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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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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은 지난 1월 6일 소천하신 김정순장로님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도 김장로님을 특별히 기릴 수 있는 내용이라야 되겠습니다만 저는 유감스럽게도 김장로님을 친숙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오늘의 말씀증거에서 장로님의 생전에 가지셨던 뜻을 바르게 기억하고, 그래서 그분을 애틋이 추모하는 마음을 전달할 수 없음을 참으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장로님을 기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오늘의 예배순서 곳곳에서 표현될 것입니다. 저는 장로님의 일생을 전해들으면서 그분의 고귀한 신념과 정의를 사랑하는 열정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깊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장로님에 대하여 특별한 느낌을 가졌던 것은 지난해 4월에 제가 '광복 50주년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증거를 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날 제가 전한 말씀의 내용은, 우리민족이 광복 50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시급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문제는 무엇보다도 자율적이며 자생력 있는 민족으로 일어서야 하는 일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최남선 등의 민족문화 담론들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며, 또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초기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 민족 지도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동시에 그 문제점도 극복해 내어야 하는데, 이 민족자생 능력의 유지를 바빌론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 신앙을 창출해 낸 이스라엘 제사문서 기자들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께서 예배 후에 저에게 찾아 오셔서 오늘의 말씀에 대하여 특별히 고맙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장로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저는 장로님은 민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고,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시는, 민족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분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오늘 저의 말씀증거는 이러한 김장로님을 생각하면서 성서가 말하고 있는 우리 인생의 삶과 죽음의 경험에서 발견되어지는 의미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 가운데 구약성서 전도서는 지혜문서에 속하는 글입니다. 구약성서는 크게 율법서,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집이라는 세 문서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혜문서는 성문서집에 속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문서의 특성은 그것이 철저하게 인간 경험 중심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율법서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법도를 제시하고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모세를 찾아 부르십니다. 또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찾고 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심판과,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구원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자들의 시대적 통찰을 통하여 전달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를 대행하여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서나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자신의 뜻을 요구하시며, 그 뜻에 맞지 않을 때는 심판을, 맞을 때는 복을 내리시는 등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을 찾아 나아간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 전승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스라엘의 역사나 그 역사 속에서 요구하신 법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 생활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 등이 무엇인가 하는 등의 인생살이의 문제들을 철저히 인간 경험에 의하여서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색, 경험들을 중심으로 인간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고 궁극적 의미를 탐색해 나갑니다. 삶의 법칙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율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발견해 찾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발견은 인간 경험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들 문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래들입니다.
이 지혜문서에 속하는 오늘의 본문 전도서는 더 철저한 인간 경험의 고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도자의 인생 경험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서의 전체적 맥락은 생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해 나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동력자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인류 구원을 위한 민족 선택을 하며, 모세를 불러서 노예로부터 해방사건을 일으키게 하며,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가고,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윤리적 삶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스라엘을 요구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구원 행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가면서 새롭게 재창조되는 희망을 가진 존재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지혜문서에 속하는 잠언서에도, 거기에는 비록 율법과 예언 전승이 희박하다 할지라도, 낙관적 역사관이 보입니다. 다만 사람이 지혜롭게만 행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오직 지혜를 갖는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 지혜를 얻는 것조차도 헛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잠언서와 전도서의 대조에서 전도서의 허무관념을 더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잠언서에는 인간이 지혜를 깨닫기만 하면 인간 생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면 행복을 보상받는다는 낙관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를 갖는 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잠언서에서는 현자들이 현명하고 의롭게 살면 번영과 부귀와 존경을 받고 어리석고 간악한 사람은 그러한 존경과 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볼 때 인생의 모습이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어리석고 간악한 사람이 더 부귀를 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는 것도 헛되다는 것이지요. 또 잠언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혜가 열쇠이며 하나님의 길을 통찰할 수 있으므로 지혜는 절대적 선이 된다고 하여 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가 인간의 궁극적 의미나 인생 자체의 깊고 신비한 측면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지혜의 한계를 주장합니다. 인생의 복잡하고 신비한 측면들은 인간의 지혜로는 그 궁극적 면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간의 궁극적이고 신비한 측면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며 그 손에만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 하여 세우는 목적이나 안다고 하는 지식과 계획 등은 모두 허무하며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간의 허무한 상태를 제일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일시성과 무상함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이런 운명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헛되다'라고 하는 말은 본질적이다라는 것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을 의미하여 영원한 것과 대조되는 말이지요. 추운 겨울날 아침 숨을 내 쉴 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입김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하는 일, 학문, 희락 등이 아무런 좋은 결과를 주지 않고 인생의 중요한 의의가 재물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그래서 죽음의 동등성을 말합니다. 지혜를 가진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똑같이 죽음을 가지며,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죽음에 이르며, 지식이 많은 자나 무식한 자가 모두 같이 그 길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까지도 그 길에 똑같이 간다고 하여 생의 헛됨을 노래합니다.
그러면 이 전도자의 비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의 상대화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활동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그의 관념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이에 대한 헌신이 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보다 낫다, 보다 못하다의 평가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의 이러한 비관론 때문에 이것이 경전성의 논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장의 뒷부분에는 이 전도서를 찬양하는 주장과, 율법과의 관련성을 가지는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전도서의 경전적 가치를 확보하려는 후대의 노력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요 하나님만이 인간의 요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인생과 우주와 만물을 이루고 운행하시는 근원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며, 지혜주의가 지혜를 실천함이 인생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과응보적이며 보상적인 원리의 지배를 말하는 것을 전도자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나 보상주의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 이렇게 허무를 말함은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제한성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의 길로 다시 돌아서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지 못할 결정적인 존재이면서도 숨어 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역설적으로 극단적 비관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 태도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인생의 사실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 인생을 고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일시성을 생각하며 이 경험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의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에는 출생의 자유가 없으며 죽음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 생활의 계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삶의 모든 것은 신비요 수수께끼로 남는다고 보며,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고백입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뒤섞여 있는 인생살이의 복잡함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 경험의 고백에서 내리는 코헬렛의 결론은 인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큐리안적 요소를 보입니다. 생의 분깃으로 현재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즉 능동적으로 현재를 살라는 것이며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현재를 의미 있게 만들라는 보다 능동적 요청으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코헬렛의 죽음의 허무에 대한 고백은 진솔한 인간 경험의 고백입니다. 인생이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무상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부자도 거지도 지배자도 억압당하던 자도 지혜자도 우매자도 심지어 동물까지도 죽음 앞에 동일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이 진솔한 고백의 중심에 두고 있는 의미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헛되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고 매달리며 잡으려고 애쓰는 노력들이 쓸데없고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더 잘 되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죽음 앞에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일깨웁니다. 지혜를 찾아서 얻게 되는 명예와 존경까지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율법을 잘 지키거나 지혜롭게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헛된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매달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 안심하고 내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솔로몬의 삶을 예로 제시합니다. 그는 스스로 솔로몬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의 헛됨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브루조아적 사고라고 봅니다. 그리고 보수적 입장이라고 평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코헬렛의 중심 주제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모든 것이 생명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와도 상통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 내 영혼아 배부르게 지내자고 할 때 하나님께서 오늘 네 생명을 거두어 가면 그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질문한 비유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이 죽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현재를 의미 있게 능동적으로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우리는 요한복음의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허무를 강조한 코헬렛에게 오늘 우리는 그 다음의 고백을 연결시켜 재고백하고자 합니다. 코헬렛의 의미 있는 죽음이 의미 있는 생명과 영원을 가져온다는 결론에 대한 확장이요 반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의 본문은 죽음에 대한 세속적 이해로 끝나지 않고 전도서를 훌쩍 넘어 생명의 확장과 역설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24-25절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자칫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비관적이 되고 허무함에 빠지게 되지만 그러나 성서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생명은 죽음으로써만 확장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학자들은 amazing paradox라고 합니다. 마가 8:35, 마태 16:25, 누가 9:24, 마태 10:39, 누가 17:33 등에도 같은 맥락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요한복음 12장의 맥락은 당시 요한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에 연결됩니다. 유대교로부터 축출을 당하고 핍박받게 되는 위기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요한 공동체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일은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당하였던 공포 분위기는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가 그들을 얼마나 위협하였던지 그 당시에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던 상황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공동체 앞에 예수의 생애를 보여줍니다.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위협 앞에 떨고 불안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의 생을 따를 것을 요청한 말이 바로 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였습니다. 예수는 진정으로 죽어서 생명을 확장시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자초하면서 그의 일생을 살았고 결국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종교와 정치적 기득권자들로부터 눌림 받은 민중을 비호하기 위하여 종교, 정치체제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안식일 논쟁과 반 성전적 행동이 이를 보여줍니다. 예수의 안식일 논쟁은 사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유대교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험의 도전이었으며 유대교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을 소탕한 사건은 성전 체제에 항거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성전 체제를 묵인하는 로마제국에 항거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의 성취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제 전도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서 한 특수한 선택하는 죽음의 이야기로 우리는 옮겨왔습니다. 선택하는 죽음이 보편적 죽음의 허무를 극복해 내고, 인생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선택하는 죽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며, 생명이 온 세상에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선택은 그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생명력은 계속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이 땅위에서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옳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의 판결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통한 생명의 확장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죽음에 의한 생명의 확장을 동의보감의 유의태와 허준을 통해서 그리고 1970년대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게서 봅니다. 특히 노동운동가로서 22세에 분신 자살하여 죽은 전태일은 수많은 노동자 어린 여공들을 사랑한 가슴으로 죽음을 선택하였고, 그는 지금 고난받는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의 생애가 영상화되고 문서화된 것은 정보화 시대의 부활의 현상입니다. 그가 안타깝게 열악한 노동자의 환경개선과 근로 기준법에 의한 노동조건의 개선 노력은 그의 죽음으로 사건화되고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지(1970.11.30) 사흘 뒤에 서울 법대생 100여명이, 상대생 400여명, 그리고 나흘 뒤에는 법대생 200여명, 문리대생 100여명, 이화여대생 30여명, 그 밤에 연세대학생 200여명, 고려대생 300여명에게로 그의 생명이 번져나가기 시작하였고, 기독교계로 확산되었으며, 사회 전체로 번져 나갔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처럼.
부활은 죽음을 통한 생명의 확장입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예수의 부활이 그가 이 땅위에서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해 그것이 옳다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판결이라면 전태일열사의 부활도 바로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인정하는 판결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전태일의 죽음의 동기에 대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여 '나의 전체의 일부' 또는 '나의 또 다른 일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고통을(특히 그는 어린 여직공들의 고통에 더 괴로워하였는데) 자기 동일시 할 수 있는 연민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참된 기쁨은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하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라는 지극히 소박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이것들이 그를 죽음으로까지 선택하게 한 요소였습니다. 우리들도 연민을 말하고 참된 소박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전태일에게 비추어 보면 나 자신의 언어가 얼마나 위선적이며 가증된 것인지 금방 탄로가 납니다. 그는 참으로 언어 그대로의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진실한 연민과 소박하고 진솔한 희망에의 신념은 새로운 생명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많은 열매 맺는 썩어짐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연민의 본성과 오늘보다 내일을 낫게 하기 위한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 구절을 너무 거시화하고 추상화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 희생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설정하고 사람들에게 특정한 몇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전태일의 말을 통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소박한 행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일을 오늘보다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살며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의 삶이며, 그로 인해 생명의 확장이 오고, 우리는 부활에 이르며, 전도서의 허무관념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나는 전태일열사의 말을 빌어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일반적 허무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그리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모든 약한 것을 자기 동일시하는 연민과 오늘보다 내일을 낫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정의의 길을 걷는 삶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그런 삶은 영원히 메아리치고 확장될 것입니다. 암울하던 유신시대 민주화 투쟁의 길을 선택하신 김정순장로님의 생애 또한 이러한 정의의 길 위에 서 계신 것을 우리는 이 시간 바라봅니다. 이제 그분의 생명은 우리 가운데 확장될 것이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고 따르셨던 앞서가신 정의의 길을 걸으셨던 선배들과 함께 우리 곁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수많은 썩어진 밀알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생명이요 그 결실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오늘 읽은 성서본문 가운데 구약성서 전도서는 지혜문서에 속하는 글입니다. 구약성서는 크게 율법서,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집이라는 세 문서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혜문서는 성문서집에 속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문서의 특성은 그것이 철저하게 인간 경험 중심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율법서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계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법도를 제시하고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모세를 찾아 부르십니다. 또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찾고 부르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심판과,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구원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자들의 시대적 통찰을 통하여 전달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그를 대행하여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서나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자신의 뜻을 요구하시며, 그 뜻에 맞지 않을 때는 심판을, 맞을 때는 복을 내리시는 등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을 찾아 나아간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 전승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스라엘의 역사나 그 역사 속에서 요구하신 법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 생활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 등이 무엇인가 하는 등의 인생살이의 문제들을 철저히 인간 경험에 의하여서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색, 경험들을 중심으로 인간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고 궁극적 의미를 탐색해 나갑니다. 삶의 법칙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율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발견해 찾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발견은 인간 경험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들 문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래들입니다.
이 지혜문서에 속하는 오늘의 본문 전도서는 더 철저한 인간 경험의 고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도자의 인생 경험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서의 전체적 맥락은 생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해 나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동력자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인류 구원을 위한 민족 선택을 하며, 모세를 불러서 노예로부터 해방사건을 일으키게 하며,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가고,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윤리적 삶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스라엘을 요구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구원 행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가면서 새롭게 재창조되는 희망을 가진 존재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지혜문서에 속하는 잠언서에도, 거기에는 비록 율법과 예언 전승이 희박하다 할지라도, 낙관적 역사관이 보입니다. 다만 사람이 지혜롭게만 행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오직 지혜를 갖는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 지혜를 얻는 것조차도 헛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잠언서와 전도서의 대조에서 전도서의 허무관념을 더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잠언서에는 인간이 지혜를 깨닫기만 하면 인간 생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면 행복을 보상받는다는 낙관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를 갖는 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잠언서에서는 현자들이 현명하고 의롭게 살면 번영과 부귀와 존경을 받고 어리석고 간악한 사람은 그러한 존경과 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는 실제 생활에서 볼 때 인생의 모습이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어리석고 간악한 사람이 더 부귀를 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는 것도 헛되다는 것이지요. 또 잠언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혜가 열쇠이며 하나님의 길을 통찰할 수 있으므로 지혜는 절대적 선이 된다고 하여 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가 인간의 궁극적 의미나 인생 자체의 깊고 신비한 측면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지혜의 한계를 주장합니다. 인생의 복잡하고 신비한 측면들은 인간의 지혜로는 그 궁극적 면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간의 궁극적이고 신비한 측면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알며 그 손에만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 하여 세우는 목적이나 안다고 하는 지식과 계획 등은 모두 허무하며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간의 허무한 상태를 제일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일시성과 무상함을 말해줍니다. 사람은 이런 운명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헛되다'라고 하는 말은 본질적이다라는 것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을 의미하여 영원한 것과 대조되는 말이지요. 추운 겨울날 아침 숨을 내 쉴 때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입김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하는 일, 학문, 희락 등이 아무런 좋은 결과를 주지 않고 인생의 중요한 의의가 재물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그래서 죽음의 동등성을 말합니다. 지혜를 가진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똑같이 죽음을 가지며,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죽음에 이르며, 지식이 많은 자나 무식한 자가 모두 같이 그 길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까지도 그 길에 똑같이 간다고 하여 생의 헛됨을 노래합니다.
그러면 이 전도자의 비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의 상대화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활동의 가치를 상대화하는 그의 관념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이에 대한 헌신이 없는 것으로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보다 낫다, 보다 못하다의 평가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의 이러한 비관론 때문에 이것이 경전성의 논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장의 뒷부분에는 이 전도서를 찬양하는 주장과, 율법과의 관련성을 가지는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전도서의 경전적 가치를 확보하려는 후대의 노력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근원이요 하나님만이 인간의 요구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인생과 우주와 만물을 이루고 운행하시는 근원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며, 지혜주의가 지혜를 실천함이 인생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과응보적이며 보상적인 원리의 지배를 말하는 것을 전도자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나 보상주의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 이렇게 허무를 말함은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제한성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의 길로 다시 돌아서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지 못할 결정적인 존재이면서도 숨어 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역설적으로 극단적 비관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 태도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사람은 어떤 인생의 사실을 분석할 수는 있어도 그 인생을 고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인간 자신의 연약함과 일시성을 생각하며 이 경험 때문에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의 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에는 출생의 자유가 없으며 죽음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 생활의 계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삶의 모든 것은 신비요 수수께끼로 남는다고 보며,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고백입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뒤섞여 있는 인생살이의 복잡함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 경험의 고백에서 내리는 코헬렛의 결론은 인생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큐리안적 요소를 보입니다. 생의 분깃으로 현재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즉 능동적으로 현재를 살라는 것이며 현재의 중요성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현재를 의미 있게 만들라는 보다 능동적 요청으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코헬렛의 죽음의 허무에 대한 고백은 진솔한 인간 경험의 고백입니다. 인생이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무상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부자도 거지도 지배자도 억압당하던 자도 지혜자도 우매자도 심지어 동물까지도 죽음 앞에 동일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의 이 진솔한 고백의 중심에 두고 있는 의미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헛되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추구하고 매달리며 잡으려고 애쓰는 노력들이 쓸데없고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더 잘 되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죽음 앞에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일깨웁니다. 지혜를 찾아서 얻게 되는 명예와 존경까지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율법을 잘 지키거나 지혜롭게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헛된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매달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소유해야 안심하고 내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솔로몬의 삶을 예로 제시합니다. 그는 스스로 솔로몬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의 헛됨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브루조아적 사고라고 봅니다. 그리고 보수적 입장이라고 평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코헬렛의 중심 주제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모든 것이 생명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와도 상통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곡식을 많이 쌓아 놓고 내 영혼아 배부르게 지내자고 할 때 하나님께서 오늘 네 생명을 거두어 가면 그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질문한 비유의 의미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이 죽음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현재를 의미 있게 능동적으로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우리는 요한복음의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허무를 강조한 코헬렛에게 오늘 우리는 그 다음의 고백을 연결시켜 재고백하고자 합니다. 코헬렛의 의미 있는 죽음이 의미 있는 생명과 영원을 가져온다는 결론에 대한 확장이요 반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의 본문은 죽음에 대한 세속적 이해로 끝나지 않고 전도서를 훌쩍 넘어 생명의 확장과 역설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 12장 24-25절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자칫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비관적이 되고 허무함에 빠지게 되지만 그러나 성서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본문은 생명은 죽음으로써만 확장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학자들은 amazing paradox라고 합니다. 마가 8:35, 마태 16:25, 누가 9:24, 마태 10:39, 누가 17:33 등에도 같은 맥락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요한복음 12장의 맥락은 당시 요한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에 연결됩니다. 유대교로부터 축출을 당하고 핍박받게 되는 위기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요한 공동체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일은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가 당하였던 공포 분위기는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가 그들을 얼마나 위협하였던지 그 당시에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던 상황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공동체 앞에 예수의 생애를 보여줍니다.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위협 앞에 떨고 불안해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의 생을 따를 것을 요청한 말이 바로 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였습니다. 예수는 진정으로 죽어서 생명을 확장시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자초하면서 그의 일생을 살았고 결국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종교와 정치적 기득권자들로부터 눌림 받은 민중을 비호하기 위하여 종교, 정치체제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안식일 논쟁과 반 성전적 행동이 이를 보여줍니다. 예수의 안식일 논쟁은 사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유대교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험의 도전이었으며 유대교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을 소탕한 사건은 성전 체제에 항거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성전 체제를 묵인하는 로마제국에 항거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러나 이러한 일들의 성취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제 전도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서 한 특수한 선택하는 죽음의 이야기로 우리는 옮겨왔습니다. 선택하는 죽음이 보편적 죽음의 허무를 극복해 내고, 인생이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선택하는 죽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며, 생명이 온 세상에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선택은 그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생명력은 계속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이 땅위에서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옳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의 판결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통한 생명의 확장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죽음에 의한 생명의 확장을 동의보감의 유의태와 허준을 통해서 그리고 1970년대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게서 봅니다. 특히 노동운동가로서 22세에 분신 자살하여 죽은 전태일은 수많은 노동자 어린 여공들을 사랑한 가슴으로 죽음을 선택하였고, 그는 지금 고난받는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의 생애가 영상화되고 문서화된 것은 정보화 시대의 부활의 현상입니다. 그가 안타깝게 열악한 노동자의 환경개선과 근로 기준법에 의한 노동조건의 개선 노력은 그의 죽음으로 사건화되고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지(1970.11.30) 사흘 뒤에 서울 법대생 100여명이, 상대생 400여명, 그리고 나흘 뒤에는 법대생 200여명, 문리대생 100여명, 이화여대생 30여명, 그 밤에 연세대학생 200여명, 고려대생 300여명에게로 그의 생명이 번져나가기 시작하였고, 기독교계로 확산되었으며, 사회 전체로 번져 나갔습니다. 예수의 부활사건처럼.
부활은 죽음을 통한 생명의 확장입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예수의 부활이 그가 이 땅위에서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해 그것이 옳다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판결이라면 전태일열사의 부활도 바로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인정하는 판결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 전태일의 죽음의 동기에 대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여 '나의 전체의 일부' 또는 '나의 또 다른 일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고통을(특히 그는 어린 여직공들의 고통에 더 괴로워하였는데) 자기 동일시 할 수 있는 연민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참된 기쁨은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낫도록 하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라는 지극히 소박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이것들이 그를 죽음으로까지 선택하게 한 요소였습니다. 우리들도 연민을 말하고 참된 소박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전태일에게 비추어 보면 나 자신의 언어가 얼마나 위선적이며 가증된 것인지 금방 탄로가 납니다. 그는 참으로 언어 그대로의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진실한 연민과 소박하고 진솔한 희망에의 신념은 새로운 생명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많은 열매 맺는 썩어짐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연민의 본성과 오늘보다 내일을 낫게 하기 위한 노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 구절을 너무 거시화하고 추상화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기 희생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설정하고 사람들에게 특정한 몇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전태일의 말을 통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소박한 행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일을 오늘보다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살며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한 알의 밀알의 삶이며, 그로 인해 생명의 확장이 오고, 우리는 부활에 이르며, 전도서의 허무관념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나는 전태일열사의 말을 빌어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일반적 허무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은 그리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모든 약한 것을 자기 동일시하는 연민과 오늘보다 내일을 낫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정의의 길을 걷는 삶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그런 삶은 영원히 메아리치고 확장될 것입니다. 암울하던 유신시대 민주화 투쟁의 길을 선택하신 김정순장로님의 생애 또한 이러한 정의의 길 위에 서 계신 것을 우리는 이 시간 바라봅니다. 이제 그분의 생명은 우리 가운데 확장될 것이며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고 따르셨던 앞서가신 정의의 길을 걸으셨던 선배들과 함께 우리 곁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수많은 썩어진 밀알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생명이요 그 결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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