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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사야 민영진 목사............... 조회 수 2099 추천 수 0 2008.01.24 15: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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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11:9 
설교자 : 민영진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메시아 곧 구세주로 고백하시는 여러분. 기독교인으로서 혹시 다른 종교의 경전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의아해 하실 분도 없지 않을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질문이 좀 우스운 질문이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날 때부터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목사 내외의 아들로 자라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를 이교적인 것으로 보도록 교육을 받았으므로, 제가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던가, 비록 교양의 차원이라 할지라도 제가 타종교의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타종교의 경전, 예를 들어 불교의 경전에 속하는 어떤 책은 저로서는 읽을 염두도 감히 내지 못했었고, 설사 제가 그런 책에 흥미를 느껴 그 책을 구했다해도, 목사님 내외분이 부모로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는 그 불교의 경전을 감히 공개적으로 읽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 처지가 그러했기 때문에 혹시 여러분께서는 저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해 본 것입니다.
제 자신을 반성해 볼 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근 30여년 전 제가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섰을 때 교양과목으로 '종교와 기독교'라는 과목부터 강의하기 시작했었는데, 거기서 우리 나라의 불교와 유교와 도교, 그리고 우리의 무속 등에 관하여 비교종교학적 접근을 시도해 가변서 강의를 할 때에, 종교학에 관한 책은 읽으면서도, 강의시간에 다룰 불교나 유교의 경전은 어느 것 하나도 읽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세계성서공회 연합회 안에서 불교권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경전인 신구약 성서를 발췌하여 소개하고 불교도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오해하기 쉬운 성서의 개념을 쉬운 말로 설명하는 '해설성서'의 편집과 집필을 맡은 위원이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태국, 홍콩, 대만 출신의 성서학자들로 구성된, 겨우 5명밖에 안되는 위원인데 우리 나라가 오랜 불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하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인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에서는 불교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저를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배정하여 활약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위원회에 배정이 되어 지난 5-6년간 활동하면서, 제가 비록 불교 문화권에 살고 있다고 해도 불교에 대해서는 얼마나 무지한가를 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불교의 전통이 깊은 우리 나라에서 50여년 넘게 살아오면서도 불교 경전 한 권을 제대로 읽거나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기독교인, 그 중에서도 불교와 같은 타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그 영향하에 있는 독자들에게 성서를 읽도록 기회와 편의를 제공한다고 할 때, 두 곳으로부터 의혹에 찬 질문을 받게 됩니다. (1) 하나는, 불교 쪽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불쾌감입니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선교전략, 더 직접적으로는 불교 정복, 기독교 세력의 확장, 실크로드를 따라서 행군하는 새로운 형태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불교 신도 자체가 아니라, 불교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아시아의 주민들이 주된 목표라고 해도, 불교가 느끼는 위협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을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안에서의 의혹입니다. 불교권 성서편집 활동이 불교도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혼합을 시도하는 이단적인 움직임이거나, 아니면 불교와 기독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의 실천적 신학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혹입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 안에서도 타종교의 특성을 인정하고 종교다원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지에 서 있는 이들은, 불교 쪽에서의 의혹을 느끼는 것과 꼭 같이, 이것이 불교를 정복하려는 기독교의 호전적인 선교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불교에서 기독교 경전 읽기는 불교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태국 이야기이긴 하지만, 성서보급운동에서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태국의 성서공회가 1986년부터 태국 불교의 승려들로부터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사찰로 보내달라는 주문을 받은 일입니다. 태국에는 약 3만 6천여 곳의 사찰이 있는데,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에서는 지난 10여년 동안 약 9천여 사찰에 성서를 보낸 바 있습니다. 이 성서는 사찰 내의 도서관에 비치되며 승려들과 사찰을 방문하는 불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세계성서공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연합회에서는 불교권 독자를 위한 해설성서 편집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초에 종교간 경전 바꿔읽기 모임이 있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여러 종교의 경전 발췌를 위한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서공회라든가 교회 밖에서 먼저 이루어진 운동들입니다.
이러한 운동에서 드러난 실체는 이것이 타종교 정복을 목표로 하는 선교전략도 아니고, 종교 혼합을 시도하려는 운동도 아니었는데, 이러한 시도들이 지금까지 거둔 결과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확대되는 경험을 하였다는 것이고, 동시에 자기 종교의 고유성과 독특성에 대한 이해의 정도도 더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종교의 경전이 때로는 자기 종교의 경전이 지닌 진리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준다는 체험입니다.
실제로 체험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불교권 독자를 위한 성서편집위원들이 1995년 6월 홍콩에 모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일행은 홍콩의 불교를 공부하려고 란타우(Lantau)라고 하는 섬에 있는 보련사(寶蓮寺)를 방문했습니다. 란타우라는 섬은 홍콩 본 섬보다 배나 더 큰 섬이긴 합니다마는 인구는 홍콩이 100만인데 란타우는 겨우 20,00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홍콩 부두에서 Ferry로 약 한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해발 약 500여 미터쯤 되는 산 위에 보련사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해발 520미터 되는 목어봉(木魚峰) 정상에는 세계에서 제일 크고 높은 좌상 부처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오전에 란타우 섬에 도착했는데, 이미 그곳에는 보련사의 좌상 대불을 보러 가는 수많은 불자 순례객들이 붐볐고, 선착장에서 란타우 산 정상의 보련사까지는 디럭스 관광버스가 계속하여 순례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니 보련사가 나왔고, 목어봉에 앉은 좌상 대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앉은키가 26.4미터였습니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노천 청동 석가여래 불상이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그것이 가장 안전한 자세라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큰 법당에 들려 홍콩 불교의 특징에 대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데, 한 여승이 출구에 앉아서 졸고 있다가, 우리가 나오니까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불경 단편들을 보여주면서, 원하면 가져가서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단편 한 권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나왔습니다. 사찰 안의 여러 부속 건물들을 둘러보고 나서, 우리 일행은 사찰 내의 식당에서 사찰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그리고 나서는 목어봉의 좌불상을 보러 260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노곤하고 졸리기도 하여 목어봉으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불교광장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기로 하였습니다. 제 아내를 포함하여 일행 5명이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나무 그늘에 앉아서 낮잠을 청하면서 주머니에 든 불경 단편을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왼쪽 표지에서부터 읽으면 영어본문이 나왔고, 오른쪽 표지에서부터 읽으면 한문본문이 나왔습니다. 영어제목은 How It Is Difficult To Repay The Deep Kindness Of Parents Sutra였고, 한문으로는 '父母恩重難報經'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처와 그의 제자 아난다가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 오니까 사람의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부처가 길을 가다 말고 그 곳에서 멈추더니 그 뼈를 향해서 큰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란 아난다는 부처에게 물었답니다. 세존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체 높으신 분이신데, 어찌하여 저런 마른 뼈다귀를 보고 엎드려 절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부처께서는, 자기가 뼈를 보고 절한 것이 아니라 그 뼈 중에는 전생의 부모님의 뼈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실은 그 부모님을 생각하고 거기에 절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저 뼈들 중에 희고 무거운 것은 남자의 뼈이고 검고 가벼운 것은 여자의 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난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이 입는 옷이 남장과 여장이 구별되어 있으므로 남자 몸매에 남자 복장을 하고 있으면 남자인 줄 알고, 여자 몸매에 여자 복장을 하고 있으면 여자인 줄 알지만, 이 뼈들이야 아무런 성 구별이 없는데 희고 무거운 것은 남자 뼈이고, 검고 가벼운 것은 여자 뼈라니 어떻게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처께서는, 남자들은 살아 있을 때 사찰이나 드나들고 경전이나 암송하면서 편하게 살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 뼈가 희고 무거운데, 여자들은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데, 그 젖이라는 것이 바로 피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아기가 제 어머니의 젖을 빤다는 것은 곧 어머니의 피를 빠는 것인데, 한 아기가 나서 자랄 때까지 먹는 젖의 양이 무려 7,150갤론이나 되기 때문에 어머니들의 뼈는 그렇게 시커멓게 썩고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여기까지 읽다가는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피를 7,150갤론이나 빨았고, 그래서 평소에 어머니는 자식들 때문에 몸이 쇠약해지고 있었고, 지금 무덤에서 썩고 있는 그 뼈마저 아버지의 뼈와는 달리 시커멓고 가볍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습니다. 자식은 바로 어머니의 몸을 먹고 성장한다는데 생각이 미치니까, 어머니 살아 생전에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무심했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부모은중난보경'을 계속해서 읽어보니까, 어머니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임신한 이후 그 아이를 나을 때까지, 태 속에서 그 아이를 잘 보호해준 은혜(懷胎守護恩), 아이를 낳을 때 산고를 겪으며 나아준 은혜(臨産受苦恩), 그렇게 산고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는 은혜(生子忘憂恩), 쓴 것은 자신이 먹고 단 것은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咽苦吐甘恩), 마른자리에 자식을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廻乾就濕恩), 가슴에 안고 젖을 물려 키워주는 은혜(哺乳養育恩), 자식을 깨끗하게 키우느라 추하게 늙어 가는 은혜(洗濯不淨恩), 멀리 떠난 자식을 잊지 못해 애태우는 은혜(遠行憶念恩), 자식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은혜(探加體恤恩), 자식에 대해 끝없이 연민하는 은혜(究竟憐愍恩), 이상 열 가지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어리석은 종을, 다른 곳도 아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란타우 섬의 불교 사찰 보련사로 인도하시어서, 거기에서 이웃 종교 경전 '부모은중난보경'을 만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그토록 귀한 말씀을 직접 읽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나실 때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떠나시어서,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신 그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한 교훈으로 남겨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 주님 예수께 감사하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유대교의 십계명을 통해서도 부모를 공경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고, 바울사도를 통해서도 십계명의 부모공경정신을 기독교가 이어 받게 하셨는데, 늦게나마 이웃 종교의 경전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에 대한 이토록 감격스러운 말씀을 읽게 하시고, 평소의 불효를 늦게라도 깨닫고 회개할 수 있게 하신 성령님의 깨우쳐주심(覺)에 대하여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불교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온 아시아의 문화권에 살면서도 우리 인구의 1/4이 믿는 이웃종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지했던 것과 냉담하리만큼 무관심했던 것과 때로는 막연하게 적대감정을 가졌던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은혜를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을 뿐,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정리하여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아보려는 엄두도 못 냈던 불효를 회개하였습니다. 자식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지극한 은혜에 대한 자식의 보잘것없는 은혜갚음의 한 방편일 뿐인데, 그 보잘것없는 자식의 도리를, 마치 부모에 대해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하는 양, 무슨 큰 희생이라도 하는 양, 자식의 도리를 무슨 자식의 공로로 착각한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그 깊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어머니에게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으나, 철들자 어머니를 여의었으니, 어머니의 그 큰 은혜를 어머니에게 직접 갚을 길이 없어서 안타깝지만, 이제 제 자식들의 어머니에게라도, 제 어머니에게 못 다한 은혜갚음을 조금이나마 갚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제가 제 자식들만한 나이에는 철이 없어서 제 어머니의 은혜 몰랐듯이, 저의 자식들도 저희들의 어머니의 은혜를, 아직은 모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에게도 늦게라도 철이 들게 해 주신다면, 그들의 아비가 뒤늦게나마 제 자식들의 어머니에게라도 어머니의 은혜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애쓰듯이 그들도 그렇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두 아이들에게 '부모은중난보경'을 읽고 깨닫고 뉘우치고 다짐한 일에 관하여 말해 준 다음에 제안해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의 생일이 되면 아빠와 엄마는 너희들에게 선물을 주면서 너희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이제부터는 너희가 너희의 생일이 될 때마다, 너희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하고, 너희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뜻에서 너희가 어머니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하면서 어머니 은혜에 고마움을 표시하면 어떻겠느냐? 아빠도 그렇게 할 작정인데..."하고 말했더니,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제 아비처럼 깊은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또 하나 다짐한 것은, 이웃종교의 경전에 계속하여 관심을 가지고 읽음으로써, 이웃종교도 배우고 그 종교를 가진 이웃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웃종교들이 비추어주는 빛을 통하여 우리 종교의 진면목을 더욱 넓고 깊게 깨닫고, 우리 자신의 신앙이 지닌 고유성과 가치를 발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같은 진리도 진술방식에 따라 주는 감동이 다르다는 것을 제 자신이 '부모은중난보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구약의 율법서는 부모공경과 늙은 부모학대 금지를 법률의 형식으로 강요하고 있고, 구약의 지혜문학은 지혜자의 권면의 형식으로 부모 공경을 권면하고 있고, 사도바울도 자녀된 이들이 이 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누리려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기독교인의 윤리규정으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부모은중난보경'은 어머니의 구체적인 자식 사랑을 열거하여 찬양하므로써, 부모를 공경해야 할 까닭을 이해시킴에 있어서나 자식의 불효를 깨우침에 있어서, 개인에 따라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보다 더 효과적인 진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계약법의 명령형식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렸던 소아시아 지역에 살던 그리스 문화권의 영향 밑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윤리적 규범으로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재해석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의 희생과 고생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에 같은 교훈이 서로 다른 방식을 진술되어 있다고 할 때에 그 다른 진술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종교의 교훈을 재발견할 수도 있고 같은 교훈을 가진 이웃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이웃종교를 가진 이들이 기독교의 경전을 읽게 될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레미아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종교의 구별이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날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렘 31:34).
하였고, 예언자 이사야 역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 함께 평화스럽게 살 날을 내다보았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 11:9).

우리가 믿는 이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나 전혀 종교라고는 가져보지 않은 사람에게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도록 권면하고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모든 민족이 종교의 구별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아서 함께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될 날을 내다 본 예언자들의 희망을 구체화시켜보려는 우리의 소박한 노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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