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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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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3년 8월 10일 주일2부설교 |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 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살 충동을 막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살을 합니다. 부부싸움을 한다음 자살을 하고, 카드빚 때문에 자살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을 하고, 신병을 비관해서 자살하고,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하고, 부모의 꾸중을 듣고는 자살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끊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20여개국 중 10번째가 됩니다. 작년 매일 36명, 1시간에 1.5명 꼴로 자살했습니다. 매년 7만명이 시도하고 여자가 남자보다 4배 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제 죽는 비율은 남자가 여자보다 2배내지 3배가 높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살을 하지는 않았지만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한두번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 교육단체에서 초?중?고 학생 500명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에 75.4%가 자살충동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원인은 성적이 나빠서 혹은 가정불화로 이성문제등으로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전건축 당시 너무나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 강력한 자살충동을 느낀적이 있었습니다. 자살이나 자살충동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삶의 과부하를 막으라
첫째로, 삶의 과부하가 되면 자살하게 됩니다.
내가 감당할수 없는 짐을 지고 고생을 하게 되면 점점 삶에 의욕을 상실하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 버리고 자살하게 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너무나 심한 고생에 부딪혔을때 삶의 소망까지 잃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말했습니다. 바울같이 위대한 사도도 너무나 고생스러우니까 나중에 살소망을 잃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삶에 과부하가 걸리니 낙심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아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분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겨뤄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재물을 불사르게 하므로 이기고, 저들 450인을 잡아 기손 시냇가에서 목을 쳐죽였습니다. 3년 6개월 가뭄이 있던 땅에 비가 오도록 결사적인 기도를 했고 결국 그땅에 비가 내리게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수도 이스라엘까지 아합의 병거 앞에서 그는 뛰었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뛰었습니다. 그결과 그는 심신이 극도로 지쳤습니다.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 연락이 왔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협박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그만 낙심을 했습니다. 사람이 과부하에 걸려서 허덕일때 조금만 더 무거운 짐이 얹혀져도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지만 지치고 피곤했을때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을 듣자 마음이 좌절하고 우울증에 걸려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3절로 4절에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도 과부하에 걸리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기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땅에 살면서 감당치 못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게 되면은 자살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 3백만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오다가 너무나 힘이 들고 지치니까 죽기를 원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같은 사람도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난 다음에 엄히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어라.” 이 명령은 십계명에도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반드시 휴식해야만 삶을 이어 나갈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쉬셨는데 사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하루중에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한주중에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엿새일하고 하루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런 주기가 인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데 필요하고 능률적임을 판단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료인들도 인체가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말경 프랑스 혁명 후 무실론자들의 충동에 의하여 10일 휴일제가 불란서에서 실시된적이 있습니다. 이 제도가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도입 되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히려 이 기간동안 산업재해가 급증하고 생산량도 40% 감소되어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하고 말았습니다.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변치 않습니다.
소련 공산혁명을 일으킨 무실론자 레닌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하루분 일을 더 해야 한다고 표어를 내걸고 8일 휴일제를 채택했으나 생산성이 30%나 감소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레닌은 “우리는 기독교 보다 더 노동자를 더 생각하므로 6일 휴일제를 도입하겠다.”고 떠들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잘 아시고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라고 했을 것입니까?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내리신 제도인 것입니다.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나라는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거 일본제국은 1939년 12월 8일 주일 새벽에 진주만을 폭격하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중에 일을 더 시키기 위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노래를 지어 부르며 극성을 부렸다고 하나 결국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북한 공산정권도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남침을 시도하여 피비린내 나는 동족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동포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일만 시키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에 각 나라마다 사정은 다를수 있으나 성경은 주일성수만이 건강하고 축복받고 행복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역사가 이것이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 종종 쉬러 갔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쉬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7절에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쉬셨는데 우리가 주야로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서 잘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네 번이나 영국 수상을 지낸 글래드스턴은 나이가 90세가 되도록 주일예배 한번도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늘 힘써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영국에서 역사상 손꼽는 수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두 명의 나무꾼이 하루종일 장작패는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종일 도끼질을 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았고 다른 나무꾼은 50분 일하고 반드시 10분은 쉬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게으른 놈 봐라. 자기 친구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도끼질을 하는데 저놈은 50분간 도끼질하고 10분은 쉰다.”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50분 일하고 10분 쉰 사람이 훨씬 장작을 많이 팼습니다. 10분 동안 쉬면서 도끼를 갈았다는 것입니다. 무딘 도끼로 일하는 것보다 도끼날을 갈고서 일한 사람이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일하는 것보다 휴식을 통하여 마음과 몸을 날카롭게 하고 난 다음 일하는 것이 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고불변의 법칙인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 쉬어라’ 이 하나님의 법칙을 지켜야 자살충동에서 피할수 있습니다. 너무 과부하가 걸려서 지치고, 피곤하고, 살 의욕까지 잃어 버리고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대로 해야 우리의 인간존재가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잘 굴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희망과 꿈을 가져라
둘째로, 자살 충동을 막기 위해서는 희망과 꿈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삶의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만이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저히 피할길이 없고 죽음만이 피한다. 너무나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이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가면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질수 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이상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바라게 되면 오히려 좌절과 절망 대신에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가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창열한 홍해수에 막혔는데 애굽의 바로왕이 대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해 왔으니 앞은 창열한 홍해수요, 뒤에는 애굽군대요, 말그대로 샌드위치가 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시고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홍해 바다를 갈라 놓았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것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홍해에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야웨를 앙망하고 기다리면 야웨께서 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서 삶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적막강산이 될지라도 어떻게 삶의 동굴속에 들어가서 나갈길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갈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거기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때 죽은자를 살리는 주님을 앙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이나 고통이 다가와도 꿈과 희망은 가질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을 우리가 짊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짊어지면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일을 행하는 야웨, 그일을 지어 성취하는 야웨인 것입니다. 일은 야웨께서 행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당해서 감당하지 못할 때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해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면 모든일을 여러분 문제, 능력으로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에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야웨의 것이므로 인생의 주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일을 맡기고 주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반드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저명한 사업가였고 억만장자가 되었던 카네기는 젊은 시절에는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데 물건이 잘팔리지 않고 너무나 고달프고 수입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떠한 사무실에 물건 팔러 들어갔는데 보니까 그 벽에 별볼일없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어요. 갯벌에 물은 다 썰물이 되어서 나가버린 곳에 배한척이 덩그런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습니다. 그는 갯벌위에 그냥 얹혀 있어요. 논은 갯벌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뭐라고 써있었는가 하면 ‘밀물이 반드시 들어온다.’ 그렇게 써있었습니다. 낙심과 좌절과 절망이 큰 카네기는 그 그림을 보자 크게 전율했습니다. “내 인생이 마치 저 배와같이 을씨년스럽다. 모든 기회가 다 가버리고 나는 썰물에 갯벌에 버려진 저 거루와 같다. 그러나 내게도 밀물은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그때는 두둥실 물위에 떠서 나갈것이다.”그는 그 그림을 보자 마음속에 굉장한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주인보고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 그림 내게 주실수 없습니까?” 사정을 하니까 주인이 “그 뭐 볼일 없는 그림 왜 달라고 하느냐?” “내게 꼭 주십시오.” 카네기는 그 그림을 자기 사무실벽에 걸어 놓고 그 다음부터는 늘 그 그림을 바라보고는 말했습니다. “밀물은 다가온다. 지금은 썰물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내게 밀물은 다가온다. 축복의 바다에 둥실 떠갈날이 다가온다. 부정적이고, 좌절하고, 절망하던 카네기는 그 그림하나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소망차고,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그는 나중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억만장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그 벽에는 언제나 붙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물이 다 빠져나간 갯벌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거루와 같을 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를 바라는 자에게는 밀물의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밤이 오면 아침은 다가옵니다. 폭풍우가 아무리 심해도 고요한 날밝은 날은 다가오고 길이 아무리 험해도 평탄한 길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꿈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역경을 이기고 나가기 때문에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과 소망을 버리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 짐을 나눠질 친구를 찾으라
셋째로, 우리가 자살충동을 이기기 위해서는 짐을 나눠질 친구가 있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친구가 있으면 번거롭지만 참으로 마음을 털어놓을수 있는 가까운 몇사람의 친구가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고민은 나누면 작아지기 때문에 내가 기쁨이 있으면 친구하고 나누면 기쁨이 더 커지고 고민이 있으면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면 고민은 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번민을 친구와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9절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 셀구역이나 셀지역이 필요한 것은 좋을때는 필요없는 것 같지만은 내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셀구역이나 셀지역에 같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위해서 마음을 합쳐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살충동을 피할수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나혼자 짐을 지고 가다가는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좌절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줄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사람이 힘을 합치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셀구역이나 셀지역에 소속되어서 함께 기도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 굉장히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서 지나가던 한 사람이 전차에 치었습니다. 전차 바퀴밑에 깔려서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경찰과 응급구조대원들이 와서 그를 꺼내려 하였지만 중장비 차량이 없이는 구조할수 없는 상황이었고 장비들이 도착할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서 이 사람이 “버틸까”의문이 되었습니다. 전차안에 깔려 있는 그 사람은 “나좀 살려주세요. 나좀 꺼내주세요.”하고 소리를 질러댔으나 심한 고통 때문에 정신착란증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청년이 뛰어와서 군중을 헤치고 그 전차밑에 기어 들어가서 전차에 치어 죽어가는 그 청년을 머리를 자기 팔에 베이고 자기도 같이 누워서 그 청년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청년은 전차에 치인 사람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너는 죽지 않는다. 내가 너와 같이 있다. 곧장 중장비가 온다. 그리고 너는 구조해 될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어라.” 계속해서 귀에대고 속삭였습니다. 정신착란증세까지 오면서 좌절하고 절망하여 기절할 지경에 이르니 친구는 다른 친구의 그 속삭이는 말에 용기와 힘을 얻고 마음을 가라앉이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있지 아니하여 중장비가 와서 그 전차를 들어 올리고 전차밑에 깔린 사람을 끄집어 내어서 살려 내었습니다. 그가 살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것은 친구가 그와같이 고통에 동참하면서 끝까지 용기와 힘을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깔려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친구가 와서 우리에게 용기와 힘과 격려를 준다면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수 있습니다. 고난당할 때 친구가 와서 주는 한마디 격려의 말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좋을때 친구야 얼마든지 있지요. 그러나 내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친구들 다 떠나가고 좋은 주변에 조롱하는 자와 원수들만 남습니다. 그럴때 찾아와서 나에게 용기와 힘이 되어주고 짐을 나누어 주는 친구는 참된 친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친구가 이 세상에는 별로 많지 않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영원한 친구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고 친히 십자가에 올라가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면서 피흘리고 죽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우리 인생에 동참한 분은 이 천지간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요,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삶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쓰시고 오시고 사람이 되셨으매 인간과 함께 온갖 갖은 신고를 체험하시고 마지막 여러분과 나의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마음이 온유하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사람들은 다 손가락질하고 우리를 꾸짖고 비난하고 공격하지만은 예수님은 온유하다는 것은 나는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당하고 세상이 다 등을진 사람일지라도 주님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가 너를 영접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나는 겸손하다고 말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높고 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고 버림받고 진흙창에 뒹구는 사람하고도 같이 짐을 지는 겸손한 분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까 내게로 오너라. 두려워 하지 말라. 그리고 짐을 내게 맡겨 버려라. 내가 너와함께 짐을 져주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짐을 지면 너희 짐은 쉽고 너는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분은 없습니다.
4.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가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 합니다.
인생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세상 즉, 물질적인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잃어 버리면 살 의욕을 상실하고 말지만 인생에 세상적인 물질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새로운 인생관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순복음신학교 다닐때 어느 채플시간에 박우석 전도사님이라는 나이 많은 전도사님이 간증을 하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옷은 초라하고 볼모양이 없었지만 얼굴은 상당히 광채가 나고 또 굉장히 학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그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거지였는데 선교사를 만나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회 열심히 나가면서 예수를 믿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명치대학교 문학부를 석사학위까지 받고 나왔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잘 출석을 했는데 6?25사변때 부산에서 사업을 해서 물질적인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를 많이 드리고 사업에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점점 그는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손님 만난다, 사업차 일하기 바쁘다고 해서 교회를 한두번 빠지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도 나왔는데 새벽기도도 안나오고 새벽에 종소리가 나면 마음에 양심이 가책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귀를 막고 새벽종소리를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세상과 마귀에 잡혀 버리고 교회와 하나님과는 담을 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자기의 회사와 연결된 다른 여러회사에서 부도가 나기 시작하니까 순식간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서 자기의 그 잘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도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국세청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빨간딱지를 붙이는데 나중에 숟가락 하나까지 빨간 딱지를 다 붙이고, 빚쟁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너무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에 취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수도 없고 기도도 안나옵니다. 좌절과 절망에 처하여 갈길이 없으므로 강력한 쥐약을 사서 부산구덕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중턱에 올라가서 그는 그 쥐약을 마셨습니다. 얼마나 독하였던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요. “우석아~ 우석아~ ”그래서 보니까 푸른 하늘에 구름이 뜨고 나무들이 있기에 “내가 지옥에 오기는 왔는데 지옥에도 하늘이 있고 구름이 떠있고 나무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위에 구름이 둥실떴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서서 손을 내밀어 말하기를 “우석아, 우석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행위를 버리고 내게로 돌아와라. 그러면 널리 용서해 주리라. 네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벌하여 나를 멀리 떠났으나 얻은 것이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라.” “주님이여, 내가 지금 지옥에 와있는데 어떻게 회개합니까?” “아니야~ 네가 지옥에 와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약을 먹고 혼수상태가 되어서 한주일이 지났다. 일어나서 내가 지시한 곳으로 가라.” 그래서 벌떡 일어나니까 벌써 온몸에 개미가 집을 지었습니다. 팔, 다리, 몸에 개미가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 개미를 다 털어내고 그는 벌벌 기어서 대신동을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순복음교회였습니다. 순복음교회에 들어가서 땅을 치고 울고 회개하고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사연을 이야기하니까 목사님이 부여에 있는 개척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여에 있는 개척교회에 가서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신학교 다닐때 전도사로써 그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부귀와 영화를 누려도 마음속에 진실한 소망과 기쁨은 없었다. 이제 다 잃어 버리고 빈손들고 낡은 옷입고, 낡은 구두신고 시골 전도사가 되었지만은 마음이 이렇게 평안하고 기쁘고 즐거울수가 없다. 내 인생관이 세상과 물질을 따라갔을때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늘 고통스럽고 늘 괴로웠지만 탐욕을 털어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내세를 바라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간증을 우리에게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만 따라가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과 세상의 것이 다 떠나갈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세상 저 건너편에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세상만 따라갔던 솔로몬의 탄식을 여러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전도서 2장 4절로 11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인생으로써 최고의 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도 그것을 누리고 난 다음 나중에 들어보니 오직 있는 것은 공허밖에 없더라.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그는 탄식을 한것입니다. 물질만 따라가고 세상만 따라가면 종국적으로 그 속에 내용이 없습니다. 겉은 찬란한 것 같으나 내용이 없지요. 거품같이 잡으면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세상에 좌절하고 말것입니다.
1924년 시카고에 있는 한 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 7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전 재산을 합치면 미국의 국고보다 많았습니다. 25년후 한 기자가 그들의 생애를 추적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강철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슈합은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 죽었고,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스카튼도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은채 고독하게 죽었습니다. 뉴욕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휘트니는 감옥에 있고, 재무장관이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업총수였던 리버모호와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프레이는 자살했고,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던 크루걸은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의지하나 잠언 34장 5절은 재물의 허무함을 이렇게 가르침니다.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재산을 다 합친 부를 가졌던 사람들도 25년 만에 다 패가망신하고 말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없이 세상과 물질을 따라간 것은 종국적으로 도적질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헛된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주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으면 이 사람이 진실로 부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한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앓는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는 영원한 고장에 우리의 집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3절로 4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인생관이 달라져야 됩니다. 물질적인, 세속적인 인생관만 가지면 물질도 세상도 떠나갈 때 공허속에 허덕이고 좌절속에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빌허트 목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빌허트 목사님이 피지섬에 갔을때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사가 사망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45분 동안 시체실에 안치 되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죽어 있었던 45분 동안 빌허트 목사님은 천사의 인도로 천국을 구경했습니다. 천국을 다녀온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새 예루살렘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영광을 보고나니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분토만도 못하게 여겨진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세상 사는 것은 다만 나그네 길이요, 이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는 비할수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든 자’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의 절망과 고통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땅에서는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고 칭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야 우리는 인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속에서 자살충동을 다 이기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최근에도 한국에 저명한 재벌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 충동을 받았고 또 자살하고 있습니다.
또 죽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다
한두번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사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살충동을 받고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이것을 이길수 있는 힘은 우리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 안에 있는 소망과 꿈이 우리에게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므로 모두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매일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미하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살 충동을 막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살을 합니다. 부부싸움을 한다음 자살을 하고, 카드빚 때문에 자살을 하고,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을 하고, 신병을 비관해서 자살하고,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하고, 부모의 꾸중을 듣고는 자살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끊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20여개국 중 10번째가 됩니다. 작년 매일 36명, 1시간에 1.5명 꼴로 자살했습니다. 매년 7만명이 시도하고 여자가 남자보다 4배 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제 죽는 비율은 남자가 여자보다 2배내지 3배가 높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살을 하지는 않았지만 죽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한두번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 교육단체에서 초?중?고 학생 500명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에 75.4%가 자살충동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원인은 성적이 나빠서 혹은 가정불화로 이성문제등으로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전건축 당시 너무나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 강력한 자살충동을 느낀적이 있었습니다. 자살이나 자살충동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1. 삶의 과부하를 막으라
첫째로, 삶의 과부하가 되면 자살하게 됩니다.
내가 감당할수 없는 짐을 지고 고생을 하게 되면 점점 삶에 의욕을 상실하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 버리고 자살하게 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너무나 심한 고생에 부딪혔을때 삶의 소망까지 잃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말했습니다. 바울같이 위대한 사도도 너무나 고생스러우니까 나중에 살소망을 잃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삶에 과부하가 걸리니 낙심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아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분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겨뤄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재물을 불사르게 하므로 이기고, 저들 450인을 잡아 기손 시냇가에서 목을 쳐죽였습니다. 3년 6개월 가뭄이 있던 땅에 비가 오도록 결사적인 기도를 했고 결국 그땅에 비가 내리게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수도 이스라엘까지 아합의 병거 앞에서 그는 뛰었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뛰었습니다. 그결과 그는 심신이 극도로 지쳤습니다.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 연락이 왔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절로 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협박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그만 낙심을 했습니다. 사람이 과부하에 걸려서 허덕일때 조금만 더 무거운 짐이 얹혀져도 쓰러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지만 지치고 피곤했을때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협박을 듣자 마음이 좌절하고 우울증에 걸려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3절로 4절에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도 과부하에 걸리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기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땅에 살면서 감당치 못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게 되면은 자살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 3백만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오다가 너무나 힘이 들고 지치니까 죽기를 원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같은 사람도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살하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난 다음에 엄히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어라.” 이 명령은 십계명에도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반드시 휴식해야만 삶을 이어 나갈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쉬셨는데 사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하루중에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한주중에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엿새일하고 하루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런 주기가 인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데 필요하고 능률적임을 판단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료인들도 인체가 지속적인 긴장을 유지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말경 프랑스 혁명 후 무실론자들의 충동에 의하여 10일 휴일제가 불란서에서 실시된적이 있습니다. 이 제도가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도입 되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오히려 이 기간동안 산업재해가 급증하고 생산량도 40% 감소되어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하고 말았습니다.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변치 않습니다.
소련 공산혁명을 일으킨 무실론자 레닌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하루분 일을 더 해야 한다고 표어를 내걸고 8일 휴일제를 채택했으나 생산성이 30%나 감소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레닌은 “우리는 기독교 보다 더 노동자를 더 생각하므로 6일 휴일제를 도입하겠다.”고 떠들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다시 7일 휴일제로 환원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잘 아시고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라고 했을 것입니까?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내리신 제도인 것입니다.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나라는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거 일본제국은 1939년 12월 8일 주일 새벽에 진주만을 폭격하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중에 일을 더 시키기 위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노래를 지어 부르며 극성을 부렸다고 하나 결국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북한 공산정권도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남침을 시도하여 피비린내 나는 동족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동포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일만 시키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에 각 나라마다 사정은 다를수 있으나 성경은 주일성수만이 건강하고 축복받고 행복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역사가 이것이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 종종 쉬러 갔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에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쉬셨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7절에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쉬셨는데 우리가 주야로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서 잘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네 번이나 영국 수상을 지낸 글래드스턴은 나이가 90세가 되도록 주일예배 한번도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늘 힘써 기도했습니다. 그는 그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영국에서 역사상 손꼽는 수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두 명의 나무꾼이 하루종일 장작패는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종일 도끼질을 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았고 다른 나무꾼은 50분 일하고 반드시 10분은 쉬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게으른 놈 봐라. 자기 친구는 하루종일 쉬지 않고 도끼질을 하는데 저놈은 50분간 도끼질하고 10분은 쉰다.”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50분 일하고 10분 쉰 사람이 훨씬 장작을 많이 팼습니다. 10분 동안 쉬면서 도끼를 갈았다는 것입니다. 무딘 도끼로 일하는 것보다 도끼날을 갈고서 일한 사람이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일하는 것보다 휴식을 통하여 마음과 몸을 날카롭게 하고 난 다음 일하는 것이 더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고불변의 법칙인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 쉬어라’ 이 하나님의 법칙을 지켜야 자살충동에서 피할수 있습니다. 너무 과부하가 걸려서 지치고, 피곤하고, 살 의욕까지 잃어 버리고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대로 해야 우리의 인간존재가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잘 굴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희망과 꿈을 가져라
둘째로, 자살 충동을 막기 위해서는 희망과 꿈을 잃지 말아야 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삶의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만이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저히 피할길이 없고 죽음만이 피한다. 너무나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이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기적의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가면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질수 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이상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시편 42편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바라게 되면 오히려 좌절과 절망 대신에 찬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가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창열한 홍해수에 막혔는데 애굽의 바로왕이 대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해 왔으니 앞은 창열한 홍해수요, 뒤에는 애굽군대요, 말그대로 샌드위치가 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좌절과 절망에 처했을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시고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홍해 바다를 갈라 놓았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것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홍해에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야웨를 앙망하고 기다리면 야웨께서 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서 삶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적막강산이 될지라도 어떻게 삶의 동굴속에 들어가서 나갈길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모든 동굴은 터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갈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선생도 거기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때 죽은자를 살리는 주님을 앙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이나 고통이 다가와도 꿈과 희망은 가질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을 우리가 짊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짊어지면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일을 행하는 야웨, 그일을 지어 성취하는 야웨인 것입니다. 일은 야웨께서 행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당해서 감당하지 못할 때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해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면 모든일을 여러분 문제, 능력으로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에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야웨의 것이므로 인생의 주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일을 맡기고 주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반드시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저명한 사업가였고 억만장자가 되었던 카네기는 젊은 시절에는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데 물건이 잘팔리지 않고 너무나 고달프고 수입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떠한 사무실에 물건 팔러 들어갔는데 보니까 그 벽에 별볼일없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어요. 갯벌에 물은 다 썰물이 되어서 나가버린 곳에 배한척이 덩그런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습니다. 그는 갯벌위에 그냥 얹혀 있어요. 논은 갯벌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뭐라고 써있었는가 하면 ‘밀물이 반드시 들어온다.’ 그렇게 써있었습니다. 낙심과 좌절과 절망이 큰 카네기는 그 그림을 보자 크게 전율했습니다. “내 인생이 마치 저 배와같이 을씨년스럽다. 모든 기회가 다 가버리고 나는 썰물에 갯벌에 버려진 저 거루와 같다. 그러나 내게도 밀물은 반드시 다가올 것이다. 그때는 두둥실 물위에 떠서 나갈것이다.”그는 그 그림을 보자 마음속에 굉장한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주인보고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 그림 내게 주실수 없습니까?” 사정을 하니까 주인이 “그 뭐 볼일 없는 그림 왜 달라고 하느냐?” “내게 꼭 주십시오.” 카네기는 그 그림을 자기 사무실벽에 걸어 놓고 그 다음부터는 늘 그 그림을 바라보고는 말했습니다. “밀물은 다가온다. 지금은 썰물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내게 밀물은 다가온다. 축복의 바다에 둥실 떠갈날이 다가온다. 부정적이고, 좌절하고, 절망하던 카네기는 그 그림하나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소망차고,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결과 그는 나중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억만장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그 벽에는 언제나 붙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물이 다 빠져나간 갯벌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는 거루와 같을 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를 바라는 자에게는 밀물의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밤이 오면 아침은 다가옵니다. 폭풍우가 아무리 심해도 고요한 날밝은 날은 다가오고 길이 아무리 험해도 평탄한 길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꿈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역경을 이기고 나가기 때문에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과 소망을 버리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 짐을 나눠질 친구를 찾으라
셋째로, 우리가 자살충동을 이기기 위해서는 짐을 나눠질 친구가 있어야 됩니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친구가 있으면 번거롭지만 참으로 마음을 털어놓을수 있는 가까운 몇사람의 친구가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고민은 나누면 작아지기 때문에 내가 기쁨이 있으면 친구하고 나누면 기쁨이 더 커지고 고민이 있으면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면 고민은 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번민을 친구와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9절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 셀구역이나 셀지역이 필요한 것은 좋을때는 필요없는 것 같지만은 내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셀구역이나 셀지역에 같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위해서 마음을 합쳐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살충동을 피할수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나혼자 짐을 지고 가다가는 쓰러지면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좌절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줄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사람이 힘을 합치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셀구역이나 셀지역에 소속되어서 함께 기도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속에 굉장히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서 지나가던 한 사람이 전차에 치었습니다. 전차 바퀴밑에 깔려서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경찰과 응급구조대원들이 와서 그를 꺼내려 하였지만 중장비 차량이 없이는 구조할수 없는 상황이었고 장비들이 도착할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서 이 사람이 “버틸까”의문이 되었습니다. 전차안에 깔려 있는 그 사람은 “나좀 살려주세요. 나좀 꺼내주세요.”하고 소리를 질러댔으나 심한 고통 때문에 정신착란증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청년이 뛰어와서 군중을 헤치고 그 전차밑에 기어 들어가서 전차에 치어 죽어가는 그 청년을 머리를 자기 팔에 베이고 자기도 같이 누워서 그 청년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청년은 전차에 치인 사람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너는 죽지 않는다. 내가 너와 같이 있다. 곧장 중장비가 온다. 그리고 너는 구조해 될것이다.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어라.” 계속해서 귀에대고 속삭였습니다. 정신착란증세까지 오면서 좌절하고 절망하여 기절할 지경에 이르니 친구는 다른 친구의 그 속삭이는 말에 용기와 힘을 얻고 마음을 가라앉이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있지 아니하여 중장비가 와서 그 전차를 들어 올리고 전차밑에 깔린 사람을 끄집어 내어서 살려 내었습니다. 그가 살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것은 친구가 그와같이 고통에 동참하면서 끝까지 용기와 힘을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깔려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친구가 와서 우리에게 용기와 힘과 격려를 준다면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수 있습니다. 고난당할 때 친구가 와서 주는 한마디 격려의 말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좋을때 친구야 얼마든지 있지요. 그러나 내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친구들 다 떠나가고 좋은 주변에 조롱하는 자와 원수들만 남습니다. 그럴때 찾아와서 나에게 용기와 힘이 되어주고 짐을 나누어 주는 친구는 참된 친구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친구가 이 세상에는 별로 많지 않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영원한 친구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고 친히 십자가에 올라가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면서 피흘리고 죽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우리 인생에 동참한 분은 이 천지간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요,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삶에 동참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쓰시고 오시고 사람이 되셨으매 인간과 함께 온갖 갖은 신고를 체험하시고 마지막 여러분과 나의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마음이 온유하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사람들은 다 손가락질하고 우리를 꾸짖고 비난하고 공격하지만은 예수님은 온유하다는 것은 나는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당하고 세상이 다 등을진 사람일지라도 주님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내가 너를 영접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이 나는 겸손하다고 말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높고 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고 버림받고 진흙창에 뒹구는 사람하고도 같이 짐을 지는 겸손한 분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까 내게로 오너라. 두려워 하지 말라. 그리고 짐을 내게 맡겨 버려라. 내가 너와함께 짐을 져주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짐을 지면 너희 짐은 쉽고 너는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분은 없습니다.
4.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가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생관이 필요 합니다.
인생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세상 즉, 물질적인 것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잃어 버리면 살 의욕을 상실하고 말지만 인생에 세상적인 물질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새로운 인생관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순복음신학교 다닐때 어느 채플시간에 박우석 전도사님이라는 나이 많은 전도사님이 간증을 하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옷은 초라하고 볼모양이 없었지만 얼굴은 상당히 광채가 나고 또 굉장히 학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그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거지였는데 선교사를 만나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교회 열심히 나가면서 예수를 믿고 일본에 유학을 가서 명치대학교 문학부를 석사학위까지 받고 나왔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잘 출석을 했는데 6?25사변때 부산에서 사업을 해서 물질적인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를 많이 드리고 사업에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점점 그는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손님 만난다, 사업차 일하기 바쁘다고 해서 교회를 한두번 빠지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도 나왔는데 새벽기도도 안나오고 새벽에 종소리가 나면 마음에 양심이 가책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귀를 막고 새벽종소리를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세상과 마귀에 잡혀 버리고 교회와 하나님과는 담을 싸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자기의 회사와 연결된 다른 여러회사에서 부도가 나기 시작하니까 순식간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서 자기의 그 잘나가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도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국세청에서 나와서 모든 것을 빨간딱지를 붙이는데 나중에 숟가락 하나까지 빨간 딱지를 다 붙이고, 빚쟁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너무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에 취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수도 없고 기도도 안나옵니다. 좌절과 절망에 처하여 갈길이 없으므로 강력한 쥐약을 사서 부산구덕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중턱에 올라가서 그는 그 쥐약을 마셨습니다. 얼마나 독하였던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요. “우석아~ 우석아~ ”그래서 보니까 푸른 하늘에 구름이 뜨고 나무들이 있기에 “내가 지옥에 오기는 왔는데 지옥에도 하늘이 있고 구름이 떠있고 나무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머리위에 구름이 둥실떴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서서 손을 내밀어 말하기를 “우석아, 우석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행위를 버리고 내게로 돌아와라. 그러면 널리 용서해 주리라. 네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벌하여 나를 멀리 떠났으나 얻은 것이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라.” “주님이여, 내가 지금 지옥에 와있는데 어떻게 회개합니까?” “아니야~ 네가 지옥에 와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약을 먹고 혼수상태가 되어서 한주일이 지났다. 일어나서 내가 지시한 곳으로 가라.” 그래서 벌떡 일어나니까 벌써 온몸에 개미가 집을 지었습니다. 팔, 다리, 몸에 개미가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 개미를 다 털어내고 그는 벌벌 기어서 대신동을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순복음교회였습니다. 순복음교회에 들어가서 땅을 치고 울고 회개하고 그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사연을 이야기하니까 목사님이 부여에 있는 개척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여에 있는 개척교회에 가서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신학교 다닐때 전도사로써 그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부귀와 영화를 누려도 마음속에 진실한 소망과 기쁨은 없었다. 이제 다 잃어 버리고 빈손들고 낡은 옷입고, 낡은 구두신고 시골 전도사가 되었지만은 마음이 이렇게 평안하고 기쁘고 즐거울수가 없다. 내 인생관이 세상과 물질을 따라갔을때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늘 고통스럽고 늘 괴로웠지만 탐욕을 털어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고 내세를 바라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는 간증을 우리에게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만 따라가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과 세상의 것이 다 떠나갈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세상 저 건너편에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세상만 따라갔던 솔로몬의 탄식을 여러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전도서 2장 4절로 11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인생으로써 최고의 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도 그것을 누리고 난 다음 나중에 들어보니 오직 있는 것은 공허밖에 없더라.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그는 탄식을 한것입니다. 물질만 따라가고 세상만 따라가면 종국적으로 그 속에 내용이 없습니다. 겉은 찬란한 것 같으나 내용이 없지요. 거품같이 잡으면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세상에 좌절하고 말것입니다.
1924년 시카고에 있는 한 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 7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전 재산을 합치면 미국의 국고보다 많았습니다. 25년후 한 기자가 그들의 생애를 추적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강철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슈합은 무일푼의 거지가 되어 죽었고,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스카튼도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은채 고독하게 죽었습니다. 뉴욕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휘트니는 감옥에 있고, 재무장관이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업총수였던 리버모호와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프레이는 자살했고,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던 크루걸은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의지하나 잠언 34장 5절은 재물의 허무함을 이렇게 가르침니다.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재산을 다 합친 부를 가졌던 사람들도 25년 만에 다 패가망신하고 말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없이 세상과 물질을 따라간 것은 종국적으로 도적질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헛된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주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으면 이 사람이 진실로 부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한 것이나 구하는 것이나 앓는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는 영원한 고장에 우리의 집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3절로 4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인생관이 달라져야 됩니다. 물질적인, 세속적인 인생관만 가지면 물질도 세상도 떠나갈 때 공허속에 허덕이고 좌절속에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빌허트 목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빌허트 목사님이 피지섬에 갔을때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사가 사망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45분 동안 시체실에 안치 되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죽어 있었던 45분 동안 빌허트 목사님은 천사의 인도로 천국을 구경했습니다. 천국을 다녀온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새 예루살렘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영광을 보고나니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분토만도 못하게 여겨진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세상 사는 것은 다만 나그네 길이요, 이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는 비할수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든 자’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는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의 절망과 고통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땅에서는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고 칭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야 우리는 인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속에서 자살충동을 다 이기고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최근에도 한국에 저명한 재벌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 충동을 받았고 또 자살하고 있습니다.
또 죽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다
한두번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사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살충동을 받고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이것을 이길수 있는 힘은 우리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 안에 있는 소망과 꿈이 우리에게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므로 모두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매일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미하며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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