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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새로움의 창조인가

전도서 권진관............... 조회 수 1392 추천 수 0 2008.10.05 09: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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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전5:18-20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1.21주일설교 
창세기 12:1-9, 전도서 5:18-20, 마태복음 26:38-39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성서의 토대가 되고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지고 이어져 온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짐을 싸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이것은 대단한 약속입니다. 야훼께서 직접 그에게 들려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이 사실이므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희망을 가지고 집을 떠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이 주어진다면 매우 행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잊지 않고 그것을 평생 붙드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 믿음인 것입니다. 행운은 저절로 오는 것이지만 믿음은 자신을 던지는 모험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태어났으므로 행운아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인간은 아닙니다. 행운에 의존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하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약속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붙드는 믿음 그것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다른 유혹이 있을 때, 우리는 원래의 약속을 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상(히브리서 11:1)이며 소망의 내용은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는가요? 이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이었고, 아브라함에게 옛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서 새로운 땅을 향하라고 충동하시고, 이끄시는 신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혹하시는 하나님, 새로움을 향해서 “꼬시고”, 동하시고 이끌어내시는 야훼 하나님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출애굽을 이끄실 때도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이끌어내시는 유혹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야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인생도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 아브라함은 75세의 고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대체로, 나이가 많이 들어 고령이 되면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잘 배합하고 정리해서 사는 것이 대체적인 모습이고, 그것이 나이든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나이에 새로운 결단을 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자신을 편안하게 하여 주었던 것들, “고향과 친척과 나를 보호해 주었던 아버지의 집” 이런 것들이 아브라함을 안주하게 만들었던 것인데, 이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신 야훼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약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유명한 과정철학자 Alfred North Whitehead는 신을 유혹하는 자(Lurer)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 신적인 목표를 안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유혹하는 신은 우리 모두를 그 신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충동하십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야훼 하나님과 매우 동일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신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목적, 즉, initial aim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약속을 잊거나 도중에 포기하여 신의 목적을 생애 동안에 이루어 놓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의 고령에 떠났는데 그보다 젊은 우리들이 못 떠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새로운 것을 향하여 도전하는 나그네의 길이라고, 아니, 탐험가의 험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말이 장렬한 실패의 결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은 시도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장렬하게 실패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패 그 자체가 성공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렬한 실패도 해 보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잘 사느냐, 성공했느냐로 따지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는 형이냐 아니면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 사람이냐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가 희망이 있느냐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고 주저앉는 교회냐로 갈리는 것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는 벌써 20세의 성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할 시점에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의 이러한 상태에 그냥 주저앉고 말거냐, 아니면 가져갈 것은 챙기고 놔둘 것은 뒤에 놓아두고 새로운 땅을 향해서 탐험해 나갈 것이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20주년 행사도 하면서 올 한 해는 대화를 하며 모색하며,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탈출하는 교회, 출애굽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항상 움직여야 하며, 동시에 멈춤도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움직임과 멈춤에 조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국의 많은 대형 교회들이 현실안주형, 즉 멈춤만 계속하는 교회라고 봅니다. 최근에는 사학법 개정 반대 삭발까지 하면서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발버둥은 수많은 양심 있는 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이 매우 시급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 중에서 좋은 것은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면서 주어진 것들 중에서 선한 것들을 모아서 잘 배합하고 종합하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형성해 나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져갈 수 없는 것들 그리고 가져가면 안 좋은 것들을 뒤로 했습니다. 그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뒤로 했지만, 데리고 가져 갈 수 있는 것, 아니 필요한 것은 함께 갔습니다. 그것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이것은 각자가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마는, 적어도 몇 가지는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과거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안주하고 과거를 자랑하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과거는 잊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망각하는 것이 좋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 재미있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늘 고등학교 시절만을 얘기합니다. 옛날에 고착된 모습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빌립보서에 바울의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3:13-14) 새길교회의 과거의 것들, 우리의 자랑할 것들, 우리를 안주하게 뒤에서 끌어당기는 모든 것들은 이제 뒤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이 떠나야 합니다.

둘째로 버려야 할 것은 우리들 속에 있는 교만입니다. 교만심에 대한 반대는 겸손이지만, 그러나 겸손의 구체적인 모습은 열린 자세라고 봅니다. 교만은 닫혀 있는 마음입니다. 자기중심성의 교만은 나와 다른 것, 새로운 것에 대해서 닫혀 있습니다. 개신교회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교만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무조건 타부시하는 편협하고 닫힌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열려있는 마음은 새로움에 대해서도 열려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대화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교만은 욕심을 낳습니다. 욕망과 희망은 다롭니다. 둘 다 바라는 것이 있지만,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욕망을 품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희망을 품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이 주신 가치와 가능성에 참여하는 자세라고 한다면, 욕심과 욕망은 하나님이 주신 가치를 자기만이 소유하려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가야 할 자산은 무엇입니까? 겸손, 성실, 사랑하는 마음, 열린 마음, 소망, 그리고 책임적인 자세 이런 것들이 있겠지요. 저는 여기에 더해서 우리 교회가 내세웠던 좋은 이념 즉, 삼무 정신, 참여주의가 더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삼무 정신이란 무 (담임) 목사, 무 교회-건물, 무 교단을 지향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향해 가지고 가야 하는 필요한 품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고, 예배인도에 골고루 참여하는 참여주의 정신도 우리가 가져가야 할 귀중한 자산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과거의 것을 잊고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원천이며 새로움의 원천이며 생명의 풍부한 원천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야훼가 이제까지 하란 지방에서 아무 문제의식과 희망을 품지 않고 안주하며 늙어가고 있던 촌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이끌어 내셨습니다. 왜 이러한 인물을 이끌어내셨을까요? 힘 있고, 젊고, 용기 있는 인물을 선택하지 않고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이 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의 본문 즉 전도서의 글에서는 새로움을 찾아 떠나라는 말씀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 먹고 살 돈과 재산을 하느님께 몫으로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아 수고한 보람으로 즐길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5:17-20)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인데, 그 기본 기조는 전도서 첫 부분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가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는 말씀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헛되게 미지의 땅으로 떠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주어진 재물을 가지고 편안하게 즐기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힘들여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편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떠나는 것이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모두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이 됩니다. 살아 있을 때 행복한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의 이러한 말씀에는 커다란 진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리는 다양한 것이 합하여 진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만이 진리이지 않고 다양한 것이 모아져서 진리라고 보아집니다. 삶에 관한 한 진리는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욕심부리지 말고 즐기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고,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수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합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도서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연결시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여정적인 생이 기조를 이루지만 인생의 각각의 시점에서는 전도서의 말씀에 의거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길, 탐험의 장거리의 생을 구성하는 순간순간 멈춤이 있는데, 이 멈춤의 상황 속에서는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의 기본 흐름은 아브라함의 길떠남과 같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여행자나 나그네 혹은 탐험자의 생이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멈출 때의 생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행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롭게 결론에 도달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했습니다. 예수의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대제사장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와서 예수를 체포하고 예수는 로마인들에게 넘겨져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예수는 그 전날 밤 이 동산에서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33세의 젊은 예수는 편안한 생에 대한 미련을 갖지만 그 미련을 극복합니다. 이제 그동안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젊고 활기찬 제자들을 뒤로 하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나라를 향해서 죽음을 무릅씁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 속에는 전도서의 안빈낙도의 걱정 없이 행복한 생은 존재하지 않았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수많은 치유의 이야기들, 특히 죽은 아이를 일으켜 세운 치유의 이야기,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 제자들과의 동고동락하는 모습, 그리고 먹고 마시기를 즐기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는 모습에서 삶을 사랑하고 행복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던 분이었고 본인 자신도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던 분입니다. 다시,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면, 우리의 목적은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더 잘 사는 것(to live, to live well, to live better)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이러한 생에 대한 사랑과 긍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에 대한 사랑과 긍정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생의 긍정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지, 생의 부정으로 십자가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이지 생을 부정하는 죽음 이후의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이 향해서 갔던 새로운 땅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새로이 찾고, 또 세워야 할 새로운 땅에 유비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뒤로 하고 떠나기로 결단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예수의 고뇌에 찬 결단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새길 공동체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이들었어도 시간을 거슬러 새로운 생을 향해 나아가는 그러한 삶을 우리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가는 도중에 우리가 앞으로의 생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만족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겁게 새로운 땅을 향해 험난한 길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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