 내 몸은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때 시간은 우리의 몸 안에서,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먼지만도 못한 지구에서만 이루어지는 지극히 제한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혹 내 안의 세포 하나에 집중해보기도 합니다. 우주에서 보면 내가 먼지만도 못한 존재이듯이, 내 안의 세포 하나도 나 전체와 견주면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그 세포 하나가 떨어져나간다고 해도 우리 몸 전체에서는 별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주에서 나라는 존재는 내 몸의 세포 하나와 비슷한 관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참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우주적 차원에서의 ‘나’는 참 보잘 것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발견은 나에 대한 비관이나 절망이 아닙니다. 그 보잘 것 없음을 느끼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정말 큰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신의 작음을 느낀다면, 정말 큰 것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납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보잘 것 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정말 큰 것을 다시 본 이의 신앙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근원이자(1) 영원자이시며(2) 시간을 초월하신 분으로서(4) 그분 앞에서 인간은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됩니다.(3) 나와 세상의 진정한 주재자로서(5-6), 인간에 비하면 너무 크신 분으로서(7, 9), 그분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8) 왜냐하면 기껏 숨겨놓은 그곳도 그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숨겨놓지만 그곳이 이미 그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진리하고 하거나 이치 내지 원리라고 하거나 우주적 힘이라고 표현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교리를 머리 속에 외워두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실존적 진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원이 되는 그 어떤 분, 원리, 힘을 체현함으로써 인생을 더 넓고 깊게, 이웃을 포용하며 살아갈 줄 아는 삶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하느님을 나의 욕심 안에 가두어놓고 나의 계획을 이루어주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영원의 하느님을 시간 안에 가두어두고 나의 시간적 욕망을 채워주는 그 어떤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낫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낫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 시간을 세어나갑니다. 모레보다는 한 달 후가, 한 달 후 보다는 일 년 후가 더 낫기를 바라며 삽니다. 그렇게 하다가 언젠가는 몸이 사라지고 그렇게 셈하는 능력도 없어지리라는 것을 머리 속으로는 알지만 정작 몸으로는 느끼지 못합니다. 오년 후 십년 후, 이십년 후를 마치 영원으로 착각합니다. 하루 이틀 세어나가는 우리의 습관이 영원까지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 순간 오늘 성경은 우리가 정말 무엇을 세며 살아야 하는지, 과연 우리의 날 수를 끝없이 셀 수나 있기는 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역심과 집착을 기대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놓고 살지만, 그래서 그러한 기대와 희망에 따라 인생의 날 수를 하루 이틀 세며 살지만, 이러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 읽은 성경은 영원할 것 같은 인생도 영원은커녕 한낱 먼지나 한바탕 꿈과 같다는 사실,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터전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강력한 폭탄처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아 먼지로 돌아가라” 하고 하나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그저 일장춘몽처럼 먼지가 되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는 저녁에 시들고 마는 풀잎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살이 인생인줄도 모르고 천년을 계획하며 사는 인생을 영원하신 분이 보면 웃음 나올 일이겠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칠십년이고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10a), 요새 기준으로 하면 기껏해야 팔구십이고 근력이 좋으면 백년 뿐인데도, 내일을 세고, 모레를 세고, 십년을 세고 백년을 세다가 영원까지 셀 태세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돌이켜보면 그 보잘 것 없는 날 수마저 고생과 슬픔에 젖은 시간에 지나지 않은데 말이지요.(10b)
이 시편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통찰하고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날 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아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12) 정말 인생의 기간, 날 수를 제대로 세며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대로 헤아리고 센다는 것은 내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것만한 지혜가 어디 있겠느냐는 깨달음에 기반한 기도이지요.
김준태라는 시인이 쓴 “감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목적 속에서 무엇을 세며 살아야 하는지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 합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우리는 먼 훗날엔 무엇을 세며 살게 될까요? 먼 훗날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달 후엔 무엇을 세며 살게 될까요? 한 달 후에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도 나름대로 묘미가 있지만, 저는 다소 시골스러운 곳에 살면서 봄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린 나뭇잎이 파릇파릇 솟아나오는 모습은 참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얼른 그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그런데 김준태 시인의 물음처럼, 정말 먼 훗날에는 무엇을 세게 될까요? 몸이 없으니 하나 둘 세던 행위도 사라지겠지 하며 쉽게 답변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물음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영원한 세계에 결정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그 모습도 기억하고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하고 유치한 상상만을 하게 될 뿐입니다.
인생의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고백됩니다. 그러니 기도도 그에 맞게 하게 되지요: “당신의 종들에게 당신께서 이루신 일들을, 또 그 후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16)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그것이 이어지면서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는 고백이 담긴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깊이를 제대로 통찰하며 사는 삶 만큼 훌륭한 선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이 잘 되게 하소서”(17) 하는 기도도 그저 자신만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날 수를 제대로 세며 사는 사람의 모습, 즉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가는 감사함 속에서 사는 사람의 삶의 모습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시편 90편의 기도를 우리의 입으로 절절하게 고백할 줄 아는 신앙 체험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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