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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할 때와 말할 때

전도서 복음............... 조회 수 2630 추천 수 0 2007.11.15 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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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전3:1-8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3:7)

어떤 부인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더 이상 남편과 같이 살기 힘들 것 같아요. 너무 신경질적이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고 살아요.”
의사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합니다. “병원 옆에 신비의 작은 샘이 있습니다. 그 샘물을 담아 집으로 가져가서 남편이 집에 돌아오시면 얼른 한 모금 드십시오. 절대 삼키시면 안됩니다.”
부인은 의사의 말대로 물을 떠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돌아온 남편은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예전 같으면 또 싸웠을 텐데 그 날은 신비의 물을 입안 가득히 물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꼭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 부인은 언제나 남편 앞에서 신비의 물을 입에 머금었고 남편은 눈에 띄게 변해 갔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변화에 너무 기뻐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비의 샘물이 정말 효능이 좋더군요. 남편이 싹 달라졌어요.”
의사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기적을 일으킨 것은 물이 아닙니다. 당신의 침묵입니다.” 침묵과 이해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말 때문에 싸움의 불길을 키우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침묵은 때로 끊길 뻔했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그 사람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침묵은 값지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입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잠17:28)

타우라스 산의 정상 후미진 골짜기는 독수리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들에게는 두루미가 가장 좋은 먹이 감이라고 합니다. 두루미들은 떠들기를 아주 좋아하는 새들로서 특히 날아다닐 때 큰 소리를 냅니다. 이러한 소리들은 곧잘 독수리에게 좋은 신호가 되어 여행 중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몇몇 놈들은 독수리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두루미들은 그들의 소란스러운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행 전이면 항상 그들의 입에 가득 찰 정도의 크기인 돌을 집어 뭅니다. 이들은 불가피하게 침묵을 유지하게 되 위험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말을 많이 하다보면 내면의 생각들이 드러나게 되고, 이로 인해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즉, 지식과 실력의 정도도, 인격과 성품도, 됨됨이도 여실히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을 꼭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의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침묵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한 작가가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을 때 그를 찾아와 위로해준 두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진정한 위로’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내게 와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무덤 저편에 있는 소망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하였습니다. 나는 감동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그가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떠났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내 옆에 앉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언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내 곁에 한시간 이상 앉아서 내가 얘기하면 들어주고, 짧게 얘기하고, 짧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도 떠났습니다. 그런데 보내기 싫었습니다. 나는 감동이 되었고 위안도 받았습니다. 그가 떠나자 너무나 서운했습니다.”
위로할 사람이 필요할 때 그의 옆에 앉아서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에게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침묵은 어떤 대화나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5)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두 사람은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가끔씩 침묵 가운데 전해지는 가르침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성도여러분! 침묵을 좋아하십니까? 말을 즐겨하십니까? 침묵과 말은 항상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침묵 속에는 말이 들어있지만 말속에는 침묵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침묵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말속에 들어있는 있는 의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스위스인 들은 "웅변은 은, 침묵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시기 적절한 침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덕목입니다. 때와 장소에 맞게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은 금과 같이 빛나 보이고 돋보일 수 있으며 사람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주기도 합니다. 말을 해서 풀어야 할 과제가 있고 침묵으로 넘어가야 할 상황도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선택해야 합니다. 말을 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막힌 담을 헐 듯 수월하게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면 무심코 내뱉은 비난의 말이 설사 악의가 없었더라도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상처를 주고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지금 어떤지 꼭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해서 해결이 된다면야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묵묵히 참고 넘어가는 인내가 아쉽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해주는 것보다 그냥 눈감아 주고 잘한 점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을 수 있습니다. 남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때입니다. 칭찬이 아닌 비난의 말이라면 오히려 침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캐나다의 의학박사 윌리엄 오슬러는 침묵에 대한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침묵은 가장 훌륭한 예술에 속한다. 생활의 분위기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소한 일, 즉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진다. 항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든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또한 항상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애쓰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내는 불평으로 인하여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나중에 말한 것을 후회해도 일단 입으로 쏟아놓은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함부로 했던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굉장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입을 지켜 꼭 필요한 말, 유익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으면, 나중에 고통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조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 13:3)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즉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 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고난은 동일하다. 그러나 고난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고난이 다른 이유는 우리의 고난이 죄 값으로 인한 징계의 결과라면 주님의 고난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중보적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고 쓰라린 아픔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신 이유는 그 고난 속에 인류 구원의 값진 보화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겸손과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라고 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말은 결코 허구가 아닙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을 향하여 수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의 환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주님의 발걸음은 무거우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장사하며 돈 바꾸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셨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다음날 예수님은 감람산 위에서 자기를 시험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에게 세금 문제와 죽은 자의 부활과 율법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다니로 돌아가신 주님은 셋째날을 맞아 온종일 쉬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날을 침묵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베다니에서의 주님의 침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와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측하시면서도 베다니에서 온종일 계시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침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침묵 속에는 언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토머스 칼라일은 “침묵은 말 이상으로 웅변적이다. 연설은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더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베다니에서 하루를 쉬시면서 장차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는 침묵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소모적인 행동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침묵은 두 걸음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행위였습니다. 베다니에서 온종일 침묵하신 주님의 행동은 많은 의미를 지닌 말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현실을 수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큰일을 앞에 두고 휴식하는 ‘쉼’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주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또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속의 대명(大命)을 감당키 위하여 쉼을 통해 힘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쉼표가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닙니다. 쉼이 없는 신앙 역시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은 공생애 기간에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 쉬시면서 또 기도하신 것입니다(막 1:35).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제7일에 쉬셨습니다(창 2:1∼2).
쉼은 사역의 전제조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쉼에 철저하셨고 또 이를 통하여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렇듯 쉼은 우리 인생의 활력소이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주님에게 베다니의 침묵은 이렇듯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수용하시고 이를 위해 쉼과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승리는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침묵의 힘으로 설득하십시오. 그것은 말보다 침묵이 더욱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언집에 보면 "혀를 조용히 쉬게 하는 것은 현명한 머리이다."(윌리암 루카스),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이다."(죤 드라이든) "침묵을 지키면 사람들은 당신을 철학자로 여길 것이다."(로마 격언) 등 침묵에 대한 명언이 많습니다. 침묵이 그만큼 값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입니다. 꼭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속으로라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삶이 힘들고 앞길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하며,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의 길이 없는 문제로 고통을 받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맞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을 믿습니까? '기도와 응답',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씀입니까? "부르기 전에 응답하겠고, 말을 마치기 전에 들을 것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신 기록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펴더라도 기도는 응답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6, 13)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하나님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을 찾았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생생한 기도 응답의 간증들을 듣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입니다.
사업가인 짐이 빌리 그레이엄에게 말했습니다.
"저와 30년 동안 동업하는 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 부끄러운 일이군요. 함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권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즉시 폴에게 가서 당신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새롭게 살아야 하며, 삶을 새롭게 영위하기 위해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간청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은 폴의 사무실에서 아무 말 없이 서성거렸습니다. 이상히 여긴 폴이 물었습니다. "짐, 매우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응,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뭐지?"
"자네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네. 난 자네가 예수를 믿으면 좋겠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폴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동안 나는 자네가 내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네.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새롭게 해주시길 그리스도께 기도하겠네. 자네와 함께 이번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그 분께 정식으로 믿음을 고백하겠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 14)

셋째는 지혜로운 말,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칭찬하는 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영광돌리는 말 그리고 선한 말, 경우에 합당한 말(잠25:11) 등 입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12:18)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넷째, 악한 일과 불의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일에 대한 침묵은 승락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악을 깨우치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파숫꾼의 사명입니다.(겔3:17- 20, 겔33:7-11)
북한의 인권탄압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의 거짓됨을 알려야 합니다.
수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할 때 가장 큰 유익이 무엇입니까? 수도원에 있는 전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또한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그곳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정신을 분산시키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며칠 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내적인 평화와 힘이 생깁니다. 또한 믿는 교인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현재의 고난은 내일의 축복이 되고, 나의 고난은 자녀의 축복으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침묵이 없으면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혼잡하고 소음 중에서도 만나 주시지만 대개 조용한 장소에서 만나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과 잠잠한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30장 15절에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 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잠잠하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는 현명한 사람이 10분이라도 더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잠잠히 신뢰함으로 뿌리깊은 나무처럼 뿌리깊은 영혼과 생명수를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 하나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로 침묵하실 때가 계십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침묵을 본받게 하소서 부득이 말을 할 때는 행복을 낚아내는 축복의 말을 많이 사용하여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고, 적절한 때에 담대하고 지혜롭게 말할 수 있는 입술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조용한 물이 깊은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말 중에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아픈곳을 말하면서 그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할 뿐 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을 하지않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없이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추측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힘을 돋구어 주는 그런 말을 나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까...
사람들은 드러내는 말 보다는 밝은 미소로 침묵으로 조용한 물이 깊은 것 처럼 깊이 있는 말로 사랑과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내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가?
0 나는 말에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가?
0 나는 불필요한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지는 않는가?
0 내 입술은 정결하며 정직합니까?
0 내가 침묵할 때는 언제입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 침묵하는 강자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벌였다.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정하는 수컷끼리의 싸움이다.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암컷 호랑이들을 거느리며 좋은 먹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졌다. 한 마리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또 한 마리는 침묵하며 이에 맞섰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렁차게 포효하던 호랑이가 용맹스럽게 싸울 것 같더니 도중에 그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고 말았다. 크게 소리 지르는 호랑이일수록 약한 놈이고 싸움에 진다고 한다. 진정 강한 호랑이는 오로지 침묵과 위엄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고 한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 호랑이가 보고 웃을 것이다.

* 예화(2): 비난과 침묵

말에 어폐가 좀 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은 무척 쉽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걱정해 주는 것처럼, 또 진심으로 위하여 충고해 주는 척하면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끼쳐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간간이 우리 주변에 불미스러운 추문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서 충격의 파장은 크고 소문은 확산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무책임하게 침소봉대하여 말들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만들어 겉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사이버 상에서의 소문은 진위 확인은 고사하고 유통기한도 없이 가히 언어 폭력 수준입니다. 이럴 땐 말을 옮기지 말고 그저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추문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걱정한답시고 이리저리 글을 펴다 나를 정도로 우리는 걱정하지도 않으며, 또 실제로 당사자와 친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혹평하면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기심에 따라 소문내는 참새 입방아 노릇만 하게 되고 결국 상처를 재생산하며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남의 말은 좋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침묵이 나을지 모릅니다. 격려할 수 없다면 오히려 비난보다는 침묵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예화(3): 하나님의 침묵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섣부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고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쫓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머릿속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때가 무르익었을 때 과일을 수확해야 그 과일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고르십니다. 침묵의 시기가 지나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83:1)
* 기도: 침묵 후에 이어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소서.

* 예화(4): 침묵 게임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침묵 게임’을 시키셨다. 가장 오랫동안 침묵하는 사람이 이기는, 많은 부모가 좋아하는 게임이다. 어느 날 몇 시간 동안 그 게임을 하고 있을 때(우리는 그 게임을 잘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침묵 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요즘도 전혀 다른 이유로 침묵 게임을 하고 있다.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움 때문에 말하길 억제한다. 갈등이 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이 두렵고, 인간관계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에 대해 괴롭지 않은 척할 때, 본심과 달리 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할 때 침묵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동안 서로 침묵 게임을 하는 부부들을 안다. 그들은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친밀감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침묵 게임을 하는 직원들을 안다. 그들은 파문 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원망과 좌절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나는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와 침묵 게임을 하는 교인들을 안다. 그들은 거절이나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겠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제공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지금 당신은 누구와 침묵 게임을 하고 있는가? 침묵 게임 뒤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 예화(5): 침묵시간

"엄마 오늘 날씨 어때요? 더우면 1번 안 더우면 2번." 그러면 나는 손가락을 한 개 펴 보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덥습니다. 아이는 짧고 시원한 옷을 골라 입습니다.
내가 침묵하는 날이면 딸아이는 알아서 상황을 정리해 갑니다. 처음엔 말 안 하는 엄마보다 차라리 잔소리하는 엄마가 더 낫다더니 이젠 나의 침묵시간을 즐기는 듯합니다. 아직 어린 둘째는 "엄마 또 침묵이야?" 하고 투덜거립니다. 앞에 와서 웃기기도 하고 심술도 부립니다. 하지만 그도 엄마의 침묵을 조금씩 이해해 갑니다.
침묵, 일상에서 늘 하던 말을 멈추고 나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의미 없이 던져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참된 말을 찾기 위한 노력입니다. 처음엔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이젠 침묵이 주는 귀한 의미들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침묵은 금'이란 말을 절실히 공감하게 됩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쏟아 붓던 말들, 그들을 위한 말이 왜 잔소리가 되는지 ….
오늘도 나의 침묵시간에 딸아이는 분주합니다. 할 이야기가 많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하얀 종이에 이것저것을 써 가지고 옵니다. 엄마가 고개만 끄덕여도 의사표시가 될 수 있도록 보기 항목을 여러 개 적어오는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혹 침묵시간에 전화라도 오면 먼저 전화기로 달려갑니다.
침묵 시간은 나 자신만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엄마를 배려 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보다 아이들이 더 큰 것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침묵은 아이들과 내가 사랑을 느끼며 참으로 하나가 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4. 침묵에 관한 금언

0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토마스 칼라일)
0 혀를 조용히 쉬게 하는 것은 현명한 머리이다.(윌리암 제임스 루카스)
0 말을 할 때와 침묵을 지킬 때가 따로 있다.
0 비록 자기가 올바를 지라도 끝까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 큰 힘이 있다.(카토)
0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이다.(죤 드라이든)
0 침묵은 승낙을 의미한다.(영국 속담)
0 하지 않은 말은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루이스 코수드)
0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때 침묵은 분별력 있는 웅변이다.(보비)
0 만일 그대가 현명하다는 평을 받고 싶으면 그대의 혀를 다물 줄 아는 현명함을 먼저 배우라(프란시스 촬스)
0 개미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자는 없다. 그런데 개미는 말이 없다.(벤자민 프랭클린)
0 사람이 말하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배우게 되지만 침묵하는 일은 좀체로 배우지 못한다.(탈무드)

5. 찬송: (48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1.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2.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 주라
3.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옆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 샘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4.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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