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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시편 홍순택............... 조회 수 1706 추천 수 0 2008.10.26 23:41:40
.........
성경본문 : 시90:4-6 
설교자 : 홍순택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7.22주일설교 
시편 90:4-6, 베드로후서 3:7-8 

<들어가는 이야기>
저희 집 전설(傳說)에 따르면, 저는 만 세 돌이 지난 후에야 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진 ‘엄마’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네요. 당시 저의 별명은 ‘응 선생’이었다는데요. ‘응’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좋다, 싫다, 배고프다, 쌌다 등등 모든 의사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전설은, 세 돌이 지난 어느날 제가 처음 내뱉은 말이 엄마도 아빠도 맘마도 아닌, 바로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였다는 겁니다. 아무튼, 남들보다 지나치게 말문이 늦게 트이는 저를 보며 부모님은 ‘이 놈을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나’ 고민을 하셨었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아이는 저를 닮지는 않았습니다. 39개월째를 살고 있는 지금은 저와 어느 정도 대화가 되는 수준이니까요.

어린아이와 대화를 하다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며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리고 상대방의 표현을 끝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배우게 됩니다. 어떤 때는 아이가 말하려는 것을 제가 앞질러 말해버리고 싶은 욕심도 생겨나고 아이가 말도 하기 전에 그걸 알아채고 해줘버리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제가 알아들었다 생각하고 아이에게 말하면 ‘아니~’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또, 아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말을 풀어서 이야기하려면 꽤나 많은 생각을 해야 되고 골치를 썩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와 대화를 위해서는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저의 말 속도를 늦추어야 하더군요.

말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이와 함께 걷다보면, 아이는 있는 참견 없는 참견 다 하고 길에 놓인 돌맹이 하나 고인 물 웅덩이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길거리의 맨홀 뚜껑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밟으며 가려 합니다. 그러기에 저 혼자 걸으면 5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가까이 걸려 간 적도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이를 데리고 정해진 일정으로 어딘가 가려한다면 제 속은 바짝바짝 타오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 아이 덕에 수행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로 이 기다림의 시간은 때로는 매우 길고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그 기다림을 통해 아이가 자기 ‘스스로’ 해내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라 생각하고, 또 아이가 자기의 말을 아빠가 귀담아 들어주고 자기의 행동을 기다려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서 저의 답답한 마음을 자꾸 타이릅니다. ‘기다려라,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면서요.

<인간의 시간>
아이에게는 아이의 때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때와 시간은 아이들마다 다 다르겠지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무엇이든 억지로 일찍 가르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생각을 언제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이들, 참 일찍부터 이것저것 많이도 배웁니다. ‘표준’이란 이름으로 일반화 된 나이와 학년에 맞추어 배워야 할 것들이 다 정해져 있고 공교육은 그 표준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그 표준을 앞서나가면 보통의 부모들은 참 대견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표준보다 늦게나가면 보통은 답답해합니다. 이래서 이 세상 어떻게 사나 걱정을 하고 안달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그 표준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이 가르치려고 참 무던히들 노력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서야 한글을 배웠고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구구단을 배웠으며 중학교 1학년 첫 영어수업 시간에야 알파벳을 배웠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가 살던 지역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제 친구들을 보면 이 세상 사는 데 별 문제들은 없더군요. 하지만 지난날과는 다르게 요즈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학업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과중한 속도경쟁 속에서 시간을 앞당겨 빨리빨리를 배우며 살고 있는지 제가 뭐라 말씀을 안 드려도 아실 겁니다. 속도 경쟁, 조기교육까지는 아니어도 선행학습 등으로 아이들에게 시간을 앞서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부모들은 아이가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그리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게 말하며 아이들에게 좀더 빨리 뭔가를 배울 것을 바랍니다. 남보다 더 빨리, 더 잘 해내기를 기대합니다.

어려서부터 이미 시간과의 싸움을 겪은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 더하면 더했지 이전보다 전혀 덜하지 않은 시간과의 싸움을 또 벌이게 됩니다. 취업을 위해서, 또는 진학을 위해서,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IMF 이후 한국경제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바는 요즘 속된 표현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빡세졌다’는 것입니다.

야근은 훨씬 더 많아졌고 출근 시간은 더 빨라졌습니다. 제 아내는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근을 8시간 후인 오후 3시 반에 하느냐. 아닙니다.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일찍 퇴근을 하는 데 그게 출근한지 12시간이 다 되어가는 저녁 7시 가까운 시간입니다.

근무시간이 늘어나면 그 늘어난 시간 안에서 일을 여유 있고 꼼꼼하고 차분하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닙니다. 컴퓨터니 뭐니 사무자동화를 위한 기기들과 시스템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업그레이드 되지만 오히려 업무는 더욱 늘어나고 일은 해가 갈수록 더욱 정신없이 몰려들고 분주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 아내는 그나마 나은 형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해서 밤별을 보고 퇴근하는 분들도 매우 많으시더군요.

이처럼 학생 시절과 직장 시절을 거치며 우리 인간들은 시간과 싸움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늘 부족한 것 같습니다. ‘헛되이’? 헛되이 보낼 시간은 없어지고 시간을 분초 단위로 나누어 잘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게 짓누릅니다. 그래야 좋은 시험성적을 얻어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붙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역시 또다시 시간을 잘 활용하고 헛되이 쓰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도 벌고 승진도 하고 최소한 짤리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늘 문제는 시간입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각종 전산시스템과 사무자동화기기들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근은 늘어나고 휴일에도 일손을 놓지 못합니다.

우리 인류는 원래 이렇게 바쁘고 분주하게 살았을까요? 아니라면 언제부터 이렇게 살게 된 것일까요. 인간이 만들어낸 산업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유’, ‘천천히’라는 단어는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 해도 뜨기 전에,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별을 보고 출근하고 햇볕 한 줌, 바람 한 자락, 흙 한 톨 만져보지 못한 채 콘크리트 건물을 공기 삼아 형광등 불빛을 햇빛 삼아 하루를 보내다 해가 진 후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도시의 불빛이 삼켜버린 별빛이 숨어 있는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틈 없이 콘크리트 길을 밟으며 지하철과 버스에 갇혀 사무실을 탈출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류는 왜 이렇게 산업에 얽매이게 된 것일까요. 왜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사로잡혀 버리게 된 것일까요. 수렵시대를 살던 인류의 선조들의 하루 흐름은 어떠했을까요. 농경시대 농부들의 하루 흐름은 어떠했을까요. 하루 일과 뿐 아니라 일 년의 흐름은 어떠했을까요.

근대산업문명은 도시를 만들어냈습니다. 문명을 만들어냈으며 산업을 구축했습니다. 자연과는 별개의 도시문명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시간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 시간 개념을 담은 시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인간의 일상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의 시간’은 과거 농경시대 인간이 따르던 자연의 시간과는 분명 다른 시간일 것입니다. 이 ‘인간의 시간’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인간을 자연의 시간으로부터 분리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도시의 인간은 자연의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었고 결국은 인간도 자연의 시간을 망각하고 인간의 시간, 즉 도시의 시간, 산업의 시간, 질주하는 시간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근대화가 낳은 인간의 시간은 진보의 시간입니다. 끊임없이 앞으로 위로 풍요함으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시간입니다. 언젠가는 완성에 도달하여 완벽한 문명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고 보는 인간중심의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간을 다투어 일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그렇게 시간을 다투어 많이 일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주어진 필수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시간은 밤이나 겨울이 인간에게 멈춤이나 휴식을 주지만 인간의 시간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밤을 밝히고 일을 할 수 있는 문명이 덧붙여져 있는 시간이며 온실을 만들어 식물이 쉼 없이 일년 내내 성장하고 열매를 맺도록 혹사할 수 있는 기술 위에 선 시간입니다. 산업문명 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시간은 이처럼 자연을 산업과 자본의 재료로 사용해버릴 수 있는, 도구화 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진 시간입니다. 한 예로 딸기는 원래 5~6월 수확됩니다. 하지만 요즈음 시장에서 이 시기에 딸기를 보기가 힘듭니다. 너도나도 모두 더 비싼 값을 받기 위해 하우스를 짓고 12월부터 3~4월까지 딸기를 출하해냅니다. 자연의 시간, 흐름까지도 인간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마음대로 앞당겨버리는 것이 인간의 시간인 것입니다.

결국 이런 문명은 자연을 혹사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도 혹사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도 자연처럼 산업과 문명, 그리고 자본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언론보도에 따르면 과로사하는 사람의 수가 해마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대로 된 통계도 없는 형편이어서 일본의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후생성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205명이 업무 스트레스와 과로가 직접적인 원인이 돼서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숫자는 전년도에 비하면 61.4%늘어난 것이랍니다. 물론 과로로 인해 정신질환을 얻었다며 보상을 요청한 사람 수는 훨씬 많아 지난해에만 819명이 산재 보상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들은 산업 재해로 숨지거나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 가운데 101명이 일주일에 100시간 넘는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했다고 합니다. 그들도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겠지요. 이것이 오늘날의 인간의 시간이 가진 덫입니다. 효율과 편리를 위해 창출된 것이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고 자연과 타인에게서 소외시키는 덫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인간의 시간은 문명을 이룩하려는, 부를 얻으려는 인간의 욕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문명을 이루고 부를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간 스스로를 산업문명의 시간 속으로 밀어넣었고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그 시간에 거꾸로 사로잡히고 말게 된 것입니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종교가, 신앙이 인간의 인간다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빛을 비추는 것이라면 이같은 인간의 시간에 마땅히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의 말씀은 ‘시간’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성서입니다. 인간들이 공들여 만들어나가는 모든 문명과 인간들이 조바심내며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을 한순간에 헛된 것으로 무화(無化)시켜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90:4-6
4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5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6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베드로후서 3:7-8
7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은 사라지고 말 한정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위대한 문명도 한낮 들풀처럼 시들어 말라버리고 맙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지요. 이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문명과 시간의 본질을 통찰하고서 이 말씀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통찰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위에서였겠지요.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존재, 즉 인간과 자연 모두 부질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영화도 주님께는 그저 지나간 하루에 불과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같은 시간관 위에서 성서는 시종일관 인간의 헛된 욕망과 추구에 목숨걸지 말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래서 산업문명의 시간에 붙들려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깨우칠 수 있는 힘, 바벨탑을 혼란에 빠트릴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종말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중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인간의 시간의 종말뿐만 아니라 자연의 시간의 종말도 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가올 종말의 날에 인간과 모든 생명은 물론 하늘과 땅이라는 자연의 물리적 조건까지도 모두 불 타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시간>
종말의 날,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 전혀 새롭고 전혀 다른 세상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넘어 영존하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분은 시간의 흐름, 자연의 흐름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인간이 계획하고 인간이 투자하는 모든 일을 단박에 헛된 것으로 뒤엎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같은 시간과 존재 모두를 넘어서고 절멸시키는 절대의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헛되고 지나친 인간문명의 질주와 인간의 시간이 가진 교만함과 위험을 경계합니다.

그런데 종말의 날에 선과 악을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인간 말고 가치중립적인 자연조차도 모두 불태워져 버린다는 것은 자연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자연의 존재 이유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농촌에서 자란 제게는 못내 찜찜합니다. 아마도 중동의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정입니다만,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수많은 생명체들이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살던 사람이 오늘 성서 말씀을 기록했다면 조금은 다르게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소외시킨 자연의 파괴로 인간의 존재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된 오늘날. 생태적인 감수성과 눈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시대와 문화의 옷을 입고 한계를 가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서를 읽어나가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절박한 요청인 생태적인 감수성을 갖고 새롭게 해석하며 읽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때로는 과감하게 새롭게 써내려가는 것은 어떨까요. 한 시대의 언어에 절대이며 영원이신 하나님을 가두어두지 않도록 말입니다.

동아시아 전통의 신앙은 시간과 존재 모두의 근원으로써 자연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를 헛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시간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의 시간은 순환하고 반복하고 회귀합니다. 인간이 개발한 시계의 시간이 아니고 밤낮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로 알아챌 수 있는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죽고 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자연 자체는 장구히 이어집니다. 이렇게 자연의 시간은 반복이며 죽음과 삶의 순환입니다. 한 예로 중국에는 노자 장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몸에 익히려는 도교의 도사들이 모여 거주하는 사찰인 도관(道館)이 있는데 전통적인 도관에는 어둠을 밝히는 전등이 없다고 합니다.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눕는 기본적인 삶의 방식에서부터 자연의 시간을 따르고 그에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기에, 현대문명의 물결 속에서도 전등을 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같은 감수성을 배워 성서를 새롭게 읽어보는 것은 어떨런지요.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홀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인격적인 타자인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절대적인 존재를 체험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자연에서 절대와 영원의 감각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억겁의 세월 순환과 회귀를 반복해온 장구한 자연 앞에서 영원과 절대를 깨달았고 인간존재를 겸허하게 할 지혜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영원’이 홀로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라면 동아시아 신앙 전통의 ‘영원’은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죽은 생명을 거두어들이며 다시 생명으로 내어놓는 자연이었을 것입니다.

<마치는 이야기>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휴가는 탈출입니다. 일상의 번잡함과 업무의 과중함을 떠나는 휴식입니다. 또한 일상의 시간을 멈추고 성찰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간으로, 자연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휴가 때는 하루 정도라도 따로 떼어서 시계 없이, 그저 날 밝고 날 저물고 해 높이 떠오르는 것으로, 즉 자연의 흐름으로 하루의 시간을 삼아 보내보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소위 빈둥빈둥 하루를 보내보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혹시 모르죠. 그 빈둥거림과 자연의 시간 속에 머뭄으로 우리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자연의 시간이 되살아날지도 모를테니까요. 자연의 하루가 어떻게 세심하게 변해가는지 오감을 동원하고 마음을 열어 관찰하고 느껴보시는 것은 어떠실런지요. 우리가 얽매여 살고 있는 산업과 문명의 흐름인 인간의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그 시간이 반드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삼아보시는 것은 어떠실런지요. 좋은 휴가 보내시길 빕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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